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재벌 로만 아브라모비치가 인수한 첼시가 급부상하기 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의 최고 흥행전은 당시 우승을 양분했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아스널의 경기였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두 팀의 경기는 지금의 엘 클라시코(스페인 프리메라리가의 양대 인기 구단인 레알 마드리드와 FC 바르셀로나가 벌이는 경기) 못지 않게 주목을 받았다.
두 팀의 혈전은 수많은 일화를 남겼다. 2004년 10월, 49경기 연속 무패 행진을 이어가던 아스널은 할리우드 액션으로 논란이 된 루니의 페널티킥 유도에 무너졌다. 맨유에 0대 2로 패해 분을 참지 못한 아스널 선수들은 맨유의 알렉스 퍼거슨 감독에게 피자를 던졌다. 이는 집단 싸움으로 번져 언론 지상을 장식했다. EPL의 전설로 남은 ‘피자 게이트’다. 앙금이 가시지 않은 2005년 2월 또 사단이 났다. 아스날의 하이버리 구장에서 벌어진 경기에서 두 팀 선수들은 경기 전 입장을 기다리던 터널에서 다시 충돌했다. ‘터널 게이트’다.
수장들도 만만치 않았다. 맨유의 퍼거슨 감독과 아스널의 벵거 감독은 각각 ‘불’과 ‘물’을 상징할 정도로 성격이나 팀을 지휘하는 방식이 달랐다. 가뜩이나 자주 싸우는 두 사람의 설전이 피자 게이트 이후 점입가경으로 치닫자 영국 경찰 당국까지 나서 자제를 요청했을 정도다.
이런 상황에서 맞이한 2006∼2007 시즌 초 맨유는 아스널에 연거푸 졌다. 퍼거슨 감독은 경기 결과가 나쁘면 라커 룸에서 선수들에게 축구화를 걷어찰 정도로 격한 성정을 지녔다. 세상이 다 아는 앙숙에게 연이어 패배했으니 길길이 날뛰고 선수들을 다그칠 법도 하건만, 퍼거슨은 이렇게 말했다. “오직 진정한 챔피언만이 패배 후 자신의 진가를 입증한다. 지금처럼 중요한 시점에서 나온 패배는 오히려 우리에게 보약이다. 같은 실수를 다시 하지 않으면 된다.” 팀을 재정비하는 데 힘쓴 그는 결국 2006∼2007시즌 EPL 챔피언 타이틀을 차지했다.
‘패배 후 진가를 보여줘야 챔피언(Only true champions come out and show their worth after defeat)’이라는 퍼거슨의 말에는 실패를 바라보는 그의 관점이 압축돼 있다. 누구나 성공을 좋아하고 실패는 싫어한다. 하지만 그 누구도 성공만 거듭할 수는 없다. 천하의 퍼거슨도 마찬가지다. 1986년 그가 감독이 된 후 현재까지 맨유의 승률은59%다. 10번 중 6번만 이겨도 EPL 최고의 팀으로 군림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한국시리즈에서 무려 10번 우승한 김응룡 전 삼성라이온스 사장, ‘야구의 신’으로 불리는 김성근 SK와이번스 감독도 감독으로서 모두 5할대의 승률을 기록하고 있다. 이들이 명장이 된 이유는 4번 패배했을 때 이를 차분히 인정하고, 그 이유를 찾아내 다른 패배를 예방했기 때문이다.
잘 알려진 사례지만 3M의 포스트잇 개발도 실패 덕분에 가능했다. 강력한 접착제를 발명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은 연구원이 엉뚱하게도 잘 떨어지는 접착제를 개발한 덕에 포스트잇이 탄생했다. 만약 한국 기업에서 잘 붙는 접착제를 개발하라는 명령을 받은 직원이 잘 떨어지는 접착제를 만들었다면 어땠을까. 경영자는 해당 직원을 나무라기 바빴을 것이고, 그 직원 역시 실패를 부끄러운 일로 생각하고 감추기에 급급했을 것이다. 성공지향적인 한국 기업에서 실패는 여전히 금기이자, 조용히 묻어야 할 기업 비밀처럼 여겨진다.
한국 사회에서는 무조건 실패를 피하려고만 하는 개인이나 조직이 많다. 직장인들의 술자리에서도 “열 번 잘하고 한 번 실수하는 것보다, 다섯 번만 잘하고 한 번도 실수하지 않는 게 낫다”는 류의 조언이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개인도 조직도 발전할 수 없다. 특히 창조 혁신 역량이 화두인 초경쟁 시대에 이런 접근법은 조직 경쟁력의 약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일은 언제나 잘못될 수 있다. 문제는 일이 잘못됐을 때 이 실패를 발전의 계기로 삼느냐 마느냐다. 성공은 종종 자만을 불러와 더 큰 실패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반면 실패는 반성과 교훈을 남겨 큰 성공의 밑거름이 될 수 있다. 조직 학습에서 실패가 중요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