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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운하 시대 중국 상인 이야기

“아무리 번화해도 쇠하는 때가 있는 법”

조영헌 | 373호 (2023년 07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한때 중국 강남 지역의 대운하는 중국 경제와 문화의 혈맥 역할을 했다. 대운하의 진면목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할 수 있는 운하 도시는 조선의 연행사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번화한 곳이라도 결국 쇠하는 때는 온다. 이때 과거의 번영과 영광에 집착하면서 변화하지 않으면 쇠락이라는 쓴잔을 마실 수밖에 없다. 19세기 초 해운의 시대가 열렸지만 청은 여전히 운하에 의존하다가 19세기 중반에서야 노선을 바꾼다. 그 결과 운하 도시는 물론 청 역시 쇠락을 맛봐야 했다.



길었던 코로나 팬데믹이 끝나고 해외여행이 다시 활성화하기 시작했다. 3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해외로 떠나지 못했던 사람들의 억눌린 마음은 보복성 여행이라는 형태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지난 1분기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해외로 떠난 국제선 이용 여객 수가 지난해보다 10배 많은 1100만여 명에 달했을 정도다. 코로나의 진원지이자 강력한 ‘제로 코로나’ 정책을 추진하면서 상하이 폐쇄까지 선언했던 중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3월 비자 발급이 재개된 이후 여행 수요가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 아직은 일본 여행이 압도적으로 많지만 조만간 다양한 지형과 문화를 지닌 중국 관광 여행도 빠르게 회복될 것이다.

거의 매년 중국을 방문하던 필자도 2020년 코로나 이후 중국을 방문하지 못했다. 올해 3월에 산둥성 린칭(臨淸)에서 대운하를 주제로 열린 국제학회에 기조 강연자로 초청을 받았지만 비자 발급의 어려움 등으로 온라인 참여에 만족해야 했다. 가을에 상하이 푸단(復旦)대의 국제학회에 초청을 받아 방문할 예정인데 가게 되면 오랜만에 다시 보고 싶은 것이 바로 강남 운하다. 상하이까지 연결된 수로망을 따라 과거 명과 청 시대에 상업적으로 번성했던 각종 운하 도시들을 방문해 배도 타고 수향(水鄕) 도시의 문화를 즐길 생각을 하면 벌써 마음이 설렌다.

옛 조선의 선비들도 강남 운하 도시에 대한 방문을 갈망했다. 하지만 그들은 강남을 직접 방문할 수 없었다. 조선이 개창된 지 얼마 안 돼 명이 강남에 위치한 남경(南京)에서 북경(北京)으로 천도를 했기 때문이다. 수도 북경을 왕래하는 연행사들의 육로 외의 사적인 교류는 금지된 상태였다. 또한 명이나 조선 모두 사무역을 금지하고 정부 사절단에 의한 ‘조공 무역’만 허가하는 해금 정책을 시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인이 강남을 방문하는 방법은 사실상 우연한 표류(漂流) 외에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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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부의 강남 표류와 운하 견문 기록 『표해록』

조선인들에게 강남은 직접 가볼 수 없는 상상적 공간이었다. 이에 조선 시대의 문학 작품에는 강남의 문화 지리적 심상이 다양한 형태로 등장한다. 백거이(白居易, 772~846)가 “강남은 좋더라(江南好)”고 노래한 것처럼 조선인들에게 강남은 아름다운 산수, 자연과 어우러진 문화적 공간, 화려한 세속적 유흥 문화까지 고루 갖춘 이상적인 공간으로 ‘상상’됐다.1

그러다 직접 강남을 목도하게 된 인물이 있었으니, 1488년 절강성 영파(寧波)로 표류했던 최부(崔溥, 1454~1504)였다. 제주도 경차관(敬差官)으로 재임하던 최부는 부친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제주도를 출발해서 고향인 전라도 나주로 가는 도중 폭풍을 만나 표류했고, 해류에 휩쓸려 영파(寧波)에 표착했다. 최부 일행은 표류 중에 식수가 모자라 자신의 오줌을 받아 마셔야 하는 절체절명의 위험에까지 처했으나 결국 2주가 넘는 사투 끝에 영파에 도착했다. 몰골이 말이 아니었던 최부 일행은 조선인으로 변장한 왜인(倭人)으로 오해를 받기도 했으나 필담을 통해 신원이 밝혀지자 북경까지 안전하게 호송됐다. 이 과정에서 최부 일행은 대운하를 이용하는 관선(官船)에 탑승해 강남 도시와 운하 풍경에 관한 기록을 풍부하게 남겼다. 이것이 바로 표류 문학의 최고봉으로 손꼽히며 이후 많은 연행사의 연행록에도 영향을 미친 최부의 『표해록(漂海錄)』이다.

최부는 조선인들의 문화 지리적 심상 속에 있던 지역에 갈 때마다 관련된 인물의 고사를 떠올렸다. 운하 도시 항주(杭州)를 경유할 때는 백거이가 세웠다는 광화원(廣化院)의 죽각(竹閣)을 떠올리며 그곳에서 백거이가 지은 시를 읊었다. 여기서 그쳤다면 상상 속의 강남과 별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최부는 직접 목도한 항주의 도시 이미지를 덧붙였다. “항주는 동남 지역의 큰 도회(都會)로 가옥이 잇달아 행랑을 이루고 치맛자락이 이어져 장막을 이루었으며, 저자에는 금은이 쌓여 있고 사람마다 비단옷을 걸치고 있을 정도로 번화하다”면서 한마디로 “별천지”라고 감탄했다.2 항주와 함께 강남의 대표적인 도시로 쌍벽을 이루던 소주(蘇州)에 대해서도 “보대교(寶帶橋)에서 이 역에 이르는 동안 양쪽 기슭에는 상점이 이어져 있고 선박이 운집하여 있었는데, 참으로 동남(東南)에서 제일가는 도시”라고 평했다.3 “하늘에는 천당이요, 땅에는 소주와 항주가 있다(上有天堂, 下有蘇杭).”는 유명한 속담에 익숙하던 조선 지식인들에게 최부의 『표해록』은 상상적 공간을 눈앞에 보듯 생생하게 묘사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최부는 대운하를 이용해서 북상했기에 운하에 관련된 언급도 풍부하게 남겨뒀다. 서로 다른 수위 차이를 연결하는 제방이 있던 여량홍(呂梁洪)에 대해서는 “물의 흐름이 꼬불꼬불하다가 이곳에 와서야 언덕이 탁 트여서 세차게 흐르는데 세찬 기세는 바람을 뿜고 소리는 우레와도 같아 지나는 사람들은 두려워서 전율하며 간혹 배가 뒤집힐까 걱정했습니다”라고 선박 운행의 위험성을 기록했다.4 비록 사행원처럼 의도적인 목적을 가지고 중국을 방문한 여정은 아니었지만 최부의 『표해록』은 이후 사행을 떠나는 이들의 필독서로 사행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기에 연행록의 보조적 자료로 여겨진다.

통주에서 만나는 수로 교통의 번화함

그렇다면 조선시대 북경까지 사행원으로 참여했던 이들은 운하 교통망을 전혀 볼 수 없었을까? 그렇지 않았다. 대운하의 북쪽 끝이기는 하지만 통주(通州)에 도착해 북경에 입성할 때와 다시 북경을 나와 통주를 경유해 한양으로 돌아오는 귀로에 대운하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통주와 북경을 연결하는 운하 구간은 ‘어하(御河)’ 또는 ‘옥하(玉河)’라고도 불리는 하천, 통혜하(通惠河)에 해당한다. 약 1800㎞에 달하는 경항(京杭) 대운하 가운데 가장 북쪽에 위치한 20㎞ 남짓한 수로로, 전체 운하의 1%에 해당하는 짧은 구간에 불과하다. 하지만 남쪽에서 올라온 각종 조운선, 관선, 상선이 밀집하는 지역이자 북경으로의 진입로이기에 운하 교통망의 진면목을 엿봤다고 할 수는 있겠다.

대부분의 조선 연행사들은 통주에서 만나는 운하를 빠짐없이 기록했다. 통주의 운하는 중국의 문물을 관찰하는 곳일 뿐 아니라 운하길로 이어진 남방의 여러 세계와 문물을 체험하고 상상하는 장소였다. 조선인의 중국 방문이 북경까지의 육로로 제한됐기에 통주에서 본 운하 교통망은 이채로운 이국 경험이었다. 누군가는 이곳에서 배 위에 올라 남방의 진귀한 물산을 구경했고, 누군가는 동정호 악양루(岳陽樓)에 오르는 꿈을 꾸었고, 누군가는 남방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항주 서호(西湖) 풍경을 상상했고, 누군가는 통주 역참의 벽 위에 적힌 안남 사신의 시에 차운(次韻)하며 가보지 못한 먼 나라를 간접 체험했다.5

조선 연행사 가운데는 인공적인 운하를 자연 하천으로 잘못 인식한 이들도 있었다. 통혜하의 수원이 자연 하천인 로하(潞河) 등과 연결돼 있기는 해도, 연행사가 봤던 물길은 분명 인공 수로였다. 원대 중국을 방문했던 이슬람 탐험가 이븐 바투타(Ibn Batuta, 1304~1368)도 길게 이어진 대운하를 항주에서 북경까지 이어지는 자연 하천으로 오해한 바 있었으니6 이렇게 크고 긴 인공 운하를 경험하지 못했던 한계일 것이다.

1459년 통주에 도착한 이승소(李承召)는 운하에 가득한 조운선과 상선의 빼곡한 돛대 풍경을 시로 남겼는데 이는 19세기까지 통주를 왕래하는 연행사들에게 상징적인 이미지로 영향을 미쳤다.


한 줄기 긴 물결이 경기(京畿)로 이어지니

조운선과 상선들이 이끌리듯 몰려드네

높이 솟은 돛대들 묶은 듯 빼곡하고

그림배들 이어져 끝 아니 보이누나

만국은 사방에서 특산물을 가져오고

여러 겹 통역 거쳐 천자를 알현하네

태평성대 기상을 그대는 기억하게

쌀 한 말 서푼 함은 예부터 드물어라.7


통주를 가득 메운 선박의 대부분은 강남 지역의 미곡을 싣고 매년 북경을 왕래하는 1만여 척의 조운선이었다. 최현(崔晛)은 1609년 통주에서 “이곳이 바로 남경과 산동 등 여러 고을의 조운선이 모이는 곳이다. 또 용주(龍舟)와 각사(各司) 누선(樓船)이 있어 고물과 이물이 서로 접하였고 돛대가 빽빽이 모여 탑처럼 솟아 있었다”고 언급했고, 황재(黃梓, 1689~1756) 역시 1751년에 통주에 도달하여 “저 멀리 민가를 바라보니 즐비한 가옥은 북경에 버금갔고 강소와 절강에서 온 조운선이 정박해 있었다”고 기록했다.8 이처럼 ‘통주의 돛대’는 조선 사신들이 연행길에 반드시 보아야 할 ‘장관(壯觀)’ 목록에 포함되었고, ‘통주의 선박[通州海舶]’은 ‘연경의 빼어난 여덞 경치[燕都八景]’ 가운데 하나로 손꼽혔다.9 하지만 운하가 얼어버린 겨울에 방문했던 연행사들은 글로 보던 통주 선박의 장관을 목격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겨야 했다.

연행사들이 봤던 선박들은 대부분 1000㎞ 이상 떨어진 남쪽에서 올라온 배로, 통주의 통혜하를 통해 여러 교량 밑을 통과해 북경 성문까지 도달했다. 황재가 목격했던 이 구간은 조금씩 수위가 높아지는 구간이기에 갑문이 설치돼 있었고 물살도 급해졌다. 수심이 얕아지지 않도록 여러 물길로부터 물을 끌어들이도록 설계돼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하를 이용하면 “끝내는 강해(江海)까지 닿아서 뱃길을 열어주니, 아마도 하늘이 북경을 위해 이렇게 만든 것”이라고 칭송했다.10 수도를 천진과 연결된 바다 및 강남과 연결해주는 대운하의 연결성(connectivity)과 그로 인해 물자 조달이 원활했던 특징을 발견한 것이다.

선박에 탑승해 선상 거주자를 관찰하다

연행사들이 직접 선박을 타고 운하를 이용한 사례는 극히 드물었다. 다만 그들은 통주에서 북경을 왕래할 때 배를 타기보다는 육로를 통해 들어가면서 운하에서 만나는 교량을 인상적으로 기록하곤 했다. 대표적인 다리가 ‘팔리교(八里橋)’라는 속칭을 지닌 영통교(永通橋)이다. 가끔 여러 척의 선박이나 뗏목을 연달아 묶어 다리처럼 활용한 부교(浮橋)를 발견하고는 신기하게 적어놓기도 했다. 예외적인 경우가 홍대용인데 그는 귀경길에 영통교에서 직접 세를 낸 배를 타고 통주 북문까지 도달했다.11

일부 연행사는 통주의 운하에 정박한 선박에 직접 탑승해 내부를 자세히 기록했는데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운하를 왕래하는 조운선이나 상선에 대한 외적 묘사는 많지만 선박 내부나 선박 생활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중국 측 기록에도 아주 드물게 발견되기 때문이다. 필자가 대운하를 주제로 박사 논문을 쓸 때도 선박 생활에 대한 자료가 많지 않았다. 이에 2004년 운하를 답사하면서 정박한 선박에 탑승해 선박 주인과 인터뷰를 하면서 책을 통해 얻지 못한 정보를 얻었던 기억이 있다.

필자보다 330년 전인 1670년에 통주에 도달했던 이원정(李元禎)은 “푸른 수염의 남자와 검은 머리의 여자들이” 타고 있던 선박에 직접 승선해 봤다. 그 배는 류큐(琉球, 오키나와), 일본, 섬라(暹羅, 태국) 등 해외를 왕래하는 남방 상인의 선박이었다. 이원정은 예리한 관찰력으로 그들이 “배를 집으로 여기고” 있음을 간파했다. 그리고 배에 숙식이 가능한 가옥과 침구류를 구비할 뿐 아니라 채소와 닭, 개 등을 키우고, 배에서 혼인도 하고 제사도 지내는 풍속이 있음을 알아내고 기록했다.12 지금도 중국의 운하에서 화물을 운송하는 선박을 자세히 보면 이원정이 관찰했던 것처럼 침구류를 구비하고 채소와 개를 키우면서 선상에서 생활하는 선민(船民)들을 발견할 수 있다. 필자가 19년 전에 선박 주인과의 인터뷰를 통해서 겨우 알아냈던 운하 선민의 삶이 이미 330년 전 조선인의 기록에 담겨 있었던 것이다.

이원정보다 166년 뒤인 1836년 통주에 도착했던 임백연(任百淵)이 승선했던 선박은 강남 지역의 소주에서 온 배였다. 임백연은 직접 침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다실(茶室), 고양이와 개, 닭을 키우는 모습을 보고 이를 “배 안의 즐거움”이라 묘사했다. 배가 2층으로 구성됐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흥에 겨운 임백연은 처음 만나는 중국인들과 배 안에서 의자를 늘어놓고 앉아 차를 마셨다. 그리고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넓은 바다에서 돛을 펼치고 천 리를 순식간에 지나가면 얼마나 통쾌할까?”13 선박에서 삶을 영위하는 운하 선민에 대해서는 최근 인류학적 방법론을 활용한 연구가 시작됐는데14 연행록 자료를 활용하면 과거의 모습과 비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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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번화한 곳이라도 쇠하는 때가 있는 법”

이원정의 시대와 달리 임백연이 살았던 시기에 청과 조선의 해안에는 이미 유럽과 미국에서 온 상선들로 넘쳐나기 시작했다. 임백연이 통주에서 선박에 탑승한 때로부터 3년 뒤 중국에는 아편전쟁이 발생했다. 바다 건너 세계에 문호를 개방하지 않고서도 북경은 물자가 부족한지 모른 채 수백 년을 유지할 수 있었기에 오히려 중국은 해양 세계로부터의 도전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중국의 운하에서 원양 항해를 ‘상상’으로만 즐겼던 조선인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바다와의 불가분의 관계성을 지닌 섬나라 일본만 10여 년 전 중국의 아편전쟁 패배 소식을 접했던 터라 1853년 미국의 검은 선박인 ‘쿠로후네(黑船)’가 나타났을 때 ‘스스로’ 개항하고 해군 세력을 키웠다.

중국은 아편전쟁의 패배 이후로도 해양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 변화를 취하지 않았다. 북경의 청 조정은 여전히 운하를 이용한 북경으로의 물자 조달에 힘을 기울이며 가급적 오랫동안 현상을 유지하려 했다. 실제 운하는 1850년대까지 그 역할을 감당했다. 하지만 남방에서 태평천국 군대가 일어나 운하 수로망을 가로막자 운하에 대한 유지와 보수가 중단돼 치수가 약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853년부터 연달아 발생한 황하의 범람 및 노선 변경으로 인해 대운하의 남쪽 구간은 물난리가 났고, 제대로 된 보수 공사가 이뤄지지 않았다. 결국 청조도 운하에 대한 오랜 집착을 버리고 해운을 통한 조운으로 노선을 변경하기 시작했다. 1860년대의 일이다.

바로 그 시기에 통주에 도착했던 연행사 신석우(申錫愚 1805~1865)는 이렇게 변화된 상황을 체감했다. 연행길에 반드시 봐야 했던 ‘장관’으로 손꼽히던 ‘통주의 선박’ 풍경은 그야말로 과거의 전설처럼 느껴졌다. ‘영국 오랑캐’와의 전쟁(2차 아편전쟁을 말함)으로 통주가 먼저 공격을 당했지만 노략질과 방화의 피해는 없었기에 시장의 외형은 옛 모습 그대로였다. 도망가서 흩어졌던 상인들이 근래 다시 모여들고 있지만 ‘아직 문을 닫은 가게가 많아 낮에 보는 광경은 매우 쓸쓸’했다. 무엇보다 통주의 자랑이었던 운하를 가득 메운 선박 행렬과 번성함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석우가 이를 기록한 이유가 있었다. “아무리 번화한 곳이라도 쇠하는 때가 있는 법인데 내가 온 이 시점이 바로 그러하기 때문”이었다.15

35년 전만 하더라도 통주를 방문했던 조선인은 ‘노하(潞河, 통주의 운하를 지칭)의 배와 노를 보지 않고는 황제가 거하는 도성의 웅장함을 알지 못한다’고 노래했는데16 그렇게 운하 교통망으로 번성했던 통주도 쇠하는 때가 온 것이다.

“아무리 번화한 곳이라도 쇠하는 때가 있는 법”이라는 조선인 신석우의 언급은 급변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에도 묘한 기시감을 던져준다. 운하 교통망이 번성했던 기간이 아무리 길었다 하더라도 19세기 중엽에 이르면 ‘과거’의 일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때 모두가 다 쇠락을 경험한 것은 아니었다. 운하라는 과거의 영광과 번영에 집착하던 이들은 쇠락이라는 쓴잔을 마셔야 했지만 기선과 철도라는 새로운 가능성에 도전했던 이들은 또 다른 번영의 플랫폼으로 갈아탈 수 있었다. 기선과 철도 역시 번영했지만 결국 쇠하는 때를 맞이했다. 지금은 자동차와 비행기의 시대이지만 이 역시 쇠하는 때가 있을 것이다.

교통망은 단순히 새로운 기술에 의해 대체되는 것이 아니다. 기술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이를 이용하는 인간들의 호응과 유행을 동반해야 그 대체가 진정한 변화와 성장으로 연결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시간과 공간(거리), 이동에 따르는 비용에 대한 본질을 탐구함으로 기존의 인식을 새롭게 할 때만이 어떠한 형태의 모빌리티 혁명에도 적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효율성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안정성, 공정성, 평등성, 친환경성 등도 고려해야 한다.17 이러한 통합적 지혜는 결국 다시 역사에 대한 진지한 묵상과 현실 세계와의 끊임없는 대화로부터 도출될 것이다.
  • 조영헌 | 고려대 역사교육과 교수

    필자는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중국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의 방문 학자와 하버드-옌칭 연구소 방문 연구원을 거쳐 서울대 동양사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중국 근세 시대에 대운하에서 활동했던 상인의 흥망성쇠 및 북경 수도론이 주된 연구 주제이고, 동아시아의 해양사와 대륙사를 겸비하는 한반도의 역사 관점을 세우는 데 관심이 있다. 저서로 『대운하 시대, 1415-1784: 중국은 왜 해양 진출을 ‘주저’했는가?』 『대운하와 중국 상인: 회양 지역 휘주 상인 성장사, 1415-1784』 『엘로우 퍼시픽: 다중적 근대성과 동아시아(공저)』 등이 있다.
    chokra@kore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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