베스트셀러로 본 트렌드: 『혈의누』
2016년 초 소설 『혈의누』 재판본이 한 경매현장에 나타났다. 1906년 처음 신문에 연재됐던 『혈의누』는 한국 근대 소설의 효시이자 ‘신소설(新小說)’1
이라는 장르 자체의 창시작으로 여겨지고 있다. 당시 국내에 단 세 권만 남아 있다고 알려졌던 책인데 홀연히 한 권이 더 나타난 것이다.
이 책에 경매 주최 측이 매긴 평가액은 1억5000만 원. 참고로 2015년 말 김소월의 『진달래꽃』 초판본이 한국 근현대 문학 경매 사상 최고가인 1억3500만 원에 낙찰돼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시집이 제한된 독자층과 희소성 때문에 소설보다 경매 시장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점을 감안하면 『혈의누』의 평가액은 자못 이례적으로 보인다. 『혈의누』가 과연 최고가를 경신할 수 있을지 초미의 관심사가 됐지만 아쉽게도 『혈의누』는 새로운 주인을 만나지 못했다.
베스트셀러 친일소설 『혈의누』
110년 만에 세상에 나타나 1억5000만 원의 가치를 평가받은 소설 『혈의누』는 문학적 가치가 높은 반면 치명적인 오점을 가진 작품이기도 하다. 문학 교과서에 빠지지 않는 내용이지만 이 소설의 저자 이인직은 ‘친일파’다. 한일강제병합 조약 당시 막후에서 실무를 교섭했다는 전적이 있으니 ‘친일파’ 중에서도 A급이다. 더군다나 ‘작가의 삶과 그의 작품은 분리해서 봐야 한다’는 일각의 주장도 먹히지 않을 정도로 『혈의누』는 그 내용만으로도 ‘친일소설’임이 확실하다. 『혈의누』는 주인공 ‘옥련’을 일본군이 구해줘서 문명의 길로 인도한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혈의누』는 당대 ‘대중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갖춘 드문 소설이기도 했다. 『혈의누』는 초판 발행 1년 만에 재판을 찍었다고 한다. 이 시기 출판 자료가 드문 관계로 정확히 몇 부가 팔렸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당시의 독자 규모와 구매력을 고려했을 때 이 기록만으로도 베스트셀러였다고 평하기에 부족하지 않다. 적어도 후대 문인들이 입을 모아 『혈의누』를 인상 깊게 읽었다고 말했을 정도로는 팔렸다. 한일강제병합 직후 발행불허처분을 받은 후에도 『혈의누』는 제목과 내용을 살짝 바꿔 ‘옥련의 말로를 궁금해하는’ 독자들을 꾸준히 찾아갔다. 베스트셀러답게 1920년대에는 『혈의누』를 모방한 소설들, 일종의 아류들도 출간됐다. 그중에는 심지어 『혈의누』를 그대로 베껴놓고 후일담만 짧게 덧붙인 소설도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판매금지까지 당했던 소설이 대중들에게 이처럼 인기를 끌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1900년대, ‘생각의 시장’이 탄생
『혈의누』가 등장한 1900년대는 자랑할거리가 많았던 시대가 아니다. 역사적으로 이 시대는 조선이 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한 ‘망국’의 시대다. 아이러니하게도 망국의 위기를 자산으로 삼아 성장한 산업도 있었으니 바로 출판 산업이다. 내일 아침에라도 국권을 잃을 수 있다는 위기감이 조선 사회를 지배하는 가운데 약육강식의 세계정세에서 살아남으려면 민족이 똘똘 뭉쳐 힘을 키워야 한다는 논리가 ‘정답’처럼 통용됐다. 지식계층이 볼 때 국력을 키우려면 먼저 국민 한 명 한 명의 힘을 키워야 했다. 문제는 그 한 명 한 명이 너무나 ‘무지몽매’하다는 암담한 현실이었다. 이에 처방된 만병통치약이 ‘교육’과 ‘계몽’이었고 그 미디어로 가장 각광받았던 매체가 ‘책’이다. 마침 서구식 인쇄술 도입과 한글 보급에 힘입어 출판 시장이 범계층적·범국가적으로 확장될 준비가 갖춰진 상태였다.
한편 이 시대에 커피와 전기가 들어왔다. 서구식 문화와 문명은 오랫동안 문을 닫고 있던 조선 사회에 스며들어 이전에는 없던 욕망을 탄생시켰다. 사람들은 전차를 타고 극장에 다녔고, 잉크 냄새가 물씬한 신문과 잡지를 읽으며 사회적·정치적 사안을 두고 열렬히 토론했다. 남녀가 나란히 신식 학교에서 지리와 산수와 영어를 배웠고, 핫한 정치가의 공개 연설 소식이 들리면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기도 했다.
커피와 전기의 세례 속에서 대중은 낯선 것을 즐기고, 배우고, 참여하려는 욕망을 키웠다. 시대의 최첨단에 위치했던 출판 산업이 이 새로운 니즈를 놓칠 리 없었다. 1900년대에 배우기를 원하는 대중과 가르치고 싶어 안달이 난 지식계층은 사이좋게 손을 잡고 계몽의 열기 속으로 진입했고, 출판은 불 일 듯 일어났다.
새로운 지식과 사상, 즉 ‘생각’은 이 시장에서 가장 각광받는 상품이었다. ‘생각의 시장’에서 성공하려면 두 가지가 해결돼야 했다. 첫째, ‘무엇을 팔 것인가’. 이 문제는 비교적 수월하게 해결됐다. 망국의 위기감에는 ‘문명개화’ ‘자강독립’ ‘민족자존’을 처방한다는 ‘정답’ 세트가 준비돼 있었다. 까다로운 것은 바로 두 번째, ‘어떻게 팔 것인가’였다. 그것도 대중에게 말이다.
전통적 배경을 가진 지식계층은 대중성을 고려해 한문이 아닌 국문 위주 장르를, 딱딱한 논설류보다 쉽고 재미있게 읽히는 서사류를 선택했다. 이 노선에서 태어난 성공적 ‘상품’이 실존 영웅과 역사를 내세운 ‘역사전기류’다. 외세에 맞서 나라를 수호한 잔다르크와 을지문덕 같은 역사적 영웅들이 대중의 히어로가 되고, 독일과 베트남처럼 약육강식의 판도를 증명하는 타국의 역사가 조선의 거울이 돼 줬다.
다만 근본적으로 ‘과거’의 이야기인 역사 전기류로는 닿기 힘든 구석이 있었다. 여기에는 대중에게 보여줄 현재의 모델이 없었다. 잔다르크가 돌아온들 갑옷과 칼의 시대가 지나간 지금, 그가 어떻게 조선 사회를 구할 것인가? 허구의 서사가 노릴 지점은 바로 여기였다. 바로 지금, 조선 사회에 당장 ‘있었으면 하는’ 모델이 돼 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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