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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R1. 장수 기업의 생존 전략

한 우물을 파든, 끊임없이 혁신하든
100년 브랜드는 위기를 기회로 여겨왔다

신동엽 | 294호 (2020년 4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기업이 오래 살아남으려면 어떤 전략을 가져야 할까. 하나의 사업에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할까. 아니면 끊임없이 변화하고 혁신해야 할까. 그렇다면 전혀 다른 사업으로 전환했을 때 해당 기업은 이전 회사와 같은 곳으로 볼 수 있을까. 이는 경영 전략 전반에 걸쳐 가장 큰 두 가지 대안적 패러다임으로, 실무 경영자들은 물론 학자와 전문가들의 의견도 나뉜다. 국내 기업의 과거만 들여다봐도 해답을 찾기가 쉽지 않다. 120여 년을 버틴 두산은 특정 사업 분야에 집중하기보다는 과감하게 변신해 급진적 성장을 추구해왔다. 반대로 동화약품은 창업 시부터 ‘부채표’라는 로고와 ‘활명수’라는 브랜드명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한 가지 공통적인 시사점은 한 우물을 파는 ‘선택과 집중’ 전략에서도 역동성은 필수라는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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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창업 100주년을 맞은 동아일보를 비롯해 우리나라에도 100세 전후의 장수 기업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최근 기업의 장수가 국내외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공교롭게도 최근 해외에서는 지난 100여 년간 세계 시장을 주도하면서 영원히 생존할 것 같던 코닥, 제록스 등 전설적 기업들이 갑자기 무너지면서 기업의 생존과 사멸에 대한 관심이 더욱 높아졌다. 기업이 오래 산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사람과 같은 생물에게 사용되던 ‘장수’라는 개념이 기업에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인가? 생명체가 아닌 기업이 장수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을 뜻하는 것일까? 장수 기업이 되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 그리고 기업의 장수는 항상 바람직한 것일까?

구미(歐美)에 비해 상대적으로 수가 적지만 우리나라에도 세계적 기준에서 장수 기업으로 분류될 수 있는 기업들이 상당수 존재한다. 평가 기준에 따라 순서가 달라지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우리나라 장수 기업들을 살펴보면 두산(1896년 박승직상점으로 창업), 동화약품(1897년 창업), 신한은행(1897년 한성은행으로 창업, 조흥은행), 우리은행(1899년 대한천일은행으로 창업, 조선상업은행, 한일은행), 몽고식품(1905년 창업), 동아일보(1920년 창업), 삼양사(1924년 창업), 삼성(1938년 창업), SK(1939년 선경직물로 창업), 현대(1946년 현대자동차공업사로 창업), LG(1947년, 락희화학공업으로 창업) 등을 꼽을 수 있다. 전 세계적으로 볼 때 최근 기업들의 평균 수명이 대략 15년 내외라는 점을 고려하면 최소 70년 넘게 사업을 영위하고 있고 대부분 3, 4대째 경영권을 계승해온 이들은 분명히 장수 기업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리고 이들 한국형 장수 기업은 단순한 장수를 넘어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세계사에 유례없는 고속성장을 이뤄낸 주축이었다. 특히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제국주의 침략과 국권 상실, 일제의 가혹한 탄압과 침탈, 2차 세계대전과 태평양전쟁, 남북 분단, 6•25전쟁 등의 격변의 한국사를 고려할 때 이 정도 장수 기업들이 존재하는 것은 그 자체로 놀라운 성취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세계로 눈을 돌려보면 100세 내외의 장수 기업이 우리나라에 10개 정도인 데 비해 미국이나 독일 등 산업화를 선도한 구미 국가에서는 각각 1만 개가 넘는다. 전통에 집착하는 문화적 특수성이 있긴 하지만 일본은 3만 개가 넘는다. 이런 장수 기업들은 어떻게 그 오랜 기간을 생존할 수 있었을까? 100년 기업으로 장수하려면 어떤 전략이 필요할까? 베스트셀러 경영서적들에서 흔히 제시하듯 ‘장수 기업의 7가지 공통 습관’ 등과 같은 리스트를 제시할 수 있으면 차라리 좋겠다. 하지만 실제 우리나라를 비롯한 국내외 장수 기업들을 자세히 분석해보면 한두 가지로 기업의 장수를 가능하게 하는 공통적인 전략들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장수의 비결은 그야말로 서로 다른 다양한 요인이 매우 복잡하게 상호작용한 결과다.

장수 기업의 두 가지 전략 패러다임

장수 기업이 되기 위한 전략 패러다임에 대해서는 크게 ‘선택과 집중’과 ‘변화와 혁신’이라는 두 가지 정반대 대안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다. 이 두 가지는 기업의 장수뿐 아니라 경영 전략 전반에 걸쳐 가장 큰 대안적 패러다임이기도 한데 어느 쪽이 기업의 장수에 더 유리한지에 대해서는 실무 경영자들은 물론 학자와 전문가들의 의견도 나누어진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한 우물을 파라’는 선택과 집중 전략이 직관적으로는 좀 더 호소력이 강할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선택과 집중 전략은 경영 전략 이론에서 특화 전략 혹은 전문화 전략이라고 부르는데 다양한 사업 분야나 가능성을 여기저기 기웃거리지 않고 농경민처럼 자신이 잘 알고 잘 경작할 수 있는 분야에 끊임없이 더 깊이 땅을 파 들어가는 전략이다. 자신이 강점을 가진 특정 분야에 집중해서 핵심 역량과 경쟁력을 끊임없이 강화하는 전략을 추구하는 기업들은 여러 분야에 관심과 역량이 분산된 기업들에 비해 최소한 그 분야 내에서는 당연히 경쟁우위를 가질 수밖에 없으므로 결과적으로 장수하는 데 유리할 것이라는 논리다. 구체적으로 보면 오랜 기간 특정 분야에서 특화하는 기업들은 그 분야만의 특수한 경쟁 조건들에 관한 전문적 역량과 지식을 축적하기에 유리하다. 그 분야에서 내부 생산 역량과 외부 판매망, 공급망 등 경쟁의 기반이 우월하며, 또 그 분야 소비자와 공급업체와 협력업체들에 높은 인지도와 신뢰를 유지하기에 생존에 유리하다. 조직생태학에서도 특정 니치(틈새시장)에 천착해 좁게 집중하는 스페셜리스트 조직이 광범위하게 다각화하는 제너럴리스트 조직들에 비해 좁은 특정 시장에서의 경쟁에서 유리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선택과 집중 전략이 당면할 수 있는 리스크는 기업이 통제할 수 없는 외부 조건, 즉 환경에서 온다. 환경이 불연속적으로 변화하면서 선택과 집중 전략을 구사해온 사업 분야나 역량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거나 월등하게 우월한 새로운 대안에 의해 대체돼서 아예 사라져버리는 경우 선택과 집중 전략은 치명적인 생존 위기를 초래하게 된다. 강점을 갖고 있는 사업 분야나 역량, 선택과 집중하던 기업은 다른 대안이 없으므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갑자기 사멸하게 된다. 흔히들 얘기하는 코닥 사례가 여기 해당되며 조직이론에서는 이런 현상을 과거엔 통했던 ‘성공 방정식(success formula)’이 새로운 환경이 요구하는 근본 변화를 실행하지 못하게 발목을 잡아 치명적 위기를 초래하는 ‘성공의 덫(success trap)’이라고 설명한다. 전략 경영에서는 기존 ‘핵심 역량(core competence)’이 ‘핵심 경직성(core rigidity)’이 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와 관련해 흥미로운 사례는 필름과 인화지 사업에서 코닥에 열세를 면치 못하던 후지의 대응 전략이다. 후지는 필름과 인화지 중심의 이미지 사업이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전략적 판단하에 신속하게 사업 분야를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필름과 인화지에 적용되던 표면처리 기술을 레버리지로 자신들의 사업 분야를 재규정하고 피부미백 화장품과 같은 완전히 다른 분야로 진출해 여전히 세계적인 기업으로 승승장구하고 있다. 2000년대 초의 전략적 판단 차이가 코닥과 후지의 생사와 운명을 가른 것이다. 그렇다면 핵심 역량이 훨씬 더 강하던 코닥은 환경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창업 120년 만에 사멸했는데 그보다 약했던 후지는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바로 ‘성공의 덫’의 원리 때문이다. 성공 방정식이 강할수록 기존 사업 분야에서의 경쟁 우위도 그만큼 더 강해진다. 이와 동시에 환경 변화가 그 성공 방정식의 가치를 파괴해 다른 성공 방정식으로 바꿔야 생존할 수 있는 경우에는 오히려 변화의 발목을 잡는 성공의 덫도 비례해서 더 강해지기 때문에 갑자기 생존 위기에 빠지게 된다. 평소에 위대한 기업으로 존경받던 초우량 기업들이 갑자기 무너지는 사례 대부분은 성공의 덫 때문이다. 이런 특수한 환경 변화를 조직 이론에서는 핵심 역량의 가치를 파괴한다는 의미에서 ‘역량파괴적 환경변화(competence-destroying change)’라고 한다. 역량파괴적 환경 변화가 바로 선택과 집중 전략을 선택한 기업들의 장수가 좌절되는 위험한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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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과 집중에 명확하게 대비되는 정반대의 장수 전략이 바로 ‘변화와 혁신’이다. 자신이 강점을 가진 특정 사업 분야나 역량에 갇혀 있지 않고 환경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운 기회와 사업 분야를 찾아 유연하게 옮겨 다니는 유목민적 전략이다. 광범위한 사업 분야들에 비관련 다각화하는 기업들은 대부분 변화와 혁신 전략을 추구한다. 변화와 혁신 전략은 선택과 집중 전략과 정반대의 장단점을 가진다. 즉, 특정 사업 분야 내에서의 경쟁에서는 아무래도 한 가지 분야에 오랜 기간 특화해온 역량과 경험, 노하우를 가진 선택과 집중 전략을 추구하는 기업들에 비해 불리할 수밖에 없다.

이런 면에서 폭넓은 니치들에서 활동하는 범용주의 조직들은 전문주의 조직들에 비해 평소에는 경쟁과 생존에 불리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조직생태학은 이런 전문주의 조직들과 범용주의 조직들 간 유불리는 환경의 성격에 따라 달라진다고 강조한다. 즉, 특정 니치의 풍요로움이 장기간 지속되지 않고 니치들을 둘러싼 환경이 격변하는 상황에서는 오히려 다양한 니치에서 생존할 수 있는 범용주의 조직들의 생존율이 훨씬 높다는 것이다. 특히, 최근 삼성그룹을 비롯한 우리나라 기업 집단들이나 아마존, 구글 등 4차 산업혁명 기업들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환경 변화에 따라 쇠퇴할 가능성이 있는 기존 사업 분야들에서 과감하게 철수하고 획기적 신성장 가능성이 있는 새로운 사업 분야들에 과감하게 진입하는 방식으로 역동적으로 비관련 다각화하는 기업들은 변화와 혁신 전략을 통해 생존과 장수를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선택과 집중 전략과 변화와 혁신 전략은 서로 다른 장단점을 가지고 있으므로 어느 전략이 기업의 장수에 유리한지 단순하게 정의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자신이 속한 산업과 사업 분야의 본질적 속성과 환경 변화, 그리고 각 기업의 고유한 미션과 비전에 따라 장수 기업의 전략은 다양하게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장수 기업들은 어떤 전략적 패러다임으로 오랜 기간 생존해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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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장수 기업들의 경영 전략

우리나라 장수 기업들도 특정한 한 가지 전략적 모델을 획일적으로 따른 것이 아니며 선택과 집중 전략을 추구한 기업들과 변화와 혁신 전략을 추구한 기업들로 크게 나눠진다. 우리나라 장수 기업 리스트에서 항상 1, 2위를 차지하는 두산과 동화약품을 보면 그 차이를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최장수 기업으로 인용되는 두산은 1894년 갑오개혁으로 육의전의 독점체제가 무너진 기회를 이용해 보부상 박승직이 자기 이름을 따서 1896년에 ‘박승직상점’으로 창업했다. 초기는 전형적인 잡화점으로 다양한 옷감 등 생활용품을 팔았으며 일제강점기 초에는 당시 수요가 급증하던 여성들의 화장품 시장을 겨냥해 ‘박가분’이라는 화장용 분을 제조해서 판매하기도 했다. 해방이 되면서 1946년에 두산상회로 개명, 일본인이 운영하던 적산 기업을 인수하고 동양맥주를 창업해 주류 업계에 뛰어들었고, 그 후 양조를 중심으로 무역, 건설, 전자, 방송, 식품, 통신, 부동산 개발, 유통 등 광범위한 분야들로 비관련 다각화하며 성장해왔다. 2000년경을 전후해 두산은 일련의 대규모 인수합병과 매각을 통해 주업이던 양조업계에서 철수하고 대신 세계적 중공업 기업인 밥캣 등을 인수해 두산중공업과 두산인프라코어를 중심으로 우리나라의 대표적 중공업 그룹으로 자리매김해왔다. 지난 120여 년간의 두산의 진화 과정을 보면 특정 사업 분야에 선택과 집중하는 특화 전략보다는 수익 창출과 성장의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과감하게 변신해 급진적 성장을 추구하는 ‘변화와 혁신’ 전략을 통해 장수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이제까지 두산이 보여준 가장 뛰어난 전략적 역량은 바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신속하게 근본적 변신을 단행한 변화와 혁신 역량이었다. 19세기 말 갑오개혁 직후 과감하게 보부상에서 근대적 상점으로 탈바꿈하며 창업했을 때, 해방 직후 적산 기업을 인수해 완전히 새로운 양조업으로 진입했을 때, 그리고 2000년경 주업에서 철수하는 과감한 매각과 글로벌 인수합병까지 시도하며 또다시 중공업으로 근본적으로 변신했을 때 사례 등은 두산의 신속하고 과감한 변화와 혁신 역량을 잘 보여준다. 환경 변화에 따라 자기의 핵심 사업까지 미련 없이 버리며 전혀 다른 새로운 분야로 과감하게 진입하는 이런 변화와 혁신 전략이 두산을 120년 최장수 기업으로 만든 전략적 원동력이다.

이와 정반대의 사례가 바로 박승직상점이 창업한 바로 다음 해인 1897년에 창업한 동화약품이다. 회사 명칭과 사업 분야들이 빈번하게 변화해온 두산과 달리 회사명, 사업 분야, 핵심 브랜드, 그리고 소유 구조가 120여 년 전 창업기와 거의 동일하게 유지돼온 동화약품이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나라 최장수 기업이라고 주장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동화약품의 시작은 일제의 제국주의적 침략, 우리나라의 국가적 고난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동화약품은 1895년 일제 자객들에 의한 명성황후 시해와 1896년 고종의 아관파천, 그리고 1897년 대한제국 선포 등 민족의 격변기에 탄생했다. 고종을 지근에서 경호하던 선전관 출신 민병호가 그의 아들 민강과 함께 궁중비방을 현대화해서 당시 일반 민중들에게 가장 흔했던 병인 소화불량 등 위장장애 치료제인 ‘활명수’를 출시하면서 창업한 동화약품은 당시 조선 말 우리 민중들의 폭발적 호응을 받았을 뿐 아니라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려던 고종 등 왕실의 지원 속에서 급성장했다. 그 뿌리 자체가 민족주의적 가치관이었던 만큼 동화약품은 창출된 수익으로 독립운동과 교육, 빈민 구휼 활동 등을 적극 지원하면서 민족 기업으로 자리 잡았다. 또 경영권에서도 초대 사장인 민강이 3•1독립선언과 관련해 체포돼 모진 고문 등으로 순국한 후 과도기를 거쳐 민족주의 가치관을 공유하고 재력과 경영 역량이 뛰어났던 윤창식에게 경영권을 넘겼고 그 후손들로 이어지면서 창업 당시의 민족주의적 가치관이 21세기인 현재까지 여전히 강하게 계승되고 있다. 현재 이 기업을 이끌고 있는 윤도준 회장은 창업 후 12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정기적으로 조선총독 관저와 일본의 신사가 있었던 남산 등을 중심으로 일제 침략의 흔적들을 후손들에게 보여주며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투어를 직접 안내하는 등 민족주의적 창업 가치관을 굳건히 지켜오고 있다. 동화약품은 전략적 관점에서 볼 때 선택과 집중 전략의 대표적 예다. 창업부터 현재까지 약품과 의료, 건강이라는 한 우물만 파는 전략을 고수해왔고 그 이외 분야로의 비관련 다각화는 거의 시도해본 적이 없다. 또한 로고와 회사명도 창업 시부터 부채표 동화약품을 120년간 변치 않고 지켜오고 있으며, 활명수라는 브랜드명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그 결과 전략 경영에서 지속가능한 경쟁 우위의 가장 중요한 요건으로 강조되고 있는 ‘모방불가능성’에서 동화약품과 활명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지위를 유지해왔으며 장수의 원천이 됐다. 즉, 동화약품의 장수의 전략적 기반은 사업 분야, 회사명, 로고, 브랜드, 핵심 가치 등 기업 경영의 모든 영역에서 강력한 선택과 전략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장수 기업인 두산과 동화약품의 대비되는 예에서 명확히 드러나듯이 기업의 장수를 보장하는 하나의 공통적 전략은 존재하지 않으며 다양한 전략적 대안이 존재한다. 다른 장수 기업들의 예를 살펴봐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기업들 중 변화와 혁신 전략을 통해 성장하고 장수해온 대표적인 예는 삼성일 것이다. 1938년에 대구에서 무역업과 제분업 등의 사업을 하는 삼성상회로 출발한 삼성은 해방과 함께 현대적 산업의 기반이 거의 없었던 당시 국내 환경을 성장 기회로 적극 활용해 광범위한 분야에서 삼성물산, 제일제당, 제일모직, 안국화재(현 삼성화재), 동방생명(현 삼성생명), 동화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중앙일보, 전주제지(현 한솔), 제일기획 등을 잇달아 창업하며 각 분야에서 새로운 산업을 창출했고, 1969년에는 삼성전자를 창업하며 세계 1위의 씨앗을 뿌리게 된다. 그 후에도 삼성은 합섬, 건설, 시스템통합, 엔지니어링, 중화학, 호텔, 증권업, 카드 등 광범위한 비관련 분야들로 끊임없이 진출하며 우리나라 대표 기업 집단으로 자리 잡아 왔다. 삼성의 장수에서 단연 가장 중요한 전략적 역량은 세계 최고 수준의 과감하고 신속한 변화와 혁신 능력이다. 삼성은 그 누구도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1974년에 미래 가능성과 급성장 기회를 탐지하고 반도체 산업에 진입, 기어이 세계 1위를 차지했다. 삼성은 사업 분야에서의 변화와 혁신뿐 아니라 경영 방식에서도 끊임없는 근본 변신을 추구해왔다. 우리나라 최초로 직원 공채를 시행했고, 소위 ‘관리경영’이라는 당시로서는 완전히 새로운 경영 방식을 제시해 현대적 기업 경영의 확산을 선도했다. 또 1993년 신경영 선언으로 세계화된 시대의 경영 방식과 글로벌 스탠더드의 확산을 주도했으며, 2007년에는 창조 경영으로 21세기 시대정신이 요구하는 근본적 변신을 시도했다. 즉, 삼성의 장수 비결은 시대 환경의 변화를 미리 읽는 환경 탐지 역량과 그에 따라 과감하게 근본적 변신을 단행해내는 강력한 변화와 혁신 역량인 것이다.

이와 반대로 선택과 집중 전략으로 장수해온 대표적 예가 바로 동아일보일 것이다. 정확하게 100년 전인 1920년, 민족지도자인 인촌 김성수에 의해 민족주의와 문화주의라는 두 가지 핵심 가치를 기반으로 창간된 동아일보는 창업 이래 정도언론(正道言論)이라는 한 가지 영역에 선택과 집중을 기울여 왔다. 일제 강점기 동안 브나로드 운동과 신간회 운동 등 독립운동과 민족정신계몽 운동을 적극 지원했고 베를린올림픽 당시 시상대에 선 손기정의 가슴에 달려 있던 일장기 사진을 지우는 일장기 말소 사건을 계기로 강제 폐간되기도 했다. 또 해방 후에는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정권에 맞서 반독재 민주화언론의 사명을 수행하다가 1970년대 중반 정부 탄압으로 광고가 취소되고 기자들이 대량 해직되는 고초를 겪기도 하면서 현재까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언론기업으로 자리 잡아 왔다. 동아일보의 사업 분야 포트폴리오를 보면 전통적 신문 이외에 DBR(동아비즈니스리뷰), 종합 편성 채널 등으로 다양한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으나 언론 산업의 범위를 벗어난 적이 없다. 부침이 심한 격변의 언론 산업에서 동아일보가 100년간 대표 기업의 지위를 지켜온 전략적 기반은 본업과 핵심 가치에 대한 강력한 선택과 집중이었다. 이렇게 볼 때 장수 기업의 두 가지 전략 패러다임들 중 어느 쪽이 더 우월한지는 객관적으로 일반화할 수 없으며 각 기업이 속한 산업의 특수성과 시대별 환경의 요구, 그리고 경영자의 가치관과 소명의식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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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 기업 개념의 모호성
그런데 장수 기업과 관련해 반드시 고민해봐야 하는 것은 비교적 객관적이고 과학적으로 장수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인간과 같은 생물의 수명과 달리 ‘기업의 장수’라는 개념은 생각보다 모호하고 불확실하다는 사실이다. 또한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기업들이 장수하는 것이 항상 바람직한가다. 오히려 기업들이 역동적으로 퇴출되고 새로운 기업들이 탄생하는 것이 사회 전체와 경제에는 더 바람직하다는 주장도 있다.

우리나라 대표 기업들 중 일부가 100세를 넘기면서 장수 기업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고 있는데 이런 관심은 기업의 장기간에 걸친 생존, 즉 장수가 기업의 중요한 성과 지표로 새롭게 인식되고 있는 증거이며, 더 나아가서는 기업들이 장수하는 것은 바람직하다는 전제가 당연시되고 있다는 방증이다. 그런데 기업의 ‘성과’는 학문적 관점에서 엄밀하게 따져보면 생각보다 훨씬 복잡한 문제다. 일단 기업의 성과를 측정하는 지표는 광범위하고 다양하다. 크게만 봐도 수익, 규모 성장, 매출, 시장점유율, 시장가치, 생존 등이 모두 기업 성과의 지표이며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수익성만 해도 자산수익률, 매출수익률, 주가수익률, 투자수익률 등 무수한 지표가 존재한다. 그러면 이 수많은 성과 지표 중 가장 중요한 핵심 지표는 무엇일까? 아쉽게도 아직까지는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공통의 핵심 성과 지표는 없으며 관심사에 따라 강조하는 성과의 종류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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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사실은 학문적으로 엄밀한 방법론을 사용해 대량의 데이터를 계량적으로 분석해보면 이들 성과 지표 간에 일관성은 별로 없다. 예를 들면, 수익성이나 성장률이 높은 기업이 항상 장기적으로 생존하는 것은 아니며 시장가치와 수익성 간 상관관계도 그리 높지 않다. 최근 글로벌 경제를 지배해온 아마존이나 구글 등은 시장가치가 1000조 원이 넘지만 막상 재무제표를 들여보면 순이익은 생각보다 상대적으로 그리 크지 않다. 그리고 모든 기업은 당연히 이윤 극대화를 추구할 것이라는 상식적 전제와 달리 소위 ‘1000조 원 클럽’ 기업들은 실제 경영 의사결정에서 수익성을 그리 강조하지도 않는다. 스티브 잡스는 “이익을 위해 사업을 해본 적이 없다(I never did it for money)”고 말하기도 했다. 대신 고객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꿀 상품이나 서비스를 통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내면 수익은 부산물로 따라온다고 주장한다. 또 연구 결과를 보면 다양한 성과 지표를 예측하는 독립변수들이 서로 다른 경우가 많다. 즉, 수익을 추구하는 전략과 성장을 추구하는 전략, 그리고 생존을 추구하는 전략은 각각 다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성과를 추구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까? 모든 기업에 공통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정답은 당연히 없으며 각 기업의 전략적 선택에 달려 있다.

이런 성과 지표의 다양성과 기업별 주관적 선택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가장 근본적이고 객관적인 성과 지표로 많은 사람이 동의하는 것이 바로 얼마나 오래 생존하느냐를 다루는 생존율이다. 수익성이나 성장률 등 다른 성과 지표들도 기업이 생존해야 추구할 수 있으므로 실은 모든 기업 성과는 생존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순이익이나 매출, 시장점유율, 규모 성장 등과 같은 재무적 성과를 주로 연구하는 대부분의 경영학이나 경제학 연구들과 달리 필자가 전공하는 거시 조직이론 분야의 연구들에서는 장기간에 걸친 생존율을 가장 중요한 성과 변수로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생존과 장수에 초점을 맞추더라도 객관적으로 기업의 장수를 측정하는 것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며 매우 복잡하고 모호하다. 기업이 오랜 기간 생존했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일까? 같은 사업 분야를 오랜 기간 영위한 것이 그 측정 지표라면 삼성은 창업 때와 완전히 다른 사업을 주력으로 하고 있으므로 장수 기업이 아니다. 기업의 이름, 즉 동일한 회사명을 오랜 기간 고수한 것이 장수의 지표라면 LG나 두산은 장수 기업의 조건에 맞지 않는다. 소유주나 경영진이 같은 가계에서 장기간 계승된 것이 장수의 증거라면 우리은행이나 신한은행은 장수 기업이 아니며, 또한 가계의 장수와 조직의 장수 간 개념적 구분에도 맞지 않는다. 동일한 브랜드가 장수의 지표라면 우리나라 장수 기업들 중 극히 소수만 이에 해당된다. 이런 의미에서 사업 분야, 회사명, 소유주, 브랜드 등 대부분의 지표에서 장수 기업의 요건을 모두 갖춘 동아일보나 동화약품은 세계적으로 매우 희귀한 사례다. 해외의 경우에도 우리가 잘 아는 GE는 1892년에 토머스 에디슨이 전기회사로 창업했으나 GE라는 회사명 이외에는 사업 분야, 소유주, 브랜드 등 모든 것이 다 바뀌었으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장수 기업으로 간주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영구 실패형 장수의 위험

그러나 장수 기업의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의미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문제는 과연 기업들이 장수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여부다. 거의 모든 기업은 당연히 생존을 추구하며 장기간 생존에 성공하면 장수 기업이 된다. 그리고 사회적으로도 장기간 생존한 기업들을 ‘장수 기업’이라는 명칭으로 높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오래 생존하는 것과 높은 성과를 창출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라는 사실이다. 기업 성과 지표들 간 불일치에서 명확하게 알 수 있듯이 수익성이나 성장률 같은 다른 성과 지표들과 기업 생존율이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즉, 다른 지표들로 측정한 성과는 낮아도 생존하는 것은 가능하며 장수도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조직이론가인 린 저커(L. Zucker)는 ‘영구적으로 실패하는 조직(permanently failing organizations)’이라는 매우 흥미로운 개념을 제시했다. ‘영구실패형 조직’은 모순적인 개념이다. 조직이 목적 달성에 한두 번 실패할 수는 있지만 영구적으로 실패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조직의 본질은 목적 추구를 위한 수단이므로 특정 수단이 한두 번 실패하면 버리고 새로운 수단으로 갈아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직의 원래 존재 이유인 목적 달성에는 계속 실패하면서 생존에는 계속 성공한다면 영구실패형 조직이 가능해진다. 저커는 생각보다 많은 조직이 원래의 목적은 잊어버리고 단순히 생존에만 집착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남기에 급급하면서 영구실패형 장수 조직들이 속출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시민들에 대한 봉사가 존재 목적인 정부와 공공조직들이 대부분 시민봉사에는 실패하면서 권위주의적 관료제를 기반으로 살아남으며 철밥통으로 불리는 것이 영구실패형 조직의 대표적 예다. 기업들도 예외가 아니다. 대부분의 전문가가 동의하는 기업 조직의 존재 목적은 경제적 가치 창출이므로 여기서 반복적으로 실패하는 기업들은 퇴출되는 것이 정상적이다. 그런데 IMF 위기 직전 우리나라 30대 재벌그룹 계열사 중 대다수가 경제적 가치창출 정도를 측정하는 EVA(경제적 부가가치, Economic Value Added)가 마이너스였다.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라고 만든 수단인 기업들이 경제적 가치를 파괴하면서도 살아남았던 것이다. 즉, 당시 우리나라 기업들은 원래 목적 달성에는 실패하면서 생존에는 성공적인 영구실패형 기업들이었고 그 결과 국가 경제 전체가 무너져버렸다.

이렇게 볼 때 장수 기업의 증가가 항상 바람직한 것은 아니며 오히려 어떤 경우에는 원래 목적 달성이라는 궁극적 기업 성과에 반복적으로 실패하는 기업들은 장수가 아니라 신속하게 퇴출하는 것이 전체 사회와 경제에는 더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1960년대 미국 대학생 민주화운동 조직이던 ‘SDS(Students for Democratic Society)’의 예는 조직의 생존과 사멸에 대해 신선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당시 월남전 등을 주도하던 권위주의적 정부-군부-산업 복합체에 대항해 민주화운동을 전개하던 SDS는 더 효율적으로 기득권 세력들에 저항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투쟁을 전개하며 과격화됐다. 그 결과 자신들이 맞서 싸우던 상대들과 마찬가지로 권위주의적이며 비민주적인 조직으로 변질됐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SDS는 수단과 목적 양면에서 모두 원래의 목적인 민주주의에 투철한 조직이 아니면 오히려 민주적 사회 달성에 장애가 된다면서 스스로 해체하는 결정을 내린다. 이런 면에서 외부에 대해서는 민주주의를 내세우면서 자신들은 반민주적 행태를 서슴지 않는 일부 우리나라 운동권 단체들에 대해 아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장수 기업의 사회적 정당성과 별도로 전혀 다른 이유로 기업들의 장수를 추구하기보다는 오히려 끊임없이 목적 달성에 실패하는 기존 기업들이 퇴출되고 새로운 기업들이 탄생하는 역동적 생태계가 전체 사회와 경제에 훨씬 더 바람직하다는 주장도 있다. 이런 주장의 출발점은 조직의 경직성, 즉 근본적 변화의 어려움 때문이다. 조직생태학의 구조적 관성(structural inertia)이론에서는 부분적 개선이 아닌 사업 분야나 조직구조, 핵심 가치 등 조직의 핵심적 영역들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시도는 성공률이 극히 낮으며 오히려 그 과정에서 기업의 사멸 위험을 높이게 된다고 주장한다. 즉, 경영 구루들이 흔히 강조하는 변화와 혁신은 실제로는 매우 위험한 전략이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제임스 마치(J.G. March)는 성공률이 낮은 기존 기업들의 근본적 변화를 굳이 시도하려고 하지 말고 환경이 변화해 기존 조직이 한계에 봉착할 때는 스스로 조직을 폐업하고 새로운 환경에 적합한 새로운 조직을 창업하는 것이 나은 전략일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렇게 볼 때 기업의 장수는 모든 기업이 항상 추구해야 하는 바람직한 성과 목표가 아닐 수도 있으며 오히려 환경 변화의 성격에 따라 과감하고 신속한 자발적 폐업과 잔여 자원들의 창조적 재결합을 통한 역동적 환경 적응이 더 우월한 전략적 옵션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생존 자체에 집착해 보유 자원을 완전히 소진하기 전에 자발적 폐업과 재창업을 시도하는 것은 급격한 환경 변화가 빈번한 21세기 초경쟁 환경에서 기업 경영자들이 반드시 염두에 둘 필요가 있는 중요한 전략적 대안이다. 즉, 성서의 요한복음에서 가르치듯이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지혜를 경영자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장수 기업을 추구하는 경우에도 영구실패형 장수가 되지 않도록 항상 경계해야 한다. 진정한 의미에서 장수 기업은 단순히 오랜 기간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목적 달성에 높은 수준으로 성공한 결과, 전체 사회와 경제가 원해서 생존하는 역동적 장수라야 할 것이다.

역동적 장수 기업을 향하여

앞에서 살펴봤듯이 우리나라 장수 기업의 역사와 현황은 외국에 비해 일천한 편이다. 우리나라의 산업화가 이들 선진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매우 늦기 때문이다.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서구에서 조직 내부에 연구개발, 생산, 판매 등 다양한 기능부서들을 동시에 갖추고 광범위한 지역에서 다양한 상품을 생산해 판매하며, 전문 경영자들과 시스템에 의해 관리되는 현대적 의미의 기업들이 세계사에서 최초로 등장한 것은 19세기 중•후반이다. 이때 등장한 새로운 조직 형태인 현대적 기업들은 인류역사상 최대의 변혁이라는 현대 산업사회를 탄생시켰다. 우리에게 익숙한 GE, 코닥, 제록스, 포드, GM, IBM 등 20세기 100년간 세계 경제를 주도한 글로벌 초우량 기업들이 이때 창업했으며 미쓰비시 등 일본의 대표적 대기업들도 이때 탄생했다. 물론 장인 생산의 전통이 강한 일본이나 독일 등에 곤고구미, 기코망, 헨켈스, 파버카스텔 등 역사가 200∼300년이 넘는 초장수 기업들도 소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전통적인 장인 공방의 현대화된 버전이지 엄밀한 의미에서 현대적 기업으로 보기는 어렵다. 19세기 중•후반에서 20세기 초에 걸친 기간 동안 대거 탄생한 현대적 기업 중 소수가 100년 이상 생존해 지금의 장수 기업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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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반해 우리나라는 이때 일본과 열강들의 제국주의적 침략으로 현대 산업사회로의 자생적 전환이 좌절됐다. 물론 사농공상을 기본으로 하는 조선시대의 전통적 계급 구조와 문화적 가치관도 최하층민으로 천시되던 상인과 그 바로 위 계급인 공인이 결합된 현대적 기업 조직의 자생적 발생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주된 원인은 제국주의적 침략이었다. 선진국들이 한창 산업화에 몰두하던 19세기 중•후반 시작된 일제의 침략과 국권 상실, 가혹한 식민 침탈, 태평양전쟁, 그리고 6•25전쟁 등으로 우리나라에서는 현대적 기업들을 중심으로 한 산업 경제가 뿌리내릴 여유 자체가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산업사회의 기반이 구축된 것은 서구나 일본보다 거의 100여 년 늦은 1960년대 초였다. 따라서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 우리나라에 장수 기업이 적은 것은 당연한 역사적 귀결이다. 앞으로 우리나라에도 미국이나 독일, 일본과 같이 100년, 200년 기업들이 다수 출현하려면 어떤 전략이 필요할까? 그렇다고 원래 목적 달성에 계속 실패하면서 오랜 기간 살아만 남는 영구실패형 장수 기업을 원하는 것은 아니며 반드시 우리나라의 미래 100년을 이끌고 나갈 수 있는 역동적인 장수 기업이어야 한다.

첫째, 장수 기업의 두 가지 전략적 대안인 선택 집중과 변화 혁신 간 관계에 대해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이 두 가지 전략 패러다임들을 지나치게 작은 맥락으로 해석해 두 가지 상호배타적 대안들 중 한 가지만 선택해야 하는 것처럼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마이클 포터 하버드대 교수는 그의 경쟁 전략 프레임워크에서 품질 차별화나 비용 절감의 두 가지를 본원적 전략(generic strategies)으로 제시하면서 이 둘 중 하나만 선택해서 집중해야 하지, 두 가지를 혼합하는 전략은 가장 위험한 ‘어중간함(stuck in the middle)의 덫’에 빠져 몰락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실제 기업들의 전략 패러다임을 심층적으로 분석해보면 두 가지 표면적으로 상반되는 전략들을 결합해 실행하는 사례가 빈번하게 관찰된다. 흔히 사용하는 ‘전통적 발전적 계승’이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 전통에 선택과 집중을 하는 경우에도 오랜 기간 다양한 환경 변화에 적응하면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시대에 뒤처지지 않고 ‘발전적’이 되기 위한 혁신이 필수다. 따라서 선택과 집중 전략을 추구하는 기업들도 완벽하게 원형 그대로 지킬 부분과 시대 환경에 따라 유연하게 재해석하고 변화 혁신할 부분을 구분하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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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폭 좁은 사업 분야에 장기간 선택과 집중해 세계 최고를 유지해온 기업들을 일컫는 개념으로 이해되는 ‘히든챔피언’ 모델을 소개한 헤르만 지몬(H. Simon)은 의외로 기업 장수에 가장 중요한 요건은 끊임없는 변화와 혁신이라고 주장한다. 즉, 히든챔피언들이 오랜 기간 세계 정상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비록 특정 상품이나 기술, 사업 분야에 특화하지만 그 내부에서는 끊임없이 변화와 혁신을 시도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200년 세계 1위 장수 기업인 미국의 듀폰과 P&G도 마찬가지다. 1802년에 창업한 듀폰은 200년이 넘게 기술 역량에서 화학 분야에 선택과 집중했으나 그 역량을 적용하는 상품 시장은 끊임없이 변화와 혁신을 추구해 19세기의 화약사업에서 20세기의 인공 소재, 21세기의 생명과학적 농업 등으로 변신해왔다. 찰스 홀리데이(C. Holliday) 전 회장에게 듀폰이 200년 장수할 수 있었던 비결을 물었을 때 그는 “우리는 지난 200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어제의 성공과 치열하게 싸워왔다”며 듀폰의 변화 혁신 DNA를 가장 중요한 원천으로 강조했다. 즉, 듀폰은 기술 기반 역량에서는 선택과 집중 전략을 고수하면서 상품시장에서는 환경 변화에 따라 끊임없는 변화와 혁신 전략을 추구해 200년 초우량-초장기 기업이 된 것이다. 1837년에 창업해 비누, 샴푸, 세제 등 생활용품 분야에서 부동의 세계 1위를 지켜온 P&G는 세제를 중심으로 한 욕실과 부엌에서 사용하는 일상생활 용품이라는 원래의 사업 영역에 200년 가까이 선택과 집중했다. 아이보리 비누 같은 대표 브랜드들도 100년 이상 그대로 고수해왔다. 그러나 P&G는 생활용품 사업 분야 내부에서는 끊임없는 신제품과 신기술 개발을 시도하며 변화와 혁신을 거듭해왔다. 21세기에 들어서 와서는 심지어 자신들의 내부 역량만으로는 새로운 환경이 요구하는 변화와 혁신을 지속적으로 창출하기 어렵다는 인식하에 외부의 다양한 역량을 내부 역량과 결합해 상시 창조적 혁신을 실행하는 모델인 C&D(Connect & Develop)를 제시, 전 세계 기업들의 개방적 혁신을 선도했다. 이렇게 볼 때 장수 기업에서 선택 집중과 변화 혁신은 상호배타적인 전략적 대안이라기보다는 반드시 공존해야 할 상호보완적 경영 행위라고 보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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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불연속적 환경 변화가 발생할 때 많은 기업은 적응을 위한 근본 변신에 실패해 대거 사멸하게 된다. 따라서 장수 기업으로 생존하고 성장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전략적 선택은 바로 시기마다 환경의 불연속성을 정확하게 판단해 적시에 적절한 변화와 혁신을 실행하는 것이다. 선택과 집중 전략으로 오랜 기간 장수를 누려온 기업들이라도 불연속적 환경 변화가 발생할 때는 기업이 원하거나, 원치 않거나 상관없이 근본적 변신을 수행해야만 생존할 수 있다. 따라서 시기마다 근본적 변화 혁신을 실행해야 할 시기인지, 아니면 기존 영역에 선택과 집중하면서 개선적 변화를 추구할 시기인지 환경 변화의 성격을 정확하게 읽어내는 환경 독해력이 장수 기업을 위한 가장 중요한 전략적 역량이다. 이런 면에서 기업 경영자는 항상 수시로 변화는 시대 환경에 자기 기업을 끊임없이 벤치마킹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듀폰의 홀리데이 회장이 말했듯 아무리 성과가 높을 때도 제로베이스에서 자기 기업의 전략과 조직, 문화가 여전히 급변하는 미래 환경에도 유효할 것인가를 냉철하게 평가하고, 과감하게 필요한 조치를 단행하는 것이 장수 기업의 가장 중요한 요건인 것이다.

셋째, 기업 장수에 관한 조언에서 흔히 강조되는 것이 기업의 라이프사이클에 따라 다른 전략을 적용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환경 변화에 따른 전략의 변화가 외부에 초점을 맞췄다면 라이프사이클 관점은 기업 내부에 초점을 맞춘다. 조직생태학 연구에서도 외부 환경의 영향을 통제하고 나면 기업의 연령, 라이프사이클에 따라 조직 생존율이 달라진다고 주장한다. 경영서적에서 일반적으로 제시되는 기업의 라이프사이클은 창업기-성장기-성숙기-쇠퇴기 등으로 구성되는데 단계마다 전략적 과제가 다르기 때문에 각 단계를 넘어갈 때마다 요구되는 전략적 변화를 적시에 시행하지 않으면 생존에 실패하게 된다고 한다. 최근 벤처창업계에서 흔히 사용하는 개념인 ‘죽음의 계곡’은 창업 초기에 대부분의 신생 기업이 사멸한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창업기에는 성장이나 장기적 비전보다는 당장의 생존 확보를 위한 리스크 관리에 집중해야 한다. 창업기의 생존 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하면 기업이 양과 질 양면에서 본격적으로 자라고 커지는 성장기를 맞게 되는데 이때의 위험은 창업기 조직과 성장기 조직의 근본 차이에서 온다. 즉, 성장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규모가 커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역량과 동기부여에 의존하던 창업기적 경영을 탈피해 시스템 중심으로 체계적으로 기업을 경영하게 된다는 의미인데 경영 방식의 이런 근본 변화는 당연히 높은 위험을 수반하게 된다. 따라서 성장기 동안에는 개인 중심의 미시적이고 근시안적 관점을 탈피해 미래에 대한 장기적 비전을 기반으로 언제, 어떤 조직으로, 어떻게 성장할지에 대한 전략적 변화 관리가 생존에 필수적이다. 성공적으로 성장한 기업들은 성숙기에 접어드는데 성장기 동안 뿌려 놓은 씨앗을 추수하는 단계다. 이때 기업들은 성과 지표에서 최고의 실적을 창출하게 되는데 여기에 생존을 위협하는 또 다른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바로 앞에서 언급한 ‘성공의 덫’이다. 즉, 효과적으로 경쟁하고 성장해 성숙기까지 생존하는 성공 방정식이 됐던 기존의 전략적 역량에 선택과 집중하다 새로운 역량으로의 전환에 실패하게 되는 위험이다. 따라서 장수 기업으로 생존하기 위해서 성숙기에는 반드시 기존 역량의 활용을 극대화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미래 역량에 대한 투자가 필수적이다.

쇠퇴기는 기업이 사멸해 장수 기업의 목표가 좌절되느냐, 아니면 다시 한번 회생해 생존과 성장을 계속할 수 있느냐의 갈림길이다. 이때 가장 중요한 전략적 과제는 침체되고 역동성을 잃은 조직을 다시 젊은 조직처럼 재활성화(revitalization)하는 것이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1980년대에 늙고 침체된 거대 공룡 기업 GE를 단숨에 역동적인 젊은 기업으로 재활성화하는 과정에서 잭 웰치가 보여줬던 변혁적 리더십이며 그 성공 여부에 따라 장수 기업의 명운이 달라진다. 즉, 장수 기업에 대한 라이프사이클 관점은 각 시점에만 근시안적으로 몰두하지 말고 기업의 생애 전체에 대한 장기적 관점에서 단계마다 필요한 전략적 선택을 해야만 장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넷째, 기업의 장수 여부를 결정하는 마지막 요인은 바로 리더십 승계다. 리더는 개인적 자질과 가치관을 넘어서 그 기업의 전략과 조직, 시스템, 문화적 가치관의 형성과 변화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이다. 리더가 바뀌면서 승승장구하던 기업이 갑자기 몰락하기도 하고 반대로 침체와 위기에 빠졌던 기업이 단숨에 변신해 급성장하기도 한다. 따라서 성공적 리더십 승계는 기업의 장수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실제 통계를 보면 창업자로부터 2세대로 리더십이 계승되는 시점을 전후해 70% 가까운 기업들이 사멸하고 대략 30% 정도만 2대에 걸쳐 생존한다고 한다. 기업의 핵심 가치와 미션을 체화해서 실천하는 존재인 리더의 교체는 기업 장수에 가장 중요한 관건이다. 장수 기업들에 대한 연구에서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업 분야나 기술 역량, 심지어 회사 이름 등이 다 바뀌더라도 핵심 가치와 미션이 지속되면 동일한 기업으로 간주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핵심 가치와 미션은 리더를 통해 계승되므로 성공적 리더십 승계는 기업의 장수에 결정적 요건이다.

1857년에 창업해 지난 150여 년간 스웨덴 경제의 30∼40% 내외를 항상 차지해온 세계적 장수 기업인 발렌베리그룹은 가문 내에서 리더십을 5대째 승계해왔지만 사회적 지탄이나 내부 잡음 없이 국민 기업으로 존경받고 있는데 그 비결은 독특한 리더십 승계 시스템이다. 발렌베리그룹의 리더가 되기 위해서는 친척들 간 치열한 경쟁을 통해 자신의 능력과 성과를 증명해야 하고, 적절한 후계자가 없을 때는 외부에서 후계자를 영입하기도 한다. 부모의 도움이 전혀 없이 최고의 명문대학 교육을 마쳐야 하고, 반드시 해군 장교로 복무해야 리더 후보가 될 수 있다. 그리고 해외에서 광범위한 사업 경험을 쌓으며 글로벌 역량도 스스로 입증해야 한다. 여기에 더해 특정 리더의 개인적 판단에 의해 그룹이 교란되는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두 명의 리더가 사업과 금융을 나누어서 함께 이끌어 나가며 서로 견제하는 쌍두마차 리더십 시스템으로 운영된다. 그리고 개인이나 가족의 소유가 아니라 공익재단을 통해 그룹을 소유하고 또 수익의 대부분을 사회에 기부한다. 이처럼 철저한 윤리 경영과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얼마나 철저하게 내면화하는가 여부가 리더 선발에 가장 중요한 기준이다. 즉, 핵심 가치와 역량 두 가지에만 초점을 맞춘 이런 치밀한 리더십 승계 시스템이 발렌베리그룹의 장수의 핵심 비결이었다. 우리나라 장수 기업들도 마찬가지다.

기업의 장수와 리더십 승계 간 관계와 관련해 한 가지 경계해야 할 것은 리더라는 특정 개인에 대한 지나친 의존성이다. 어떤 조직을 창업해 성장시킨 창업자는 대부분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다. 대다수 일반인은 가지고 있지 않은 ‘예외적인 탁월한 자질’을 의미하는 카리스마의 개념이 시사하듯이 카리스마를 가진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창업자를 평범한 후계자가 계승하는 경우 심각한 리더십 위기에 봉착해 오히려 기업의 생존을 위협할 수도 있다. 따라서 100년, 200년을 건승하는 진정한 장수 기업이 되기 위해서는 카리스마와 같은 특정 개인의 리더십에 대한 의존도를 되도록 낮추고 조직 구조와 경영 시스템, 업무 프로세스, 의사결정 기준 등에 그 핵심 가치와 미션을 내재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위대한 조직이론가이자 사회철학자인 막스 베버(Max Weber)는 진정한 의미에서 현대적 조직은 ‘카리스마의 일상화(routinization of charisma)’를 통해 특정 개인이 아닌 조직의 시스템과 제도 자체가 카리스마를 가지는 조직이라고 강조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단순히 오랜 기간 생존하는 영구실패형 장수가 아니라 시대마다 인류가 당면하는 문제들을 창조적으로 해결해 전체 사회와 글로벌 공동체의 존경을 받으며 100년을 넘어, 200년, 300년 이상 끊임없이 성장하고 발전하는 역동적 장수 기업이 다수 출현하기를 기대해본다.


필자소개 신동엽 연세대 경영대학 교수 dshin@yonsei.ac.kr
필자는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예일대에서 조직이론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직이론과 인문 예술 분야 학술지 등 저명 저널에 다수의 논문을 실었다.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 조직위원장과 한국인사조직학회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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