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ssons from Classic - 바흐와 헨델 下

멋쟁이 헨델, 패러다임 바꿔 성공을 낚다

102호 (2012년 4월 Issue 1)








헨델, ‘나는 멋쟁이다

헨델은 10대 때부터 멋쟁이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패션 리더였던 것은 물론 자신을 잘 포장하고 이를 명성으로 승화시키는 데 천부적인 소질을 보였다. 외과의사였던 아버지가 어려서부터 강도 높은 음악 몰입교육을 시켰지만 그는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 데에 더 관심이 있었고 심지어 18세부터 제자를 받기도 했다. 실질적으로 학생들을 가르칠 능력이 거의 없었음에도 여러 도시를 돌며 연주 경력을 쌓았다는 것을 잘 포장해 제자를 받아 스쿨(School)을 형성한 것이다. 또 헨델은 독일이 당대 문화의 중심지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끊임없이 해외로 나갈 궁리를 했다. 연주 여행으로 구축한 네트워크를 통해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갈 만한 길을 끊임없이 모색했다.

 

조그마한 루터교 도시의 궁정에서 외과의사로 봉사하던 헨델의 아버지는 제법 유복한 경제력과 조건을 갖추고 있었지만 명예가 다소 아쉬웠다. 이에 유명한 큰 교회 목사의 아들이었던 텔레만이 그랬던 것처럼 헨델도 법대에서 진득하게 공부하길 바랐다. 그러나 헨델은 11 소크라테스 방식으로 교수의 강론과 학생의 연구로 진행되던 공부를 멀리하고 연주 기회만을 쫓아 다녔다. 아버지와 잦은 충돌을 피할 수 없었던 헨델은많은 독일 작곡가들이 여러 지역에서 활동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뚜렷하게 누가 맹주라고 할 수 없는 이 상황에서 꼭 기회를 잡고 싶다며 결국 대학을 그만둔다. 이렇게 해서 인생 전체를 통틀어 커다란 자양분이 된 이탈리아 유학의 여정이 시작됐다.

 

20대 초반의 헨델에게 이탈리아는 꿈의 땅이었다. 우선 교회가 예술에 개방적이었다. 자기 절제와 함께 끊임없이 성찰을 요구했던 루터, 칼뱅교의 입장과 달리 가톨릭 교회는 음악과 미술에 투자하기를 아끼지 않았다. 비발디(Vivaldi) 같은 이들은 교회에 소속돼 있었지만 오케스트라를 정기적으로 지도하면서 베니스의 극장에서 자신의 작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이탈리아의 유복한 경제 조건과 자유분방한 사조 또한 매력적이었다. 도시마다 오페라 극장은 붐볐고 교황이 관람하는 연주회가 있었을 정도로 예술에 대한 활기가 넘쳐났다. 이 시절 헨델은 몇 가지 협주곡을 비롯해 유명한 합창 작품주께서 말씀하셨다(Dixit Dominus)’를 통해 재기 발랄한 오케스트라 선율과 규모 있는 합창단의 표현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헨델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Value)는 무엇이고 자신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인터페이스(Interface)와 상품(Product)을 어떤 식으로 구현했을까? 헨델은 단순히 작품 자체에 집중하기보다는 자신의 브랜드와 명성에 더 치중했다. 바흐가 내적인 완벽성과 작품 자체의 구조화를 통해 그 진정성을 인정받는 데 주목했다면 헨델은 자기 자신 자체를 상품이라고 보고 여러 분야에 걸쳐 문어발식발뻗기를 시도했다.

 

또 바흐와 달리 헨델의 상당수 작품들은 모방(Imitation)과 다양한 성향을 섞는 것(Mix-up)으로 일관됐다. 당대의 트렌드를 좇다 보니 다른 작곡가들과 비슷한 산출물들이 여럿 나오기도 했고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의 작품 안에서도 서로 비슷한 유형들이 다수 나오기도 했다. 오라토리오메시아는 오페라의 다른 선율이나 오르간 협주곡집들로부터 내용들을 차용했고 특정 성가곡의 경우 아예 구성 자체를 빌려온 것도 있었다.

 

헨델은 경영자적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하기도 했다. 이탈리아 유학 직후 하노버 궁정에 고용됐던 헨델은 끊임없이 외도의 길을 모색하던 결과 잠재적 시장은 크지만 상대적으로 아직 매력적인 아이템이 주입되지 않았던 영국 런던의 오페라 시장을 주목했다. 당시 영국의 오페라는 거의 독창곡 중심이었고 성악가의 기량에 전적으로 의존하다시피 하는 심심한 장르였다.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새 트렌드를 습득했다는 자신감을 가진 헨델 입장에서는 욕심 나는 미개척 영역이었다. 마침내 헨델은 1720년대 초반 이탈리아어로 상연되는 작품을 헤이마켓 오페라 시장에 인기리에 올리는 데 성공했다. 특히 섬나라에 있다 보니 문화적으로 취약하다는 콤플렉스가 있었던 영국의 상류층 귀족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1

 

그럼 헨델의 역량 모델은 무엇이었을까? 첫 번째도 네트워크, 두 번째도 네트워크, 세 번째도 네트워크였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일반적인 제자를 거의 받지 않았다고 한다. 가장 영항력 있는 헨델의 회고자로 지목되는 제자 스미스가 헨델의 오페라에 투자하는 부유한 상인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또 헨델은 왕실의 어린 자제들을 개인지도하고 그들에게 바이올린, 성악, 작곡 기법 등을 가르치면서 왕족들과 친해지는 데에 심혈을 기울였다. 뿐만 아니라 하노버 궁정을 떠나오면서 척졌던 선제후가 조지 1세로 영국 왕의 자리에 등극하자수상음악을 작곡해서 그의 환심을 사려고 한 일화도 있다. 이후 수년간 헨델의 오페라는 공주를 비롯해 여러 왕족들의 후원금과 지원 기반을 토대로 운영됐다고 한다.

 

실험적인 접근뿐만 아니라 파격적인 무대 연출이 핵심이었던 헨델의 오페라는 장중한 스토리 위주의 영국 오페라에 비해 위험성이 강했다. 따라서 유력 투자자들과의 지속적인 관계를 통해 안정적인 자금 유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헨델은 왕실 차원의 관심과 함께 귀족층들의 소비를 유도할 수 있는 비즈니스 모델을 개발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경쟁자 진입으로 네트워크 기반 명성이 무너지다

그러나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한 역량은누군가의 사람이 되면서이 만들어짐과 동시에 부정적인 요소로 돌아오기도 했다. 하버드대의 사회학/경영학 교수인 조던 시겔(Jordan Siegel) 박사는 이것을 가리켜정치적 네트워크 내재성의 부정적 단면(Negativity of Political Embeddedness)’이라고 말한다.헨델 역시 초기에는 엎치락뒤치락을 반복했던 영국 정계의 시류에 휩쓸려 다닐 수밖에 없었다. 특히외교 관계에는 물 같은 총리’ ‘매국노 총리로 지목되었던 월폴 수상과의 관계가 외국인인 그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이방인이라며 그의 오페라와 작품이 갖는 가치를 폄하하는가 하면 국가적인 위기가 온존하는 시기에 외국어로 상연되는 음악을 듣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일인가에 대한 문제 의식을 제기하기도 했다.

 

또 영국 오페라 시장에 진출하는 경쟁자가 늘어나면서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한 헨델의 명성에 손상이 가기도 했다. 특히 이탈리아 오페라의수입업자였던 헨델을 위협하는본토박이 이탈리아인니콜라 포르포라(Nicola Porpora, 1686-1768)의 영국 진출은 큰 위기가 아닐 수 없었다. 그는 헨델의 쇼맨십(Showmanship)에 철저히 쇼맨십으로 대응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헨델의 오페라가 미남 카스트라토 가수(소년 합창단원 출신으로 변성기가 오기 전에 거세해 소프라노-알토의 고음역을 소화할 수 있는 남성 가수를 의미한다)였던 세네시노(Senesino)와 계약해 흥행을 올렸다면 포르포라는 유럽 전역에서 명성을 떨쳤던 파리넬리를 고용하는 전략으로 대응했다. 포르포라는 경영자이자 주주로서 제작과 투자 과정에 참여함과 동시에 연주자로서 직접 공연을 지휘하는 역량까지 선보였다. 또 그는 여러 정객들과의 교분을 통해 역량을 과시했던 헨델의 경쟁력에 대해 상대 파벌의 귀족들과 영부인들을 접촉해 투자와 후원을 이끌어내기까지 했다. 결국 헨델은 경쟁자들의 지속적인 견제와 네트워크 자산의 진부화로 인해 1720년 말에 파산을 겪고 만다. 한때는 남해주식사건(South Sea Bubble: 당시 영국의 재무장관이었던 로버트 할리가 재정 위기 타개 목적으로 설립해 영국 재무성 채권과 노예 무역 전문 기업이었던 남해회사의 주식을 교환하는 수익 상품 투기 사건. 튤립 버블과 함께 유럽의 대표적인 버블 사례로 꼽히며 헨델은 왕족들과 함께 투기에 가담해 로열 아카데미 오브 뮤직을 설립할 자산을 모으려 함)으로 고위층의 축재 스캔들에 휘말릴 만큼 부를 자랑했던 헨델이 이제는 아이템이 식상하다는 반응과 함께 빈털터리 신세가 될 지경까지 몰린 것이다.

 

 

 

신시장 개척으로 다시 일어나다

헨델은 이런 상황을 어떻게 극복했을까? 헨델은 기존 시장의 패러다임이 더 이상 영국에서 맞지 않는 아이템이라는 것을 재빨리 간파했다. 실제로거지 오페라라는 가십 위주의 대체 상품이 등장하면서 진지한 영웅담이 담겨 있는 이탈리아 귀족 오페라는 뒤안길로 밀려나는 추세였다. 이에 헨델은 새로운 제품 카테고리를 만드는 전략을 구사해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기로 한다. 헨델 고유의 경쟁 전략 및 환경 대응 방식이 또 한번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그는오라토리오라는 장르에 주목했다. 예배당 인근의 기도소에서 신자들의 묵상을 위해 개발된 오라토리오는 원래 상업적인 용도로 상연할 만큼의 규모를 갖춘 콘텐츠가 아니었다. 그러나 교회 예배의 형식보다 자유로운 편성이 가능해 자유로운 스토리라인 전개가 가능하고 사람들이 듣기에도 훨씬 쉬웠으며 교회의 공식 언어인 라틴어뿐만 아니라 각국의 언어로도 상연되기 때문에 더 많은 고객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영어 공연이 가능하다는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헨델은 이오라토리오라는 장르가 별도의 무대와 의상, 연출이 필요 없는 음악극이라는 사실에 주안점을 맞췄다. 종교곡이라는 객관적인 특성과 함께 다양한 관중들이 계층에 관계없이 환호할 수 있는 소재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헨델은 이스라엘, 유대 왕국 등의 기독교적 소재가이방인에 대항하는 하나님의 신자들이라는 구도를이방인을 견제하며 맞서 나가는 영국이라는 구도로 묘하게 이입시킬 수 있는 콘텐츠가 될 수 있음에 주목했다. 애국주의적인 소재가 가질 수 있는 상업성과 대중들의 열광을 기대했던 셈이다. 가사를 만드는 과정에 당대를 대표하는 논객들을 참여시킨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다. 영국 국교회의 애국적인 분위기를 선도했던 신학자 제넌스(Charles Jennens, 1700-1773)를 작사가로 참여시키는가 하면 종교시인들로 하여금 가사를 감수하게 했다. 그의 오라토리오는 화려한 색채와 오케스트레이션을 갖췄지만 듣기 쉬운 가사로 구성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메시아는 서민들이 접근하기에도 좋은 콘텐츠였다. 고아원으로 알려진 파운들링 병원에서 상연되는가 하면 영국의 왕립 극장에서 왕족들이 자리한 가운데서도 연주됐다.

 

“알토 솔로와 콰이어 : 자애로우신 하나님, 참된 교회를 축복하사 우리의 왕을 구하소서! 믿는 자 모두는 일편단심으로 당신의 의도 따라 적을 정복하리, 이것이 안 되면 우리 모두 멸절되리라

 

-제전 오라토리오 HWV 62, Part 3, 20번 곡2

 

결국 헨델은 이교도의 위협에 놓였던 이스라엘을 영국에 비유함으로써 국민 여론을 자극하는 한편 자신이 외국인이라는 사실을 가린 채 대세를 유도하는 데 성공했다. 스페인, 프랑스를 비롯한 가톨릭 국가들과의 지속적인 갈등은참된 성공회 국가인 영국의 문화적 정체성을 되새김질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오페라에서 오라토리오로의 대전환(Great Transformation) 전략이 성공한 것이다.3  18곡의 오라토리오 중 대부분은 외국 세력과의 전쟁이라는 문맥(Context)하에서 국민적 여망을 결집시키고 국왕의 권위를 정당화시키는 데에 활용됐다. 솔로몬 왕이나 다윗과 같은 구약시대 군주들의 모습은 상대적으로 영국적 정통성이 부족했던 하노버 왕가 구성원들의 집권 당위성을 홍보하는 역할을 했다. 헨델은 노년까지 이어졌던 기부 사업이나 왕실 행사를 통해열정적이고 거룩한 영국적 작곡가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했다.

 

시대정신에 주목하다

만약 그가 계속해서 오페라를 작곡하거나 다른 소재의 도입을 통해 기존의 트렌드를 일신하려는 데에 그쳤다면 어떻게 됐을까? 19세기 후반까지 영국은 외국 음악의 풍조에 매우 민감한 문화권이었다. 이탈리아 오페라가 인기를 끄는가 하면 프랑스 풍의 건반곡이 시장을 석권했던 적도 있었고 독일인 멘델스존의 작품이 교향곡의 모범으로 인식되던 시기도 있었다. 특정한 표준이 오래 갈 수 있는 시장이 아니었던 셈이다. 경영전략 연구자 조엘 바움(Joel Baum)주변 사람들이 많이 실패할수록 학습을 통해 자신의 성공 가능성은 더욱 높아진다는 결과를 제시4 한 바 있는데 헨델은 자신의 실패와 함께 수많은 1720-30년대의 오페라 벤처들이머니 게임으로 쓰러져 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결국 10년간의 고민 끝에 기존의 비즈니스 모델과 차별화된그 무언가를 창출해낸 것이다. 음악학자 윈턴 딘(Wynton Dean)헨델이 주목한 것은 시대정신이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귀족들에게만 영합하는 예술보다는 다양한 지적 기준을 지닌 대중으로부터 어느 정도의 반향과 공감대를 이끌어냈다는 것이다. 헨델은 정해진 트랙을 가면서 요구조건을 달성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공간과 조건에 끊임없이 도전하면서 새로운 표준을 만들어나갔다. 바흐가 다가오는 기회구조를 타이밍에 맞게 잡으려는 경향에 집중했다면 헨델은 기회 자체를 만들고 그것을 네트워크를 통해 움직이는 역할에 능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상대방을 실각시키거나 비합리적인 수단을 동원하기도 했으나 헨델이 만들어낸 아이템 중 상당수는 당대의 유행과 트렌드를 일신하는 데 기여했다. 경제사회학자들은 단순히 시장점유율이 높은 기존의 플레이어만이 사회 운동 성격의 열기를 이끌어나갈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오히려 비교적 새로운 성격을 갖고 있는 신흥 카테고리들이 자신들이 갖고 있는 특장점을 적극 홍보하면서 업자들끼리의 결속과 제휴 네트워크를 통해 시장 내에서 존재의 의미를 입증해 나가는 전략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정당성(Legitimacy)’을 인정받고 더 나아가서는 경쟁 구도에 자연스럽게 편입되는 것이다.

 

헨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오라토리오라는 장르는 오페라나 협주곡에 비해 비교적 새로운 상품이었지만 애국주의 운동이 한참 일어나고 있었던 영국의 시대적 분위기와 계층을 넘나드는 예술을 통한 공감이 필요했던 분위기에 부합했다. 특히 영어 가사 자체가 대중의 관심을 만족시킬 수 있는 요소였다. 라틴어나 어려운 전례문 위주로 쓰인 곡이 아니라 누구나 공감할 수 있고 쉽게 내재화할 수 있는 텍스트가 제일 효과적이라는 철학이 반영된 것이다.귀족들로부터의 후원을 기반으로 한 자원 확충이 아니라 티켓 수입과 성과 귀인이 분명한 비즈니스 모델 개념의 도입도 중요한 성공의 인자였다. 그전까지 헨델은네트워크에 의존해서 자신의 경쟁력을 확보하는 경향이 강했다. 따라서 정권의 향배에 따라 그 지위가 흔들리거나 심지어는 실각의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1730년대 이후 오라토리오라는 장르로 갈아타면서 그는 거의 독자적인 사업 역량과 시스템을 구축해 나가기에 이른다.

 

각가의 삶을 살아갔던 바흐와 헨델, “나는 나를 갈망한다

고전 음악이라는 콘텐츠가 매우우아하다는 이미지를 갖고 있어서인지 음악계를 치열하지 않은 세계로 비약해 평가하는 사람을 자주 접한다. 심지어 경쟁이나 고유 이미지 창출과 같은 적극적 전략보다는 자신만의 내면에 주의를 기울이는 현학적인 분야로 오해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앞서 2회에 걸쳐 살펴본 바흐와 헨델을 보더라도 그것은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매우 변화무쌍한 경쟁 환경에 노출됐던 인물이고 그 가운데서 자신들만의 외로운 투쟁을 계속해야 했다. 또 당대의 관념에 도전해야 하는 상황도 있었고 리더로서 의사결정을 내리면서 책임을 지고 주위의 비판을 감당해야 했던 시기도 있었다.

 

특히 바흐의 경우에는 말년의 업적이 거의 부정당하기까지 했다. 바로크시대의 전아(典雅)함이 아니라 일반 시민들이 쉽게 들을 수 있는 고전파 음악이 새로운 트렌드로 떠오르던 1740년대 후반 및 1950년대 초기는 음악적 전환기였다. 교회음악을 중심으로 커리어를 쌓아 온 바흐의 완벽한 대위법적 작곡 기법이 가치가 없다는 취급을 받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바흐는 이때 푸가의 기법(Art of Fugue)’이라는 성부들 간의 관계가 순차적이면서 논리적인 진행 방식을 갖추는 대위법과 푸가의 용법을 집대성한 결과물을 내놓았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그간의 음악사적 발전을 고려할 때 그와 같은 대사전의 집필이 필수적이라는 신념 하나 때문이었다. 비록 당대인들이 이 업적의 가치를 거의 알아보지 못했지만 멘델스존을 중심으로 한 후대의 인물들은아카이브(Archive)’라는 새로운 기록 보존 방식을 통해 그의 작품을 되살리고 그 의미를 연구하는 모임을 결성하기도 했다.

 

헨델도 마찬가지다. 오라토리오는 1770년대에 접어들면서 교향곡이나 근대적인 성격을 띠는 다른 기악곡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한정적인 스토리와 소재를 다루는 진부한 작품으로 전락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헨델은 18곡에 걸친 자신의 작품을 총체적으로 기록하는 한편 자신의 음악적 유산과 전 재산을 사회에 기부함으로써 기존에 열정 있는 활동으로 쌓았던 명성 이상의 명예를 얻었다. 헨델이 그토록 경쟁자들과 치열하게 투쟁을 벌여 왔던 비즈니스의 대가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의외의 면모로 보여질 수도 있는 행동이었다.

 

이들이 그토록 열정을 다해 호소하려고 했던 것은 무엇일까? 변화하는 생태계를 살아갔던 가치와 역량 모델, 그리고 환경에 대응하는 경쟁력이라는 요소를 통해 어떤 점을 살펴볼 수 있을까? 그리고 그들이 쌓아왔던 그 이전의 업적 못지않게 중요한 유산으로 남은, ‘친사회적 행동들이 어떻게 인식될 수 있을까? 공공경제학자들이나 사회심리학자들 모두 동의하는 명제가 한 가지 있다. 이타적 협력과 기여 활동의 저변에는 인정과 자아 실현의 욕구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바흐와 헨델은 기존 음악인들이 가졌던 모습처럼 대세에 적응하면서 쉽게 살아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이 가지 않은 길을 걸었다. 그리고 그 길을 새로운 개념으로 정의해 후대의 역사로 남았다. 이 모든 것의 저변에는 바로나는 나를 갈망한다는 생각, 즉 끊임없이 자신의 열망수준을 높여나가고 세계를 재구성하고자 하는 자기 실현의 욕구가 있었던 것이다.

 

경영전략 연구자 마크 토마스 케네디(Mark Thomas Kennedy)지속 가능한 경쟁우위(Sustainable Competitive Advantage)’에 대해 다른 해석을 내놓는다.5  과거 사회학자 찰스 틸리(Charles Tilly)가 이야기한6  ‘계속되는 불평등(Durable Inequality)’이 경쟁 우위와 거의 같은 표현이라는 것이다. 경쟁력, 서로 간의 격차와 불평등은 단순히 유형의 자원으로 빚어지는 차이가 아니다. 환경을 어떻게 바라보고 그 안에서 자신을 실현시켜 나가는 과정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달린 문제다. 요즘 들어 수많은 인재들이 만들어 가는 자신만의 스토리, 경력들을 들여다보면키워드는 있으나사상이 없는 경우가 많고사상이 있더라도 정작 기억에 남을 만한 터치포인트(Touchpoint)는 제공하지 못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2012년의 오늘날 바흐와 헨델이 재래(再來)한다면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던질까? 우선 자신을 정의하는인식의 틀(Cognitive Scheme)’부터 만들라고 할 것이다. 충분히 환경에 대해 사색하고 고민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자에게 기회는 따르지 않는다. 비록 두 천재는 각각 같은 듯 다른 삶을 살았던 사람이지만 각자가 커다란 생태계에서 어떻게 의미를 만들어 나갈 것인지 고민했던 선각자였다.

 

지금도 그들은 외칠 것이다.

 

“나는 나를 갈망한다.”

 

 

 

 

김혜옥 연세대학교 음악대학 합창지휘전공 교수 hokimbangeunice@gmail.com

필자는 줄리어드 음대에서 피아노 전공으로 학사 및 석사, 웨스트민스터콰이어 칼리지에서 교회음악 및 합창지휘 석사, 맨해튼 음대에서 같은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오레건 바흐 페스티벌, 한국합창제 등을 통해 전문 연구자 및 세미나 강사로 활동해 왔다. 현재는 연세대 음악대학 교수 겸 연세 콘서트 콰이어 상임지휘자로 재직 중이다. 2010년 스페인 문화부 주최 국제하바네라콩쿠르에서 최고 지휘자 표창을 수상하기도 했다.

 

천영준 연세대학교 창조경영센터 선임연구원 taisama@naver.com

필자는 선임연구원은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및 교육학과를 졸업하고 정보산업공학과 석사 과정에서 비즈니스 모델 개발 및 경영 전략을 연구했다. 현재 연세대 기술경영협동과정 박사 과정에 재학 중이며 연세대 창조경영센터에서 협업적 혁신(Collective Innovation) 및 소셜 컴퓨팅을 연구 중이다.

동아비즈니스리뷰 298호 Future Mobility 2020년 6월 Issue 1 목차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