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1839년 프랑스 파리에서 공식적으로 발명돼 1840년대부터 전 세계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사진 한 컷을 찍는 데 무려 8시간이나 걸렸다. 사진에 찍히는 사람은 8시간 동안 꼼짝 않고 있어야 해서 고통스러울 정도였다. 당시의 사진관은 빛을 들이기 위해 천장을 유리로 만들어 태양광을 직접 받았다. 사진관 안이 너무 뜨거워 사진을 찍는 사람이나 사진에 찍히는 사람이나 모두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단발령, 조선에 사진을 퍼뜨리다
기록에 따르면 한국에는 갑신정변을 전후해 사진이 들어왔다고 한다.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에 갔던 김옥균과 박영효가 국내에 사진을 들여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개화파는 조선을 개화하기 위해 고종의 어진(御眞)을 찍는 게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조선의 왕을 서양문물인 카메라 앞에 노출시킴으로써 개화에 상징적 의미를 더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1880년대 당시에는 사진을 한 컷 찍으려면 5∼8분이 걸렸다. 게다가 실내는 너무 어두웠기 때문에 사진을 찍으려면 고종을 밖으로 모시고 나와 5분 동안 햇볕 아래에 서 있도록 해야 했다. 당시 수구파가 이 계획을 알고는 고종의 사진을 찍지 못하도록 개화파를 견제했다. 그러다 1884년 3월 16일 조선의 외교문서를 담당한 퍼시벌 로웰이 마침내 가장 먼저 고종의 사진을 찍게 되었다. 뒤이어 조선인으로는 처음으로 지운영이 고종의 어진을 촬영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전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사진이 토착화하기 어려웠다. 특히 단발령 전까지는 사진에 관한 유언비어가 난무했다. 사진에 찍히면 혼을 빼앗긴다는 소문에서부터 필름에 바르는 아교는 아이들을 잡아다 그 뼈를 고아서 만든 것이라는 이야기까지 다양했기에 사진관이 수난을 겪었다. 그러다 고종이 단발령을 내리자 사람들은 조상이 물려준 머리카락을 사진으로나마 영원히 간직하고 싶어 했고, 사진관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사진은 시간의 화석
인간이 발명한 모든 물건 가운데 인간이 시간으로부터 저항하고 독립하게 해주는 것은 카메라뿐이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시간의 흐름을 거역할 수 없지만 사진은 어느 한 순간을 정지시킴으로써 그 순간을 영원히 사라지지 않게 한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사진 발명이 불의 발견에 비견될 정도라며 그 과학적 업적을 높이 평가한다.
사진은 시간의 화석이다. 집집마다 앨범이 있고, 가족사진에는 모든 가족사가 다 들어있다. 사람들은 나이를 먹고 시간이 흐르면 옛 사진을 통해 지나간 시간을 되돌아본다. 실존자와 사진 속 인물이 함께 있는 것이다. 사진 속 인물은 이미 사라진 사람이며,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그 순간부터 죽음이 된다는 뜻이다. 사진은 항상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과거를 돌아보는 매개체다. 사진을 찍는 순간부터 사진 속 장면은 이미 과거가 된다. 사진 속 시간과 지금 그 사진을 보고 있는 시간의 차이가 클수록 과거는 더 애잔하게 다가온다. 우리가 계속 사진을 찍는 것도 부단히 나의 존재를 증명하고, 내가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으며 어떤 공간에 가봤는지를 알려주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념이 될 만한 장소에서 으레 사진을 찍으며 그 순간을 영원히 간직한다. 시간의 의미를 사진으로 자각하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유형의 사진이 바로 증명사진이다. 파리에서는 사진이 발명된 지 1년 만에 도시 안에 1200개의 사진관이 생겼다고 한다. 자신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깨닫고, 자신이 죽은 뒤에도 자식들에게 자신의 얼굴을 남기기 위해서였다. 서양 역사에서도 영주들의 집 거실에는 초상화가 큼직하게 걸려 있었다. 프랑스혁명 이후 부르주아 정부는 서민들도 자기 초상화를 가질 수 있도록 장려했다. 국민들은 사진을 찍기 위해 사진관 앞에서 줄을 섰다. 사람들은 나라는 존재는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싶어 사진관에 갔다. 또한 자신이 죽더라도 사랑하는 여인의 지갑이나 목걸이 속에 사랑의 징표로 사진을 남기기 위해서였다. 한마디로 서로의 약속과 정체성의 산물이 바로 사진이다. 그래서 사진이 잘 못 나오더라도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의 사진을 많이 찍는 게 좋다. 특히 서양에서는 거실과 주방 곳곳을 가족의 사진으로 꾸며 놓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사진 찍히길 두려워하고 부자연스러워 하는 문화가 남아 있다.
‘왜 나는 사진만 찍으면 이리도 못 나올까’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사람들이 사진을 거부하는 이유는 지금까지 마음에 드는 사진을 한 장도 못 가져봤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누구에게나 최상의 앵글을 줬다. 사진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직 자기가 지닌 가장 아름다운 앵글을 모르기 때문이다. 사진을 잘 찍든 못 찍든, 구도나 초점이 잘 맞든 안 맞든 중요하지 않다. 부모님들이 자식의 어린 시절 사진이 초점이 많이 흔들렸다고 해서 안 보진 않는다. 그저 ‘내 아이가 벌써 이렇게 컸구나’ 하고 느낄 뿐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지하철이나 공원에서 ‘셀카’를 찍고, 근사한 레스토랑에 가서 좋은 음식을 먹은 추억을 남기기 위해 음식 사진을 찍어 블로그나 미니홈피에 올린다. 이걸 보면 일기가 따로 없다. 사진을 통해 그 사람이 뭘 좋아하는지, 어떤 감성을 갖고 있는지 다 알 수 있는 시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