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이후 기업들의 글로벌 활동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첫째는 20세기 전반에 벌어진 두 차례 세계대전의 근본적인 원인이 결국 ‘국가의 부(the wealth of nations)’를 둘러싼 각국 정부의 첨예한 이해관계에서 비롯됐다는 점을 깨달은 것이다. 1776년 애덤 스미스가 자유 무역의 필요성을 처음 제기한 뒤 학계에서는 비교우위에 기반을 둔 자유 무역이 대세를 이뤘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수출은 선이고 수입은 악이라는 중상주의 사고가 판을 쳤다. 중상주의 접근은 결국 선진국을 중심으로 한 제국주의와 식민지 개척으로 이어졌고, 국가 간 빈부 격차가 더욱 뚜렷해지면서 전쟁이라는 참극을 낳았다. 이에 따라 전쟁 이후 세계 질서를 다시 재편하려던 선진국들은 후진국에 대한 원조를 강화했고, 관세 인하를 통해 자유 무역을 증진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1947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GATT(General Agreement on Tariffs and Trade) 체제가 만들어진 뒤 모두 8차례의 협상을 통해 관세를 인하하고 무역을 증진시키는 노력이 이어졌다. 1995년부터는 WTO(World Trade Organization)가 GATT 체제에서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물론 GATT나 WTO 체제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높았지만, 이런 노력들로 인해 시장 개방과 규제 완화는 더욱 진전됐다. 덕분에 기업들은 훨씬 호의적인 상황에서 글로벌 활동을 할 수 있었다.
둘째는 기업들의 주된 글로벌 활동이 무역에서 해외직접투자(FDI)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완제품이 국경을 넘는 무역과 달리 해외직접투자를 통해서는 생산요소와 노하우가 국경을 넘어 현지에서 생산과 판매가 이뤄진다. 해외직접투자의 활성화는 기업들의 글로벌 경영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았다. 다국적 기업이라 불리는 새로운 형태의 기업들이 등장했다. 기업 활동이 현지에서 이뤄지는 만큼 현지화(localization)가 글로벌 경영의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다.
특히 해외직접투자의 역할이 중요한 이슈로 부각됐다. 해외직접투자가 개도국이나 후진국의 경제 발전에 기여한다는 긍정적인 시각과 함께, 해외직접투자를 제국주의와 식민지 개척의 새로운 형태로 폄하하는 시각이 공존했다. 하지만 이런 비판에도 불구하고 기업들의 해외직접투자는 꾸준히 늘었고, 이와 더불어 다국적 기업도 계속 생겨났다. 또 다국적 기업의 등장은 글로벌 경영의 초점을 해외직접투자에서 다국적 기업의 경영으로 바꿔 놓았다.
바틀릿(Bartlett)과 고샬(Ghoshal) 교수가 1989년 출간한 <국경없는 경영(Managing Across Borders)>은 다국적 기업의 경영을 본격적으로 다룬 고전이다. 그들은 기업이 특정 국가에 진출하는 사건(event)을 다룬 해외직접투자보다 이미 많은 나라에 투자해서 여러 자회사를 거느리고 있는 기관(institution), 즉 다국적 기업 자체에 관심을 기울였다. 즉, 바틀릿과 고샬은 무역에서 해외직접투자, 다국적 기업으로 이어지는 글로벌 경영의 제3의 물결을 본격적으로 탐구했다. 이들은 가전과 소비재, 정보통신 산업에서 미국 유럽 일본의 대표적인 다국적 기업을 심층 분석해서 다국적 기업의 경영을 이해할 수 있는 세 가지 핵심 기준을 제시했다.
‘다국적 기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자신들의 핵심 자산을 어디에 배치하는지, 해외 자회사의 역할은 무엇인지, 그리고 글로벌 경영에서 얻은 지식을 어떻게 개발하고 전파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바틀릿과 고샬 교수는 이 세 가지 핵심 기준에 따라 전통적인 다국적 기업의 유형을 세 가지로 구분했다.
첫 번째 유형은 좁은 의미로 정의된 다국적(mul-tinational) 기업이다. 다국적 기업은 글자 그대로 각각의 국가에서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다국적 기업을 의미한다. 정의의 명확성을 위해 ‘다국가(multidomestic)’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다국가 기업은 주로 필립스나 유니레버 같은 유럽의 다국적 기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유형이다. 다국가 기업은 자신들의 핵심 자산을 여러 나라에 분산 배치한다. 예컨대 필립스의 경우(1987년 기준) 본사가 있는 네덜란드에 가장 큰 연구개발(R&D) 센터를 두고 있었지만, 영국 독일 프랑스 미국 등에도 R&D 센터를 두고 있었다. 또 본사와 해외 자회사의 관계도 상당히 독립적이었다. 해외 자회사들에 상당한 권한을 부여하고 이들의 주도하에 현지 시장을 공략하는 방법을 선호했다. 이와 함께 현지에서 습득한 지식을 주로 현지 시장에 적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