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소나(persona)라는 말이 있다. 아주 오래전 로마 시대 연극 무대에서 배우들은 가면을 쓰고 연기했다고 한다. 바로 이 가면이 페르소나이다. 훌륭한 배우는 자신의 감정과는 무관하게 맡은 배역을 충실히 수행한다. 연기해야만 하는 날, 자신의 아이가 교통사고로 죽거나 혹은 복권에 당첨되었을 수도 있다. 뛰어난 배우는 자신이 맡은 배역에만 집중할 뿐이다. 비극적인 사건에 동요되거나 행운에 취해 배역을 망쳐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페르소나라는 가면을 쓰고 연기를 했던 로마 시대 배우들은 요즘 배우들보다 더 수월하게 연기했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데는 맨얼굴보다 가면이 더 편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자신은 슬픔에 빠져 있지만, 웃는 얼굴의 가면을 쓰고 우스꽝스러운 연기를 하고 있는 배우를 말이다. 우리는 그 배우에게 측은한 마음을 느낀다. 하지만 우리도 그 배우와 마찬가지 처지가 아닐까?
아주 오랫동안 사귀었고 결혼까지 꿈꾸었던 연인으로부터 결별 통보를 받았다고 가정해보자. 다음 날 우리는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출근해 상사와 동료들을 보고 반가운 아침 인사를 나눈다. 심지어 거래처 사람들과 만나서 미소를 짓기도 한다. 우리는 알고 있다. 삶은 마치 연극처럼 진행되고 있고, 그렇게 이뤄져야만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다. 우리는 마치 능숙한 배우처럼 맡은 배역을 연기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가면을 벗고 우리의 맨얼굴을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자신의 슬픔을 누군가로부터 위로받고 싶어 한다. 몇몇 친구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중 한 명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맨얼굴을 보여주려고 하는 순간, 그는 자신이 해고당했다며 슬퍼한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다시 친구라는 가면을 쓸 수밖에 없다. “괜찮아. 너는 능력이 있으니까. 이번이 오히려 전화위복의 기회가 될 거야.”
언제쯤 우리는 페르소나를 벗고 자신의 맨얼굴을 보여줄 수 있을까? 그렇지만 맨얼굴이라고 믿었던 것도 사실 또 하나의 페르소나에 지나지 않은 것은 아닐까? 바로 여기에 인간 모두가 겪을 수밖에 없는 비극이 있다. 자신의 페르소나를 애써 벗어던지자마자, 우리는 맨얼굴이 아닌 새로운 페르소나를 발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페르소나를 벗어야만 우리의 맨얼굴을 찾을 수 있는 것일까? 아니 맨얼굴이라는 것이 있기는 한 것일까? 고민을 거듭하던 중, 우리 뇌리에는 아주 오랜 시절 인간의 삶이란 연극에 불과하다는 통찰에 이른 철학자 한 명이 떠오른다. 그는 에픽테토스(Epiktētos, 50?∼138?)이다.
너는 작가의 의지에 의해서 그러한 인물로 결정된 연극에서의 배우라는 것을 기억하라. 만일 그가 짧기를 바란다면 그 연극은 짧고, 만일 길기를 바란다면 그 연극은 길다. 만일 그가 너에게 거지의 구실을 하기 원한다면, 이 구실조차도 또한 능숙하게 연기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만일 그가 절름발이를, 공직 관리를, 평범한 사람의 구실을 하기를 원한다고 해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 <엥케이리디온(Encheiridion)>
에픽테토스에게 ‘작가’는 신을 의미한다. 그에 따르면 신은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우리가 연기해야 할 배역들을 모두 정했다. 그에 따라 우리는 거지가 될 수도 있고, 왕이 될 수도 있고, 사형수가 될 수도 있고, 절름발이가 될 수도 있다. 에픽테토스에 따르면 왕이 되었다고 뻐길 것도 없고, 거지가 되었다고 해서 슬퍼할 이유도 없다. 왕이나 거지는 진짜 자기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삶이란 연극판에서 부여받은 배역에 지나지 않는다. 연극이 끝나면, 그러니까 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우리는 모두 배역에 충실했던 배우들이었을 뿐이다. 어린 나이에 죽을병에 걸렸다고 슬퍼할 이유도 없다. 단지 자신이 맡은 배역이 그럴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충실하게 배역을 소화하고 연극판을 떠나면 된다. 괜히 신이라는 작가에게 투덜거려서도 안 된다. “왜, 저에게 이런 초라한 배역을 주었나요?” 이 말을 들었다면 작가는 말할 것이다. “누군가 어차피 그런 배역을 맡을 수밖에 없었다. 프로답게 연기에 집중해하지, 왜 아마추어처럼 투덜대는 거니?”
에픽테토스의 신이 종교적이라서 불편하다면, 사회나 사회 속에서 만나게 되는 타인들로 작가를 바꿔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우리는 특정 사회를 선택하여 태어날 수 없다. 이 사회는 우리로 하여금 어떤 배역을 맡도록 강제한다. 결혼해서 시부모를 만났을 때, 젊은 신부는 시부모와의 관계에 어울리는 페르소나를 써야만 한다. 어렵게 들어간 회사에서 신입 사원은 직장 상사와의 관계에 어울리는 페르소나를 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간은 평생 가면을 쓰고서는 살 수 없는 법이다. 외롭기 때문이다. 자신의 맨얼굴이 아니라 자신이 불가피하게 쓰고 있는 페르소나만을 좋아하는 사람들 속에서 우리는 고독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불행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페르소나가 자신의 맨얼굴이라고 믿는 삶을 영위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맨얼굴은 페르소나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하고 쭈글쭈글 망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행스럽게도 에픽테토스는 자신의 맨얼굴을 가꾸는 방법에 대해 넌지시 알려주려고 한다.
존재하는 것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들이고, 다른 어떤 것들은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들이 아니다.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들은 믿음, 충동, 욕구, 혐오,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 자신이 행하는 모든 일이다. 반면에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들은 육체, 소유물, 평판, 지위,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 자신이 행하지 않는 그런 모든 일이다.
- <엥케이리디온>
에픽테토스는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한다. 전자가 우리의 맨얼굴과 관련된 것이라면, 후자는 페르소나와 관련된 것이다.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것, 혹은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들이 페르소나와 관련될 수 있는 이유는 자신의 건강이나 재산 상태, 혹은 평판이나 지위가 모두 타인들에 의해 평가되고 이해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에픽테토스는 섬세한 철학자였다. 그는 우리의 삶이 연극처럼 진행된다는 사실을 통찰하는 동시에 배역을 맡은 배우의 얼굴 이면에 있는 맨얼굴의 중요성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들, 즉 우리 자신의 고유한 믿음, 충동, 욕구, 혐오 등 우리 자신의 맨얼굴에 해당하는 것도 페르소나만큼이나 중요한 것이었다.
에픽테토스는 페르소나와 맨얼굴을 동시에 가지고 삶을 영위해야만 하는 인간의 숙명을 간파했던 철학자였다. 다시 말해 페르소나에 집착하다가 맨얼굴을 망각하거나, 혹은 맨얼굴에 신경 쓰다가 페르소나를 경시하는 것, 이 두 가지 극단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의 성찰로 인해, 우리는 삶에서 겪는 모든 고통과 갈등이 어디에서 유래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맨얼굴을 드러내야 할 때 페르소나를 쓰거나, 반대로 페르소나를 드러내야 할 때 맨얼굴을 보여주려고 하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잊지 말자! 맨얼굴이 없다면, 우리가 페르소나를 쓰는 일도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페르소나에 지나치게 신경 쓰는 우리로서는 맨얼굴을 관리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한 일이다. 맨얼굴이 건강하다면, 우리는 다양한 페르소나를 쓸 수 있는 힘을 얻을 것이다. 불행히도 맨얼굴을 관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신이 쓰고 있는 페르소나를 벗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페르소나를 벗는 순간, 우리는 망가진 맨얼굴을 볼까 두렵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것이 에픽테토스가 우리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가르침이 아니었을까?
편집자주 21세기 초경쟁 시대에 인문학적 상상력이 경영의 새로운 돌파구를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동아비즈니스리뷰(DBR)가 ‘CEO를 위한 인문고전 강독’ 코너를 통해 동서고금의 고전에 담긴 핵심 아이디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사상과 지혜의 뿌리가 된 인문학 분야의 고전을 통해 새로운 영감을 얻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