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씨는 한때 잘나가던 벤처기업의 최고경영자(CEO)였다. 학창시절부터 정보기술(IT)분야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대학졸업 후 IT 분야의 선두를 달리는 대기업에 공채로 입사했다. 하지만 대기업 특유의 관료적인 조직생활에 염증을 느꼈다. 일에 대한 열정과 자신이 갖고 있는 아이디어를 살려보고 싶었던 그는 회사를 뛰쳐나와 창업했다. A씨의 탁월한 역량과 때마침 찾아왔던 벤처붐에 힘입어 그의 회사는 업계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회사로 빠르게 성장했다. 그런데 글로벌 기업의 인수제의도 거절하며 승승장구하던 그였지만, 몇 해 후 벤처버블이 꺼지면서 추가 투자 유치에 연이어 실패했다. 결국 자금사정으로 부도를 맞기에 이르렀다. 한 때 주변의 부러움을 사고 언론을 장식하며 앞으로만 질주하던 젊은 CEO A씨는 하루 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이후 A씨는 새로운 직장을 구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했지만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그렇게 몇 개월을 지내던 즈음, 극적으로 두 건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게 됐다. 한 건은 국내 대기업의 IT 계열사 마케팅 팀장 포지션이었고, 다른 건은 창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한 벤처기업의 CEO 포지션이었다. 두 포지션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장단점이 명확했다.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대기업에 입사한다면 비록 자신의 역량을 맘껏 펼칠 수는 없겠지만, 보장된 연봉과 안정된 직장생활을 기대할 수 있다. 반면 벤처기업 CEO가 된다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면서 한번 꺾였던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를 다시 얻게 되는 것이다. 물론 벤처기업이기 때문에 대우도 열악하고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불투명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A씨는 조언을 얻고자 필자를 찾아왔다.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미래에 도움이 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바로 눈 앞에 놓인 두 개의 기회만을 놓고 비교한다면 어떤 쪽이 정답인지 아무도 답할 수 없을 것이다. 경력관리에 보편타당한 ‘답’은 없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A씨에게 어떤 쪽을 선택하는 것이 그 다음의 경력에 도움이 될지 고민해 볼 것을 권했다. 당장 이직할 회사도 중요하지만 평생 일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면 그곳을 떠나게 됐을 때 경력 상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인가 하는 부분도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눈 앞의 조건만 보고 이직?
한번 입사하면 퇴직할 때까지 한 직장을 다니던 아버지 세대와는 다르게 갈수록 이직이 보편화 되고 있다. 최근 한 조사에 따르면 직장인들의 80.7%가 한 번 이상 이직을 해 본 것으로 나타났다. 그만큼 많은 직장인들이 언제라도 만족할 만한 조건이 생긴다면 이직할 의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한국고용정보원의 조사에 따르면 직장인의 평균 이직 횟수가 4.1회로 회사를 옮기는 것이 직장인들에게 상당히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어떤 면에서는 이직이 경력관리를 위한 하나의 수단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런데 많은 직장인들이 이직을 결심할 때 당장 어떤 곳으로 옮기는 게 유리할까라는 점만 따진다. ‘현재의 직장이 상대적으로 연봉, 복리후생이 낮아서’, 또는 ‘야근이 잦은 등 근무환경이 만족스럽지 못해서’ 등이 이직의 주된 이유가 되곤 한다. 때문에 이직할 회사의 연봉, 직급, 회사 분위기 등 조건들을 보고 선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선택은 장기적인 경력관리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경력사원을 채용하는 기업은 대개 그 사람의 경험과 지식을 활용하는 것을 전제로 채용한다. 어떤 면에서는 곧바로 전투에 뛰어들 ‘용병’의 개념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조직에 들어간 인재가 자기 자리를 찾고 그 속에서 자신만의 역량을 더 키워서 성장을 하게 되면 이직은 경력에 플러스가 된다. 그러나 용병으로서의 기능만 수행하고 역량을 키울 기회를 얻지 못한다면 연봉이나 다른 보상이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자신의 경력에 마이너스가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다른 조건이 열악하더라도 일을 통해 자신의 목표나 비전에 다가갈 수 있는 자리라면 그만큼의 투자가치가 있다. 겉으로 번지르르한 자리라도 자신의 목표와 비전에 반하는 자리라면 당장의 이익은 있어도 이후의 경력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A씨도 불투명한 벤처기업의 미래와 그로 인한 몰락을 경험했기에 비교적 안정적인 자리인 대기업으로 향하는 것이 현재로선 자연스러운 선택일 것이다. 하지만 30대 중반의 나이에 당장의 안정적인 생활을 위해 자신의 목표를 접고 현실과 타협하는 것도 쉽지 않은 선택이다. 또 어떤 선택을 하든 몸담게 될 회사에서의 생활 그 이후까지 생각하면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