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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s Letter

바통터치, ‘골든 룰’을 찾아라

김현진 | 389호 (2024년 3월 Issue 2)
가족기업이 많은 럭셔리, 이른바 명품 업계에서 승계와 관련해 자주 회자되는 기업은 에르메스와 구찌입니다. 전자는 잘된, 후자는 잘못된 사례로 꼽히는데 에르메스에는 있고, 구찌에는 없었던 것은 바로 ‘계획’과 ‘합의’였습니다.

구찌는 창업자인 구치오 구찌, 그리고 세 아들과 네 손자를 거치는 와중에 가족 간 격렬한 상속 전쟁을 벌였고 결국 다른 기업에 운영권을 넘기는 운명을 맞았습니다. 창업자가 세상을 떠날 때 장녀를 상속에서 배제하고, 세 아들에게만 기업을 물려준 것이 불행의 씨앗이 됐습니다. 이후 아들 간에도 기여도를 두고 분쟁이 이어졌고 이후 3세들까지 가세하면서 부자(父子)간 탈세 고발, 심지어 살인에 이르기까지 큰 진통을 겪었습니다.

또 다른 명품 기업, 에르메스는 다른 방식을 택했습니다. 새로운 승계 구도를 만들면서 ‘브랜드 정신’에 입각한 원칙을 적용한 것입니다. 즉 ‘에르메스 정신(가족, 스포츠, 정제된 우아함의 전통)’을 잘 지키고 사업적 재능도 있는 가족 구성원을 선별해 리더로 육성하는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주식은 반드시 가족 내에서만 매매하도록 하고 회사의 주요 정책을 결정하거나 CEO를 교체하려면 가족 주주 75% 이상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는 등의 원칙이 담긴 주주 합의서도 작성했습니다. 적대적 인수 시도 등 외부 위협들을 헤치고 에르메스가 가족기업으로서의 명성을 이어가는 것을 보면 ‘계획’과 ‘합의’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됩니다.

최근 국내 재계에서도 가업 승계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펼쳐지고 있습니다. 산업화 시대인 1970∼80년대 창업 세대의 고령화가 진행되면서 가업의 미래를 고민하는 중소·중견기업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사실 가족기업이 명맥을 이어가기가 쉽지 않은 일임은 다양한 연구 결과를 통해 입증된 바 있습니다. 존 L.워드 노스웨스턴대 켈로그경영대학원 교수가 미국 일리노이주 내 제조업체를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 가족기업의 34%만이 1세대에서 2세대로 계승됐고, 세 번째 세대로 이어진 기업은 13%, 네 번째 세대까지 간 기업은 3%에 불과했습니다. 국내에선 세금 등 제도 관련 이슈는 물론 승계 준비에 대한 이해 부족까지 맞물려 원활한 승계 절차에 큰 장애물이 되고 있습니다.

기업 승계는 오너 가족의 재산권만의 문제가 아니라 고용과 경제 활력 등에 직결되는 이슈이기에 더욱 적극적인 대처가 필요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중소기업의 승계가 원활히 이뤄지지 않을 경우 10년간 32만5000개 사업체가 폐업할 것으로 예상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널리 알려진 대로 기업 현장에서 당장 승계에 발목을 잡는 것으로 생각하는 요소는 상속세입니다. 기업가치가 높아질수록 상속이나 증여 때 낼 세금만 늘어나는 꼴이니 회사가 잘돼 주가가 치솟는 현상을 오너 스스로가 달갑지 않게 여기는 아이러니한 현상까지 빚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인지해 제도적 보완이 이뤄지고는 있지만 여전히 승계 환경이 척박한 상황에서 기업들이 내부적으로 더 힘을 써야 할 점은 바로 승계 시점의 훨씬 전부터 ‘계획’을 세우는 것입니다.

에르메스와 구찌 가문의 성패를 가른 또 다른 요소, ‘합의’와 관련해선 가족 내 진솔한 소통이 필수적입니다. 반얀글로벌 패밀리비즈니스 어드바이저스는 HBR 기고문에서 “사실 많은 오너 가족이 갈등이 두려워 민감한 논의를 피하는 ‘거짓 화목(fake harmony)’ 상태에 빠져 있다”며 “이러면 갑자기 ‘절벽 사건(cliff event)’을 만나 함께 추락할 위험이 크다”고 지적했습니다.

승계의 ‘골든타임’에 주목해야 할 시점, 이번 호 스페셜 리포트에는 성공적 가업승계를 위한 전략과 방법 등 실무적 지식을 풍성하게 담았습니다. 적절한 시점에서의 매각 등 대안 전략도 함께 소개합니다. “승계 계획은 릴레이 경주의 바통터치에 비유된다. 바통은 관중석에서는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조용히, 차분하게 다른 선수에게 넘겨져야 한다”는 ‘승계의 골든 룰’을 찾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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