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지난 봄 학기부터 ‘통합사고론 세미나’라는 강좌를 맡고 있다. 일반대학원에서 진행하는 수업이라 다양한 학과 소속의 석·박사 학생들이 강의를 신청한다. 학생들은 대체로 자기가 전공에만 매몰돼 있다는 한계를 느끼며, 통합적으로 문제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능력이 절실하다고 토로했다. 또 인문학에 대한 열망과 필요성을 말하면서 수강 신청 동기를 설명했다.
그러나 한 번의 강의로 통합적 관점이 저절로 생기는 것도, 해법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이 글 역시 마찬가지다). 오히려 답을 주지 않고 문제를 던져 학생들이 스스로 혼돈을 겪게 하는 것이 통합적 사고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혼돈을 겪는다는 것은 기존에 갖고 있던 생각과 믿음이 흔들림을 뜻한다. 따라서 통합적 사고는 혼돈에서부터 출발한다.
통합적 관점과 짝을 이루며 거론되는 것이 곧 ‘인문학’이다. 전 세계적으로 소외 계층을 대상으로 인문학 강좌를 실시하는 미국의 얼 쇼리스는 <희망의 인문학>이라는 저서에서 다음과 같은 충격적 발언을 한다.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부자다. 미국 사회는 결코 가난한 자에게 인문학을 가르치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가난한 이유가 인문학을 공부하지 않아서이고, 또 미국 사회가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그는 미국 사회의 빈부 차이와 불평등의 원인을 인문학 교육에서 찾고 있다.
결국 그는 가난한 자에게 인문학 강좌를 제공하고, 많은 사람들이 자기 길을 찾아가게 하는 ‘기적’을 이뤄냈다. 그 기적은 다름 아닌 ‘자기 성찰력’이다. 자기 성찰력은 본래 인간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에서 출발한다. 이는 곧 인간의 자기 정화력, 자율적 판단에 대한 신뢰다. 실제로 수업은 소크라테스 대화론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사람들은 질문하고 답하는 훈련을 거쳐 자기를 ‘발견’하게 된다. 그 결과 인문학 강좌를 들은 노숙자 가운데는 변호사로 자기 변신을 이룬 사례도 있다.
이런 자기 성찰과 자기 발견은 다시 예술에서의 ‘미적 반성’으로 이어진다. 예술의 목표는 단순한 아름다움을 표현하거나 감상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미적 체험을 통해 스스로를 반성하게 하는 것이 목표다. 여기서 ‘창의력’을 말할 수 있다. 창의력은 자기 나름대로의 생각과 느낌, 주의력, 관찰력과 사물에 대한 깊은 애정에서 나온다. 따라서 창의력은 전문 예술가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위대한 ‘잠재력’이 된다.
리처드 플로리다의 ‘창조 계급(crea-tive class)론’을 보면 창의적인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창조 계급은 피터 드러커의 지식 경제(knowledge eco-nomy) 패러다임을 발전적으로 비판하면서 창의성이 경제의 주요 동력이 된다는 사고에서 나온 개념이다. 이를 토대로 자율성과 창발성, 다양성과 유연성 등 ‘창조적 자본(creative capital)’의 중요성도 강조됐다.
그중 흥미로운 것은 자기 일에 대한 잠재적 창조 계급의 집중과 창의적 대응이다. 이를테면 미용사가 자신의 일을 기능적으로 보지 않고 창조적인 스타일리스트로서 자긍심을 갖거나, 심지어는 가정부가 청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집 안 인테리어에 대해서도 조언하는 것이 대표적 사례다. 플로리다는 이를 가리켜 “내 미용사와 가정부 모두 큰 조직의 통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현재의 일을 택했다. 그들 모두 창조적 일을 즐긴다. 이와 같은 서비스 계급의 사람들은 창조적 경제의 흐름에 근접해 있으며, 재분류될 만한 주요 후보자들이다”라고 말한다.
노숙자와 미용사, 가정부 등이 어떻게 자기 변화를 이루어내는가를 돌이켜 생각해보자. 그들은 자신에 대한 존중과 자긍심을 바탕으로 자신의 업무에 창의성을 발휘하며 변화를 일구어간 것이 아닐까. 이런 창조적 인간들이 오늘날 문화와 사회, 경제를 변화시킨다. 그리고 그 변화는 인간과 사물, 세계를 통합적으로 바라보고 이해할 때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