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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siness History Highlight

간판내린 제일모직, 60년 史 변곡점에서의 선택이 주는 교훈은?

유귀훈 | 153호 (2014년 5월 Issue 2)

 

편집자주

기업의 역사에는 그 기업의 운명을 바꾼 결정적 사건이나 순간이 반드시 존재합니다. 이때의 결단이나 사건의 이면을 살펴보는 과정은 다른 기업에도 큰 교훈을 줍니다. 단순히어떤 일이 있었다고 기억하는 것보다 그 일의 원인과 맥락을 정확하게 분석해 지식의 형태로 만드는암묵지의 지식화작업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국내 유수 기업의 기업역사(社史)를 집필해 온 유귀훈 작가가 ‘Business History Highlight’를 연재합니다.

 

“이거 알면 늙었다는 증거.”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에 자주 등장하는 유머다. 연예인 사진이 코팅된 책받침, 문방구에서 팔았던 군것질거리 등의 사진을 올리고 추억에 빠지는 사람은 그만큼연식이 오래됐다는 걸 보여준다. 물론 대부분 1980년대 혹은 1990년대 초반에 유행하던 것들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오래돼 이젠 회자조차 되지 않는 것들도 있다. 1950년대까지 연례행사처럼 찾아온보릿고개를 경험해본 세대만 기억하는 단어, 바로마카오 신사. 제일모직이 국내 최초로 국산 양복지를 내놓기 전까지 양복을 해 입으려면 마카오에서 밀수한 값비싼 영국산 모직에 의존해야 했다. ‘마카오 신사의 어원이다. ‘마카오 신사라는 단어는 그래서 곧장제일모직이라는 회사를 떠올리게 만든다. 바로 그 제일모직의 간판이 내려진다. 2014 71일 삼성SDI에 합병되면서다. 창업 60주년을 꼭 2개월 앞둔 시점이다.

 

제일모직 공장 전경.

 

1954 7월 초. 삼성물산 도쿄지점의 현지 사원 이치마루(市丸)가 일본통산성 섬유국, 도쿄통산국, 일본양모방적회, 다이도(大同)모직, 다이토(大東)방직 등을 급하게 돌아다녔다. 모방공장의 설비운영에서부터 생산관리, 기술지도, 시장 동향에 밝은 사람을 추천받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았다. “그만한 인물이 뭐가 아쉬워 한국 회사에 가려고 하겠느냐?” 그나마 추천해준 사람이 도후쿠(東北)모직을 이미 정년 퇴직한 하야시 고헤이(林耕平)였다. 이병철 회장을 만난 하야시는 82일부터 고문 자격으로 삼성물산 도쿄지점으로 출근했다.

 

해방 후 마산과 밀양에는 모직물을 짜는 업체들이 있었다. 그러나 설비도 낡고 기술도 턱없이 부족해서 고급 모직물은 생산하지 못했다. 가늘고 촘촘한 양복지는 대부분 홍콩이나 마카오에서 수입 혹은 밀수입됐다. 너무 비싸 일반인들은 꿈도 꾸지 못했다.

 

“고급 모직물을 국내에서 생산해 싸게 공급하자!”

이게 제일모직의 시작이었다. 서구에서 기계설비를 구입하고 모직산업이 앞선 가까운 일본의 경험을 빌린 제일모직은 1956년 초부터 고급 털실(장미표)과 고급 신사복지(골덴텍스)를 생산했다. 이병철 회장은 스스로 골덴텍스로 지은 양복을 입고 다니며 국산을 홍보했다.

 

제일모직이 앞장서 이끌던 국내 섬유산업은 50∼60년대 한국 경제의 맏형이었다. 그러나 70년대 이후 중국 등이 저가 물량 공세를 시작했다. 제일모직은 한발 앞서 직물사업의 업다운 스트림(전방 및 후방 산업 진출을 통한 수직계열화)을 추진했다. 1969년 화섬사업을 시작하고, 1970년 봉제업(패션업)에 진입했다. 또한 업다운 스트림의 연장으로 화섬의 원료인 고순도 텔레프탈산(TPA) 생산을 추진했다. 쉽게 말해 원료를 뽑아내는 석유화학 분야부터 섬유 완제품까지 완전한 체인을 만들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제일모직의 미래 전략에 변수가 생긴다. ‘변곡점이다. 1972 11월 중화학공업 위주의 제3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안이 발표되면서다. 삼성그룹은 이듬해 8월 제2차 삼성경영 5개년 계획(1973∼1977) ‘세계기업으로서의 성장전략을 발표했다. 제일모직은 그동안 준비해온 석유화학사업 등록증 및 각종 인허가, 권리 등을 1974 7월 출범한 삼성석유화학에 이전했다.

 

업다운 스트림을 완성하지 못한 제일모직은 80년대 성장 한계점에 이른다. 이병철 회장은 늘 이 점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직물과 패션은 업종상 성장의 한계가 있을 수 있으니 극단적으로 회사 생존에 한계가 올지도 모른다. 새로운 변신이 필요하다는 말을 남긴 이병철 회장은 1987년 말 향년 77세로 타계했다.

 

제일모직은 인조대리석을 생산하는 등 다시 화학사업에 참여했다. 그러나 본업을 강화하기 위한 업다운 스트림과는 거리가 멀었다. 섬유·패션과 화학의 공생은 결과적으로 기업의정체성을 약화시킨 불안한 변신이었다. 차라리 사명에서모직을 떼어버렸다면 어땠을까.

 

제일모직 구미공장 AMOLED 소재 출하식

 

삼성물산 의류사업부가 제일모직을 흡수할 것이라는 말이 시장에 나돌기 시작한 건 1993년 출범한 김영삼 정부가 대기업들에업종 전문화를 강하게 요구할 때다. “당사(삼성물산)는 현재 제일모직과의 합병을 위한 준비를 계속하고 있으며 추후 준비단계가 완료되는 대로 법적인 절차를 밟아 합병을 추진할 계획이다.”

 

1993 1028, 1994 430일 두 번에 걸쳐 삼성물산이 공시한 내용이다. 제일모직도 같은 내용을 공시했다.

 

하지만 제일모직에 대한 고() 이병철 회장의 애정이 반영되면서 공시는 없던 일이 됐다. 제일모직은 전자재료 사업에 참여했다. 이후 제일모직은 삼성SDI와 함께 2차전지를 개발하는 등 전자재료 사업을 새로운 성장엔진으로 내세웠다. 2013 12월 패션사업부가 삼성에버랜드로 이관될 때 알 만한 사람은 다 다음 수순을 짐작했다. 기업의 정체성이 누가 봐도 티가 날 만큼 어정쩡해졌기 때문이다.

 

1972년 첫 번째 변곡점에서 과감히 포기하거나 80년대 섬유산업 한계점에서 어정쩡한 화학과의 공생이 아니라패션 전문 기업등으로 탈바꿈했다면 어땠을까. 변화의 바람이 불어올 때, 기업은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에 대해정답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다만 우리는 60년 장수기업이 간판을 내리는 이 시점에 그들의 변곡점에서의 선택으로부터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유귀훈 기록작가 겸 컨설턴트 yoohun@gmail.com

필자는 성균관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했다. 노루페인트, 신성, 삼부토건,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삼성SDI, 제일모직, 포스코, 아모레퍼시픽, 태창철강, 종근당 등의 기업사를 집필한 기록작가다. <사사(社史)제작법> <최신사사기획제작법> <유귀훈의 기록노트> <마라톤> <장수기업입문서 社史> <기록입문> <유귀훈의 기록노트2> 등의 저자이기도 한다. 현재 프리랜서 기록작가 겸 컨설턴트로 활동하며 각 기업 역사에서 배우는 비즈니스 교훈을 전달하고 있다.

 

  • 유귀훈 | - (현) 기록작가 겸 컨설턴트
    - 전 노루페인트, 신성, 삼부토건,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삼성SDI, 제일모직, 포스코, 아모레퍼시픽, 태창철강, 종근당 등의 기업사를 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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