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cle at a Glance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인간실격>에서 주인공은 심심풀이로 말놀이를 한다. 명사를 비극 명사와 희극 명사로 나누는 놀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에 존재하는 희극 명사란 무엇인가. 한 치의 화성적 균열도 보이지 않는, 그야말로 ‘희극 명사’일 것 같은 모차르트의 음악이 보여주는 아름다운 완전체 속에도 순간적인 덧없음의 조짐이 나타나 있다. 바니타스와 비애극은 죽음이 아무런 의미가 없듯이 삶 자체도 공허하고 무의미하다는 현실을 그대로 드러낸다. 현실에서 모든 장식을 걷어내 버리면 모든 명사는 결국 ‘비극 명사’가 될지도 모른다.
편집자주사상가와 예술가들의 공유점을 포착해 철학사상을 감각적인 예술적 형상으로 풀어내온 박영욱 교수가 DBR에 ‘Art & Philosophy’ 코너를 연재합니다. 철학은 추상적이고 난해한 것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경험을 선사할 것입니다.
‘코미 명사’란 존재하는가?대부분 유럽의 언어에는 명사가 성으로 나뉜다. 독일어처럼 여성, 남성, 중성 명사로 나뉘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대개 여성 명사와 남성 명사로 구분된다. 우리말에 이런 구분이 없어서인지 우리에게는 명사를 성으로 구분하는 것이 낯설게 느껴진다. 그 구분의 기준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알 수가 없다. 심지어 같은 의미의 단어라 하더라도 언어에 따라서 명사의 성이 다른 경우도 허다하다. 가령 프랑스어에서 태양은 ‘soleil’로 남성 명사인데 독일어로는 ‘Sonne’로 여성 명사이다. 이렇게 같은 뜻을 지닌 단어조차 성이 제각기 다르니 여성 명사와 남성 명사를 구분할 명확한 기준을 찾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다만 어떤 관습적 계기에 의해서 임의로 구분됐다고 추측할 따름이다.
여기서 한번 엉뚱한 상상을 발휘해보자. 명사를 성에 의해서 구분하지 않고 다른 식으로 구분해보면 어떨까? 다자이 오사무(太宰治, 1909∼1948)의 자전적 소설인 <인간실격>에서 주인공 요조는 선배 호리키와 시간을 때우기 위해 심심풀이로 자신들만의 말놀이를 한다. 그들은 유럽 언어가 명사를 여성과 남성 명사로 나누는 것으로부터 착안해 명사를 ‘코미 명사’와 ‘트라 명사’로 나눈다. 여기서 코미란 희극을 뜻하는 코미디(comedy)에서 따온 것이며, 트라는 그 반대인 비극을 뜻하는 트래지디(tragedy)에서 따온 것이다. 이렇게 그들은 명사를 희극 명사와 비극 명사로 나누는 말놀이를 한다. 한 사람이 먼저 단어를 제시하면 다른 사람이 그 단어가 코미 명사인지, 트라 명사인지를 맞추는 것이다. 출제자는 상대방의 답이 틀렸을 경우 왜 그런지에 대한 답을 해줘야 한다. 자신이 제시한 단어의 성이 왜 트라 명사인지, 혹은 코미 명사인지에 대한 납득할 만한 이유를 설명해야 하는 것이다.
요조와 호리키처럼 우리도 말놀이를 해보자. 소풍은 트라 명사일까, 코미 명사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코미 명사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면 난이도를 높여보자. 시계는 트라 명사일까, 아니면 코미 명사일까? 지금 필자에게 시계는 코미 명사이다. 이 글을 쓰면서 계속 시계를 들여다본다. 시계의 분침이 몇 바퀴를 돌고 시침이 90도 각도를 움직이면 글쓰기의 업무로부터 해방될 것이며 맥주를 마시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당수는 필자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시계는 우리를 늙음과 죽음의 순간으로 이끄는 잔인한 세월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더 어려운 문제를 내보자. 사랑은? 그것을 막 시작한 사람에겐 환희와 기쁨일 수도 있고, 심지어 아픔마저도 달콤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겪고 난 사람에게 하나의 덧없는 신기루일지도 모른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사랑은 코미 명사에서 트라 명사가 되고 말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풀어보자. 코미디(희극)는 코미 명사일까, 아니면 트라 명사일까? 만약 코미디가 코미 명사가 아닌 트라 명사라면 그야말로 가장 비극적인 일이 아닐까? 이 세상에 희극은 존재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물론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야말로 코미디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모차르트 음악을 관통하는 것은천진난만함이 아닌 비애빈의 관광 명소 중 하나인 모차르트하우스는 모차르트가 오랫동안 머물렀던 집은 아니다. 1784년부터 1787년까지 3년도 채 살지 않았지만 이 집에 거주하던 때 그는 삶에서나, 음악에서나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빈 시내의 한복판에 있는 이 집은 당시 부유한 여느 귀족 집안 못지않게 화려하며, 지금까지 보존된 당시의 가구나 장식은 모차르트의 풍족한 삶을 그대로 보여준다. 인생에서 가장 부유하고 행복한 시기를 보내던 모차르트는 이곳에서 그 유명한 ‘피가로의 결혼’을 비롯해 그에게 명성을 안긴 많은 곡들을 작곡했다. 집 안에는 모차르트가 음악 다음으로 애착을 지녔던 당구대도 놓여 있다. 이 당시 모차르트는 항상 손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을 정도로 유복한 생활을 누렸다. 그러나 집 안 전체의 화려하고도 활기찬 분위기와 달리 작업실은 한적하고도 고요한 느낌을 준다. 그의 작업 공간에는 바깥을 내다볼 수 있는 창이 있었는데 그는 작업을 할 때면 항상 창밖을 내다봤다.
그가 내다 본 창밖의 풍경은 다소 의외의 모습이다. 창밖으로는 주택가의 좁은 골목길이 일직선으로 쭉 이어진다. 빼곡히 들어선 집들 사이로 난 그저 텅 빈 골목의 풍경이 전부다. 골목의 풍경은 화려한 모차르트의 집안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외롭고도 쓸쓸함을 자아낸다. 모차르트의 음악적 내면은 떠들썩하고 축제와도 같은 집안 내부의 모습과 닮아 있을까, 아니면 자신의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텅 빈 골목과도 같은 쓸쓸함일까?
사람들은 대개 모차르트 음악을 어린아이와 같은 천진난만하고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주는 음악으로 간주한다. 요조의 말놀이에 따르면 모차르트의 음악은 코미 명사인 셈이다. 반면 베토벤의 음악은 이와 정반대 극에 있는 고뇌와 슬픔, 비탄을 대변하는 트라 명사다.
그러나 모차르트 음악과 베토벤 음악에 대한 코미와 트라 명사라는 이 단순한 이분법적 적용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는 모차르트가 바로 이 집에서 작곡한 것으로 알려진 피아노 소나타를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14번(K.457)은 몇 안 되는 단조 소나타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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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가 가장 화려하고 행복한 시기에 작곡한 C단조의 이 곡 앞부분은 흥미롭게도 베토벤의 잘 알려진 소나타 중 한 부분을 연상시킨다. (그림 1)
악보를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두 곡이 구조적으로 유사함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둘 다 같은 C단조이며, 왼손은 팔분음표가 한 옥타브의 간격으로 계속 반복되고 있다. 오른손의 멜로디 역시 점진적인 상승과 하강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구조적으로 매우 흡사하다. 실제로 듣기에도 분명한 유사성이 느껴진다. 참고로 모차르트에게 C단조는 이 곡이나 미사곡 정도에만 쓰일 정도로 예외적인 것이지만 베토벤의 경우엔 C단조가 ‘가장 베토벤스러운 조’라고 불릴 만큼 베토벤의 음악적 분위기를 대변했다.
물론 모차르트의 이 피아노 소나타에는 모차르트만의 천진난만하고 자유분방하면서도 낙관적인 아름다움이 여전히 배어 있다. 조금 전문적인 이야기일 수도 있는 이야기를 살짝 꺼내보자. 악보에 나타난 오른손 멜로디를 보면 모차르트의 반음 진행이 잘 드러난다. 가령 멜로디 성부(상단 부분)의 두 번째 마디 중 밑에 음이 F#, F, E, Eb으로 반음씩 하강하는 것이나, 셋째 마디 마지막 음부터 다섯째 마디 첫 음까지 G, F#, F, E, Eb, D로 반음씩 하강하는 것은 모두 모차르트 특유의 반음 진행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반음 진행 자체가 모차르트다운 것은 아니다. 반음 전개의 경우 화음이나 조성으로부터 일탈하기 쉬운데 모차르트의 경우 이러한 반음 진행 가운데서도 조성이나 화음이 항상 흐트러지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음악은 자유분방한 듯하면서도 항상 안정감과 조화, 낙관적인 미래에 대한 전망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