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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상을 통해 본 2인자 경영학

자결하거나, 방관하거나… 그러나 망국을 부채질한 재상도 있다

김준태 | 201호 (2016년 5월 lssue 2)

Article at a Glance

망해가는 기업은 자꾸 임원이 바뀐다. 누군가는 무능해서 잘려나가고, 어떤 이는 조직에서 희망을 찾지 못하고 스스로 떠난다. 물론 끝까지 남아서 자신의 이익만 챙기는 고위직들도 존재한다. 망해가던 나라 조선도 마찬가지였다. 수많은 재상들이 조선의 마지막을 장식했지만, 어떤 이는 자결했고, 누군가는 뛰어난 기개와 능력에도 불구하고변화를 읽지 못해망국을 가속화했다. 그리고 끝까지 남아 철저하게 자신의 이익만 챙겼던 경우도 있다. 우리는 세상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면 다른 능력이 뛰어나도 조직을 망하게 할 수 있으며, 무사안일하며 개인의 이익을 조직의 이익보다 우선하는 2인자는 위기의 시기일수록 가장 악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훌륭한 2인자가 있더라도 대세가 이미 기울어져 조직의 상황이 더 이상 손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 경우도 많다. 다만 2인자의 역할과 태도가 조직의 건강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만큼 이번 아티클에서 소개한 사례들을 통해 위기징조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교훈을 얻을 수 있길 기대한다. 

  

망해가는 기업이나 나라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책임을 지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그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비단 기업총수나 군주와 같은 1인자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다. 1인자를 보좌하며 구성원을 보호하고, 공동체를 이끌어가야 할 책임이 있는 2인자들도 여기에 포함된다. 조직의 안위보다 개인의 안위를 우선하고, 조직이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도 사사로운 욕심을 채우며, 무능하게 자리만 지키고,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 이들이 책임 있는 자리를 맡는 조직은 필연적으로 쇠약해진다. 더욱이 이런 사람들로지도층이 채워져 있다면 해당 공동체의 쇠망은 더 이상 막을 수 없는 운명이 된다. 조선왕조의 마지막 풍경처럼 말이다.

 

이번 글은 조선의 마지막 재상들, 고종에서 순종 때까지 영의정(관제개편에 따라 의정대신, 총리대신으로 명칭변화)을 지낸 인물들을 다룬다. 이들은 지난 연재의 주인공인 김홍집을 포함해 실패사례의 총집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모두가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에 대한 복기와 비판적인 고찰을 진행함으로써 오늘날의 2인자들을 위한 교훈을 찾아보고자 한다.

 

1. 세상의 변화를 읽지 못하다

 

나라가 망해가는 시기에 재상을 지냈다고 해서 무조건 수준미달은 아니다. 훌륭한 인품과 뛰어난 업무능력을 갖춘 사람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시대가 급변하고 국제정세의 불확실성이 심화되던 당시 상황에서 재상이라면 이러한 시대의 흐름을 읽고 선제적으로 대응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러지 않고 과거의 방식을 묵수하며 그저 답습하기만 한다면 자기 자신도 실패할 뿐 아니라 그 나라 역시 도태되게 된다.

 

1872(고종9) 1882(고종19), 두 차례에 걸쳐 영의정에 제수됐던 홍순목(洪淳穆, 1816∼1883)이 대표적이다. 그는 뛰어난 행정능력으로 대원군 집권기를 뒷받침했고 국가 재정 악화를 해소하기 위해 주력했다. 임오군란의 사후수습도 담당한다. 그러나 쇄국과 위정척사의 노선을 선택한 그는 보수적인 면모를 강하게 드러내며 개화를 반대했고,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그는 개화로 인해 천수를 누리지 못하게 됐는데, 개화파인 아들 홍영식(洪英植)이 주도한 갑신정변(甲申政變,1884)이 실패하자노신(老臣)이 역적 아들을 두어 천지간에 죄를 지었으니 만 번 죽은들 어찌 그 죄를 속죄할 수 있겠는가?”라며 자결했다. <매천야록>에 따르면 10살도 안 된 손자(홍영식의 아들)의 목숨을 직접 거두고 그 자신도 독약을 마셨다.1

 

다음으로 김병시(金炳始, 1832∼1898)는 고매한 인품과 청렴2 으로 조야의 존경을 받던 인물이다. 고종의 재위기간 동안 영의정과 총리대신, 의정대신을 재차 역임했던 그는 지방에 파견돼 많은 폐단을 양산하고 있던 어사(御史)를 소환하고, ‘차함(借銜)’3 을 폐지해 공직질서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청했다. 4 고종이 과오를 범하면 그때마다 강직한 어조로 비판했고, 눈물을 흘리고 머리를 땅에 부딪치며 간언한 일도 여러 번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사대당(事大黨)을 이끌며 개화당(開化黨)과 대립했고 개화당을 억누르고자 청나라를 끌어들였다. 1886년에는논시폐수차(論時弊袖箚)’를 올려 정부의 개국정책을 저지하기도 했다. 이 밖에 을사늑약 이후 의정대신을 지낸 조병호(趙秉鎬, 1847∼1910)도 부패관리를 탄핵하고 동래민란과 성주민란(1883)을 수습했으며 외교와 재정업무에서 능력을 발휘했으나 사대당 노선을 고집하는 한계를 보였다.

 

이처럼 훌륭한 역량을 가지고 있어도 시대의 변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능동적으로 혁신하지 않으면 이내 실패로 이어지게 된다. 옳은 신념과 가치관을 지키기 위해서라 하더라도 그옳음이 상대적인 것은 아닌지, 혹 아집에 따른 판단은 아닌지 늘 성찰해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유학(儒學)변통(變通)’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는데, 변통이란 <주역>, ‘계사전(繫辭傳)’5 에서 유래한 것으로 수시변역(隨時變易)과 인시제의(因時制宜)의 논리가 담겨 있다. “만물이 때에 따라 바뀌는 것은 이 세상 보편의 법칙6 이므로, 일정한 것에 고착돼 있으면 그것은 오래 유지될 수 없다. 따라서 시대 상황에 걸맞은 마땅함을 찾아 적절하게 변화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7

 

 

 

 

홍순목과 김병시, 조병호가 재상으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 것은 바로 이 변통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마치 현대 기업에서도 아날로그 필름 시대의 최강자 코닥이 디지털 카메라로의 전환이라는 세상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몰락한 것과 유사하다. 만약 코닥의 경영진이 고집을 버리고 적극적인 변신에 나섰다면, 즉 변통을 할 줄 알았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2. 자리만 지키다 사라지다

 

선비는 치세의 양신(良臣)이 되고 난세의 충신이 된다는 말이 있다. 평화롭고 번영하는 시기를 만나면 1인자를 훌륭히 보좌해 자신의 능력을 펼치지만, 혼탁한 세상을 만나면 나라와 백성을 위해 목숨을 걸고 위기와 맞서 싸운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선비와 같이 인품과 능력이 모두 뛰어난 사람에게 해당하는 말이고, 상당수의 사람들은 난세가 오면 그저 보신(保身)에 힘쓰며 자리만 지키는구신(具臣)’으로 전락한다. 망국의 시기, 조선의 조정에도 이러한 구신(具臣) 재상들로 넘쳐났다.

 

흥선대원군이 안동김씨 세도정권을 숙청시키는 과정에서도 건재했던 김병학(金炳學 ,1821∼1879)과 김병국(金炳國, 1825∼1905) 형제는 각각 영의정을 지냈지만 별다른 자취를 남기지 못했고, 갑신정변(1884)에서 대한제국 수립(1897)으로 이어지는 격변기 동안 여러 차례 총리대신과 의정대신에 제수된 바 있는 심순택(沈舜澤, 1824∼1906)과 윤용선(尹容善, 1829∼1904) 또한 거론할 만한 업적이 없었다. 이 두 사람은 독립협회로부터아첨하기만 일삼고 구차히 작록만 보존하려 할 뿐 이천만 백성을 도탄에 빠트리고 종사를 위태롭게 한다며 탄핵까지 받는다.8 재상으로서 국가의 위기상황을 적극적으로 헤쳐 나가기는커녕 하는 일 없이 자리만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순택은 심지어 백성들로부터 조롱의 대상이 됐는데, 을사늑약이 체결된 것에 비분강개해 자결하겠다고 공표해놓고 행동에 옮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9

 

재상들이 이와 같은 행태를 보인 것은 용인술의 실패가 1차적인 이유다. 구제불능의 군주가 아닌 이상 일부러 무능한 사람을 재상으로 뽑지는 않았겠지만, 온건하고 무난해 정적이 없고 임금의 뜻을 충실히 이행해 줄 사람을 찾다보니 이런 사람들이 발탁되는 것이다. 이들은 관직 생활 내내 모난 행동을 하거나 다른 이들과 충돌하지 않았기 때문에 별다른 풍파 없이 커리어를 쌓게 되고, 그로 인해 얼핏 경륜도 많고 일처리를 잘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명확한 비전과 업무지침을 제시해주는 1인자를 만난다면 그 틀 안에서 의미 있는 역할을 해나갈 수도 있겠지만 그런 1인자가 없는 곳에서는 일을 벌이지 않고 복지부동할 뿐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외면한 부류다.

 

3. 개인의 이익을 우선하다

 

그런데 아무리 세상의 변화를 읽지 못하고 자리만 지키는 재상들이 문제라고 하더라도 이들이 곧 공동체를 망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공동체를 결정적으로 위험에 빠뜨리는 것은 국가의 이익보다 나의 이익을 추구하고, 나의 안위를 구성원들의 안위보다 우선시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신의 이해관계를 위해서라면 국가나 공동체에 해악을 끼치는 일도 거부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원군의 친형인 흥인군 이최응(李最應,1815∼1882)은 동생이 자신에게 좋은 자리를 주지 않자 고종의 처가인 민씨일가와 결탁, 영의정에 올랐다. 그는 줏대가 없고 우유부단해 조정의 정무를 마비시켰으며, 부정부패와 탐욕으로 악명이 높았다.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평소 그의 탐악에 분노했던 병사들에 의해 비참하게 살해당한다.

 

1903년부터 1904년 사이 네 차례에 걸쳐 의정대신에 보임된 이근명(李根命, 1840∼1916)은 일본에게 협조해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강제 병탄된 후 자작의 귀족작위를 받았으며, 민영규(閔泳奎, 1846∼1922) 1906년 고종이 독자적 인사권을 천명하기 위해 조선통감인 이토 히로부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의정대신 임명을 강행한 인물이지만 그 역시 일본과 결탁, 자작의 작위와 고액의 사금(賜金)을 받았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이 유형의 독보적인 인물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 1858∼1926)일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공립교육기관인 육영공원(育英公院)에서 공부한 그는 미국 공사를 지내며 서양의 근대문물에 대한 이해를 갖췄다. 학부대신이 돼서는 근대적 교육제도를 도입했고, 친러 세력인 정동파(貞洞派)의 수장으로서 친일, 친청 세력을 견제했다. 친일내각을 해산시키기 위해 아관파천을 주도한 것도 바로 이완용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독립협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해 회장을 지냈으며 만민공동회에도 관여했는데, 이처럼 반일 개혁성향의 관료였던 그가친일 매국노로 전락한 것은 어째서일까.

 

기본적으로 이완용은 개인의 출세와 정치적 입지 확보를 위해 외국 세력을 활용했다. 친미→친러→친일로 변화한 그의 행적은 국가적 요청이나 신념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의 이익을 가장 잘 보장해줄 수 있는 세력을 선택하는 과정이었다.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하자 친일노선으로 급선회한 것이 이를 증명한다. 이후 이완용은 1905년 을사늑약의 체결에 적극적으로 나섰고, 1907년 헤이그특사사건이 일어나자 고종에게 양위를 종용했다. 같은 해 통감의 권한 강화, 군대해산 등을 내용으로 하는 ‘한일 신협약’에 서명했으며 1909년에는 독단으로 ‘기유각서’를 체결해 사법권을 일본에 넘겼다. 대한제국의 총리대신으로서 처리한 마지막 업무인 ‘한일합방조약’(강제 병탄)10 은 그 정점으로, 이완용은 일본의 요구에 충실히 부응한 대가로 부와 권력을 보장받았다. 그의 조국인 대한제국은 멸망해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말이다.

  

 

무릇 2인자는 1인자, 그리고 자신이 속해 있는 조직과 운명공동체라고 생각해야 한다. 개인적인 야망과 목표, 부와 명예에 대한 갈망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조직의 이익에 부합하고 조직의 성장에 기여하는 선에서만 용인될 수 있다. 그래야 자신에게나, 조직 전체에게나 모두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만약 조직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으면서 사적인 욕망에 함몰된다면 구성원들로부터 배척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 역시 위태로워진다. 그에게 2인자로서의 힘을 부여해준 것은 바로 지금의 1인자와 이 조직이다. 그 기반이 사라졌는데 힘이 유지될 수는 없다. 물론 앞에 거론한 재상들처럼 나라가 패망한 후에도 계속 부귀를 누릴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표피적이고 물질적인 삶일 뿐 힘 있고 의미 있는 역할은 더 이상 맡을 수 없다. 아주 간단한 예로, 자신이 속해 있던 기업을 배신하고 적대기업의 인수합병을 도운 고위임원이 있다고 하자. 새로 주인이 된 오너나 이사회가 과연 이 사람을 중용할까? 대가야 지불하겠지만 내가 약해지면 언제든 또 나를 배신할 수 있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란 걸 겪어본 이상 그는 의심과 경계의 대상이 될 뿐이다.

 

4. 시운을 얻지 못하다

 

앞의 세 가지가 2인자 스스로 초래한 것이라면, 마지막 네 번째 항목은 개인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상황, 시운(時運)’에 관한 것이다. 이 시기에는 비전과 재능, 열정과 충성심을 모두 가지고 있었지만 외부환경으로 인해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없었던 재상들이 있었다.

 

대원군 집권 초반기의 영의정이었던 조두순(趙斗淳, 1796∼1870)은 준조세화돼 백성들의 원망을 사고 있던 환곡(還穀)의 폐단을 해결하는 일에 집중했다. 민간의 물가를 안정시켰고 양안11 을 철저히 정리해 국가재정을 정비하는 등 경제 부문에 크게 기여했다. 시대의 변화상을 반영해 만든 법전 <대전회통(大典會通)>의 편찬 과정도 책임졌다. 이 밖에도 도적의 단속, 역참과 파발의 개혁, 군사제도 정비 등 그의 활약은 눈부셨다. 하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이내 일선에서 물러난다.

 

대원군 실각 직후 영의정이 된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은 백과사전격인 <임하필기(林下筆記)>를 편찬하는 등 학자로도 명성이 있었다. 개화정책에 적극적으로 동참한 몇 안 되는 원로대신 중 한 사람이었는데 1881년 보수파의 반발로 유배된 이후 사실상 정계에서 퇴진했다.

 

이 밖에 총리대신을 지낸 박정양(朴定陽, 1841∼1904)은 온건개화파를 대표하는 인물로 주미전권공사를 지내는 등 외교에 밝았다. 갑오개혁, 을미개혁, 아관파천 등 주요 사건 때마다 요직을 맡았지만 정국의 거센 흐름에 휘말려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진퇴를 거듭해야 했다. 1898년 의정대신에 제수된 조병세(趙秉世, 1827∼1905)는 곧은 성품과 능력으로 이름이 높았지만 고종의 잘못을 지적하고 정치개혁을 요구하는 상소를 여러 차례 올리면서 고종과 사이가 틀어졌고, 주로 향리에 은거하며 지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그는 원임재상으로서 백관을 인솔해 조약의 무효와 을사5적의 처형을 주장하다 일본군에 의해 연금되었다. 이후 각국 공사에게 대한제국의 독립을 도와줄 것을 호소하는 편지를 발송하고, 백성들에게 보내는 유서를 남긴 채 음독자결한다. 유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병세는 사경에 임박하여 국내 인민에게 고합니다. 강성한 일본이 지난날 맺은 약속을 저버리고 적신은 매국하여 500년 종사가 철류(綴旒, 금세 떨어질 듯 겨우 이어 있는 구슬)처럼 위태롭습니다. 우리 2000만 생령은 곧 노예가 되고 말 것이니, 나라를 위해 죽을지언정 어찌 이와 같은 수치를 당할 수 있겠습니까. 뜻있는 지사들이 피를 뿌리고 충신들이 흐느껴 통곡해야 할 때인 것입니다. 이에 이 병세는 충의로 생긴 분한 마음이 격하여 제 역량을 헤아리지도 않고 상소문을 가지고 대궐 앞에서 외치며 석고대죄를 하였습니다. 혹여라도 국권을 만회하고 위태로움으로부터 생민을 구제할 수 있을까 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일은 마음대로 되지 않고 대세는 이미 기울었습니다. 오직 죽음으로써 위로는 국가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여러분께 사죄하려고 합니다. 다만 죽음을 앞두고 여한으로 남는 것은 국세의 회복을 보지 못하고 성상의 근심을 풀어 드리지 못한 것이니, 전국의 우리 동포들은 나의 죽음을 슬퍼하지 마시고 각자가 분발하여 더욱 충의에 힘써 이 나라를 도와주십시오. 그리하여 우리 독립의 기초를 공고히 하여 이 수치를 씻어 주신다면 저는 비록 저승에 있더라도 춤을 추며 기뻐하겠나이다. 제각기 노력하고, 또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12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조병세에게 건국훈장의 최고등급인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이상 네 사람은 재상으로서 훌륭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추고 있었지만 각기 건강과 국내외 정치환경 등으로 인해 제대로 된 기회를 얻지 못했다. 2인자를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1인자를 만나지 못했던 것도 이들의 불운일 것이다.

 

지금까지 황혼이 물든 조선왕조 망국기의 재상들을 유형별로 나눠 살펴봤다. 물론 각각의 유형에서도 다양하고 복합적인 요소들이 추가로 작용했겠지만 세상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무사안일하며 개인의 이익을 조직의 이익보다 우선하는 2인자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리고 이런 2인자는 조직에 부정적인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는 것을 확인했다. 물론 2인자에게 문제가 있고 그들이 과오를 범했다고 해서 조직이 곧바로 위기에 빠지는 것은 아니다. 훌륭한 2인자가 있더라도 대세가 이미 기울어져 조직의 상황이 더 이상 손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 경우도 많다. 다만, 2인자의 역할과 태도가 조직의 건강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만큼 이번 아티클에서 소개한 사례들을 통해 위기징조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교훈을 얻을 수 있길 기대한다.




김준태 성균관대 동양철학문화연구소 연구원 akademie@skku.edu

필자는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정치외교학과 한국 철학을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를 거치며 10여 년간 한국의 정치사상과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철학을 공부했다. 특히 현실 정치에서 조선시대를 이끌었던 군주와 재상들에 집중해 다수의 논문을 썼다. 저서로 주간지에 연재한 역사 칼럼세종과 정조의 대화를 보완해 엮은 <왕의 경영>, 올바른 리더십의 길에 대해 다룬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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