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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황기 생존 전략

봄날의 기억 버리고 ‘실탄’ 챙겨라

김경준 | 22호 (2008년 12월 Issue 1)
여름이 가고 겨울이 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계절의 변화이지만, 막상 겨울을 견뎌내고 새로운 봄을 맞이하는 것은 언제나 쉽지 않다. 호황과 불황의 사이클도 마찬가지다. 호황기에 불황기를 대비해야 한다는 원론에는 모두가 공감한다. 그러나 불황은 항상 예기치 않은 형태로 찾아오게 마련이고, 불황을 견뎌내고 생존하는 것 역시 만만치 않은 도전이다.
 
10년 전 동남아발 경제위기의 기억이 아직 생생한 가운데 다시 미국발 불황이 찾아왔다. 필자는 IMF경제위기를 이겨나오면서 생존력이 강해진 우리나라 기업들이 이번의 어려움도 슬기롭게 헤쳐나가리라 예상하지만 고통의 강도는 훨씬 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10년 전 위기는 국지적 외환위기였지만 이번 위기는 글로벌 경제의 중심이 무너져 내린 데서 출발해 전 세계가 모두 불황으로 진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10년 전 IMF구제금융을 받던 시절에는 내수 부진에도 불구하고 미국, 일본, 유럽연합(EU) 등 선진국은 호황였기에 수출을 통해 단기간에 경제회복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표1) 주요 수출시장이 모두 침체에 빠질 전망이다. IMF에 따르면 미국, EU, 일본의 2009년 경제성장은 모두 극심한 부진이 예상된다. 주요 3대 시장이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는 것은 2차대전 이후 처음이라고 한다.10년 전 IMF구제금융이 맹장염이었다면 지금은 암 2단계로 비유할 수 있다. 맹장염은 갑자기 극심한 고통과 함께 발병하지만 수술만 하면 단기간에 회복할 수 있다. V자형 경기회복을 기대할 수 있다는 말이다. 반면에 암은 치료가 어렵고 시간도 많이 걸린다. 관리를 잘해야 진행을 멈출 수 있는데, 조금만 방심해도 급속히 악화되는 특징이 있다.
 
현재의 금융시장 경색은 단순한 유동성 위기가 아니라 2차대전 이후 국제금융 질서의 근간이던 기축통화 달러가 중심이 된 브레턴우즈 체제 자체의 위기다. 따라서 글로벌 차원의 동시 실물경기 침체가 예상되고 있다. L자형 경기 침체의 우려가 상당히 오랜 기간 현실화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기업이 앞으로 다가올 기나긴 겨울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추운 날씨에 맞게 체질과 행동방식을 바꿔야 한다. 불황기를 이겨낼 수 있는 생존의 키워드는 현금(cash)과 위험관리(risk management)다.
 
위기 때의 현금은 생명줄이다
기업은 재화-서비스를 팔아 수익을 얻고 그 수익은 일정기간 후 현금화된다. 평상시에는 수익-현금화의 사이클이 정상적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수익은 곧 일정시간이 흐른 뒤의 현금을 의미한다. 그러나 위기 때는 다르다. 장부상 수익과 내 손에 쥐어지는 현금은 완전히 별개가 된다.
 
제조업의 매출채권, 건설업체의 기성고가 전형적인 사례다. 평상시의 기업은 매출 발생이나 공사 진척 시점에서 수익을 계상한 뒤 일정시점이 지나면 대부분 현금으로 회수한다. 그러나 불황기에는 거래 상대방도 현금 지출을 억제하기 때문에 매출발생-현금화 주기도 길어질뿐 아니라 그나마 현금화가 되지 않고 장부상으로만 남아있는 수익, 소위 부실채권이 급격히 늘어난다. 현금을 인체의 혈액에 비유하면 날씨가 궂은 불황기에는 혈액의 순환속도가 느려지는 데다 몸 속을 흐르는 혈액의 절대량도 감소하기 때문에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는 구조라고 볼 수 있다.
 
또 수천 억 원의 장부상 이익이나 자산을 가지고도 수십 억 원의 현금이 없으면 극단적인 상황으로 내몰리는 것이 경기 침체기의 특징이다. 건강한 사람도 일시적인 혈액순환 장애로 치명적인 타격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다. 평상시에는 일시적으로 현금이 부족하면 빌리면 된다. 그러나 침체기에는 대형 금융기관조차 ‘내 코가 석 자’이기 때문에 돈 빌릴 곳이 마땅치 않다. 이런 상황에서 믿을 것은 내 손 안에 있는 현금뿐이다. 따라서 기업은 보유현금을 가능한 늘리고, 현금 유출을 최대한 억제하는 방법을 신속히 찾아 실행해야 한다.
 
리스크의 기본 전제를 바꿔라
남태평양의 쾌적한 휴양지에서 여유롭게 지내던 사람들을 갑자기 찬바람이 몰아치는 시베리아 벌판에 내동댕이친다면 어떻게 될까. 건강하던 사람도 저항력이 약해지고 병을 얻어 심지어 죽는 경우도 생길 것이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성장-호황기의 리스크와 위기 상황의 리스크는 기본 개념이 완전히 다르다. 과거 개념으로 리스크를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기업은 매출채권, 고정자산, 투자자산 등 영업과 자산의 모든 부문에서 새로운 기준을 가지고 리스크를 재평가해야 한다.
 
예컨대 1년 전에는 언제라도 마음만 내키면 시장에 내다팔 수 있었던 우량자산도 지금은 매수자를 찾기조차 어려운 경우가 많다. 환경 자체가 근본적으로 바뀐 지금 과거 잣대로 현재를 평가한다는 자체가 무의미한 자기 기만에 불과하다. 겨울이 왔으면 겨울 기준으로 사물을 보아야 추운 겨울을 이겨낼 방법이 보인다. 따뜻한 봄날의 좋았던 기억을 잊지 못해 겨울이 왔는데도 사물을 보는 기준을 바꾸지 못한다면 결과는 뻔하다. 상황이 단기간에 호전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버리고 냉정하게 판단하는 것이 생존력을 높이는 지름길이다.

스톡데일 패러독스를 명심하라
성공의 믿음을 잃지 않으면서도 눈앞에 닥친 냉혹한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스톡데일 패러독스다. 미국의 짐 스톡데일 장군은 베트남전에서 포로가 되어 8년(19651973) 동안 베트남의 하노이 포로수용소에서 생활했다. 그는 수감 기간에 겪은 20차례의 고문에도 불구하고 동료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으며 살아남았다.
 
장군의 회고에 따르면 수용소에서 가장 일찍 죽는 사람은 비관론자가 아니라 근거 없는 낙관주의자였다고 한다. 이들은 크리스마스에는 나갈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자기 자신에게 일종의 최면을 걸고 희망을 불어넣다가 좌절되면 실망하고, 다음에는 추수감사절의 석방을 기대했다. 추수감사절 석방이 좌절되면 다시 막연한 희망을 가지고 기다리다가 끝내 극단적인 실망에 빠져 죽음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반면에 그는 분명 풀려난다는 신념을 가지되 단기간 석방은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수용소 생활을 견뎌냈다고 회고했다. 이후 사람들은 극한 상황의 어려움을 이겨내는 합리적인 낙관주의를 스톡데일 패러독스라고 부르게 됐다. 우리나라 기업들의 위기 극복을 위해 필요한 출발점은 현실을 냉정히 받아들이되 성공에의 믿음을 잃지 않는 이와 같은 합리적인 낙관주의다.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는 말했다.
승자와 패자를 결정하는 것은 당사자가 가진 자질의 우열이 아니라 갖고 있는 자질을 어떻게 활용했는가에 달려 있다”
 
위기 극복을 위한 잠재 역량은 누구나 지니고 있지만 모두가 위기 극복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갖고 있는 자질의 활용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것이다. 우리나라 기업들이 이번 위기를 이겨내고 한 단계 도약을 이루기 위해서는 합리적인 낙관주의로 무장한 가운데 보유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는 등 생존력을 극대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필자는 서울대 농경제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딜로이트 컨설팅의 부사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업무 분야는 장기전략 수립 및 구조조정을 통한 기업경쟁력의 회복이다. <위대한 기업, 로마에서 배운다> <소니는 왜 삼성전자와 손을 잡았나> <엄홍길의 휴먼리더십> 등 7권의 책을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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