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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운하 시대 중국 상인 이야기

‘초연결’의 시대, 영감의 원천 될 상업의 神

조영헌 | 363호 (2023년 02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중국 대운하 시대에는 다양한 실존 인물들이 상업의 신으로 추앙받았다. 최고 상방으로 손꼽힌 휘주 상인들은 실존 인물인 주희를 신앙화했고, 휘주 상인들의 라이벌이던 산서 상인들은 관우를 신으로 모셨다. 바다를 주 무대로 삼았던 복건 상인에게는 마조라는 여신이 있었다. 중국 상인들이 각자의 상인의 신을 숭배한 데는 다소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다. 예컨대, 당시 엘리트였던 신사층은 주자학을 사회 이념으로 삼았으며, 휘주 상인들은 주자를 신으로 섬기며 신사 층과 연결됐다. 이처럼 중국 상인들은 상업의 신을 통해 결속과 안전을 비는 동시에 계층적 한계를 뛰어넘고자 하는 욕망을 전달하기도 했다.1



상업의 신, 헤르메스

‘상업의 신’ 하면 떠오르는 신은? 그리스신화에 익숙한 독자들은 제우스의 아들이자 제우스의 심부름을 도맡는 전령(傳令)의 신인 헤르메스를 떠올릴 것이다. 제우스는 헤르메스를 전령 신으로 삼으면서 지팡이 하나와 날개가 달린 가죽 신발을 주었다. 신이든 인간이든 건드리기만 하면 바로 잠이 들게 하는 마법의 지팡이와 하루에 만 리 길을 너끈하게 달릴 수 있게 한다는 마법의 신발이었다. 올림포스의 12신 가운데 이승과 저승을 자유자재로 오르내리는 신은 헤르메스밖에 없다. 또 헤르메스는 말솜씨도 좋고 거짓말을 해도 표시가 잘 안 나서 상업이나 도박을 주관하게 됐다. 즉 경계를 넘나드는 신이자 경계를 넘나드는 상인을 지켜주는 신이었다.

신화에서 헤르메스는 갈등 상황에서 상대방과 직접 대결하기보다는 타협하거나 협상하는 것을 선호한다. 싸우지 않고 서로 타협하고 협상하면 훨씬 나은 이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모든 거래의 목표다. 상업과 협상의 신 헤르메스는 이처럼 평화적인 거래를 통해 이득을 얻기를 좋아했다. 헤르메스의 이런 성향과 역할로 인해 두 마리의 뱀이 붙어 있는 그의 지팡이인 케리케이온은 오늘날 무역과 상업, 협상을 상징하는 디자인 요소로 각종 로고나 마크, 엠블럼 등에 적극 활용되고 있다. 스페인 화가인 페레 파우 문타냐(Pere Pau Muntanya, 1749~1803)는 ‘바르셀로나항의 보호자 무역청’을 그리면서 헤르메스를 무역의 보호자로 부각시켰다. 심지어 무력을 앞세운 유럽의 무역 공세에 복속됐던 중국 해관총서(海關總署, 수출입 통관 업무를 총괄하는 관청)도 케리케이온에 열쇠가 교차하는 이미지를 엠블럼으로 사용한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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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상업의 신이 된 주희

그렇다면 중국의 대운하 시대(1415~1784)에는 어떤 상인의 신이 있었을까? 당시 최고의 상방으로 손꼽혔던 휘주(徽州) 상인들은 실존 인물인 주희(朱熹, 1130~1200)를 신앙했다. 상인들이 주자학의 창시자인 주희를 숭배했다는 것은 분명 이채로운 사실이지만 이는 시대적인 특징을 고스란히 반영한 결과이다.

휘주인들은 주희의 고향이 휘주라는 점을 주목해 주희를 전유화하기 시작했다. 전통 시대 중국에서 동향(同鄕)이라는 공통점은 변함없이 작동하는 신뢰의 조건이었다. 하지만 사실 주희는 휘주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그가 실제로 태어난 지역은 복건성(福建省) 우계(尤溪)지만 그의 조적(祖籍, 조상들의 고향)이 휘주였다. 주희가 휘주에 머문 적도 있었으므로 휘주인들은 주희를 자신들의 조상이라 주장할 수 있었다.

장사를 위해 객지로 진출한 휘주 상인들은 어디에 가든 주희를 본받아야 할 대상으로 숭상하며 제사했다. 이를 위해 휘주 상인은 주희를 제사하는 종교적 공간이자 동향인들의 상호 부조를 위한 상업적 공간으로 자양서원(紫陽書院)을 건립했다. 자양은 휘주 흡현(歙縣)에 위치한 산 이름이자 주희의 조상이 이곳에서 독서를 했던 곳이다. 복건에서 태어난 주희 역시 그곳에 만든 자신의 독서실을 자양서실(紫陽書室)이라 불렀다.

휘주 상인들이 주자를 상업의 신으로 숭배했던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들이 활동했던 대운하 시대의 주도적 사회 이념이 바로 주자학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상품경제가 발전하고 장거리 유통업이 활성화돼 각지에서 돈 많은 상인들의 위상이 높아져도 주자학이 지배 이데올로기로 강고하게 버티고 있는 한 과거제(科擧制)를 매개로 지역 엘리트로 군림하던 신사층은 쉽게 넘어서기 어려운 존재였다. 장사를 위해 전국 방방곡곡의 어디를 가도 지역사회의 여론을 주도하는 신사층과 그들을 이념적으로 연결해주는 주자학적 세계관을 마주할 수밖에 없던 시대가 바로 15~18세기 중국 사회였다.

이러한 현실을 넘어서는 새로운 세계관을 개척할 것인가, 아니면 현실에 빠르게 적응할 것인가? 휘주 상인들이 취한 전략은 후자였다. 그들은 ‘신사화(紳士化)된 상인(gentrified merchants)’으로 스스로의 이미지를 각인하기 시작했다. 이때 주희를 향한 제사와 기도는 신의 한 수와도 같은 선택이었다. 실제로 휘주 상인들의 자제들 가운데 과거에 합격하는 비율이 다른 상인들에 비해 월등하게 높았으니 휘주 상인에게 주희의 신적 영험함은 관념이 아니라 실재였다. 더불어 주희에 대한 신앙은 휘주 상인을 단순히 돈만 버는 졸부의 이미지에서 탈피시켜 주는 것으로 시작해 신사층과 교류할 수 있는 교양과 품위를 갖추는 실질적인 도움으로까지 이어졌다.3

휘주에 “동남추노(東南鄒魯)”라는 별칭이 붙은 것이나 휘주 상인을 “상업에 종사하면서도 유학을 좋아한다”는 ‘고이호유(賈而好儒)’의 대표자로 부르게 된 것도 주희 신앙과 관련이 깊다.

주희의 라이벌 신, 관우

당시 휘주 상인의 라이벌이었던 산서(山西) 상인은 소설 『삼국지연의』의 인물로 유명했던 관우(關羽, ?~219)를 신앙했다. 주자가 문인들의 우상이었다면 용맹하기로 유명했던 관우는 무인들의 우상이었으니, 상업 세계뿐 아니라 신앙 세계에서도 휘주인과 산서인은 라이벌이라 할 만했다.

관우 역시 본래 상업과 관련이 없기는 주희와 마찬가지였다. 진수(陳壽, 233~297)의 역사책 『삼국지』에도 관우는 의로운 절개를 지닌 호방한 용장(龍將)으로 묘사될 뿐이다. 이후 천여 년이 지나 나관중(羅貫中)이 소설 『삼국지』로 관우에게 생동감을 불어넣으며 ‘의리’의 화신으로 각색할 때에도 상업과 직접 관련된 이야기는 담기지 않았다. 다만 관우는 송·원 시대에 민간을 중심으로 신격화되기 시작하더니 명나라 초기에 조정으로부터 국가 제사 속으로 편제됐다가 명 후기에는 ‘관제(關帝)’로까지 올라가게 됐다. 일개 ‘제후(諸侯)’의 작위를 지닌 실존 인물이 사후에 ‘제(帝)’라는 시호를 받을 정도로 신분이 상승한 사례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관우의 충, 절개, 의로움이라는 긍정적 이미지는 민간이나 조정에서 모두 환영받으면서 관우는 무장에서 무신(武神), 그리고 관제로까지 승격된 것이다.4

여기에 더해 청나라 시기부터 관우에게는 재신(財神)의 이미지까지 덧붙여졌다. 이는 당시 관우의 고향이 산서성 해현(解縣)이라는 동향 관계를 이용했던 산서 상인의 역할이 컸다. 이전 시기부터 객지로 많이 진출했던 산서 상인들은 경쟁 상인들이 동향을 매개로 상업의 신을 내세우며 결집의 도구로 활용하는 것에 고무돼 관우를 선택했다. 대체로 타지로 진출한 상인들은 15세기부터 자신의 고향과 관련된 민간 신앙을 숭배하는 서원이나 사원을 회관으로 활용했다. 상업에 대한 국가의 안정적인 법률적 보장이 없는 상황에서 민간 신앙은 객지에서 상업 활동의 안전과 번영을 지탱하는 역할을 수행했다.5

산서인들은 대체로 명 중후기부터 수도 북경에 자신들의 회관을 건립해 상부상조했다.

청대에 들어와 산서 상인들의 회관은 북경 이외에 유통망의 중심지로 확산하기 시작하는데 이때 그곳에 관우의 묘를 만들어 자신들을 보호하고 또 재운을 가져다주기를 빌었다. 이는 관우 신앙을 적극적으로 포용해 한족 지배와 국가 통합에 활용했던 만주족 지배층의 전략과도 호응했다.6

그들은 보통 기존에 설치된 관우의 사당이나 관제묘(關帝廟)를 활동의 거점으로 삼아 회관의 기능을 겸하기도 하고, 회관을 건립한 후 그곳에 관우의 제단을 건립하기도 했다. 하남성의 남양(南陽), 개봉(開封), 낙양(洛陽), 그리고 산동성의 요성(聊城)이나 강소성 소주(蘇州)에 건립된 산서인들의 회관이 모두 청 건륭제의 치세 기간인 18세기 중후반에 건립됐다. 청 중엽 산서 상인들의 진출 지역이 확산할수록 재물신으로서 관우의 이미지 역시 각지로 전파됐다.

산서 상인들은 경영 초기에 섬서(陝西) 출신 상인들과 함께 회관을 건립하곤 했다. 회관의 이름도 두 지역의 첫 글자를 따서 ‘산·섬회관’으로 붙였다. 산서성과 섬서성이 지리적으로 인접한 까닭도 있었지만 실상은 두 지역 상인 모두 초반엔 객지에서 세력이 강하지 않았기에 협력을 통해 세력을 키우기 위함이었다. 명대 대운하 도시이자 소금 유통업의 중심지였던 양주(揚州)에 진출한 산서와 섬서 출신 상인들은 소금을 감독하는 관청이 자리한 신성(新城)에 산·섬회관을 함께 건립해 활동의 거점으로 삼았다. 청대 하천의 지류 변천을 통해 사통팔달한 수륙 교통의 요충지로 성장의 계기를 마련했던 하남성 남양의 사기진(賖旗店)에 진출했던 산서 상인도 경영 초반엔 섬서 상인과 함께 산·섬회관을 건립했다. 특별히 이곳은 산서 상인이 동남쪽 무이산(武夷山)에서 생산된 고품질의 차를 서북의 몽골과 러시아 지역으로 수출하는 과정에서 경유해야 하는 물류의 거점이었다. 반대로 개봉에 청 건륭 연간에 독자적인 회관을 만들어 활동했던 산서 상인은 이후 도광(道光) 연간에 섬서 상인이 합류하게 되자 회관 이름을 산·섬회관으로 바꾸기도 했다.7

산서 상인들이 세운 회관에는 늘 관우를 제사하는 사당이 마련되고 관우의 의로움을 칭송하는 문구가 대문의 대련(對聯)이나 비문에 적혀 있었다. 왕래하는 이들은 관우에게 기도하면서 이를 묵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 통해 산서인들은 관우를 자신들의 정신적 지주로 승화시켜 관우의 의리와 절개의 정신으로 이윤 추구를 합리화하는 동시에 천박한 부의 축적 방식을 경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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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의 상업신, 마조

육지에서 활동하던 휘주와 산서 상인에게 주희와 관우라는 남성 신이 있었다면 해양으로 활동을 전개했던 복건 상인에게는 마조(媽祖)라고 불리는 여신이 있었다. 마조 역시 실존 인물인데 북송 초기에 복건 보전현(莆田縣) 미주도(湄洲島)에서 태어난 임씨(林氏) 집안의 딸로 알려져 있다. 그녀에 대해서는 여러 전설이 남아 있는데 공통적으로 생전에 별다른 이적은 없었으나 사후에 항해자들이 바다에서 재난을 만날 때마다 구해주는 영험이 있다고 알려지면서 해신으로 숭배됐다.8

이후 복건의 어민들과 상인들은 마조를 자신들의 신으로 섬기기 시작했고 복건 상인들의 진출 경로를 따라 마조 신앙 역시 복건과 바다 사이에 있는 대만과 연해 지역으로 확산했다.

복건 상인이 마조를 선택한 또 다른 이유가 있는데 역대 왕조 권력이 마조를 현창하며 높여줬기 때문이다. 이는 휘주 상인이 주희를, 산서 상인이 관우를 신앙의 대상으로 선택한 맥락과 정확히 일치한다. 상거래의 현실 세계에서 초자연적인 도움과 보호를 갈구했던 상인들은 지역적인 연관성을 지니면서도 현실 세계에서 영험을 기대할 수 있는 신령을 찾았던 것이다.

마조 신령이 처음 국가 권력의 관심을 끌었던 시기는 남송 시대였다. 바다로 왕래하는 항해자들이 강한 풍랑이나 해적선을 만날 때마다 마조가 등장해 위험에서 구해준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남송 조정에서는 복건 보전현에 매년 봄과 가을에 관리를 파견해 마조를 위한 성대한 제전(祭典)을 베풀었다. 당시 남송 정부는 북방의 거란과 여진족에 밀려 항주에 임시 수도를 두고 남하한 상태였다. 북방의 육상에서는 군사적 열세였기에 아무래도 해상 교역과 진출을 통해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야 했던 남송 정부로서는 마조 신앙을 현창함으로 외부로부터의 위험에서 보호를 간구했다.

남송을 멸망시킨 몽골족의 원은 다른 이유에서 더 적극적으로 마조 신앙을 후원했다. 원은 남송을 정벌하면서 수도를 지금의 북경인 대도(大都)에 새롭게 건립했다. 당시 대도 주변에는 별다른 경제적 기반이 없었기에 필요한 물자를 양자강 이남의 풍요로운 강남 지방에서 조달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쿠빌라이 칸은 수양제가 건설했던 수당대운하의 노선을 대폭 수정해 항주와 북경(대도)을 직접 연결하는 경항대운하를 재건하는 한편 강남의 연해 항구인 유가항(劉家港)에서 천진(天津)까지 곡물을 운송하는 바닷길을 열었다. 대운하를 이용한 하도(河道) 조운과 바닷길을 활용한 해도(海道) 조운을 병행한 것인데 실제로는 해도 조운량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자연히 해상으로의 운송 과정에서 풍랑이나 해적의 공격 위험에 노출되는 빈도가 많아졌고, 이에 원 조정은 1278년 마조에게 ‘천비(天妃)’라는 봉호(封號)를 부여하며 격을 올려 현창함으로써 해도 조운에서 마조의 보호와 영험함을 간구했다.9

바닷길을 통해 왕래하는 조운선이 도달하는 천진에 해운의 안전을 기원하는 마조의 사당이 세워진 것이 원 시기였고, 마치 서울에 인천항이 연결돼 광범위한 수도권을 형성하듯 북경과 천진항을 연결하는 수도권이 형성됐다.

몽골족을 몰아낸 명의 주원장은 수도를 남경에 두고 해금 정책을 강제했기에 마조는 명 시대에 이전과 같은 국가의 현창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다시 이민족인 만주족의 청이 집권한 후 마조는 몽골족의 원 이상으로 격이 올라갔다. 청은 대만에 근거지를 두었던 정성공(鄭成功) 세력을 진압하는 과정에 마조가 나타나 해군을 도와줬다는 이유로 1684년 마조에 대한 봉호를 ‘천비’에서 ‘천후(天后)’로 격상시켰다.10

이후로도 청은 안보에 위협을 느낄 때마다 모두 13차례나 마조의 봉호를 올려주었다. 이에 마조의 명칭은 ‘해신낭랑(海神娘娘)’ ‘천비’ ‘천비낭랑(天妃娘娘)’ ‘천후’ ‘천상성모(天上聖母)’ 등 다양해졌고 오늘날까지도 바다 건너 해외로 흩어진 화교들에게 가장 숭상되는 신으로 손꼽힌다.

이처럼 송, 원, 그리고 청으로 이어지는 시대 변화 속에서 마조의 신격이 계속 상승하면서 대중성을 확보하자 복건 상인도 동향 출신의 마조를 자신들의 상업신으로 삼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객지로 진출하는 복건인들은 대부분 선박으로 이동이 가능한 곳을 선호했고, 그들의 배에는 화물과 함께 이동의 안전과 상업의 성공을 기도하는 마조의 신상이 탑재돼 있었다. 복건 상인은 외지로 진출해 쟁쟁한 다른 지역 상인들과 경쟁하면서 마조에 대한 신앙도 전파했다. 명 시기에 대운하를 이용해 북상하던 복건 상인은 운하 도시 양주에 마조 신앙을 전파했고, 이후 복건 상인이 떠난 자리에 세력을 장악했던 휘주 상인이 마조를 신앙하는 천비궁(天妃宮)을 1666년에 재건했다. 해신이 하신(河神)으로 변화되고 신앙의 주체가 복건 상인에서 휘주 상인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당시 천비궁 재건을 주도했던 휘주 상인의 노림수는 더 이상 마조를 전유화하는 데 있지 않았다. 대운하를 왕래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쉽게 방문해 안전과 성공을 기도할 수 있는 종교 시설을 무상으로 제공함으로써 기부하는 상인이라는 좋은 평판을 획득하고 이를 통해 상인이지만 지역 엘리트로 거듭나고자 한 것이다.11

경계를 뛰어넘는 상인과 상업의 신

헤르메스는 신이지만 다분히 인간의 욕망이 투영된 세속의 대리인처럼 행동한다. 이윤 추구를 지상 과제로 하는 상인이라면 누구나 헤르메스와 같은 신의 도움과 지혜를 갈망할 것이다. 욕망의 극대화와 자유로운 발현을 부정하지 않는 신은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나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중국의 대운하 시대에 중국 상인들이 숭배했던 신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운하 시대(1415~1784)에 해당하는 초기 근대(15~18세기)의 유럽은 이른바 ‘대항해 시대’가 시작되면서 국경과 대륙을 초월하는 거래가 활성화됐다. 이에 유럽 상인들은 경계를 뛰어넘는 무역과 교역에 있어 지식과 정보의 중요성을 체감하게 됐다. 이러한 인식 변화가 미술계에 다시금 상업의 신 헤르메스를 소환했다. 이른바 유럽 미술에서 ‘에로스의 교육’이라는 주제가 탄생한 것인데 말썽꾸러기 에로스의 스승으로 온 세상을 다니면서 온갖 지식과 정보를 습득한 헤르메스가 그려졌다. 무역과 교육은 지식과 정보를 확산시킨다. 상업의 신이 이런 시대에 교사가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지식과 정보의 확산은 더 많은 이윤 창출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초기 근대 유럽은 이렇게 헤르메스를 최고의 스승으로 찬미하기 시작했다.12

동일한 중국의 대운하 시대에 주희, 관우, 마조와 같은 실존 인물이 사후 상업의 신으로 숭배됐던 것도 유사한 현상이었다. 상인들은 이들을 자신의 회관, 서원, 사당을 지어 찬미했지만 이들을 숭배한 이들은 상인에 국한되지 않았다. 이러한 회관, 서원, 사당을 왕래하는 사대부, 관리, 부녀자, 그리고 하층 노동자들은 모두 종교 공간에서 제사 의식을 하는 동시에 이들을 후원하는 상인들의 막강한 파워와 상업의 신이 전해주는 메시지의 세례를 받고 있었다. 상인들은 상업의 신을 통해 결속을 다지고 안전한 성공을 기도했지만 이를 통해 상인이라는 계층적 한계성을 뛰어넘고자 하는 상인들의 욕망과 상품경제의 메시지는 각지의 도시사회로 전파됐다. 역참제나 대운하와 같은 초지역적 교통로를 통해 거대한 중국이 작은 지역 경제권에서 전국적인 경제권으로 연결되자 초지역적인 객상들의 이동 경로를 따라 상업의 신 역시 경계를 뛰어넘어 확산했다. 상품과 돈이 온 세상을 넘나드는 것처럼 이들에 대한 지식과 정보, 신앙심마저 퍼져나갔다. 모든 것이 연결돼 마치 ‘초연결’의 시대로 전환하는 오늘날 경제와 종교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주목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중국의 상업 신은 적지 않은 영감을 줄 것이다.
  • 조영헌 | 고려대 역사교육과 교수

    필자는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중국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의 방문 학자와 하버드-옌칭 연구소 방문 연구원을 거쳐 서울대 동양사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중국 근세 시대에 대운하에서 활동했던 상인의 흥망성쇠 및 북경 수도론이 주된 연구 주제이고, 동아시아의 해양사와 대륙사를 겸비하는 한반도의 역사 관점을 세우는 데 관심이 있다. 저서로 『대운하 시대, 1415-1784: 중국은 왜 해양 진출을 ‘주저’했는가?』 『대운하와 중국 상인: 회양 지역 휘주 상인 성장사, 1415-1784』 『엘로우 퍼시픽: 다중적 근대성과 동아시아(공저)』 등이 있다.
    chokra@kore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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