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타고난 본성의 프로그램에 의해 살아가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환경의 영향에 의해 좌우되기도 한다. 환경은 사람에게 일시적으로 영향을 주기도 하지만 오랜 기간의 축적을 통해 다시 본성으로 고착되기도 한다. 환경에 따라 형성된 성향 또한 사람의 본성이라 하지 않을 수 없기에 과거 유학자들은 그것을 기질에 따라 형성된 본성이라는 의미에서 기질지성이라고 불렀다.
우리 민족의 터전인 한반도는 비록 기후가 적당하고 자연이 아름답기는 하지만, 그다지 넉넉하고 비옥한 땅은 아니었다. 자연환경과 사투를 벌여야 하는 수고는 덜게 됐지만, 먹고살기 위해서는 조금 더 효율적인 방법을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됐다. 아마도 이러한 환경의 영향으로 마음은 따뜻하되 머리는 발달된 기질지성을 가지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한창 화두가 되고 있는 창조경제·창의경영·창의력·창의인성 등 창조나 창의에 관련된 사안은 현대에 들어서 갑자기 대두된 것은 아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창의·창조는 우리 민족의 과제이자 숙명이었던 것이다.
기실 창조와 창의는 비단 우리 민족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닌 인류 보편의 본성이다. 사람뿐만 아니라 다른 존재들도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창의성과 창조력을 가지고 있다. 딜런 토머스 시인이 말한 ‘푸른 줄기에 꽃을 피워내는 힘’ ‘바위 사이로 물을 모는 힘’이 세상에 존재하는 만물의 창조력을 매우 압축적으로 표현해 주고 있다. 창조력은 인간의 본성이자 동시에 자연의 본성인 것이다. <주역>에서는 ‘천지자연이 가진 가장 큰 능력은 만물을 생성하는 것[天地之大德曰生]’이라고 했다. 만물을 생성하는 것은 창조에 다름 아니다.
사람의 본성이 이 자연의 본성과 같다는 것은 동양사상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다. 가령 송나라의 큰 유학자인 주자(朱子)는 ‘천지자연이 만물을 생성하는 마음을 내 마음으로 삼은 것’ 그것을 사람 본연의 마음인 인(仁)이라고 했다. 유학의 핵심 주제인 인(仁)을 창조·창의와 연관시켜 말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자연의 선물로서 창조의 본능이고 창의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창의성은 억지로 교육하거나 일깨우려 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창의성은 그것을 높이려는 인위적 노력을 가할수록 꼬리를 감춘다. 이는 마치 성장촉진제를 사용한 농산물이 일견 크고 먹음직하게 보이겠지만 그 본연의 영양소는 줄어들고 해로운 성분이 첨가돼 있는 것과 같다. 가격을 올리고자 하는 욕심이 부른 부작용이다.
사람의 창의성을 방해하는 요소도 마찬가지로 사람의 인위적 욕심이다. 창의성을 증진시켜 입학과 취업에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겠다는 마음, 창의경영·창조경제를 통해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욕심은 바로 그 의도와는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자고로 인류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예술작품이나 학술성과, 생활의 획기적 전환을 가져온 발명품들, 혹은 대히트를 친 기술제품치고 물질적 대가를 얻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은 없다. 과거시대의 창조물은 생존이 달린 절박한 상황에서 나온 것이 대부분이다. 다만 그때의 물질 획득을 위한 행위는 사사로운 욕심이 아니라 순수한 삶의 의지에서 나온 것이다. 이는 오늘날 물질 자체가 목적이 돼버린 본말전도의 상황과는 다르다. 물론 이 역시 인간의 창조의 본성이 뒷받침됐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이라면 창조의 동기와 방식은 창조 본연의 의미를 되새겨볼 만하다. 바야흐로 ‘생존’이 아닌 ‘재미’와 ‘즐거움’을 키워드로 놓아도 될 때가 온 것이다. 돈을 창조의 대가로 삼아서는 더더욱 안 된다. 창조행위 그 자체가 재미있어서 즐거운 마음으로 만들 때,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명품 창조물이 탄생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길은 사실 어렵지 않다. 타고난 본래의 마음을 욕심으로 덮어버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치억 성신여대 동양사상연구소 연구교수
필자는 퇴계 선생의 17대 종손(차종손)으로 전통적인 유교 집안에서 나고 자라면서 유교에 대한 반발심으로 유교철학에 입문했다가 현재는 유교철학의 매력에 푹 빠져 있다. 성균관대 유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성신여대 동양사상연구소에서 연구 활동을, 성균관대·동인문화원 등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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