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스트 패션(Fast fashion)’ 바람이 매섭다. 새로 짓는 도심 쇼핑몰의 목 좋은 곳에는 자라, H&M, 유니클로 등 패스트 패션 브랜드가 어김없이 들어선다. 도심 번화가도 패스트 패션 매장이 점령했다. 얼마 전 서울 중구 명동에 문을 연 유니클로 명동중앙점은 개점 당일 매출액이 20억 원까지 치솟았다. 일본 본사 관계자도 놀랐다는 후문이다. ‘빨간 내의’ 대신 효도 상품으로 급부상한 1만9900원짜리 ‘히트텍’ 내의를 9900원에 판매하는 등 다양한 상품을 20∼50% 정도 싸게 파는 파격 할인행사를 했으니 고객들이 줄을 서가며 입장하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패스트 패션은 끼니를 뚝딱 해결하는 인스턴트 라면처럼 간편하고 매혹적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4계절을 더 잘게 쪼게 최신 유행 스타일의 인기 패션 아이템을 수시로 쏟아낸다. 매장에 갈 때마다 똑같은 옷이 별로 없다. 유행에 민감한 젊은이들에겐 천국이 따로 없다. 짧게 입고 빨리 버리니 의류 소비도 늘어난다.
한국이 패스트 패션에 열광하는 사이 바다 건너 미국에서는 전혀 다른 움직임이 시작됐다. 미국에서는 한 해에 1190만t의 옷, 신발, 섬유제품이 폐기된다. 미국인 1명이 30㎏의 옷을 매년 버린다고 한다.
아웃도어 의류 브랜드인 파타고니아는 요즘 “덜 사고, 낡은 옷은 다시 쓰자(Buy less, buy used)”는 운동을 펼치고 있다. 필요한 만큼만 옷을 사서 오래 입고 낡은 옷을 수선하거나 돌려 입자는 운동이다. 옷도 자동차처럼 고장 나면 수리하고 중고로 거래하자는 얘기다. 저쪽이 패스트 패션이라면 이쪽은 슬로 패션이다.
빨래와 다림질에는 많은 물과 에너지가 쓰인다. 옷도 금방 헤진다. 볼펜자국 정도는 세탁을 하지 않아도 변성 알코올이나 레몬주스로 간단히 빼면 된다. 파타고니아는 이런 식으로 오래 옷 입는 노하우를 소비자에게 알리고 있다.
파타고니아는 헤진 제품을 본사로 보내 수선을 맡기면 10일 내에 수선해서 돌려준다. 지난해엔 1만2000건의 수선을 했다. 수선 담당 직원도 늘렸다. 입다가 물린 옷을 기부하거나 중고로 거래할 수 있는 사이트도 열었다.
뜻은 좋은데 사람들이 새 옷을 사지 않으면 이 회사는 결국 망하는 게 아닐까. 파타고니아의 생각은 다르다. 파타고니아의 아웃도어 용품은 비싼 편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자 파타고니아 경영진은 매출 감소를 걱정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불황의 골이 깊어질수록 비싸지만 오래 입을 수 있는 파타고니아 제품의 매출이 늘어난 것이다. 꼭 필요한 옷을 사서 더 오래 입으려는 합리적인 소비 성향이 강해졌기 때문이다.
소비자의 변화를 포착한 파타고니아는 상식을 뒤집었다. 제대로 된 옷을 필요한 만큼만 사서 더 오래 입자고 얘기하는 게 회사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환경에도 도움이 되니 일석이조다. 중고 옷이 유통되면 신제품 매출에는 일부 영향을 줄 수 있겠지만 회사의 브랜드 이미지를 알리고 고객을 확대할 수도 있다.
무한 경쟁이 벌어지는 시장에 정답은 없다. 소비자의 문제와 욕구를 해결해주는 기업만이 살아남는다. 패스트 패션과 슬로 패션이 공존할 수 있는 것도 이 같은 시장의 속성 때문이다. 패션 시장만 그럴까. 자동차, 전자제품, 가구 등의 제조업이나 서비스업이라고 다를 리 없다. 혁신의 답은 소비자가 쥐고 있다. 우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야 제대로 된 세상이 보인다.
박 용 기자 parky@donga.com
박용
- 동아일보 기자
-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부설 국가보안기술연구소(NSRI) 연구원
- 한국정보보호진흥원(KISA) 정책연구팀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