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상을 통해 본 2인자 경영학
Article at a Glance
망해가는 기업은 자꾸 임원이 바뀐다. 누군가는 무능해서 잘려나가고, 어떤 이는 조직에서 희망을 찾지 못하고 스스로 떠난다. 물론 끝까지 남아서 자신의 이익만 챙기는 고위직들도 존재한다. 망해가던 나라 조선도 마찬가지였다. 수많은 재상들이 조선의 마지막을 장식했지만, 어떤 이는 자결했고, 누군가는 뛰어난 기개와 능력에도 불구하고 ‘변화를 읽지 못해’ 망국을 가속화했다. 그리고 끝까지 남아 철저하게 자신의 이익만 챙겼던 경우도 있다. 우리는 세상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면 다른 능력이 뛰어나도 조직을 망하게 할 수 있으며, 무사안일하며 개인의 이익을 조직의 이익보다 우선하는 2인자는 위기의 시기일수록 가장 악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훌륭한 2인자가 있더라도 대세가 이미 기울어져 조직의 상황이 더 이상 손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 경우도 많다. 다만 2인자의 역할과 태도가 조직의 건강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만큼 이번 아티클에서 소개한 사례들을 통해 위기징조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교훈을 얻을 수 있길 기대한다. |
망해가는 기업이나 나라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책임을 지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그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비단 기업총수나 군주와 같은 1인자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다. 1인자를 보좌하며 구성원을 보호하고, 공동체를 이끌어가야 할 책임이 있는 2인자들도 여기에 포함된다. 조직의 안위보다 개인의 안위를 우선하고, 조직이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도 사사로운 욕심을 채우며, 무능하게 자리만 지키고,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 이들이 책임 있는 자리를 맡는 조직은 필연적으로 쇠약해진다. 더욱이 이런 사람들로‘만’ 지도층이 채워져 있다면 해당 공동체의 쇠망은 더 이상 막을 수 없는 운명이 된다. 조선왕조의 마지막 풍경처럼 말이다.
이번 글은 조선의 마지막 재상들, 고종에서 순종 때까지 영의정(관제개편에 따라 의정대신, 총리대신으로 명칭변화)을 지낸 인물들을 다룬다. 이들은 지난 연재의 주인공인 김홍집을 포함해 실패사례의 총집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모두가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에 대한 복기와 비판적인 고찰을 진행함으로써 오늘날의 2인자들을 위한 교훈을 찾아보고자 한다.
1. 세상의 변화를 읽지 못하다
나라가 망해가는 시기에 재상을 지냈다고 해서 무조건 수준미달은 아니다. 훌륭한 인품과 뛰어난 업무능력을 갖춘 사람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시대가 급변하고 국제정세의 불확실성이 심화되던 당시 상황에서 재상이라면 이러한 시대의 흐름을 읽고 선제적으로 대응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러지 않고 과거의 방식을 묵수하며 그저 답습하기만 한다면 자기 자신도 실패할 뿐 아니라 그 나라 역시 도태되게 된다.
1872년(고종9)과 1882년(고종19), 두 차례에 걸쳐 영의정에 제수됐던 홍순목(洪淳穆, 1816∼1883)이 대표적이다. 그는 뛰어난 행정능력으로 대원군 집권기를 뒷받침했고 국가 재정 악화를 해소하기 위해 주력했다. 임오군란의 사후수습도 담당한다. 그러나 쇄국과 위정척사의 노선을 선택한 그는 보수적인 면모를 강하게 드러내며 개화를 반대했고,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그는 개화로 인해 천수를 누리지 못하게 됐는데, 개화파인 아들 홍영식(洪英植)이 주도한 갑신정변(甲申政變,1884)이 실패하자 “노신(老臣)이 역적 아들을 두어 천지간에 죄를 지었으니 만 번 죽은들 어찌 그 죄를 속죄할 수 있겠는가?”라며 자결했다. <매천야록>에 따르면 10살도 안 된 손자(홍영식의 아들)의 목숨을 직접 거두고 그 자신도 독약을 마셨다.1
다음으로 김병시(金炳始, 1832∼1898)는 고매한 인품과 청렴2 으로 조야의 존경을 받던 인물이다. 고종의 재위기간 동안 영의정과 총리대신, 의정대신을 재차 역임했던 그는 지방에 파견돼 많은 폐단을 양산하고 있던 어사(御史)를 소환하고, ‘차함(借銜)’3 을 폐지해 공직질서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청했다. 4 고종이 과오를 범하면 그때마다 강직한 어조로 비판했고, 눈물을 흘리고 머리를 땅에 부딪치며 간언한 일도 여러 번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사대당(事大黨)을 이끌며 개화당(開化黨)과 대립했고 개화당을 억누르고자 청나라를 끌어들였다. 1886년에는 ‘논시폐수차(論時弊袖箚)’를 올려 정부의 개국정책을 저지하기도 했다. 이 밖에 을사늑약 이후 의정대신을 지낸 조병호(趙秉鎬, 1847∼1910)도 부패관리를 탄핵하고 동래민란과 성주민란(1883)을 수습했으며 외교와 재정업무에서 능력을 발휘했으나 사대당 노선을 고집하는 한계를 보였다.
이처럼 훌륭한 역량을 가지고 있어도 시대의 변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능동적으로 혁신하지 않으면 이내 실패로 이어지게 된다. 옳은 신념과 가치관을 지키기 위해서라 하더라도 그 ‘옳음’이 상대적인 것은 아닌지, 혹 아집에 따른 판단은 아닌지 늘 성찰해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유학(儒學)은 ‘변통(變通)’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는데, 변통이란 <주역>, ‘계사전(繫辭傳)’5 에서 유래한 것으로 수시변역(隨時變易)과 인시제의(因時制宜)의 논리가 담겨 있다. “만물이 때에 따라 바뀌는 것은 이 세상 보편의 법칙”6 이므로, 일정한 것에 고착돼 있으면 그것은 오래 유지될 수 없다. 따라서 시대 상황에 걸맞은 마땅함을 찾아 적절하게 변화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7
홍순목과 김병시, 조병호가 재상으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 것은 바로 이 변통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마치 현대 기업에서도 아날로그 필름 시대의 최강자 코닥이 디지털 카메라로의 전환이라는 세상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몰락한 것과 유사하다. 만약 코닥의 경영진이 고집을 버리고 적극적인 변신에 나섰다면, 즉 변통을 할 줄 알았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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