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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의 마법

이치억 | 216호 (2017년 1월 Issue 1)
우리 사회에서 ‘예(禮)’라는 말은 이중적 어감을 가진다. ‘예의바른’ ‘매너 있는’이라는 수식어는 주로 긍정적 의미로 사용된다. 한편으로 형식이나 겉치레, 과시나 번문욕례 같은 부정적인 요소와도 연관돼 있다. 예가 주는 뉘앙스의 차이는 동서양을 기준으로 나누어지기도 한다. ‘매너’나 ‘에티켓’, ‘젠틀’과 같은 서양식 용어는 긍정적 이미지를 갖지만 왠지 ‘예의범절’ 같은 우리식 표현은 사람의 행위를 규제하고 구속하는 듯한 부정적인 느낌을 준다. 예가 과시의 수단으로 변질되고, 사람이 예에 종속돼 억압받았던 과거 특정 시기에 대한 트라우마는 아직도 남아 있다. 이는 자발적이고 자연스런 변용의 기회를 박탈당한 우리의 역사와도 무관하지 않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의 형식이 아닌 예의 정신을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예의 잘못된 적용은 언제라도 사람을 억압할 수 있기 때문에 예의 형식화는 비단 현대만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줄곧 지적돼온 문제였다. 애초에 공자(孔子)가 이미 예는 형식이 아니라 정신이 중요하다는 점을 누차 강조한 바 있다. “사람이 사람답지 못하면 예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예는 사치스러울 게 아니라 검소하게 치러야 한다”고 했던 사람이 바로 예학의 실질적 창시자 공자 자신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예의 정신이란 과연 무엇일까?

성리학의 집대성자인 주자(朱子)는 예를 ‘하늘의 이치가 무늬로 드러난 것(天理之節文)’이라고 했다. 즉 예는 사회의 질서를 세우기 위해 인위적인 합의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그들의 가장 자연스러운 몸짓이 반복되고 소통되면서 저절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마치 일정한 체계를 가진 음성들이 사람들 사이에 소통되고 반복되면서 언어가 만들어지듯 예의 형식도 공통된 몸짓에서 비롯된 것이다. 문화에 따라 표현되는 양상은 다를 수 있지만 그 몸짓의 저변에는 몇 가지 공통된 정신이 깔려 있다. 바로 배려와 양보, 존중과 공경 같은 것이다. 겉치레만 있고 이러한 정신이 결여된다면 그것은 하늘의 이치가 드러난 예가 아니라 예를 가장한 가식일 뿐이다.

비록 나의 마음에 내재돼 있기는 하지만 배려나 양보, 존중이나 공경 같은 예의 정신은 다소 대타적(對他的)이다. 이러한 정신은 타인을 향한 것이고 타인을 위한 마음이다. 예는 남을 위해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내면에 있는 대자적(對自的)인 예의 정신은 무엇일까? 바로 오늘날에도 반드시 필요한 정신인 ‘감사’의 마음이다. 예는 고마움의 마음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 근원인 조상에 대한 감사, 관계를 맺고 있는 타인에 대한 감사, 나의 삶을 도와주는 사물에 대한 감사 등 예에는 ‘고맙습니다’의 정신이 관통하고 있다.

모든 존재와 사건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순간, 내 마음은 편안해지고 따뜻해진다. 감사의 정신이 대자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다. 만사에 고마운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자기 최면이나 마인드컨트롤이 아니라 만물과 만사가 실제로 그러한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존재와 일어나는 사건은 감사의 대상이 아닌 것이 없다. 삶의 터전인 대자연과 공동체, 그리고 그 안의 모든 존재가 고맙지 않은 것이 없다. 나를 기쁘고 즐겁게 하는 일은 물론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는 일마저도 결국은 나를 단련해 성장시키는 고마운 일이다.

세상의 모든 관계는 ‘감사’를 그 정신으로 하는 예(禮)로써 맺어져야 한다. 고용주와 고용자의 관계도 예외가 아니다. 이들은 이익을 놓고 대립하고 갈등하는 관계가 아닌 서로 돕고 상생하는 고마운 관계다. 관계의 설정을 이러한 방식으로 옮겨놓는 순간 내 눈과 마음이 변화하고 거기에 비친 세상은 달라질 것이다. 이와 더불어 조직 전체가 변화하는 상승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고맙습니다’의 예는 기분이 좋아지는 마법을 가지고 있다.


이치억 성균관대 초빙교수

필자는 퇴계 선생의 17대 종손(차종손)으로 전통적인 유교 집안에서 나고 자라면서 유교에 대한 반발심으로 유교철학에 입문했다가 현재는 유교철학의 매력에 푹 빠져 있다. 성균관대 유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현재 성균관대·동인문화원 등에서 교학상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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