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畵中有訓

두보의 완화초당, 조선 문인의 꿈이 되다

고연희 | 153호 (2014년 5월 Issue 2)

편집자주

미술사와 문학 두 분야의 전문가인 고연희 박사가 옛 그림이 주는 지혜를 설명하는 코너畵中有訓(그림 속 교훈)’을 연재합니다. 옛 그림의 내면을 문학적으로 풍부하게 해설해주는 글을 통해 현인들의 지혜를 배우시기 바랍니다.

 

가장 존경받은 시인(詩人)

() 문학이 발달한 중국에서 두보(杜甫, 712∼770)는 시성(詩聖)이라 불린다. 두보는 그보다 11살 많은 이백(李白, 701∼762)과 함께 당나라 시인의 우뚝한 봉우리로 기억되는 이름인데 둘 중 실제로 문학사에서나 정신사에서 영향력이 컸던 시인은 두보였다. 이 그림에 그려진 인물이다.

 

이백과 두보는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시의 내용과 풍격이 매우 달랐다. 이백의 시에는 그 시절 장안의 화려함이 호쾌하게 그려졌다면 두보의 시에는 그 시절 역사의 침울한 진실이 비장하게 맺혀 있다. 두보는 자연의 찬란한 풍경 속에서도 사람들에게 상처를 남긴 고금의 역사를 바라봤고 눈물을 참지 못했다. 또한 자신을 돌아보며 외로움과 그리움으로 눈물과 콧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어명에도 다리를 뻗고 한 잔 술로 풀어낸 이백의 기상과 그 풍류의 멋을, 두보의 시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두보의 시에는 세상의 아픔을 바라보는 진정의 힘이 위로 솟구치고 밑으로는 인간적 겸허함이 묵직하게 흐른다. 이백을 시선(詩仙)이라 하여 사람이 따를 수 없는 차원이라 뒀다면, 두보를 시성이라 부르며 학자들이 배우고자 했던 이유다. 이로 인해 두보의 시가 후대의 학자들에게 더욱 영향을 미쳤다.

 

두보가 죽은 뒤 송나라 지성인들은 두보를 배울 만한 최고의 시인으로 주목했고 조선에서 한글이 창제돼 외국서적 국역사업을 진행할 때 두보의 시집은 첫 국역 대상으로 선정됐다. 성종 때 간행된 국역두보시집은두시언해(杜詩諺解)’로 통칭된다. 지금까지도 한시의 국역방법을 공부하거나 초기 한글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중요한 서적이다. 그런데 막상 이 책을 연구하는 이들조차 두보의 거대한 존재감을 종종 잊는다. 공기처럼 스며든 두보의 위상에 대해 새삼스레 논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양기성(梁箕星), ‘완화복거(浣花卜居, 완화계에 집을 정하다)’

조선 18세기전반, 종이에 채색, 33.5x 29.4cm, 일본 야마토분가칸.

 

불우함 속에서 빛난 시심(詩心)

두보의 생애는 너무나 불우했다. 그의 시문능력은 특별했지만 젊은 시절 과거의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고 방랑을 시작했다. 두보는 그의 어린 아들이 먹지 못해 요절했다는 슬픈 소식을 겪은 뒤 40세가 넘어서야 관직을 얻었다. 그러나 당 현종 시절의 부조리한 정치상황이 그에게 불편했고 그나마 안사의 난으로 현종이 몰락하고 장안이 함락된 뒤 그도 적군에게 붙들리는 신세가 됐다. “나라가 망가져도 산천은 그대로라, 장안에 봄이 드니 초목이 우거지네(國破山河在, 城春草木深)”로 시작하는 시춘망(春望)’이 이때 지어졌다. 나라를 걱정하는 애절함이 비통하다. 숙종이 즉위한 뒤 두보는 다시 벼슬을 얻었지만 벗을 옹호하다 좌천됐다. 지방을 떠돌게 된 두보는 전란 후 피폐한 민간의 고통을 목도하게 된다. 신혼부부의 이별이며 늙은 군사의 이별, 집도 없는 사람들의 이별 등 뼈아픈 세 가지 이별로 엮은삼별(三別)’이 이 와중에 지어진다. 참담한 현실을 고발한 이 시에는 민중에 대한 염려와 사랑이 담겨 있다. 두보의 시는 역사를 비추는 거울이라 하여시사(詩史)’라 불린다. 그는 내면의 거울을 닦고 또 닦고 시를 다듬었다. 역사의 부침 속에 불우한 개인사를 살았지만 두보가 흘린 눈물은 시가 되고 별이 됐다. 조선의 시인들은 두보를 존경하고 두보의 시를 학습하면서 두보 시에 담긴 사랑과 책임감을 배웠을 것이다. 현대의 한 문학비평가는 근대기 윤동주의서시로 공감되는 정서는 오랫동안 학습된 두보의 시적 정서가 반영된 양상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는 그 마음은, 전통의 시대에서 전달된 참된 시인의 마음이었다는 뜻이며 그 속에 두보의 시가 있다는 해석이다.

 

완화초당의 두보

그림 속 두보가 꽃이 핀 강가의 초당에 앉아 있다. 벗 엄무의 도움으로 두보가 완화계의 초당에서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게 된 때는 그의 나이 40대 후반이었다. 그러나 완화계 초당에서의 안거도 오래 가지 못했다. 두보는 다시금 짧은 벼슬과 매우 오랜 방랑을 맞았다. 홍수가 심하게 든 해 식량이 다 떨어진 배 위에서 두보는 생을 마감했다. 그의 나이 59세였다.

 

이 그림은 두보가 잠시나마 편안한 집에 머물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림의 왼편 상단에 적혀 있는 제목은완화복거. 이 그림 왼쪽 면에는 두보의 시복거(卜居, 집터를 잡노라)’가 적혀 있다. “완화계 흐르는 물 서쪽 끝, 숲 그윽한 곳에 집터를 잡았노라. 성을 벗어나면 세상일이 줄어들고, 맑은 물로 나그네 근심이 삭는 줄 미리 알고 있었지로 시작한다. 두보는 완화초당에 머물며 벗에게 시를 띄웠다. “강가에 핀 꽃이 지기 전에 그대가 성도로 돌아오거든, 완화계가에 있는 늙은이를 기꺼이 찾아 주겠는가? 그대를 위해 내가 술을 사거든 눈앞 가득 살 것이고, 그대의 하인에게는 쌀밥을 주고, 그대의 말에게는 푸른 꼴을 먹이리라.”

 

사람들은 완화계에서 잠시 행복했던 두보를 기억하고 싶어 했다. 두보가 머물렀던 완화초당은 이후 역사적 명소가 됐다. 이미 송나라 때 음력 419일을 완화절이라 정하고 마을 사람들이 두보를 기렸다. 오늘날 사천성의 성도에 가면 완화계 앞두보초당이 관광명소로 아담하게 꾸며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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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연희

    고연희lotus126@daum.net

    - (현) 서울대 연구교수
    - 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 연구교수로 활동
    -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연구교수로 활동
    - 시카고대 동아시아미술연구소 연구원으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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