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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BR Case Study: 활명수의 120년 브랜드 전략

힙합세대의 취향까지 모두 소화, 120살 장수 비결은 ‘소통 마케팅’

김동원,장재웅 | 232호 (2017년 9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활명수’는 1897년 개발돼 120년의 역사를 이어온 국내 최장수 제품이다. 100년 넘게 명맥을 유지하면서도 여전히 소화제 시장점유율 70%를 차지하고 있고 지금까지 85억 병이 팔렸다. 활명수가 여전히 높은 매출을 기록하고 있는 이유는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 지속적인 변화를 모색한 덕분이다. 고객 세분화를 통한 제품 라인업 강화, 유통 채널 강화뿐만 아니라 시대를 앞서나간 브랜드 관리와 가격 정책 등 활명수의 장수에는 근대적 기업 경영의 원칙들이 숨어 있다. 최근에는 소비자와의 소통에 중점을 둔 마케팅 전략을 통해 젊고 쿨한 브랜드 이미지 확립에 주력하고 있다.


스카치테이프, 호치키스, 포스트잇. 이 단어들의 공통점은 바로 상표가 보통명사로 굳어졌다는 점이다. 스카치테이프는 셀로판테이프, 호치키스는 스테이플러 등 원래 해당 제품을 부르는 보통명사가 있지만 이들 제품이 워낙 큰 인기를 끌면서 브랜드명이 보통명사의 자리를 대신했다.

브랜드가 고유명사화된 경우는 국내에도 있다. 초코파이, 진로, 딱풀 등이 그것이다. 그중에서도 활명수는 부채표라는 상표와 함께 속이 더부룩하고 소화가 안 될 때 마시는 소화제의 대명사로 사용되고 있다.

동화약품이 판매하는 활명수는 올해로 출시 120주년이 된 스테디셀러 브랜드다. 1897년생으로 아스피린과 동갑이며,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제1호 브랜드’다. 두 세기 전 만들어진 제품이지만 여전히 1년에 1억 병씩 팔린다. 동화약품이 활명수로 벌어들이는 매출만 1년에 540억 원에 달한다. 제품 인지도가 99.3%(출처: 갤럽 2015)에 이른다는 조사결과도 있으니 활명수라는 브랜드는 대한민국 사람이면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활명수는 임금을 경호하던 궁중 선전관 노천(老川) 민병호 선생이 급체나 토사곽란에 걸려 목숨을 잃는 백성을 위해 궁중 비방과 서양의학을 접목해 만든 의약품이다. ‘생명(命)을 살리는(活) 물(水)’을 뜻하는 활명수는 민 선생이 한약건재를 넣고 달인 원액에 중국에서 수입한 아선약과 정향, 박하 등을 추가해 탄생했다. 활명수는 당시 백성들에게 만병통치약으로 알려지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후 활명수는 일본의 식민 지배, 한국전쟁 등 불안한 정세 속에서도 꾸준히 국민 소화제로서의 지위를 지켜왔다. 특히 시장 상황과 소비자 기호의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하며 다양한 신제품을 내놓으면서 지속적으로 사랑받았다. 탄산을 첨가한 까스활명수를 내놓은 것이나 최근 여성과 어린이를 타깃으로 한 ‘미인활명수’와 ‘꼬마활명수’ 등을 선보인 것이 그 예다. 또 초기에는 고가 가격 전략을 통해 프리미엄 제품 이미지를 구축했다가 이후 용량을 줄이고 가격을 낮추면서 대중적인 제품으로 리포지셔닝했다. 또 1910년대부터 신문 전단 광고 등을 공격적으로 시도하기도 했다.

동화약품이 1910년 활명수를 정식 상품으로 등록하고 부채표를 상표 등록했다는 점도 당시 우리나라에 상표권이나 특허의 개념이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놀랍다고 할 수 있다. 이를 토대로 동화약품은 1996년 한국기네스협회로부터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제조·제약회사, 국내 첫 등록상품과 등록상표 등 4개 부문 인증을 받기도 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활명수를 만든 동화약품이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한 기업이라는 점도 눈여겨봐야 한다. 동화약품의 초대 사장인 민강은 중국에서 활동하던 임시정부와 연락하며 독립운동 자금과 정보를 건네기 위해 ‘서울 연통부’란 비밀단체를 동화약품의 전신인 동화약방에 뒀다. 당시 독립운동가들은 한 병에 50전(당시 시세로 설렁탕 두 그릇 가격)이나 하는 활명수를 들고 중국으로 가 현지에서 활명수를 팔아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했다고 한다.

정치적·경제적 불확실성이 극도로 높았던 한국의 시장 상황에서 활명수가 무려 120년 동아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활명수 사례는 불확실성이 극도로 높은 현대 경영 환경에서 장수 브랜드를 육성하고 싶은 많은 마케터들에게 큰 교훈을 준다. 활명수가 어떻게 브랜드 자산을 관리해 장수 브랜드가 될 수 있었는지 DBR이 집중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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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년 동안 국민 건강 책임진 활명수

활명수는 대한제국 원년인 1897년 9월 세상에 나왔다. 우리 역사의 부끄러운 장면 중 하나인 을미사변이 일어난 지 2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다. 그즈음 친일 내각이 단발령을 내려 민심이 흉흉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때 요즘으로 치자면 경호실 간부쯤에 해당하는 선전관(조선시대 선전관청에 속한 무관 벼슬로 품계는 정삼품부터 종구품까지) 출신의 노천(老川) 민병호 선생이 궁중 비방으로 활명수(活命水)를 개발하고 동화약방을 창업한다.

 

활명수의 초기 성공 요인(∼ 한국전쟁)

1. 한의학과 양의학의 컬래보레이션

활명수를 개발한 동화약방의 초대 회장 노천 민병호 선생은 당시 선전관으로 있으면서 평소 의약품에 대한 관심이 지대해 전의(조선 후기 때 궁내부의 태의원에 속해 왕실의 의료에 관한 업무를 맡아보던 주임관)들과 교류하면서 궁중 비방을 습득했다. 또 그는 기독교 신자로 서양 선교의사들과 접촉하면서 서양 의약에 눈을 떴다. 활명수는 바로 궁중 비방에다가 양약의 이점을 더한 한의학과 양학의 협업으로 탄생한 제품인 셈이다. 한약처럼 오랜 시간 달여서 먹어야 하는 약이 전부였던 시절에 활명수는 그 편리함과 신속한 효력 덕분에 출시와 함께 큰 인기를 끌었다. 특히 왕정국가였던 당시 상황에서 궁중의 비방을 바탕으로 일반 대중을 위한 약을 만들었기 때문에 활명수는 출시 초기부터 소비자들의 높은 신뢰를 받았다. 요즘에도 재벌가나 연예인들이 사용하는 제품이라는 식의 광고들을 많이 볼 수 있는데 당시에 궁중의 비방을 활용해 만든 약에 대한 소비자들의 관심이 높았음은 어렵지 않게 짐작해 볼 수 있다.

2. 탁월한 네이밍

활명수는 특히 지금 생각해도 탁월한 네이밍 전략을 활용했다. 활명수는 ‘생명을 살리는 물’이라는 뜻이다. 활명수 출시 시점에 국운이 기울어 많은 국민들은 끼니를 걱정했다. 당장 언제 무엇을 먹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으니 한 번 먹을 것이 생기면 폭식을 하는 것이 당연했다. 1890년대 한양을 찾은 영국인 여행가 이사벨라 비숍이 남긴 자료에는 ‘조선 사람들은 한 사람이 3∼4인분을 먹어 치우고 3∼4명이 앉으면 20∼25개의 복숭아와 참외가 없어지는 건 다반사’라고 적혀 있다. 임진왜란 피란기 <쇄미록>에는 당시 성인 남자가 한 끼에 7홉(밥 5공기)이 넘는 양의 쌀을 먹었다는 기록도 있다. 지금보다 몸집도 작은 당시 사람들이 이렇게 밥을 많이 먹은 이유는 다음 끼니를 기약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렇게 한 번에 대식을 하다 보니 불규칙한 식사로 배앓이가 잦았다. 하지만 마땅한 치료제가 없어 급체와 토사곽란만으로도 목숨을 잃은 이가 많았다. 활명수는 당시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양약이었고 그래서 ‘생명을 살리는 물’이라는 네이밍은 시대를 앞서갔다는 평가다.

3. 시대를 앞서간 브랜드 관리

활명수 출시 당시에는 브랜드라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브랜드를 방어해야 한다는 개념도 없었던 시절이다. 그러나 활명수는 당시 브랜드 보호 측면에서 대단히 선구적인 선례를 남긴다. 동화약방은 활명수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부채표를 1910년 8월15일에 우리나라 최초로 상표 등록한다. 특허와 상표의 중요성을 발 빠르게 인식한 조치였다. 이어 같은 해 12월16일에는 활명수도 상표 등록을 한다. 이후 1912년경부터 활명수의 인기에 편승해 활명수의 이름을 모방한 유사 상표가 속속 등장하자 동화약방은 1919년 활명수 상표 보호를 위해 ‘활명액’이라는 유사 상표를 방어용 상표로 등록한다. 이러한 방어 전략은 요즘엔 보편적이지만 당시로써는 혁신적인 조치였다고 할 수 있다.

4. 고가 가격 전략을 통한 프리미엄 이미지 확보

현재 활명수의 병당 가격은 75ml 제품 기준 800∼1000원이다. 라면 1개 가격과 비슷하다. 그러나 1910년 활명수의 가격은 무려 40전이었다. 현재 시세로 치면 대략 1만8000원 정도의 가격이다. 당시 설렁탕 두 그릇 가격과 맞먹는다. 활명수가 발매 초기 궁중 비방이라는 프리미엄 이미지를 활용해 고가 전략으로 신뢰할 수 있는 고급 제품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 소비자에게 다가갔음을 알 수 있다. 신제품에 대한 가격 결정 방식에는 초기 고가 전략과 초기 저가 전략이 있다. 활명수가 활용한 초기 고가 전략은 처음에 고급 이미지로 오피니언 리더 고객들에게 제품을 판매하다 시간이 지나면 점차 가격을 낮춰 고객층을 확장하는 방식이다. 활명수는 이후 1930년대 30전, 1965년에 23원 등으로 가격을 낮추면서 점차 대중적인 브랜드로 자리 잡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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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명수는 탁월한 품질과 시대를 앞서가는 마케팅 전략으로 초기에 성공적으로 시장에 안착한다. 하지만 일제강점 이후 급변하는 국내 정세로 인해 동화약방이 어려움을 겪으면서 활명수 역시 시장에서 많은 부침을 겪게 된다. 특히 동화약방의 초대 사장인 민강 사장은 1919년 3·1 만세 사건 이후 상하이 임시정부와 한국 간 비밀 연락망인 서울연통부를 동화약방 사무실에서 비밀리에 운영하다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이후 일제로부터 지속적인 탄압을 받아 사업이 어려워진 동화약방은 파산을 면하기 위해 회사를 회생하고 키워나갈 수 있는 인물에게 회사를 넘기는데 그 인물이 바로 보당(保堂) 윤창식 선생이다. 보성전문(고려대의 전신)상과를 졸업한 윤창식 사장은 동화를 맡아 당시로써는 현대적인 경영기법을 도입해 회사를 키워나간다. 하지만 일제 치하 이후 광복, 그리고 한국전쟁 발발로 이어지는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활명수도 국가의 운명만큼이나 힘든 시기를 보내야 했다.

 

활명수의 고도 성장기(60∼70년대)

한국전쟁 이후 혼란이 잦아들면서 활명수는 제2의 도약을 위한 힘 고르기를 시작한다. 
1962년 사명을 주식회사동화약방에서 동화약품공업주식회사로 변경했다. 이후 1963년 보당 윤창식 사장의 장남인 윤화열 사장이 6대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동화약품은 고도 성장기를 맞이한다. 1960∼70년대는 제약산업에 대한 국가적 기틀이 잡히던 시절이자 생산부터 제조까지 근대화가 진행된 시절로 요약할 수 있다. 특히 1967년 까스활명수의 출시는 활명수라는 제품이 120년을 이어올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됐다는 평가다.

1. 제약산업의 도약과 생산 및 제조의 현대화

1960년대 우리나라 제약 산업은 10년 동안 연평균 35.5%의 폭발적 성장세를 기록했다. 제약산업의 도약과 함께 생산 및 제조설비 현대화도 진행했다. 동화약품의 경우 1963년 회사 매출액이 1억 원을 돌파하면서 생산 설비가 부족해졌다. 직원도 빠르게 늘어 100명을 넘어서면서 생산시설뿐만 아니라 사무실 공간도 필요했다. 그동안 부분적으로 증축해 공간을 확보하는 방법을 활용했으나 그마저도 한계에 봉착했다. 이에 1964년 동화약품은 공장 신축을 추진한다. 당시 정부는 원료공업 육성책을 펴면서 국내에서 원료를 생산하면 비슷한 모든 원료를 수입 금지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러한 정부 시책에 부응해 동화약품도 소화효소의 원료 생산을 구상한다. 동화약품은 일본의 효소제 전문 업체 모리모토산업과 기술 제휴를 맺고 효소 공장 신축을 추진한다.

1차 신축 공장은 1965년 3월 준공됐다. 이 신축 공장에서는 국내 최초로 최고 단위 효소의 추출과 정제 작업이 진행됐다. 2차 공장 신축은 1966년 7월 완료됐는데 활명수 조제탱크, 활명수 혼합기와 초고속도 원심분리기가 국내 최초로 설치됐다. 원심탈수기 진공농축기, 효소교반기, 효소침출기 등도 설치됐다. 생산 설비의 현대화를 이룸과 동시에 대량 생산 체제를 구축한 것이다. 이에 따라 동화약품의 생산액은 1967년 3억3100만 원을 시작으로 1968년 7억300만 원, 1969년 12억3400만 원, 1970년 17억900만 원으로 5배 이상 늘었다.

2. 트렌드에 발 빠르게 대응해 개발한 ‘까스활명수’

1960년대 초반 활명수의 기세는 눈부셨다. 하지만 활명수가 인기를 끌자 경쟁업체들이 속속 생겨났다. 그중에서도 삼성제약이 활명수와 유사한 액체 소화제에 탄산가스를 주입해 청량감을 높인 신제품 ‘까스명수’를 선보이면서 활명수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이전에도 활명수의 인지도를 활용한 유사 상품들이 난립한 적이 있었지만 대부분 단발성에 그쳤다. 하지만 까스명수는 조금 달랐다. 60년대 중반 당시 사이다와 콜라 등 탄산음료가 크게 유행했다. 삼성제약은 이런 소비자의 기호 변화에 착안해 액체 소화제에 탄산가스를 넣은 제품을 선보였고 소비자들은 이 제품에 반응했다. 그러나 70년 전통 활명수에 대한 자부심이 넘쳤던 동화약품은 초기에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한다. 까스명수도 과거의 유사 제품들처럼 반짝 인기에 그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뒤늦게 상황이 심각함을 인식한 동화약품은 발포성 소화제를 만들지를 고민하지만 쉽사리 결론을 내리지 못한다. 후발 제품을 모방한다는 것이 결국 그 제품의 우수성을 인정하는 셈이 되기 때문에 섣불리 활명수에 탄산을 집어넣기를 주저한 것이다.

결국 활명수에 탄산을 첨가해 ‘까스활명수’라는 이름을 단 제품을 만들었지만 이를 출시할지를 두고 또 한번 논쟁이 벌어진다. 동화약품의 역사이자 핵심 상품인 활명수를 두고 까스활명수를 더 좋은 제품이라고 소개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렇게 망설이는 사이 까스명수는 야금야금 시장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결국 동화약품은 더 이상 늦출 수 없다는 판단에 1966년 12월 까스활명수를 출시하며 탄산 소화제 시장에 진출한다.

게임의 양상이 탄산 대 비탄산에서 탄산 대 탄산으로 재편되면서 시장에서는 오히려 오랜 역사와 강력한 브랜드 파워를 가진 까스활명수의 인기가 올라갔다. 결국 1969년에는 까스활명수가 시장점유율에서 까스명수를 압도적으로 누르고 시장 리더 자리를 되찾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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