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더블린의 기네스 맥주 공장, 미국 시애틀의 아마존 사옥, 영국 런던의 테이트모던미술관, 싱가포르의 이베이 지역 본부, 일본 도쿄의 미츠비시 마루노우치 파크빌딩의 공통점은? 바로 오래된 건물들을 다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중 가장 모범적인 사례는 단연 미국 뉴욕에 위치한 허스트미디어 그룹의 사옥인 ‘허스트타워’이다. 허스트미디어 그룹은 <에스콰이어>를 비롯한 월간지, 신문, 방송국을 거느린 거대 미디어 그룹이다. 창업주인 윌리엄 허스트는 1928년 아르데코 양식의 6층짜리 건물을 완공했다. 원래 18층짜리로 설계됐지만 1929년 대공황으로 6층까지만 지어진 것. 과거에는 주변 건물에 직원들이 흩어져서 근무했다. 하지만 기업이 성장해 이마저도 한계에 이르면서 허스트미디어 그룹은 2000년 새 사옥인 허스트타워를 짓기로 하면서 영국의 건축가 노먼 포스터에게 설계를 맡겼다.
허스트타워를 짓는 것은 당시 ‘모험’에 가까웠다. 허스트미디어 그룹은 기존 건물을 그대로 둔 채 건물을 증축하는 방식을 택했다. 새 건물은 옛 사옥 위에 덧입혀 지어졌다. 기존의 6층짜리 건물을 그대로 둔 채 182m 높이 46층짜리의 ‘상부 구조(Super Structure)’로 설계한 것. 기존 건물을 그대로 둔 채 공사하려니 공사비가 천문학적으로 많이 투입됐다. 일부에서는 낭비라는 비판까지 나왔다.
2006년 완공 후 이 건물은 과연 사치품으로 여겨졌을까. 아니다. 허스트타워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효과를 얻었다. 옛 사옥은 오랜 세월 동안 도시의 랜드 마크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허스트미디어 그룹의 역사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허스트미디어 그룹은 미디어그룹으로서 명실상부한 역사적 사회적 의미를 극대화했다. 특히 친환경적으로 지은 점도 높이 평가받았다. 실내 기둥을 최소화해서 일반적인 건물에 비해 철 사용량을 20% 줄였고 그나마 사용한 철의 80%는 재활용했다. 건물에서 사용하는 에너지도 25% 이상 절감하는 등 친환경적인 측면을 강조했다. 주변에서는 ‘도시인의 감성을 극대화했다’ ‘회사가 지켜야 할 가치에 대해 아낌없는 투자를 했다’ 등의 평가가 나왔다.
사회학자인 리처드 플로리다는 자신의 저서 <도시와 창조계급>에서 도시의 창조적 생산자들이 선호하는 공간은 멋지고, 세련되고, 거대하고, 고급스러운 공간보다는 낡고 오래된 공간이라고 설명했다. 공간의 기능보다는 공간이 주는 감성을 통해 창조적인 영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현상을 주변에서 쉽게 목격할 수 있다. 역설적이게도 최첨단 정보기술(IT) 기업들이 오래되고 낡은 곳을 사무 환경으로 선택한다. 낡고 오래된 건물이 수명이 다해 폐기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창의적인 기폭제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건축은 사람들의 심리를 지배한다. 미학적인 표현을 담고 있으면서 동시에 사람의 심리적인 개입을 자극하는 것이다.
드물지만 국내에서도 낡고 오래된 공간을 활용한 곳이 등장하고 있다. 서울 삼청동이 대표적이다. 언뜻 보면 방치된 것 같지만, 오히려 사람들의 심리를 자극해서 창작물을 생산하게 만든다.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삼청동 가로(街路)에는 사람들의 삶이 녹아 있어 조선시대에서 현대로 이전한 과정이 담겨 있다. 세월이 담긴 공간에 현대인들이 조금씩 개입해 변화무쌍함을 만들어낸 것이다. 서울 홍대 앞이나 신사동 가로수길에서도 장인의 섬세한 수공예적인 감성을 찾을 수 있다. 최근 완성된 ‘인천 아트 플랫폼’은 21세기의 창의 예술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허스트미디어 그룹처럼 국내 대기업이 민간 건축물에 이런 콘셉트를 도입한 사례를 찾기 힘들다.
리처드 플로리다가 주장하는 21세기의 창의성은 이러한 ‘시간의 유적’에서 만들어진다. 최근 많은 기업들이 ‘창의성’ 표현에 집중하고 있다. 하지만 창의성은 거저 얻어지는 게 아니다. 꾸준히 노력하고 시도해야 창의성을 증폭시킬 수 있고 다른 것들과 융합시킬 수 있다. 문제는 이런 노력과 시도를 잘할 수 있는 환경을 얼마나 잘 만드느냐에 달려 있다. 오래되고 낡고 거친 공간은 이런 창의적 환경으로 충분한 가치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편집자주 인간의 삶의 질을 결정하는 핵심 요소 중 하나는 ‘공간’입니다. 기업 입장에서도 공간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직원들의 삶의 터전이자 고객과 만나는 소중한 접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경영학에서 공간에 대한 연구는 매우 부족합니다. 이 분야의 개척자인 홍성용 모이스페이스디자인 대표가 공간의 경영학적 의미를 탐구하는 시리즈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