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eative Minds

미술의 역사 바꾼 인상주의 핵심 동력은 다자간 협력

142호 (2013년 12월 Issue 1)

 

 

편집자주

창조와 혁신이 화두인 시대입니다. 예술가, 문학가, 학자, 엔지니어, 운동선수 등 창작가들의 노하우는 기업 경영자에게 보석 같은 지혜를 제공합니다. 이병주 생생경영연구소장이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본 창조의 노하우를 소개합니다.

 

“자네, 드로잉이 너무 사실적이지 않나. 모델이 좀 작긴 하지만 그대로 그리면 어떻게 하나. 흉측하구만. 고전 양식을 따라 그려야지.”

“전 자연스러운 게 더 좋은데요.”

“위대한 작품이란 자고로 모델의 결점을 보완하는 거야. 모델이 작으면 크게 그리고, 발이 크면 작게 줄여서 그려야지.”

“실제로 발이 크잖아요. 저는 그대로 그리고 싶어요. 모두 똑같이 그릴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1863년 화가 지망생 모네(Claude Monet)는 글레르(Charles Gleyre)의 화실에서 이렇게 스승과 싸우고 뛰쳐나왔다. 같은 생각을 하던 20대 초반의 모네 친구들, 즉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 바지유(Jean-Frederic Bazille), 시슬레(Alfred Sisley)도 함께 아카데미 회원이었던 글레르의 교습소를 그만뒀다. 인상주의(Impressionism)가 잉태되는 순간이었다. 이들은 이후 20년간 뭉쳐 다니면서 협력하고 경쟁하며 서로를 발전시켰다. 결국 이들은 미술사의 흐름을 뒤바꿨고 현대미술의 싹을 틔웠다.

 

당시 프랑스 미술계는 미술 아카데미가 지배하고 있었다. 여기 회원들이 국립고등미술학교의 교수와 국가가 주최하는 살롱전의 심사위원을 도맡았다. 아직 미술품 판매상이나 화랑이 생겨나기 전이라서 살롱전에 작품을 전시하는 것만이 미술가로서 명성을 얻는 유일한 길이었다. 살롱전에서 입상해야만 상류층 후원자나 작품 구매자를 만날 수 있었다. 그래서 화가로 출세하려면 아카데미 회원의 화실이나 국립고등미술학교에서 살롱전의 심사기준대로 그리는 법을 배워 입상하는 게 관행이었다.

 

그런 점에서 아카데미 회원의 화실을 박차고 나온 모네와 친구들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다. 이런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얼마 전에낙선전에서 조롱거리가 된 그림 한 점 때문이었다. 1863년은 살롱전 입상자가 줄어들고 수천 점이 떨어진 해로 예술계의 불만이 고조되자 유례없이 낙선전이 개최됐다. 여기서 마네(Edouard Manet)풀밭 위의 점심이라는 작품이 전시됐는데 이 그림을 본 관람객들은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강둑에 두 명의 신사가 앉아 있고 그 옆에 벌거벗은 여인이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정면을 바라보는 그림이었다. 그때까지 살롱에 나왔던 작품과 전혀 다른 형식이었다. 색상은 지나치게 밝았고 원근법은 무시됐으며 무엇보다 소재가 당시 사람들의 생생한 삶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살롱에 입상하려면 신화나 성경, 역사적 사건을 정해진 원칙으로 아름답게 표현해야 했다. 그런데 이 그림은 너무 세속적인 소재를 생소한 화법으로 그렸기에 비난과 야유의 대상이 됐다. 그런데 모네와 친구들은 이 그림에서 미래를 보았던 것이다. 아카데미가 강조하는 로마와 그리스, 미학적 구도와 양식은 낡은 게 되고 앞으로는 파리와 이곳에 사는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그리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전율했고 나아갈 방향이 확고해졌다.

 

이들은 화실에 머물지 않고 자연으로 나가서 그림을 그렸다. 양식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그대로 그렸다. 숲 속에 비추는 빛과 그림자, 넘실대는 강물, 즐거워하는 남녀들을 그대로 표현했다. 네 사람은 스승 없이 서로 배우고 가르쳐주며 스스로의 화풍을 만들어갔다. 오래지 않아 이들에게 영향을 준 마네를 만났고 그림에 대해 비슷한 철학을 지닌 피사로(Camille Pissaro), 드가(Edgar De Gas), 세잔(Paul Cezanne) 등도 모여 정기적으로 만남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살롱은 이들의 새로운 화풍을 인정해주지 않았다. 그러자 살롱에 기대지 않고 자신들의 작품을 모아 전시회를 열기 시작했다. 1874 1회 전시회는 사람들의 무관심과 관람객들의 실망, 비평가들의 멸시로 실망스럽게 끝났다. 이 전시회의 수확은 인상파라는 이름을 얻은 것이었다. 모네가 전시한 <인상-해돋이>라는 그림을 보고 끝맺음이 제대로 안 됐다고 판단했던 악의적인 비평가가인상이 분명히 있다. 날로 먹는 장인정신의 자유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초창기 벽지도 이보다는 완성도가 높겠다라고 평했다. 이 조롱에서 인상파라는 이름이 굳어져 당사자들도 받아들이게 됐다. 첫 전시회는 이렇게 끝났지만 해가 갈수록 사람들은 인상파의 그림에 익숙해졌고 좋아하는 사람도 생겼다. 1886년 마지막 8회 전시회에 이르렀을 때는 인상파 화가들의 명성은 상당히 높아졌고 살롱전을 경유하지 않고도 그림을 판매할 수 있었다. 더욱이 같은 해 미국에서 열린 인상파 전시회가 성공적으로 끝나 인상주의는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됐다.

 

물론 인상주의가 사랑받게 된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다. 바로 사회적, 물질적 환경 변화가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산업혁명과 자본주의 발달로 인해 귀족 계급이 쇠퇴하고 자본가가 등장했는데 새로운 것과 개성을 좋아하는 신흥 계급이 인상주의 미술의 후원자가 됐다. 미술 분야의 기술혁신도 인상주의의 확산에 일조했다. 1841년 발명된 튜브물감은 인상파 화가들이 야외에 나가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만들었다. 이전 화가들은 밖에서 그림 그릴 때 돼지 방광에 물감을 넣어 다녔다. 물감을 짜다가 터지는 등 사용하기가 여간 불편한 게 아니어서 주로 실내에서 작업할 수밖에 없었다. 휴대가 편한 튜브물감이 나오자 거리낌없이 야외 작업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인상주의는 천재 한 사람이 만들어낸 화풍이 아니다. 어느 누구도 새로운 화풍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서로 돕고 부족한 부분을 채우면서 방향을 구체화해 나갔다. 협력이 인상주의를 낳았다.

 

협력과 개방형 혁신의 부상

 

인상주의 이야기가 경영에 도움이 되는 까닭은 현대 비즈니스 환경에서도 협력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환경의 불확실성이 커지고 예측과 계획이 어긋나는 경우가 많이 발생함에 따라 기업들은 다양한 방법을 모색해 왔다. 시나리오 기법을 개발해 상황 변화에 따라 전략을 달리 가져가기도 했고 여러 대안에 소규모 투자를 하면서 적절한 타이밍에 투자를 확대하거나 중단하는리얼옵션방식을 활용하기도 했다. 환경 변화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동태적 역량을 키우기 위해 조직의 학습 능력을 높이는 데 주력하기도 했다. 그래도 불확실성이 늘어나는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자 생각의 방향과 관점을 바꿨다. 그렇게 나온 게 바로협력이다.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힘을 합쳐서 변화에 대응하자는 것이다. 나 말고는 모두가 적인 치열한 경쟁 속에서 나와 너의 영역을 넘나든다는 점에서 이는 발상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전략적 제휴나 라이선싱 같은 전통적 전략은 양자 간 협력으로 오래 전부터 활용돼 왔다. 최근에는 이보다 더 유연하고 진화된 형태로 다자 간 협력인 개방형 혁신(Open Innovation)이 부상했다. 불확실성이 커지고 환경 변화가 빨라져 내부 역량만으로는 소비자 니즈를 충족시키는 창의적인 제품과 서비스를 개발하는 것이 더욱 어려워졌다. 그래서 연구개발 투자는 늘어나도 성공 확률은 오히려 떨어지는 경우가 빈번히 발생했다. 이에 여러 외부 자원을 활용해 상품 개발의 창의성과 속도를 높이기 위해 다수의 선진기업에서 개방형 혁신이 시도됐다.

 

2000년대 초반 P&G는 기존의 폐쇄적 R&D로는 성장이 어렵다는 판단 아래 회사 내부의 지식과 외부의 지적 자산을 연결(connect)해 제품을 개발(develop)하는 개방형 혁신을 도입했다. 쓸모 있는 외부 아이디어나 핵심 기술을 들여오기 위해 내·외부 네트워크를 운영했으며 다수의 중개회사와도 협력했다. 이를 통해 혁신적인 제품의 절반 이상을 C&D를 통해 달성했으며 전 세계의 파트너들과 2000여 건의 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IBM 2001년부터 이노베이션 잼을 통해 전 세계 수십만 명의 직원들이 고민하고 있는 문제를 토론하도록 지원했다. 이노베이션 잼은 매년 규모가 커져서 파트너 업체뿐만 아니라 정부 기관이나 시민에 이르기까지 참여 대상이 점점 확대돼 왔다. 이를 통해 IBM은 수많은 신사업을 만들어냈고 수익을 창출했다. 이 밖에도 인텔, 스타벅스, 레고, IDEO 등 수많은 기업들의 개방형 혁신 사례를 인터넷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렇게 보면 개방형 혁신의 성공 사례는 우리에게 너무 쉽게 다가오는 것처럼 보인다. 네트워크만 구축하면 아이디어가 쏟아져 나오고 혁신적인 제품으로 시장을 선도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전략적 방법론이나 세부적인 프로세스만 강조된 채 협력적 시스템을 작동시키는 메커니즘을 간과하기가 쉽다. 그러나 실제로 개방형 혁신은 성공이 그리 녹록지 않다. 모든 협력이 성공하는 것도 아니다. 인상파 화가들로부터 배워야 하는 이유다.

 

협력이 창조와 혁신으로 이어지는 경우

 

협력이 시너지를 창출해 창조와 혁신으로 이어지려면 몇 가지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

 

첫째, 우두머리가 없어야 한다. 팀이나 협력적 네트워크에서 수직적 지위 체계가 만들어지면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는다. 인상파 화가들은 나이는 달랐지만 리더가 없었다. 1866년 모네는 살롱전에서 입상하고 마네는 탈락했는데 사람들은 모네를 마네로 오인했다. 마네는 이 신인 화가가 누군지 궁금했고 그에게 초청장을 보냈다. 모네는 르누아르, 바지유, 시슬레를 데리고 나왔고 마네는 자기 또래였던 피사로와 드가를 소개해줬다. 얼마 후 피사로에게 그림을 배우던 세잔과 세잔의 친구인 소설가 에밀 졸라까지 합세해 카페에서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졌다. 비록 10년 정도 연배 차이가 났으나 마네의 그룹과 모네의 그룹은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눴다. 그들은 들라크루아와 앵그르의 장단점, 자연주의적 작품의 허구성, 예술과 문학에 대한 정부의 통제와 검열, 시대에 뒤떨어진 심사위원들이 좌우하는 살롱, 풍경화나 정물화에서 자연의 빛을 활용하는 방법 등에 대해 토론했다. 보스가 없었으므로 저마다 주장을 거리낌없이 내놓았다. 다른 사람의 주장은 내가 지닌 아이디어의 불완전한 부분을 채워줬기 때문에 이들 중 이 모임에 빠지는 사람은 없었다. 시너지가 창출됐던 것이다.

 

우두머리가 있을 때 아이디어가 많이 나오지 않는 것은사회적 억제때문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자기와 같은 아이디어를 생각하고 있을 거라는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생각을 내놓지 못한다. 더욱이 타인이 더 뛰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말할 용기가 생기지 않는다. 그래서 권위적인 사람이나 전문가가 참여했을 때, 혹은 그들이 지켜보고 있을 때 사람들은 아이디어를 적게 낸다. 상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회의를 한다면 구성원들은 동료의 아이디어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자신이 어떤 말을 할지에 신경을 곤두세우게 된다. 따라서 사회적 억제에서 벗어나려면 모든 멤버가 서로를 동등하게 바라봐야 한다. 보스를 떠나 보내야 한다.

 

혁신적인 디자인 회사로 알려진 IDEO CEO인 톰 켈리(Tom Kelly)는 브레인스토밍에 참여하면 진행자에게 결정권을 맡기고 직원들과 동일한 규칙을 따른다. 물론 직원들이 CEO와 함께 대화하는 것을 불편해하면 이런 규칙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래서 평소 조직문화가 중요하다. IDEO에서는 직급에 관계없이 직원들끼리 서로 장난치고 농담하며 어린아이들 놀이터처럼 사무실을 꾸며놓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런 분위기가 직원들이 CEO를 동등하게 볼 수 있게 만든다. 이처럼 혁신적인 기업은 위아래가 없다. 어쩌면 존댓말과 위아래 서열이 엄격한 한국 문화가 협력에 장애가 될지도 모른다.

 

둘째, 방향을 정하지 않는다. 인상파 화가들은 고전적 양식과 주제에서 벗어나 빛의 효과를 강조한 기법과 사람들의 일상을 그렸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하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미술은 각기 달랐다. 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그림을 그리러 다녔지만 다른 것을 그렸다. 파리 시민들이 물놀이를 즐겼던 유원지를 그리러 갔을 때도 모네는 물 위에 반사되는 빛의 효과를 표현하는 데 집중하느라 다른 것은 단순하게 처리했지만 르누아르는 여가를 즐기는 사람들의 화기애애한 모습에 초점을 맞췄다. 마네와 드가는 아예 야외 작업을 하지 않았다. 소재에서도 모네는 루앙대성당이나 수련을 여러 차례 그렸고, 르누아르는 사람들의 모습에 매료됐으며, 드가는 무용수를 캔버스에 담았고, 세잔은 생 빅투아르 산을 수십 차례 표현했다. 그러면서 각자 개성적인 스타일을 발전시켰다. 심지어 이들은 정치적 신념도 다 달랐다. 유복하게 자랐음에도 마네는 공화주의자였고, 피사로는 사회주의를 지지했다. 모네는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부유한 자본가 집안에서 자라난 바지유는 애국심이 깊어 1870년 발발한 보불전쟁에 자원 입대해 전사했다. 모임에 졸라나 피사로가 대화를 주도할 때면 이야기는 이내 정치토론으로 변해버렸다. 의견 대립으로 얼굴을 붉히기도 했지만 다양한 가치관을 서로 인정했다.

 

조직 구성의 다양성과 창의성의 관계에 대해 연구해온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과제의 성격에 따라 구성원의 다양성은 효과가 다르게 나타난다. 복잡하고 답을 찾기 어려운 창의적인 문제를 풀 때는 지식과 전문 분야,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다른 사람들로 이뤄진 그룹이 효과적이다. 그러나 단순한 문제를 풀 때는 단일한 사람들이 다양한 집단보다 더 높은 성과를 올린다. 창의적인 문제는 많은 아이디어를 내는 게 중요하므로 다양성이 효과를 발휘하고 단순한 문제는 실행이 중요하기 때문에 단일함과 일사분란함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는 문제를 발견하는 창의성(problem finding creativity)과 문제를 해결하는 창의성(problem solving creativity)의 차이다.

 

인상파는 전통에 대항해 새로운 방향을 개척했다. 그들은 문제를 푸는 게 아니라 불확실성과 모호함 속에서 문제를 찾는 게 과제였다. 그래서 방향을 정하지 않고 다양성을 그대로 유지하는 게 효과적이었다. 오늘날 경영환경도 비슷하다. 과거 기술이나 제품의 로드맵이 명확한 상황에서 알려진 문제를 해결할 때는 방향을 정하고 단일함으로 승부하는 것이 효과적이었으나 방향을 처음부터 일일이 그려야 할 때는 인상파 화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문제를 발견하는 창의성이 필요하다.

셋째, 남의 실수에서 아이디어를 얻는다. 3M에서 가장 혁신적인 히트 상품인 포스트잇은 강력접착제 개발 과정에서 나온 실수에서 탄생했다. 강력접착제가 아니라 약한 접착제가 만들어졌고 이를 활용해 포스트잇을 만들었다. 여기서 핵심은 실수한 사람과 개발한 사람이 다르다는 점이다. 사람을 거치면서 아이디어가 변이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사람의 실수는 다른 사람에게 스파크가 될 수 있다. 협력이 필요한 이유다. 실수로 약한 접착제를 만들었지만 접착제에만 몰두하던 연구원은 그 쓰임새의 용도를 감히 생각해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실수담이 테이프에 대해 고민하던 연구원에게 들어가면 사정은 달라진다. 스파크가 된다.

 

인상파 화가들은 수많은 작품을 그려댔기 때문에 실수도 많았다. 그들 역시 남의 실수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음에 틀림없다. 실패작은 모두 폐기했으므로 아이디어의 변이와 관련해서 다른 일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모네의 초창기 그림은 당시 서양에 소개되기 시작한 일본 그림의 영향을 받았다. 실제로 그는 일본 병풍이나 스모 선수를 그리기도 했고 아내에게 일본 의상을 입혀 상업적인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일본 그림을 활용하는 이유에 대해 모네는 이렇게 말했다. “일본 그림은 전통을 갖고 있지 않아서 좋다.” 여기서 전통이란 르네상스로부터 이어지는 서양회화의 전통을 말한다. 우리는 일본 그림이 나름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모네와 인상파들에게 원근법이 발달하지 않았던 일본 그림의 의미는 서양 고전미술의 전통과 다르다는 것으로 충분했다. 실제로 모네는 일본풍의 그림을 때때로중국 그림이라고 말했다. 일본 그림은 모네에게 가서 의미가 변이됐다.

 

이탈리아의 제품 디자인회사 알레시는 회사에서 출시해 실패한 제품을 회사 전시관에 진열해놨다. 여기서 매주 알베르토 알레시(Alberto Alessi) 대표가 디자이너들과 새로운 프로젝트에 대한 회의를 한다. 실패한 디자인은 소비자들에게 받아들여지는 제품과 거부되는 디자인의 경계가 어디인지 명확히 알려주기 때문이다. 회사는 디자이너들이 이 경계에서 일하기를 원한다. 그래야 소비자들도 예상 못한 제품을 만들어낼 수 있다. 알레시 대표는 보통 회사와는 전혀 다른 일로 조바심을 낸다고 한다.

 

“매년 두 개 정도 커다란 실패를 맛봐야 합니다. 최소 하나는 반드시 있어야 해요. 만약 2∼3년을 실패 없이 보낸다면 그건 정말 큰일입니다. 우리가 곧 디자인에서 리더십을 잃을 거라는 증거니까요. 우리의 경험을 보면 실패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어 혁신적인 제품을 개발했으니까요.”

 

넷째, 이동이 자유롭다. 협력이 성공하려면 네트워크 간 지식과 사람의 이동이 자유로워야 한다. 인상파 화가들은 자신의 개성과 스타일을 유지하면서도 서로의 기법을 함께 실험하기도 했다.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지 않던 마네도 결국 캔버스를 들고 나가서 그림을 그렸다. 무리 중 나이가 가장 많았던 피사로는 심지어 서른 살이나 어린 후기인상주의 화가 쇠라(Georges-Pierre Seurat)의 점묘법을 따라 하기도 했다. 점묘법은 화가의 눈을 카메라 렌즈로 생각해서 붓끝으로 다양한 색의 작은 점을 찍어 그림을 완성하는 화풍이다. 피사로는 말년에 한동안 점묘파와 유사한 그림을 그리다가 다시 돌아왔다. 이처럼 인상파 화가들은 서로의 기법 사이를 왔다갔다 했다.

 

협력이 성공하려면 내게 귀중한 지식과 자원을 내놓은 것을 아까워하지 말아야 한다. 줘야 얻는다. 실리콘밸리와 루트 128의 차이를 보면 알 수 있다. 루트 128은 보스턴 외곽의 국도 이름으로 보스턴의 첨단산업단지를 일컫는다.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실리콘밸리가 스탠퍼드대에서 우수한 인재를 수혈했다면 루트 128 MIT와 하버드대의 인재가 모여들었다. 1970년대에는 루트 128이 실리콘밸리보다 더 잘나갔다. 그러나 이곳에서 창업한 워드프로세서로 유명한 왕(Wang Laboratories)이나 디지털 이큅먼트, 데이터 제너럴 등은 대부분 도산했다. 지리적 여건, 교육시설 등 공통점이 많았지만 한 가지 차이로 운명이 갈렸다. 실리콘밸리에서는 같은 업계 사람들이 서로 모여 아이디어를 나누고 직원들의 이직도 자유로웠다. 그러나 루트 128에 위치한 기업은 직원들이 다른 회사 사람들과 어울려 정보를 공유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겸업금지 조항으로 이직도 자유롭지 못했다. 실리콘밸리는 내가 준 만큼 더 큰 것을 받아서 계속 성장했는데 루트 128은 협력 네트워크의 힘을 활용하지 못했다.

 

‘나’를 넘어서야 할 때

 

인상파는 근대 고전미술에서 현대미술로 넘어가는 다리가 됐다. 고전미술은 완벽한 구도와 색채를 통해 신화, 이상, 전형성을 표현했고, 현대미술은 개성 있는 기법으로 사람, 현실, 특수성을 다뤘다. 이 과도기에 인상파가 있었다. 이는 한국 기업이 당면한 현실과 비슷하다. 과거 우리는 선진기업이 제시하는 전형적인 루트를 따라 가면 됐다. 소비자와 직면하지 않고도 남들이 하는 것을 따라 하면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많은 한국 기업이 글로벌기업으로 도약한 지금은 전형적인 패턴을 따르지 말고 다양한 길을 개척해야 한다.

 

한국 기업이 아직까지 개방형 혁신에 어려움을 겪는 것도 과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세 가지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첫째, 개방형 혁신을 전술로 활용한다. 개방형 혁신을 새로운 혁신의 원천으로 활용해야 하는데 기존 전략을 실행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기업이 많다. 아웃소싱이나 구매 다변화 전략 정도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래서 개방형 혁신을 통해서 나온 신사업이나 혁신적인 제품이 적다. 과학저술가인 스티븐 존슨(Steven Johnson) 1400년 이후 나타난 인류의 위대한 발명 200여 개를 분류했다. 그랬더니 상대성이론처럼 한 사람의 천재에 의해 발견되거나 만들어진 것도 많지만 절반을 훨씬 넘는 위대한 혁신은 여러 사람과 네트워크의 협력에 의해 나왔다. 개방형 혁신의 목적은 기존 제품에 필요한 작은 아이디어를 얻는 게 아니라 우리가 들어가지 않은 분야에서 혁신적인 제품을 만드는 것이다.

 

둘째, 갑을관계의 태도를 가지고 있다. 대기업이 작은 업체와 협력 관계를 맺을 경우 상대방을 하청업체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되면 파트너십이 저하되고 상호 간 신뢰가 떨어져 유망 중소기업의 참여가 줄어들게 된다. 장기적으로 개방 혁신 네트워크의 질이 저하될 수밖에 없다. 협력 네트워크는 우두머리가 없고 수평적인 관계를 맺어야 더 혁신적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셋째, 소유욕이 너무 크다. 개방형 혁신은 외부에서 필요한 것을 가지고 오는 것으로만 생각하는 기업이 많다. 밖으로 내보내서 성공하는 경우도 생각해야 하는데 한국 기업은 기술과 사람을 내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주지는 않고 받으려고만 한다. 루트 128이 쇠락한 이유를 명심해야 할 것이다.

 

요컨대, 한국 기업은를 중심으로 협력을 바라보는 것 같다. 목적, 태도, 방법에서 자기 중심적이다. 협력은 내가 큰 구성의 한 부분이 되는 것이다. 나를 버리고 넘어서는 순간 개방형 혁신은 한 단계 발전한다. (그림 1)

 

1880 224일 한 신문에 모네의 부고가 실렸다. 그의 장례식이 51일 열릴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드가가 한 짓이었다. 인상파 전시회에 참가하지 않고 51일 살롱전에 작품을 출품할 계획이었던 모네를 비난한 것이다. 드가는 인상파 전시회에 대한 애착이 커져서 동료 화가들을 점점 통제하려고 했다. 드가에게 불만을 품은 화가들이 점차 모임에 등을 돌렸다. 이렇게 인상파 화가들은 서서히 분열됐다. 우두머리가 나타나자 자유로운 영혼들인 예술가들의 협력은 쉽사리 깨졌다. 평생 혼자 살았던 드가는 말년에 특히 외로워했다.

 

이병주 생생경영연구소장 capomaru@gmail.com

이병주 소장은 연세대 경영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LG경제연구원에 재직하면서 창의성, 변화관리, 리더십 등을 연구했다. 저서로 <애플 콤플렉스><><3불 전략>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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