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자본주의와 창조
기업 경영에 인문학적 소양이 강조되는 시대입니다. 컨베이어벨트로 상징되는 대량생산과 원가절감의 시대는 저물고 있습니다. 이제는 사람과 사회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는 고객을 감동시키는 제품과 서비스를 만들 수 없다는 공감대가 빠르게 형성돼 가고 있습니다. 특히 경영학계와 기업인들 사이에서 한국 사회의 근간을 이뤄온 유교사상에 대한 관심이 높습니다. DBR은 SK아트센터 나비와 CWPC서평(徐評)이 공동 주최한 최고경영자 교육 과정인 ‘문화와 경영’ 프로그램(주임교수 서진영)을 지상 중계합니다. 제1부 프로그램인 ‘논어(論語)와 경영’ 과정 중 이어령 이화여대 석좌교수의 특별강연 ‘새로운 생명경제 시대가 온다’ 내용 일부를 요약합니다. 이번 호 스페셜 주제인 Oriental Wisdom과 맞닿아 있어 다른 글들과 함께 읽어보실 수 있도록 Humanitas 코너에 싣지 않고 Special Report 코너에 싣습니다.
※이 기사의 제작에는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인턴연구원 장세민(연세대 경영학과 4학년) 씨와 성진원(고려대 경영학과 3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비생명경제의 지배와 대안으로서의 생명자본주의
우리가 살면서 하루 종일 가장 많이 쓰는 것이 무엇일까? 말(언어)과 돈이다. 하지만 경영자들에게 막상 ‘말이 무엇이냐’ ‘돈이 무엇이냐’라고 물으면 거기에 정확하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언어와 돈, 그리고 법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세 가지 교환가치이긴 하지만 그 어떤 자연적 근거도 없다. 다시 말해 이 세 가지는 전부 인위적인 것이고 가짜다.
애초에 자연에는 언어도, 법도, 돈도 존재하지 않았다. 자연은 0도에서 물이 얼고 100도에서 물이 끓는 것처럼 확실한 근거가 있다. 반면 우리가 사용하는 돈은 우리가 돈이라고 규정하고 인정했기 때문에 효력이 있는 것이다. 5만 원짜리가 돈이 되는 것은 우리가 그걸 그렇게 인정하기 때문이지 그 본질은 종이에 글자를 찍은 것에 불과하다. 언어도 그렇다. 한국어, 영어처럼 각 문화권에서 그렇게 규정했기 때문에 언어라 불리는 것이다. 무슨 자연적 근거가 있어서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법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우리 현실은 이렇게 자연과 상관없는 언어, 법, 돈 같은 것들이 지배하고 있다.
기업 역시 인간이 조작한, 근거가 없는 것들이 지배하고 있다. 또한 인간이 조작하고 규정한 것들에 인간 스스로가 얽매이고 종속됐다. 여기서 우리는 ‘세상이 이렇게 가도록 내버려둬도 되는 것인가’ 하는 비판을 제기해야만 한다. 단, 여기서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자본주의 4.0’이나 ‘따뜻한 자본주의’라는 말 같은 어떠한 해결방법의 제시가 아니다. 단지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하지 않았던 것, 당연하다고 여겨왔던 것을 ‘내가 지금까지 잊고 있었구나’라고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생명자본주의’다.
‘생명’을 상징성으로 설명해 보자. 인간의 3대 액체는 땀, 피, 눈물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각각 자유(liberté), 평등(égalité), 우애(fraternité)를 상징한다. 바로 프랑스 국기의 3색이기도 하다. 이 각각의 액체를 어떻게 결합하는가의 문제가 바로 생명의 이야기다.
먼저 땀은 산업화와 경제의 원리를 의미한다. 인간은 세끼 밥을 굶지 않기 위해 수없이 많은 땀을 흘리며 노동해왔다. 땀을 통해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 오늘의 시장경제이고 경제의 원리며 또 자유의 원리다.
그 이후에는 땀을 흘리는 과정에서 억압된 사람들과 소외돼 있는 사람들이 평등의 정치 원리를 가지고 나와 민주화를 이뤘다. 이때 이들이 흘린 피가 바로 민주화와 평등의 원리를 의미한다. 이렇게 땀과 피를 흘려 산업화와 민주화가 이뤄졌다. 땀은 소위 말하는 파이를 키우는 것, 즉 시장과 경쟁을 의미하게 됐으며 피는 파이를 나누는 것, 즉 더불어 사는 사회와 복지를 이야기할 때 자주 언급되게 됐다. 문제는 땀과 피 둘 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인데 이들을 어떻게 조화시키고 통합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교장선생님들은 학생들에게 “항상 긴장해라, 경쟁에서 지면 안 된다”라고 강조하며 경쟁 원리를 교육하는가 하면 동시에 한쪽에서는 “사람은 평등하다, 더불어 살아야 한다”라며 자유와 평등의 두 개의 가치를 한꺼번에 알려주는 모순 속에 살고 있다. 이 두 가지만 가지고는 정신분열이 올 수밖에 없다.
이렇게 경쟁의 원리와 평등의 원리가 팽팽하게 대결하고 있을 때 세 번째로 필요한 것이 바로 눈물, 즉 우애다. 땀과 피의 모순을 새롭게 통합시키고 융합시킬 수 있는 가능성은 공감을 일으키는 재주, 남을 위해서 울어주는 생명화, 문화 원리, 그리고 우애에 있다. 이것이 민주화와 산업화의 대립각을 해소할 수 있는 대안인 것이다. 이 원리를 우리 사회에 적용해 보자. 산업국가라는 가치와 민주주의국가라는 가치가 물과 기름처럼 쌓이게 돼 국민 간의 가치의 분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산업화세력과 민주화세력이 서로 왕래 없이 친구가 되지 못해 한국 사회 전체가 어렵게 된 것이다. 이제는 우애가 필요한 시점이다.
생명화의 3대 원천: 바이오필리아, 토포필리아, 네오필리아
그렇다면 이 ‘우애(프라테르니테, fraternité)’라는 것은 무엇인가?(흔히 ‘박애’라고 번역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말이다). 자연과학자들이 인간의 모든 궁극적 가치가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있다. 토포필리아(Topophilia, 장소에 대한 사랑), 바이오필리아(Biophilia, 생명에 대한 사랑), 네오필리아(Neophilia, 창조에 대한 사랑)의 3가지다.
먼저 토포필리아는 장소와 공간에 대한 사랑이다. 사람이 죽을 때 나무 하나 없는 고향의 민둥산이 눈에 어른거리고, 심지어 여우도 죽을 때는 무덤에 자기 머리를 자기가 살던 굴 쪽에 두고 죽는 수구초심, 이게 바로 토포필리아다. 고향이 나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지만 명절 때만 되면 고향에 내려가는 사람들로 고속도로가 꽉 차는 이유는 바로 이 설명할 수 없는 장소에 대한 사랑에 기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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