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21세기 초경쟁 시대에 인문학적 상상력이 경영의 새로운 돌파구를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DBR은 ‘CEO를 위한 인문고전 강독’ 코너를 통해 동서고금의 고전에 담긴 핵심 아이디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사상과 지혜의 뿌리가 된 인문학 분야의 고전을 통해 새로운 영감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번잡한 도시를 걷다보면 인파로 현기증이 난다. 어떻게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충돌하지 않고 자유자재로 자신의 갈 길을 가고 있는지 신기하기까지 하다. 피곤에 지친 몸으로 집에 들어와 생각해본다. 많은 사람들을 스쳐지나갔지만, 우리는 아무하고도 마주치지 않았다. 기적과 같은 일 아닌가? 마치 평행으로 내리는 빗방울처럼 우리는 서로에 무감한 채로 스쳐지나갔을 뿐이다. 우리가 행인들 중 어느 한 사람의 얼굴도 떠올리기 힘든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그렇지만 어느 날, 그리고 어느 순간 예기치 않은 마주침이 생길 수 있다. 누군가 나를 건드리면서 내가 들고 있던 커피 잔에서 커피가 흘러넘친다. “미안합니다.” 당혹감과 성가심이 뒤섞인 나는 소리가 나는 쪽을 응시할 것이다. 커피 잔을 건드렸던 사람을 보는 순간, 내 마음에는 예상치 못한 설렘이 찾아올 수 있다. 이때 나는 앞으로 연인이 될 수도 있는 어떤 사람을 만났다는 것을 직감한다.
마주침을 단순히 물리적 의미로 국한시켜 생각해선 안 된다. 사실 길거리나 대중교통 안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과 자주 육체적으로 마주친다. 진정한 의미의 마주침은 이런 육체적 마주침에 반드시 정서적 동요가 수반돼야만 한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같은 집에서 같은 이불을 덮고 수십 년을 함께 산 부부가 있다. 연애할 때나 신혼부부였을 때, 그들은 육체적으로 마주쳤을 뿐만 아니라 그로부터 정서적 동요도 경험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 두 사람은 육체적으로 마주치기는 하지만, 서로에 대해 별다른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 서로 정이 들어 같이 살고는 있지만, 각자가 남편으로서 그리고 아내로서 자신의 역할만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을 뿐이다. 결국 두 사람은 한 이불 속에서 계속 마주치고 있었던 것처럼 보이지만, 길거리의 사람처럼 전혀 마주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를 육체적, 정서적으로 뒤흔드는 진정한 마주침이 발생하면, 두 가지 감정이 발생한다. 하나는 기쁨의 감정이고, 다른 하나는 슬픔의 감정이다. 마주침과 두 가지 감정에 대한 논의가 어렵지 않다면,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난해하다고 고개를 흔드는 스피노자(Baruch de Spinoza, 1632-1677)의 사유를 어렵지 않게 맛볼 수 있다. 스피노자는 마주침과 그로부터 발생하는 감정을 토대로 흥미진진한 윤리학을 피력했던 철학자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렇게도 어렵다던 스피노자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도록 하자.
우리들은 정신이 큰 변화를 받아서 때로는 한층 큰 완전성으로, 때로는 한층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기쁨과 슬픔의 감정을 설명해준다. 그러므로 나는 아래에서 기쁨을 정신이 더 큰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감정으로 이해하지만, 슬픔은 정신이 더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감정으로 이해한다. 더 나아가서 나는 정신과 신체에 동시에 관계되는 기쁨의 감정을 쾌감이나 유쾌함이라고 하지만, 슬픔의 감정은 고통이나 우울함이라고 한다.
- 에티카(Ethica in Ordine Geometrico Demonstrata)
‘정신이 큰 변화를 받는다’는 말은 우리가 타자와 마주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경우 우리는 자신이 더 완전해진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고, 반대로 덜 완전해진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우리는 일종의 충만감을 느끼게 된다. 그렇지만 불행히도 나를 무시하고 심지어 폭력을 행사하려는 사람을 만났을 때, 우리는 위축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스피노자는 전자처럼 충만한 느낌이 가득 찰 때 우리는 기쁨의 상태에 있고, 반대로 후자처럼 위축된 느낌이 들 때 슬픔의 상태에 있다고 이야기한다. 이어서 그는 기쁨의 감정이 삶에서 쾌감과 유쾌함으로 드러난다면, 슬픔의 감정은 고통이나 우울함으로 드러난다고 덧붙인다. 맞는 이야기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우리는 구름이 걷히는 것 같은 경쾌함을 느끼고, 자신을 억압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자신이 한 줌도 안 되게 쪼그라들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기 때문이다.
만약 타자와 마주쳤을 때 기쁨을 느낀다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게 될까? 당연히 우리는 그와의 만남을 지속하려 할 것이다. 그와 만났을 때 발생하는 기쁨과 유쾌함 때문이다. 반대로 타자가 슬픔을 준다면 우리는 어떨까? 아마 그를 떠나려고 할 것이다. 자신에게 고통과 우울함을 주는 타자와 같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피노자도 기쁨이나 슬픔에 빠져 있는 인간의 행동 양식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정신은 신체의 활동능력을 증대시키거나 촉진시키는 것을 가능한 한 생각하고자 한다. 반면 정신은 신체의 활동능력을 감소하거나 방해하는 것을 생각할 때, 그런 것의 존재를 배제하는 사물을 가능한 한 생각하고자 한다. - 에티카
스피노자를 통해 우리는 왜 우리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계속 생각하려고 하고, 그럴 때마다 희미한 미소와 함께 행복에 젖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자신에게 슬픔을 가져다주는 사람을 생각하기보다, 그 사람을 자신의 곁에서 사라지게 하는 상황을 생각하게 되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이것은 기쁨과 행복을 추구하려는 인간의 본능적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문제는 우리 대부분이 기쁨의 만남이 아닌 슬픔의 만남을 영위하고 있다는 데 있는 것 아닐까? 물론 예외는 있겠지만, 대부분의 공적 생활에서 많은 사람들은 우울하고 슬픈 감정 상태에 빠져있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가족을 위해서 그들은 그런 우울한 상태를 불가피하게 감내하고 있다. 이런 우리 상황을 보았다면 스피노자는 어떤 느낌이 들까? 아마 측은한 마음을 금할 수 없을 것이다. 기쁨과 행복을 추구해야 할 인간이 이런 자명한 본능과는 대립되는 슬픔과 불행을 선택하고 있으니 말이다.
다행스럽게도 가족이나 연애와 같은 사적인 관계에서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다면, 그나마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그렇지만 만약 이마저도 불가능하다면 우리는 과연 기쁨과 행복을 완전히 포기할 수 있을까? 아마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스피노자가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더 큰 완전성, 기쁨, 그리고 쾌활함을 추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업무가 끝난 뒤 오락거리를 찾아서 밤거리를 헤매고 있는지도 모른다. 결국 우리에게 오락산업은 인간의 슬픔과 불행에 붙여지는 일회용 반창고였던 셈이다. 호프집에서, 카페에서, 영화관에서, 음악회에서 지금까지 우리는 슬픔과 우울함으로 만들어진 종기를 핥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과연 이것은 제대로 된 처방전일까? 인스턴트로 제공된 기쁨, 값싸게 구입한 쾌활이 과연 우리 삶에 진정한 행복을 부여할 리 만무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삶에서 만날 수밖에 없는 타자와의 관계, 그리고 그로부터 발생하는 우리 자신의 감정을 회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응시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런 삶의 현장에서 기쁨과 유쾌함을 지키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해선 안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스피노자가 우리에게 역설했던 ‘기쁨의 윤리학’이다. 분명 잃어버린 행복과 기쁨을 되찾는 것은 손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초인적 노력이 수반돼야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피노자도 기쁨의 윤리학을 피력하면서 다음과 같은 구절로 자신의 주저를 마무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만일 행복이 눈앞에 있다면 그리고 큰 노력 없이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등한시되는 일이 도대체 어떻게 있을 수 있을까? 모든 고귀한 것은 힘들 뿐만 아니라 드물다”고 말이다.
강신주 철학자·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 객원연구원 contingent@naver.com
필자는 서울대 철학과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연세대 철학과에서 ‘장자철학에서의 소통의 논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출판기획사 문사철의 기획위원, 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 객원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철학 VS 철학> <철학적 시읽기의 즐거움> <상처받지 않을 권리>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