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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답게 죽을 권리는 중요한 ‘노후준비’ 삶의 주도권 확보된 요양원은 어디 있을까?

한근태 | 201호 (2016년 5월 lssue 2)

Article at a Glance

나이가 들어 거동이 불편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요양원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요양원은 어떤 곳일까. 도우미들과 간호사들이 당신의 삶을 사사건건 간섭한다. 어떤 요양원이든 당신이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묻지 않을 것이다. 노인을 위한 생활지원주택파크 플레이스가 인기를 끈 이유는 바로자유때문이었다. 서비스는 요양원과 비슷하지만 서비스 제공자들과 입주민의역학관계가 달랐다. 심각한 질병을 가진 사람이 원하는 것이 단순히 생명을 연장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타인에게 짐이 되지 않고 자신의 삶을 반추할 기회를 갖는 것이 인간의 존엄 아닐까. 

 

장수시대가 되면서 모든 사람들이 노후준비에 관심이 높다. 하지만 어떻게 죽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노후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제대로 죽는 것이다. 여러분은 어떻게 죽고 싶은가? 가족과 친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지막 인사를 건네면서 죽고 싶은가, 아니면 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를 단 채 의식 없는 상태에서 죽고 싶은가?

 

당연히 전자를 선택할 것이다. 근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대부분 무의미한 생명연장을 하면서 얼마 안 남은 마지막 시간을 써버리고 만다. 끔찍하겠지만 이런 일을 상상해보자. 부모님이 말기암이다. 항암치료를 해봐야 별 소용이 없다고 의사가 얘기한다. 당신이 자식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대부분의 자식들은최선을 다 해보자,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자라며 치료에 매달린다. 환자에게 병명도 제대로 알리지 않은 채 연명치료에 매달리다 환자는 고통 속에 죽어간다. 과연 이게 최선일까? 누구를 위한 최선일까? 여러분이 환자라면 이런 선택을 하겠는가? 대부분의 연명치료는 본인이 아닌 가족을 위한 것이다. 이들은 할 건 다 해봤으니 여한은 없다, 후회는 없다고 생각한다. 연명치료로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내는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늘 소개할 책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죽음에 대한 책이다. 나이 들어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존재라는 게 어떤 건지, 의학이 이 경험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또 변화시키지 못했는지, 우리가 생각해낸 방법이 현실을 어떻게 왜곡시켰는지 살펴볼 것이다. 말년의 삶을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관리하는 노인병학 (geriatrics)의 중요성도 강조한다.

 

인간답게 죽을 권리

 

죽음이 아름답지는 않지만 인간답게 죽을 수는 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질문은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여러분은 노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늙을 준비가 돼 있는가? 인간은 누구나 늙는다. 늙는 것은 희귀한 현상이 아니다. 1790년 미국의 65세 이상 인구는 2%가 채 되지 않았지만 이제는 14%나 된다. 독일, 이탈리아, 일본에서는 20%를 넘어섰다. 중국은 세계 최초로 노인인구가 1억 명을 넘어섰다. 평균연령이 늘면서 젊은이와 노인 사이의 관계가 변했다. 전통적으로는 부모의 생존이 자녀에게 도움을 주었다. 안정감, 조언, 경제적 보호 등등…. 부모를 돌보기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한 자녀는 집과 땅을 물려받거나 물려받을 것이란 기대가 있었다. 그런데 부모가너무오래 살게 되면서 긴장관계가 만들어졌다. 노인들도 자녀들이 집 떠나는 것을 슬퍼하지 않는다. 긴 노후를 보내야 하는 부모들은 땅을 자식에게 물려주는 대신 임대하거나 팔기 시작했다. 양쪽 모두 따로 사는 것을 원한다.

 

 

모든 것은 허물어지게 마련이다. 사람들은 평소 건강에 별 문제를 느끼지 않는다. 그러다 병에 걸리면 딛고 있던 땅이 꺼지듯 모든 것이 무너져버린다. 나이가 든다는 건 몸의 각 부품이 노쇠해진다는 의미이다. 60세가 되면 평균적으로 치아의 3분의 1을 잃는다. 84세를 넘기면 거의 40%가 치아를 모두 잃는다. 65세 즈음이면 인구의 절반 이상이 고혈압이 된다. 노화 현상은 부자유스런 현상이다. 오히려 늙기 전에 죽는 것이 자연스런 일이다. 관절염, 요실금, 대장암 등 질병을 갖고 모든 것이 점점 나빠지는 노인이 병원에 왔다. 여러분이 의사라면 이 노인에게 어떤 처방을 할까? 이 노인의 최대 위험은 무엇일까? 바로 넘어지는 것이다. 넘어져 골절이 일어나는 것이 가장 위험하다. 그렇게 되면 지금 누리는 많은 것을 잃게 된다. 매년 35만 명의 미국인이 낙상으로 고관절 골절상을 입고 그중 40%가 요양원에 들어갔다. 20%는 다시는 걷지 못한다. 골절에는 세 가지 원인이 있다. 균형감각 쇠퇴, 네 가지 이상의 처방약 복용, 근육 약화가 그것이다. 이 할머니는 현재 5가지 약을 복용 중이다. 의사는 병을 치료하는 대신 다른 처방을 내렸다. 골절방지를 위해 발을 더 잘 돌볼 수 있도록 했다. 탈수 방지를 위해 처방약 중 이뇨성분이 있는 약을 다른 것으로 대체했다. 몸무게 증진을 위해 열량과 콜레스테롤이 낮은 식품을 줄이고 가족과 같이하는 식사 회수를 늘리고 간식을 좀 더 자주 먹도록 했다.

 

1년 후 이 할머니는 체중이 늘고 몸 상태도 좋아졌다. 몸의 쇠락은 넝쿨이 자라는 것처럼 진행된다. 눈에 띄는 변화가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노화는 운명이고 언젠가는 죽음이 찾아온다. 그러나 몸속의 마지막 장치마저 모두 고장 날 때까지 어떤 의학적 도움을 받느냐에 따라 그 과정은 많이 달라질 수 있다. 곤두박질 칠 수도 있고, 독립적으로 잘 보존하며 살 수도 있다.

 

삶에 대한 주도권

 

나이 많은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죽음 전에 일어나는 일들, 청력, 기억력, 친구들, 지금까지의 생활방식을 잃는 것을 두려워한다. 나이가 든다는 건 계속 무언가를 잃는 것이다. 실버스톤 박사의 부인 벨라 여사가 그랬다. 시력을 상실했고 청력이 약해졌으며 기억력도 눈에 띄게 희미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청력을 완전히 상실했고 갑자기 쓰러지면서 양쪽 종아리뼈가 모두 부러졌다. 깁스를 뗀 지 4일 후 벨라 여사는 세상을 떠났다.

 

 

한 할머니는 엉뚱한 곳에 주차를 했지만 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루 만에 집과 차를 모두 잊어버리고 혼자 지내다 요양원에 들어갔다. 최신 시설에 안정성과 간호 수준이 최고 등급인 곳이다. 그런데 점점 더 우울해졌다. 이유를 물었더니 이렇게 말했다. “여긴 집이 아니야.” 아무리 좋은 요양원이라 한들 집을 흉내 낸 곳에 불과했다. 물고기에게 물이 중요한 것처럼 인간에겐 집이 중요하다. 이들이 힘들어하는 이유는 요양원은 진짜 집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나이가 들면 어디서 살고 싶은가? 독립적으로 살 수 없을 때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가? 대부분 사람들은 요양원을 생각한다. 근데 요양원은 어떤 곳일까? 그곳에서 인간다운 삶을 즐길 수 있을까? 요양원은 독립 주거공간이지만 이전까지 없던 규칙과 간섭을 강요한다. 도우미들은 할머니의 식단을 살폈고, 간호사들은 건강 상태를 체크했다. 균형을 잘 잡지 못하자 보행보조기를 사용하게 했다. 가족에게는 안심되는 일이지만 할머니로선 사사건건 간섭받는 게 싫었다. 휠체어와 요양원 생활의 엄격한 규칙에 매여 지내는 것이 싫었다. 삶에 대한 주도권을 모두 잃었다. 대부분 환자복을 입고 지냈고 직원들이 깨우면 일어나고 목욕시켜 주면 하고, 옷을 입혀주면 입고, 먹으라면 먹고, 직원들이 정해주는 사람들과 같이 방을 써야 했다. 어떤 사람은 너무 조용하고 어떤 사람은 밤에 잠을 잘 수 없게 만들었다. 감금된 느낌이 들었다. 스스로가 선택한 길이지만 너무 불행했다. 그녀가 원한 것은 안전 이상의 삶이었다.

 

“전과 똑같이 살 수 없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지금은 집이 아니라 병원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에요.” 사실 거의 모든 요양원이 안고 있는 보편적 현실이다. 이들의 우선순위는 욕창 방지와 체중 유지 같은 것들이다. 하지만 그건 목표가 아니라 수단이다. 할머니는 자신의 삶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고 생각했다. 육체적 독립성을 잃으면 가치 있고 자유로운 삶은 불가능하다는 개념을 별 생각 없이 받아들인다. 그러나 정작 노인들은 그렇지 않다. 많은 경우 저항한다. 우선순위와 가치를 두고 갈등이 일어난다. 어느 요양원이든 노인들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지 않는다. 그들이 어떤 삶을 원하는지 묻지도 않는다.

 

치료가 전부는 아니다

 

요양원의 가장 유력한 대안은 가족이다. 샌더스 할아버지는 부인을 잃은 후 10년 동안 행복하고 만족스럽게 살았다. 일찍 일어나 아침을 먹고 신문을 본다. 산책을 하고 슈퍼에서 필요한 장을 본다. 점심을 먹고 오후에는 도서관에 간다. 잡지와 신문을 읽으며 한두 시간을 보낸다. 85세가 되던 해 심장마비를 일으키고 파킨슨병 진단을 받은 후 기억력에 문제가 생겼다. 딸이 집으로 모셨는데 더 많은 문제가 생겼다. 무엇보다 딸에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직장 일과 집안일을 하고, 아이들 돌보는 것만으로도 힘든데 항상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아버지를 모신다는 것은 엄청난 부담이었다. 아버지는 일년 사이 네 번이나 응급실에 실려갔고 음식까지 따로 만들어야 했다.

 

심지어 아버지는 텔레비전 소리를 크게 틀어 놨다. 집에 오면 정신이 없었다. 그녀는 아버지 목을 조르고 싶은 충동까지 느꼈다. 결국 두 사람은 요양원이 아닌 어시스티드 리빙시설(assisted living)에 간다. 이것은 독립 주거시설과 요양원의 중간 단계인 주거 시설이다. 이들의 비전은 독립성, 자발성을 발휘할 수 있는 곳,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을 수 있는 곳이다. 기존 요양원은 통제가 키워드이다.

 

1983, 노인을 위한 생활지원주택 파크 플레이스가 문을 열었다. 112개 주거공간을 제공하는 대규모 부동산 개발이었는데 문을 열자마자 완판됐다. 일부 주민은 심각한 장애를 갖고 있었지만 아무도 환자라 불리지 않았다. 모두 거주민이다. 욕조와 샤워시설을 완비한 욕실, 잠글 수 있는 현관문이 설치됐으며 반려동물도 키울 수 있었다. 또 카펫과 가구를 직접 고를 수 있고 실내온도도, 뭘 먹을지도 선택할 수 있었다. 물론 필요할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단지 내에는 항상 간호사가 대기했다. 비상 스위치도 누를 수 있다. 서비스는 대부분 요양원과 비슷하다. 그러나 서비스 제공자들이 항상 타인의 집에 들어간다는 개념을 이해하고 있다는 게 달랐다. 그 사실이 단지 내 역학관계를 변화시켰다. 주민들은 자신의 일과 규칙을 스스로 정했고, 위험을 감수할 것인지, 아닌지도 스스로 정했다. 밤을 새우든, 하루 종일 자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고 원하면 이성친구를 집에 재울 수도 있었다. 어시스티드 리빙의 개념은 아무도 보호시설에 감금됐다고 느끼지 않도록 하자는 데 목표를 두고 있었다. 결과는 놀라웠다. 만족도가 높아지면서 건강도 유지됐다. 신체기능과 인지능력은 오히려 향상됐고 우울증 건수도 감소했다. 정부 보조비용도 20% 줄었다. 핵심은 명확하다. 늙고 쇠약해져서 더 이상 스스로를 돌볼 수 없게 됐을 때도 삶을 가치 있게 살아가도록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다.

 

우리가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싶어 하는지는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시간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지에 달려 있다. 젊고 건강할 때는 자신이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한다. 가지고 있는 기능과 능력이 사라지는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삶의 초점은 지금, 여기로 바뀐다. 일상의 기쁨과 가까운 사람들에게로 옮겨간다.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으면 이전까지의 허영과 야망이 모두 사라져버린다. 안식을 원하고 누군가 옆에 있어 주기를 바란다.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들의 필요를 이해해야 한다. 그건 바로 그가 편안한 일상을 보낼 수 있게, 곁에 누군가와 마음을 나눌 수 있게, 사소한 목표를 성취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다.

 

 

더 나은 삶

 

처음 요양원에 배치를 받은 의사 빌 토마스는 이곳이 귀곡산장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든 이 공간에 생기를 불어넣고 싶었다. 그 자신이 살았던 농장과는 너무 대조적이었다. 농장은 생명력이 넘치는 곳이다. 좋은 삶이란 독립성을 극대화한 삶이다. 요양원 주민에게 독립성은 허용되지 않는다. 요양원에는 세 가지 역병이 있다. 무료함, 외로움, 무력감이 그것이다. 그는 식물, 동물, 어린아이들을 요양원에 끌어들였다. 개 두 마리, 고양이 네 마리, 새들을 한꺼번에 들여왔다. 인조식물을 치우고 대신 살아 있는 식물을 들여놨다. 요양원 뒤뜰에 정원과 아이들 놀이터를 만들고 학교를 마친 뒤 자녀들이 여기서 시간을 보내도록 했다. 처음에는 아수라장이었다. 근데 그때부터 주민들이 깨어나고 생명력을 되찾기 시작했다. 개를 산책시키고, 새에게 모이를 주고, 개똥을 치우면서 복용 약의 양마저 확 줄었다. 책임이 주어질수록 활동적이 되고 정신이 맑아졌다. 새를 돌보며 새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떻게 지내는지 얘기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살아나는 게 보였어요. 그들이 세상과 상호작용하기 시작하고, 사랑하고, 관심을 기울이고, 웃기 시작하는 것을 목격한 겁니다. 보통 짜릿한 느낌이 아니지요.” 토마스의 고백이다. 질병과 노화의 공포는 상실에 대한 두려움만은 아니다. 고립과 소외에 대한 공포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자기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부터 그다지 많은 것을 원하지 않는다.

 

 

 

인간다운 마무리를 위한 준비

 

사실 말기 암의 경우 치료 방법이 없다. 화학요법을 써도 생존 확률이 높지 않다. 메디케어 비용의 25%가 생의 마지막 1년에 접어든 5%의 환자에게 사용되고, 그 가운데 대부분은 별 효과가 없는 최후 1∼2개월에 집중된다. 모순이다. 암은 특정 패턴을 그린다. 초기 단계에는 비용이 많이 든다. 치료가 잘되면 점점 줄어든다. 그러다 막판에 비용이 왕창 든다. 중환자실은 죽어가는 사람들을 수용하는 창고와 같다. 기관절개, 영양보급관 삽입, 신장 투석관 삽입…. 거기 누워 있는 대부분 환자는 가망이 없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럼에도 가족과 의사들은 마지막 단계에 대한 준비가 전혀 돼 있지 않다. 마지막 일주일간, 특히 삶의 질이 현저히 떨어진다. 작별의 인사를 할 기회조차 없이 마지막을 맞는다.

 

심각한 질병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단순히 생명을 연장하는 것 말고 해야 할 중요한 일이 많다. 고통을 피하고, 가족 및 친구관계를 돈독히 하고, 주변과 상황을 자각할 수 있는 정신적 능력을 잃지 않고, 타인에게 짐이 되지 않고, 자신의 삶이 완결됐다는 느낌을 갖는 것이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성취할 수 있도록 실제 도움을 줄 의료복지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고치려 애써야 할 때와 그러지 말아야 할 때를 구분해야 한다. 그게 핵심이다.

 

일반 의료행위와 호스피스 케어의 차이점은 무얼까? 치료를 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차이가 아닌 우선순위의 차이이다. 보통 의료행위는 생명연장에 목적을 둔다. 수술, 화학요법, 중환자실 입원 등으로 환자 삶의 질이 떨어져도 시간을 버는 데 우선순위를 둔다. 호스피스는 의사, 간호사, 복지사 등을 동원해 치명적 질병을 가진 사람이 현재의 삶을 최대한 누릴 수 있도록 중점을 둔다. 여러분이 환자라면 의미 없는 생명연장과 남은 시간을 잘 보내는 것 중 어떤 것을 택하고 싶은가? 나라면 당연히 후자를 택할 것 같다. 이를 위해서는 죽음에 대해 평소에 생각을 정리해둬야 한다. 호스피스로 오는 사람 중 자기 운명을 받아들인 사람은 4분의 1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의사가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99%는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걸 이해하지만 여전히 병을 이기고 싶어 한다. 말기 암 환자 중 3분의 2는 남은 시간이 평균 4개월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말기케어(end of life care)에 관해 무엇을 바라는지 의사들과 상의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저자의 아버지는 지혜로운 사람이다. 아버지는 척수종양이란 진단을 받은 후 초기에는 수술을 하지 않고 일상을 유지했다.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손주들을 더 자주 만났고, 특별히 시간을 내서 친척을 만났고, 새로운 일을 벌이는 걸 줄였다. 자식들과 유언장과 관련한 얘기를 나누다 몸이 악화되자 은퇴를 선언했다. 초반에는 수술도 거부했다. 수술로 얻는 것보다는 잃는 게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느 시점이 되자 종양을 제거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해 수술을 받았다. 아버지는 각 단계별로 옳은 선택을 했다. 즉각 수술하지 않은 것, 병원 일을 그만둔 후에도 수술 받지 않고 기다린 것, 일상이 힘들어진 후에 수술을 받은 것 등….

 

의사들은 곧잘 환상을 얘기한다. 뻔히 예전 삶을 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수술을 하고 화학치료를 받을 것을 권한다. 그렇게 하면 예전의 삶을 되찾을 수 있다고 얘기한다. 아버지는 그 미끼를 물지 않았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대신 최선의 상태로 오늘을 살기로 결정했다. 너무나 잘한 결정이다. 아버지는 용기 있는 사람이다. 용기란 무얼 두려워하고 무얼 희망할 수 있는 지 판단하고 그것에 직면하는 힘이다. 나이 들어 병 드는 과정에서는 두 가지 용기가 필요하다. 하나는 삶에는 끝이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용기다. 또 다른 하나는 그 진실을 토대로 행동을 취할 용기다.

 

죽음은 공평하다. 누구나 언젠가는 죽는다는 측면에서 그렇다. 죽음에 관해 모르는 것도 많다. 누가 먼저 죽을지,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죽은 후 세상이 어떻게 펼쳐질지 미리 알 수 있는 게 없다. 죽음의 방법도 선택할 수 없다. 하지만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죽음의 순간이 왔을 때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란 건 선택할 수 있다. 이 책을 보고 한 가지 결심을 했다. 죽음의 순간이 오면쿨하게받아들이자, 무리한 의료행위를 하는 대신 마지막 순간을 잘 정리하고 즐겁게 가자는 것이 그것이다. 동양의 오복(五福) 중 하나인 고종명(考終命)이 바로 그런 죽음을 말한다. 천수를 누리고 죽음의 순간이 왔을 때 편안하게 죽는 것을 가리킨다. 이 책이 바로 그런 것에 관한 것이다.

 

한근태 한스컨설팅 대표 kthan@assist.ac.kr

필자는 서울대 섬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애크론대에서 공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핀란드 헬싱키경제경영대에서 경영학 석사 학위(MBA)를 받았다. 대우자동차 이사, IBS컨설팅그룹 상무, 한국리더십센터 소장 등을 지냈고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겸임 교수를 맡고 있다.

  • 한근태 한근태 | - (현) 한스컨설팅 대표
    -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 교수
    - 대우자동차 이사 IBS 컨설팅 그룹 상무
    - 한국리더십센터 소장
    kthan@assist.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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