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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도 때론 집착이다

강신주 | 41호 (2009년 9월 Issue 2)
기억이 없다면 우리의 마음은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 다음 사례는 이를 명료하게 보여준다. 카페에서 어린 시절 헤어졌던 친구를 초조하게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설레는 마음 때문인지 카페 문이 열릴 때마다 연방 고개를 돌려 누가 들어오는지 확인하려 한다. 어느 순간 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오자 그는 환한 미소를 짓는다. 많이 변했지만 아직도 예전 모습이 남아 있는 그립던 친구였기 때문이다. 친구와의 약속을 기억하지 못하거나 친구의 얼굴을 잊어버렸다면 이런 기쁨을 누릴 수 없다.
 

 
기억이 사라지면 우리는 대상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해서도 전혀 생각할 수 없다. 기억은 우리의 삶을 정상적으로 유지하도록 만드는 긍정적 역할을 한다. 하지만 우리의 삶을 가장 고통스럽게 만드는 부정적 역할도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기억은 우리의 마음을 고통으로 몰아넣는 ‘집착’을 낳는 일이 많다. 집착은 항상 부재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돈이 주머니에 그대로 있을 때는 돈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나타내지 않는다. 반면 돈을 잃어버리자마자 그 돈에 대한 우리의 집착은 강해질 수밖에 없다. 그 돈으로 할 수 있었던 일들을 생각하게 되면 집착은 거의 병적으로 강화된다. ‘어차피 잃어버린 돈인데 어떡해! 그냥 잊자’라고 생각해도 소용없다. 이런 생각을 하면 할수록 돈에 대한 집착은 더 커져버릴 게 분명하다.
 
돈만 그런 게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행방불명되거나 죽었을 때도 우리는 부재의 기억과 그로부터 생기는 집착이라는 치명적인 메커니즘을 다시 반복하게 된다. 집착과 관련해 주목해야 할 게 하나 더 있다. 돈을 잃어버린 날, 혹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날, 우리는 부재의 기억을 잡느라 타자의 소리를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집착에 빠지면 애정과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내 앞의 타자에 대해 신경 쓸 여유를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불교는 고통의 치료학으로 볼 수 있는 사상이다. 불교를 창시한 싯다르타는 고통의 메커니즘과 치료의 방법을 4가지 진리, 즉 ‘사성제(四聖諦)’로 정리했다. 인간은 고통의 존재라고 선언하는 ‘고(苦)의 진리’, 고통은 집착으로부터 생긴다는 ‘집(集)의 진리’, 고통은 소멸될 수 있다는 ‘멸(滅)의 진리’, 집착을 없앨 수 있는 방법에 대한 ‘도(道)의 진리’가 바로 그것이다. 동아시아에서 유독 발전했던 선불교(禪佛敎)도 이러한 싯다르타의 가르침을 그대로 반복한다. 물론 집착을 없애는 방법에서 조금 차이를 보이지만 말이다. 선불교는 싯다르타가 제안했던 ‘팔정도(八正道)’, 즉 ‘올바른 견해(正見)’ ‘올바른 사유(正思惟)’ ‘올바른 말(正語)’ ‘올바른 행동(正業)’ ‘올바른 생활(正命)’ ‘올바른 노력(正精進)’ ‘올바른 집중(正念)’ ‘올바른 참선(正定)’을 간단히 줄여, 깨달은 스승과 그렇지 못한 제자 사이의 직접 대면이나 수행하는 사람의 치열한 자기 정진을 강조했다.
 
여기서 선불교 역사에서 전설처럼 남아 있는 혜능(慧能, 638∼713)의 이야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혜능은 달마(達磨)를 시조로 하는 선불교 역사에서 여섯 번째 스승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흔히 ‘육조(六祖)’라고 불리며, 중국 조계산(曹溪山)에서 가르침을 전파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불교계를 장악하고 있는 ‘조계종(曹溪宗)’의 명칭을 혜능이 머물렀던 산 이름에서 따온 것만 봐도, 육조 혜능의 중요성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혜능의 가르침을 음미해보려면 라이벌이었던 신수(神秀, 606?∼706)와의 에피소드에 주목하는 게 좋다. 이 에피소드는 혜능의 일화와 어록을 수록한 <육조단경(六祖壇經)>에 실려 있다. 혜능과 신수는 모두 선불교의 다섯 번째 스승(五祖)인 홍인(弘忍, 601∼674)의 제자들이었다. 홍인은 관례대로 여섯 번째 스승(六祖)이 될 만한 사람을 선택해 자신의 가사와 밥그릇(鉢盂)을 남겨주려 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각자의 깨달음을 벽에 써보라고 말했다. 그러자 제자들 중 가장 신망이 높고 지혜로웠던 신수는 벽에 다음과 같은 시를 써놓았다.
 
이 몸이 바로 보리수[=지혜의 나무](身是菩提樹).
마음은 맑은 거울(心如明鏡臺).
날마다 힘써 깨끗이 닦아야 하리라(時時勤拂拭)!
먼지가 앉지 않도록(勿使惹塵埃).
- <육조단경>
 
홍인의 제자들은 모두 신수의 글을 보고 감탄했다. 신수가 홍인으로부터 가사와 밥그릇을 물려받지 못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때 혜능은 나무를 하느라 해가 지고 나서 뒤늦게 절로 돌아왔다. 신수가 자신의 경지를 피력하는 글을 썼다는 이야기를 듣고 일자무식인 혜능은 동료 스님에게 벽에 쓴 글귀를 읽어달라고 요청했다. 동료 스님이 읊은 신수의 글을 듣자마자, 그는 웃으며 신수의 글 옆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보리는 본래 나무가 아니며(菩提本無樹)
맑은 거울에는 (거울의) 틀이 없다(明鏡亦非臺).
본래 아무것도 없는데(本來無一物)
어디에 먼지가 모이겠는가(何處惹塵埃)!
- <육조단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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