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rganizational Improvisation
편집자주
이 글은 연세대 경영대학 뉴스레터와 상남경영원 뉴스레터에 게재됐고 지식경제부의 지식기반사업 중 2단계인 디자인정보화사업의 일환으로 개발된 ‘디자인트렌드 콘텐츠 개발사업’의 성과물로서 디자인DB에 실렸던 글을 수정·보완한 글입니다.
제품 및 서비스 혁신에서 ‘프로세스 관점’의 한계
새로운 제품과 서비스의 디자인을 지속적으로 출시하려면 창의적인 생각이 끊임없이 나와야 한다. 아이디어가 모아지면 그것들을 평가하고 다듬어 궁극적으로 마지막 제품과 서비스의 디자인으로 결정되기까지 지속적인 논의와 의사결정 과정이 뒷받침돼야 한다. 이러한 과정의 대부분은 상당한 불확실성을 지니고 있다. 공장에서 제품을 찍어내듯이 틀에 박힌 과정으로는 좋은 결과물을 기대하기 힘들다. 그러나 기존 경영학은 물론 신제품 개발과정을 연구해 온 기술경영 분야에서도 ‘프로세스화된 관점’을 중시하고 있다. 이는 신제품 디자인과 제품 개발과정을 좀 더 효율적으로 바꾸고 지속 가능하면서 재사용이 가능한 공정을 만들고자 하는 기업 경영자들의 욕심에서 비롯됐는지도 모르겠다.
순차적이고 계획적인 제품디자인 과정은 불확실하고 복잡한 디자인 과정과는 본래 궁합이 잘 안 맞는다고 할 수 있다. 끊임없이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교차하고 충돌하는 디자인 과정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에 맞는 공정을 설계하는 일은 몇몇 뛰어난 제품개발팀이나 디자인팀의 팀장들만 알고 있는 노하우에 가깝다. 복잡하고 불확실한 디자인 과정을 관리하고 더 나은 과정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일은 경험으로 얻어졌지만 겉으로 표현하기는 힘든, 그래서 문서화하기가 어려운 ‘암묵지(tacit knowledge)’의 형태로 존재한다.
문제의 핵심은 몇몇 뛰어난 디자인 팀장들만 알고 있는 특별한 제품개발공정을 알아내는 게 아니라 우리의 시각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어떤 정형화된 프로세스가 있고, 그것을 그대로 따르면 제품이나 서비스가 성공하는, 그런 마법의 비밀을 파헤치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새로운 마법을 지속적으로 발명하는 훌륭한 마법사가 될 수 있는지를 알아내는 게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조직적 메커니즘의 단서 - 즉흥연주
이러한 가운데 경영학자들은 ‘재즈의 즉흥연주(Improvisation)’를 통해 조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도들을 하고 있다.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에 걸쳐 지속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이러한 논의의 핵심은 조직을 합리적인 계획과 그의 실행이라고 보는 분석적인 사고방식의 틀을 벗어나 좀 더 유연하고 즉흥적이며 변화에 능동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시각으로 봐야 한다는 데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재즈의 즉흥연주는 흥미로운 조직적 메커니즘의 단서를 제공한다.
구체적인 논의에 앞서 즉흥연주(Improvisation)의 기본적인 구조를 살펴보도록 하자. 우선 <그림 1>에서 묘사된 바와 같이 기본 준비과정이 필요하다(Fisher & Amabile, 2009). 즉흥적인 아이디어를 만들고 이를 신속하게 실행하기 위해서는 전문적이고 정형화된 지식의 습득, 내재적 동기 부여, 실험적인 조직문화 등이 갖춰져 있어야만 한다. 이런 준비가 된 조직은 실제 업무를 수행하거나 프로젝트를 하는 과정 중 새로운 문제해결의 기회가 주어지면 새로운 아이디어를 생각해내고(conception) 이를 실행(execution)하는 과정이 매우 신속하게 일어난다. 일반적인 창작활동(예를 들어 클래식 음악을 작곡해 연주회에서 발표하거나 글을 써서 기고하는 등의 활동)에서는 아이디어를 내고 이를 실행하는 과정 사이에 시간 격차(temporal gap)가 있기 때문에 중간에 세부적인 사항들을 조율할 여유가 있다. 그러나 즉흥연주 체제에서는 이러한 시간적인 분리가 없고 아이디어 발생과 실행이 거의 동시에 일어난다. 즉흥적인 창작활동의 매력은 바로 이러한 신속한 실행이 조직 내의 다양한 창의적 잠재력을 끌어낼 수 있다는 점이다. 아이디어의 신속한 실행을 통해 다양한 아이디어들의 현실화 가능성을 미리 볼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이렇게 창의성이 발현되면 이후에는 좀 더 조직적이고 계획된 프로세스가 진행되면서 아이디어를 현실화하면 된다. 이후의 보다 정형화된 프로세스에서는 이미 앞 단계 즉흥 창작과정에서 신속하게 실행돼 가능성을 보여준 아이디어들을 다시 되새겨 보고 잘 실행된 아이디어들을 구체적으로 발전시키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즉, 즉흥적인 요소가 있는 창의성의 발현 과정을 잘 보존해서 결과물이 나오면 여기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고 이후 프로세스화된 제품이나 서비스 개발 절차를 밟으면 된다.
관행을 깨는 새로운 시도와 최소한의 구조
그렇다면 이 글의 핵심인 즉흥적인 창작과정을 잘 수행하기 위한 중요한 요소들은 무엇일까? 즉흥연주의 비유에 비춰볼 때 가장 중요한 시작점은 기존 관행을 깨는 새로운 코드진행이나 패턴을 누군가 제공하는 것이다. 즉흥연주를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자기 자신만의 특별한 패턴에 익숙해진 나머지 익숙한 패턴으로만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되면 즉흥연주 자체의 흥이 깨질 뿐 아니라 팬들이나 동료로부터 식상하다는 따가운 시선을 받을지도 모른다. 기존 관행을 깨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마일즈 데이비스(Miles Davis)는 이러한 새로운 패턴을 제공하고 다른 연주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시도들을 할 수 있게 함으로써 ‘Kind of Blue’ 앨범을 즉흥연주로만 채워 넣었다. 앨범 자체가 아주 성공적이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조직 내에서 새로운 생각들은 기존 관행이나 다른 제약조건들로 인해 사장되기 쉽다. 하지만 기존 사고방식과는 다른 새로운 아이디어를 존중하는 시스템하에서는 이런 문제를 막을 수 있다.
누군가가 패턴과 아이디어를 제공하더라도 그것을 계속 살려주고 발전시킬 수 있는 메커니즘이 없다면 지속적인 혁신이 불가능하다. 그런 측면에서 혁신을 위한 팀들은 미리 계획된 구조적인 부분을 최소화해야 한다(Minimal structure).
재즈연주로 잠시 돌아가 보면 모든 즉흥연주에는 아주 최소한의 구조가 있게 마련이다. 예를 들어 보통의 블루스에서는 블루스 12소절이나 아주 기본적인 구조가 반복되면서 즉흥연주의 뼈대를 구성한다. 일반적으로 종이에 이런 기본 구조를 적어 놓고 시작하는 경우도 있다. 어느 정도 크기의 구조가 미리 성립되는가는 그때그때마다 달라질 수 있지만 대부분의 연주자들은 이러한 곡의 기본 뼈대에 공감하기 때문에 아무리 색다른 패턴을 연주하더라도 언제쯤 브리지 파트를 연주할지, 언제쯤 엔딩에 들어갈지에 대한 대충의 감을 갖고 있다. 기본적인 구조 안에서 즉흥연주의 향연이 계속되는 것이다. 조직 내에서도 이러한 아주 기본적인 뼈대(기업의 철학, 소비자에 대한 태도, 디자인 철학, 제품에 대한 기본 철학 등)를 바탕으로 디자이너나 제품개발팀의 팀원들이 최대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개인의 활동영역을 제공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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