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함의 미학
세상살이 참 복잡하다. 도대체 뜻대로 되는 것이 없다. 공부도 어렵고, 친구 사귀는 일도 어렵다. 이성을 만나 사랑을 나누는 일은 더욱 어렵다. ‘한 사람 사랑하는 데 왜 이렇게 힘이 드는가’라고 노래하는 가수도 있다. 세상에 쉬운 일이 없다. 취직하기도 어렵고 취직을 하더라도 직장생활의 어려움은 계속된다. 세상일이 너무 빨리 변해서 거기에 따라가는 것도 쉽지 않다.
가정을 꾸려가는 일도 만만치 않다. 부부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는 것도 어렵고 부모와 자녀, 형과 아우의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는 것도 쉽지가 않다. 기업을 경영하는 일도 어렵고, 국가를 경영하는 일도 어렵다. 세계 평화를 달성하는 일은 더더욱 어렵다.
세상에 온통 어려운 일뿐이다. 세상살이가 왜 이렇게 어려울까? 그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주역>에서는 인생의 삼대 원리를 변역(變易), 불역(不易), 이간(易簡)이라 했다. 변역은 모든 것이 변하고 바뀐다는 뜻이다. 세상살이가 복잡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세상에 똑같은 것도 없고, 바뀌지 않는 것도 없다. 세상의 일은 마치 거대한 나무의 잎들이 각각 다른 모습으로 각각 다르게 움직이고 있는 것과 같다. 그 많은 잎들의 모양과 움직임을 다 파악하는 일은 참으로 어렵고 복잡하다. 그런 것을 다 파악하고 있어야 제대로 살 수 있다면 세상살이는 참으로 복잡하고 어렵다.
그러나 잎들은 그렇지 않다. 잎들은 독립된 개체가 아니다. 잎들은 가지에 붙어 있고, 가지는 줄기에 붙어 있고, 줄기는 뿌리에 붙어 있다. 뿌리는 변하지 않고 바뀌지 않는다. <주역>서 말한 불역이란 말이 바로 그것이다. 불역(不易)은 바뀌지 않는다는 말이다.
잎의 움직임은 복잡하지만 뿌리의 움직임은 단순하다. 그렇지만 잎과 뿌리가 별개의 것이 아니다. 잎과 뿌리는 하나로 연결돼 있다. 잎이 다른 잎들을 다 파악하는 것은 어렵고 복잡하다. 다른 잎들과 어울리는 방법은 더욱 어렵고 복잡하다. 그러나 다른 잎들을 파악하는 대신 자기의 본질로 파고 들어가 뿌리에까지 가서 닿으면 모든 잎들은 남이 아니라 바로 자기로 바뀐다. 모든 잎들은 뿌리와 연결돼 있다. 뿌리에서 보면 모든 잎들은 하나로 통한다. 이를 공자는 일이관지(一以貫之)라는 말로 표현했다. 모든 것이 하나로 꿰어져 있다는 말이다.
모든 잎들은 뿌리의 뜻으로 존재한다. 뿌리에서 물이 올라오면 푸름을 유지하면 되고, 물이 올라오지 않으면 붉게 물들면 된다. 잎들이 뿌리의 뜻을 잊어버리면 복잡해진다. 언제 싹이 터야 할지, 언제까지 푸른빛을 유지해야 할지, 언제 붉게 물들어야 할지, 또 다른 잎들과 어떤 관계를 유지해야 할지 도무지 알기 어렵다. 그러나 뿌리의 뜻을 알고 뿌리의 뜻을 따르면 어려울 것이 없다. 망설일 것도 없고, 주저할 것도 없다. 뿌리가 시키는 대로 그냥 따르기만 하면 된다. 참으로 간단하고 쉽다. <주역>에서 말한 이간(易簡)이 그것이다. 이간은 쉽고 간단하다는 말이다.
사람이 사는 것도 그렇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각각 독립된 개체로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복잡하고 어렵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다. 한 사람의 속도 알기 어려운데 수많은 사람을 어떻게 알고 어떻게 대할 수 있을까? 사람살이가 이렇게 어렵고 복잡하게 된 데는 원인이 있다. 그 까닭은 모든 존재를 연결하는 하나의 뿌리를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모든 잎들이 하나의 뿌리와 연결돼 있듯이 모든 사람은 하나로 연결돼 있다. 형제는 부모를 매개로 하나로 연결돼 있고, 사촌들은 조부모를 매개로 하나로 연결돼 있다. 이렇게 확대해가면 모든 사람은 하나로 연결돼 있다. 형제가 비슷하게 생긴 것은 하나로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사촌이 비슷하게 생긴 것도 하나로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서로 비슷하게 생긴 까닭도 모두 하나로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연결돼 있는 것은 사람뿐만이 아니다. 모든 생명체가 하나로 연결돼 있다. 사람과 아메바의 DNA는 97%가 같다고 한다. 연결돼 있는 것은 생명체뿐만이 아니다. 모든 물체가 하나로 연결돼 있다. 그 하나로 연결돼 있는 뿌리가 하늘이다. 그 하늘을 하느님이라고 해도 되고, 하나님이라고 해도 된다. 자연의 생명력이라고 해도 되고, 그냥 자연이라고 해도 된다. 그 하나의 뿌리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물질이 아니다. 물질이라면 하나가 될 수 없다. 그 하나의 뿌리는 모든 물체를 유지시키고 모든 생명체를 살리는 작용을 한다. 그 작용은 모든 물체의 원자 속에서 작동하고 모든 생명체의 세포 속에서 작동한다. 모든 생명체는 유전자의 명령에 따라 생명을 유지한다. 그 유전자의 생명을 유지하는 작용은 모든 생명체에 공통이다. 공통이기 때문에 하나다. 그 ‘하나’가 하늘이고, 천(天)이고, GOD고, 자연(自然)이다. 서구에서 르네상스운동이 일어난 이후 과학이 발달하고 인류문명이 비약적으로 발전했지만 사람들이 한 가지 큰 실수를 했다. 사람들이 그 ‘하나’를 부정했다. 사람들이 그 하나를 부정하는 것은 잎이 뿌리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뿌리를 부정하고, 뿌리의 뜻을 외면한 존재는 오직 사람뿐이다. 사람의 삶이 어렵고 복잡해진 까닭은 그 때문이다.
사람 이외의 생물체는 여전히 자연으로 살아간다. 자연(自然)이란 저절로 그러하다는 뜻이다. 저절로 그러하기 때문에 어려울 것도 없고, 복잡할 것도 없다.
실내에서 자라고 있는 식물은 줄기가 창 쪽으로 향해 뻗어가지만 그쪽으로 가야만 햇빛과 만나 광합성을 할 수 있다는 것을 파악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저절로 그렇게 한다. 동해의 개천에서 자란 연어는 태평양을 건너 알래스카의 앞바다에까지 갔다가 산란기가 되면 자기가 자랐던 개천으로 돌아오지만 그 개천을 애써 잊지 않고 기억한 뒤에 돌아오는 것이 아니다. 그냥 저절로 그렇게 한다. 집이 무너지기 전에 거기에 있던 쥐나 고양이는 다른 곳으로 피신을 하지만 그들은 집이 무너진다는 것을 알고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저절로 그렇게 한다. 갓 태어난 송아지는 비실비실 걸어서 어미 소의 젖을 먹으러 간다. 그렇게 해야 살 수 있다는 것을 알아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저절로 그렇게 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대자연의 생명체가 살아가는 모습이 모두 그렇다. 그것은 신비에 가까울 정도로 경이롭다. 그 모든 삶의 방법은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일 뿐이다.
사람의 삶도 예외가 아니다. 삶 그 자체가 신비다. 사람의 몸 구석구석을 들여다보면 너무나 정밀하고 신비롭다. 이런 몸을 누가 만들었을까? 우리 부모님이 어떻게 이런 정밀하고 신비한 몸을 만들었을까? 우리 부모님께서 이런 몸을 만드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저절로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몸을 만드는 것은 간단하고 쉽다.
이 몸은 저절로 그렇게 태어났고, 저절로 그렇게 자랐다. 저절로 손과 발이 생겼고, 저절로 손가락 다섯 개와 발가락 다섯 개가 생겼다. 밥을 먹으면 저절로 소화가 되고, 저절로 힘이 생긴다. 때가 되면 저절로 밥을 먹고, 피곤하면 저절로 쉬며, 밤이 되면 저절로 잠을 잔다. 생명을 유지하는 방식이 참으로 오묘하지만 그런 방식이 전혀 어렵지 않다.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므로 쉽고 간단하다.
하늘은 자연의 생명력이다. 하늘은 쉬지 않고 생명체를 살려간다. 밥 먹을 때가 되면 밥을 먹도록 유도한다. 하늘이 유도하는 것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다. 말은 귀로 듣지만 하늘이 유도하는 것은 느낌으로 듣는다. 배고픔을 느낄 때는 ‘밥을 먹어라’는 하늘의 명령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하늘의 명령이란 말이 이해되지 않는다면 유전자의 지시로 이해하면 된다. 피곤함을 느낄 때는 ‘쉬어라’는 하늘의 명령으로 이해하면 된다. 졸릴 때는 ‘자라’고 하는 하늘의 명령으로 이해하면 된다. 무너지려는 집에서 나가고 싶은 느낌이 드는 것은 ‘거기 있지 말고 밖으로 나가라’는 하늘의 지시임을 알고 나가면 된다. 어떤 물건을 만들어야 할 때는 어떻게 하면 만들 수 있는지 느낌이 온다. 느낌에 충실하기만 하면 모든 것이 쉽고 간단하다. 배고플 때 밥 먹고, 피곤할 때 쉬며, 졸릴 때 자고, 나가고 싶을 때 나간다. 느낌에 따라 낡은 것을 버리고 느낌에 따라 새로운 것을 만들면 된다. 느낌에 따라 노래하고, 느낌에 따라 춤을 추며, 느낌에 따라 작품을 만들면 된다. 어려운 것이 없다. 모든 것은 느낌에 따라 하기만 하면 저절로 된다. 공자는 이런 상태를 성실함으로 정의하고 그 내용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성실함 그 자체는 하늘의 작용이니, 성실함 그 자체로 사는 사람은 힘쓰지 않아도 알맞게 되고, 생각해서 하지 않아도 잘되며, 모든 것이 저절로 들어맞는다. 그런 사람을 성인(聖人)이라 한다.”-<중용>
그런데 사람이 욕심을 가지면서 느낌을 상실했다. 도박을 할 때는 밥 먹어야 할 때가 돼도 배고픔을 못 느낀다. 도박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도 하늘은 ‘밥을 먹어라’고 지시하지만 돈을 따고 싶은 욕심이 가로막으면 그 지시를 받아들일 느낌이 차단된다. 욕심에 가로막혀 느낌을 잃어버린 뒤에는 복잡하고 어려운 일들이 일시에 쏟아져 나온다. 언제 밥을 먹어야 하고, 언제 쉬어야 하며, 언제 자야 하는지, 낡은 집에서는 언제 어떻게 피해야 하고, 새로운 상품은 어떻게 개발해야 하는지, 노래는 어떻게 불러야 하고, 춤은 어떻게 춰야 하며, 작품은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도무지 알기가 어렵다. 그런 것을 알기가 어렵고, 행동하기가 복잡하다. 사람들의 삶이 복잡하고 어렵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면 사람에게 욕심이 왜 생기며 어떻게 생길까?
사람의 마음은 본래 하늘에서 주어진 마음뿐이었다. 그 마음이 몸에 들어와 있는 것이 정이다. 사람의 정은 하늘에서 흘러들어온 것이기 때문에 모두 같다. 배고플 때는 먹고 싶어 하고, 피곤할 때는 쉬고 싶어 하며, 위험한 것을 피하고 싶어 한다. 다만 각각의 몸이 처한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그 상황에 맞게 작용할 뿐이다. 예를 들면 갑이라는 사람은 더위를 타는 체질이라면 옷을 얇게 입고 싶어 하지만, 을이라는 사람은 추위를 타는 체질이라면 옷을 두껍게 입고 싶어 한다. 이처럼 정이 다르게 표현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살고 싶어 하는 마음에서 보면 같은 것이다. 모두 같은 정이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사람에게는 몸이 있고, 몸에는 보고 듣고 냄새 맡는 등의 기능을 가진 감각기관이 붙어 있다. 감각기관은 감각을 한다. 감각하는 것은 감각대상을 구별하는 것이다. 구별하는 기능이 업그레이드되면 분별하고, 헤아리고, 생각하고, 계산하는 기능으로 발전한다. 사람이 분별하고, 헤아리고, 생각하고, 계산하는 기능을 하면, 그런 기능을 할 수 있는 장소로서 의식이라는 것이 생긴다. 이는 사람이 사무를 보면 그 주위가 사무실로 바뀌는 것과 같은 이치다. 분별하고, 헤아리고, 생각하고, 계산하는 기능을 사람들은 재주라고 하기도 하고, 영어로 IQ라고도 한다.
인간의 의식은 분별하고, 헤아리고, 생각하고, 계산하는 일을 하는 장소가 될 뿐만 아니라 인간이 살면서 경험한 것을 기억하는 저장창고 구실을 하기도 한다. 인간은 살면서 감각한 내용들, 분별하고 헤아리고 생각하고 계산한 내용들, 배우고 익힌 것 등등을 기억이라는 형태로 의식세계에 차곡차곡 저장을 한다. 그 저장된 기억들이 의식 속에서 차츰 쌓여서 덩어리가 되면 그것이 ‘나’란 개념으로 둔갑을 한다. 말하자면 ‘나’란 의식 속에 저장된 기억의 덩어리이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들은 “내가 누구입니까” “혹시 나를 아세요” 하고 물으면서 돌아다니는 경우가 있다. 이는 자기의 기억을 잃어버린 것을 자기를 잃어버린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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