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만큼 기쁘고 뜻 깊은 날이 또 있을까. 내가 작성한 기획안이 채택된 것이다. 드디어 내가 ‘한 건’ 올렸다는 얘기다.
물론 처음부터 완벽했던 건 아니다. 결론 부분을 먼저 제시하고, 좀 더 세밀하게 논리전개를 하라는 팀장님 말씀에 따라 파워포인트 보고서를 며칠에 걸쳐 수정하고, 이 과장님에게 재점검을 받았다. 이렇게 하고 보니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일목요연하면서도 명확하게 전달되는 것이었다. 글씨체와 크기, 도형의 활용과 배치까지 모두 다시 손을 봤다.
결국 내 기획안이 유 대리님의 ‘자동조리 기능을 갖춘 냉장고’를 제치고 미래상품기획팀 제안으로 채택됐다.
프리젠테이션 보고서는 다른 팀원들의 도움으로 완벽한 모습을 갖추었다. 디자이너 출신인 임 주임은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멋지게 보고서를 꾸며줬다. 얼굴도 예쁜데다 일도 정말 잘하는 그녀. “사장님을 비롯한 임원진에 보고하는 거니까 특별히 신경 써드리는 거예요”라고 말하는 모습에 가슴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대학에 다닐 때 수십 개의 공모전에 응모했다는 손대수는 임원진의 눈길을 끌 수 있는 화려한 플래시와 애니메이션 기능을 덧붙여줬다. 마지막으로 나는 ‘거금’을 주고 최고급 레이저포인터를 샀다.
이로써 내 기획안은 정말 완벽해졌고, 이제 발표만 남았다. 아, 정말 설레고 떨린다. 준비를 어떻게 해야 할까? 이렇게 열심히 준비했는데 발표할 때에 실수를 하면 말짱 도루묵이 아닌가. 실수하지 않기 위해선 열심히 연습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 한 글자도 틀리지 않게 완벽하게 외워버리자.
우선 내가 발표할 내용을 워드 문서로 작성했다. 다 정리하고 보니 파워포인트로는 20장도 넘는 내용이 얼추 2페이지 밖에 안 된다. 양이 좀 적은 건가, 적당한 건가? 더 추가할 내용이 있을까?
여하튼 발표할 내용을 미리 적어보니 자신감이 생기는 듯하다. 정리한 내용을 며칠에 걸쳐서 외우고 또 외웠다. 출근하는 지하철에서도, 밥을 먹으면서도, 화장실에서도 외우고 또 외웠다. 추가로 틈만 나면 회사 비상구에서도 연습 하고 나니 처음부터 끝까지 한 글자도 틀리지 않을 만큼 완벽해졌다.
드디어 발표날이다. 지금 내 앞에는 사장님을 비롯해 7명의 임원진이 나만을 주시하고 계신다.
긴장되는 순간. 그래, 이제 시작이다.
“(꿀꺽) 네, 지금부터 Y전자 미래상품 개발 전략에 대한 보고를 시작하겠습니다. 저희는 20대부터 40대까지의 1인 가구를 타깃으로 삼아 소비, 건강, 감성 같은 이들의 주요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신개념 프리미엄 개발을 목표로 했습니다.(중략) 저희 팀에서 최종적으로 선택한 것은 밝기와 색채를 조절해 사용자의 스트레스를 덜어주고, 컨디션을 향상시켜 주는 특수조명 기기입니다. 스피커를 부착해 치료음향을 재생, 빛과 소리의 동조 작용을 통해 긴장감과 피로감을 경감할 수도 있으며….(중략)
‘식사 친구’ 로봇의 경우 우리 회사가 당장 제품 개발을 진행하기에는 무리가 따를 것이라는 판단을 하게 됐습니다. 반면 특수 조명은….(후략)"
“잠깐!”
갑자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식사 친구 로봇 말이야. 내 생각엔 실버타운과 전략적 제휴를 맺는다면 제품 개발을 시도하는 것도 나쁘진 않아 보이는데? 강 대리, 자네가 얘기한 대로 생활 로봇 제조로 회사 인지도를 높일 수도 있을 테고 말이야. 자넨 어떻게 생각하나?”
청산유수처럼 보고를 이어가는 중에 튀어나온 예기치 못한 질문. 내가 연습한 내용에는 이런 기습 질문은 들어있지 않았는데…. 머릿속이 멍해지는 느낌이다. 대체 누가 뭐라고 물어본 거야!
“네, 저… 그건…. 그런데, 지금 뭐라고 하셨죠?”
“됐네. 식사 친구 로봇의 시장성에 대해선 나중에 좀 더 보완해 보도록 하고, 계속하게.”
“네. 자, 그럼…. 저, 그러니까 그게….”
내가 좀 전에 어디까지 얘기했지? 이제 뭘 말할 차례지?
이럴 수가! 오늘 오전까지만 해도 완벽하게 외운 내용인데 한번 흐름이 끊기고 나니까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정리해 둔 종이를 꺼내봤는데, 내가 이야기할 부분이 어디에 있는지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 으아, 이를 어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