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간 협업을 추진할 때 가장 어렵고 힘든 과제 가운데 하나는 협상이다. 협력 파트너는 언제라도 기회주의적인 행동(opportunistic behavior)을 할 수 있다. 이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해서는 발생 가능한 수많은 문제에 대해 상대방과 합의점을 찾아서 계약서에 반영해야 한다. 협상의 성패는 협업의 성패를 가른다.
초대형 협력 사례로 꼽히는 LG와 필립스의 합작 투자 사례는 많은 교훈을 준다. ‘LG필립스LCD(현 LG디스플레이)’라는 합작사를 탄생시키기까지는 협상 기간만 무려 1년 5개월이 걸렸다. 협상은 마치 ‘두더지 잡기 게임’ 같았다. 한 가지 이슈가 해결되면 또 다른 이슈가 금세 튀어나왔다. 협상 결렬 위기도 있었다. 강도 높은 협상이 이어지면서 실무자들은 거의 탈진 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양측은 ‘세계 1위의 액정표시장치(LCD) 회사’를 만들겠다는 공통된 비전하에 마침내 협상 타결에 성공했다. LG와 필립스의 협상 사례를 체계적으로 분석한 자료와 당시의 자세한 정황이 공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거대 기업 간 협상 과정 전체가 공개된 것도 매우 이례적이다.
상대의 자원과 전략 분석해 최적 파트너 찾아라
1998년 한국 기업 전체가 외환위기의 직격탄을 맞았다. LCD 산업이나 반도체 산업 모두 공급 과잉으로 최악의 국면을 맞았다. 당시 LG그룹의 LCD와 반도체 사업을 동시에 맡고 있던 LG반도체도 예외가 아니었다. LG반도체는 이런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한 방안 찾기에 나섰다.
제휴 대상을 찾는 게 급선무였다. LG는 일차적으로 30여 개 글로벌 업체들을 검토했다. 그 결과, 필립스가 가장 적합한 파트너로 꼽혔다. 이런 판단의 근거는 필립스의 당시 자원과 역량, 전략적 포지셔닝에 대한 치밀한 분석에서 나왔다. 필립스는 이미 반도체 사업 부문을 구조조정을 해본 경험이 있었다. 또 필립스가 모니터 업계 선두이기 때문에 틀림없이 LCD 분야의 추가 제휴 대상을 모색할 가능성이 높았다.
필립스는 브라운관(CRT) 모니터는 세계 2위였지만, 당시 차세대 디스플레이로 꼽히던 LCD는 일본과 한국 업체에 밀리고 있었다. 어차피 브라운관이 LCD로 대체될 게 확실시됐기 때문에 필립스 입장에서도 LG를 제휴 후보로 여길 가능성이 높다고 LG 측은 추측했다. 실제 필립스는 이미 1997년 일본 LCD업체인 호시덴과 ‘HAPD(Hosiden and Philips Display)’라는 합작사를 설립해 운영하고 있었다. 게다가 필립스는 1990년대 초부터 구조조정을 꾸준히 추진해 유동성도 풍부했다. 이는 LG에 투자할 만한 여력이 있을 것이라는 얘기이기도 했다. LG도 필립스의 투자를 받으면 필립스의 기술력과 브랜드, 유통망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에 협업의 시너지를 충분히 낼 수 있었다.
비전과 데이터로 협상 물꼬 터라
당시 외형상으로 보면 LG가 필립스보다 열위에 있었다. 게다가 외환위기로 위기에 몰린 LG는 정부로부터 직간접적으로 외자를 빨리 유치하라는 압박을 받았다. 태생적으로 LG가 시간에 쫓기는 불리한 위치에 있었던 셈이다. 더욱이 필립스는 TV 제조업체로서 세계 시장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었지만, LG의 LCD 사업은 세계 4, 5위 수준에 머물렀다.
하지만 LG는 이런 불리한 여건을 극복하기 위해 협상 초반부터 구체적인 비전과 자료를 무기로 삼아 필립스를 공략해 대화의 물꼬를 텄다.
1998년 2월 LG 측은 필립스에 물밑으로 제휴 의사를 타진했다. 필립스의 반응은 떨떠름했다. 필립스 측은 일본의 LCD 업체인 호시덴과의 합작사에 우선순위를 더 많이 두고 있었다고 밝혔다. 실제 필립스는 호시덴에 투자를 확대하고 있었다. 특히 필립스에서는 LCD 시장의 공급 과잉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았고, 필립스 이사회도 LG와의 전략적 제휴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LG는 미온적인 태도를 보인 필립스에 명확한 ‘비전’을 제시했다. 그 비전은 ‘세계 최고의 LCD 회사(World No.1 LCD company)’로 다른 분야는 몰라도 LCD 분야에서는 반드시 세계 1위를 달성하겠다는 것이었다. LG는 구체적인 협업 방안도 제시했다. 필립스의 기초 기술, 판매망, 자금과, LG의 응용 기술과 생산 능력을 각각 결합하자는 내용이었다. 담대한 목표와 구체적인 실천 방안이 제시되자 필립스는 LG와의 제휴를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