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cle at a Glance트럼프 2기 행정부의 등장과 함께 미국 내에서 ‘마러라고 합의(Mar-a-Lago Accord)’라는 이름의 신(新)플라자합의 구상이 논의되고 있다. 이는 달러 강세가 미국 제조업을 해친다는 인식 아래 주요국과의 협력 또는 일방적 조치를 통해 달러 약세를 유도하려는 계획이다. 하지만 중국의 강한 반대, 주요 동맹국들의 정치·경제적 부담, 금융시장 충격 가능성 등으로 실현 가능성은 매우 낮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구상이 글로벌 환율 시스템, 무역 환경, 외환시장의 불안정성을 키우고 있다는 점은 명백하다. 달러 약세의 실현 가능성과 별개로 한국 기업들은 ‘환율 변동성’ 자체를 새로운 구조적 리스크로 인식해야 한다. 환차손, 수출 가격 경쟁력 저하, 수입 원자재 비용 상승이 동시에 발생할 수 있는 복합적 위협이 커지고 있으며 달러 기반 결제·무역 관행에 대한 근본적 변화 가능성까지 열려 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내 기업은 환율 변동성 자체를 전략 변수로 인식하고 자연 헤지(생산/매출 통화 일치)와 금융 헤지(선물환, 옵션)를 병행하는 장기적·구조적 환율 대응체계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또한 현지화 및 공급망 재편 강화는 물론 ERP와 연계해 실시간 환노출 모니터링 체계를 갖추는 등의 전사적 통합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마러라고 합의의 등장 배경:강달러에 맞선 통화 조율 시나리오1985년 플라자합의(Plaza Accord)는 뉴욕 플라자호텔에서 미국·일본·서독·프랑스·영국 등 G5 재무장관들이 모여 의도적으로 달러 가치를 하향 조정하기로 한 역사적 협약이다. 당시 5년간 달러가 두 배로 폭등하며 국제 무역 불균형을 초래했기에 각국이 협력해 달러 강세를 완화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2년간 달러 가치는 약 40% 하락했고 미국의 무역수지 불균형 일부가 개선됐다. 그러나 이 합의는 엔화 가치 급등으로 일본의 자산 버블을 촉발해 ‘잃어버린 수십 년’의 불황을 야기한 측면도 있었다. 실현 가능성이 있을지 의심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최근 미국 정책 입안자들 사이에서 플라자합의를 방불케 하는 새로운 국제통화 협력 구상이 언급되고 있다.
바로 ‘마러라고 합의’다. 이 용어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플로리다 별장 이름에서 유래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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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경제 책사’로 불리는 스티븐 마이란 현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CEA) 위원장이 제시한 아이디어에서 비롯됐다. 마이란 위원장은 최근의 달러 과대평가가 미국 경제에 ‘불만의 뿌리’로 작용한다고 지적하면서 이런 달러 강세는 미국 제조업을 약화시키고 만성적 무역적자의 원인으로 작용한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2020년대 초 달러 실질 가치는 1985년 플라자합의 당시 수준만큼 높아져 있었다.
마러라고 합의 구상은 미국이 다른 주요국들과 협력해 시장에 급격한 충격을 주지 않고 달러 가치를 천천히 낮추려는 계획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를 위해 미국은 우선 일방적 관세 인상으로 각국을 압박한 뒤 협조하는 국가에는 관세를 낮춰주는 당근책을 제시하고 참여를 유도한다는 구상이다. 하지만 마러라고 합의 자체도 협상을 위한 프레임에 불과할 수 있다. 다만 이것이 본격적으로 실현된다면 이는 글로벌 환율 체계에 충격을 줄 수 있다.
협정의 구상과 주요 참가국:어떻게 달러 가치를 낮출 것인가마러라고 합의 시나리오에서는 미국과 주요 교역 상대국들이 함께 달러 약세를 유도하는 방안이 핵심이다. 구상의 밑그림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달러 매도 개입: 미국의 주요 교역 파트너 중앙은행들이 보유 외환 준비금 중 달러와 미 국채를 시장에 매도함으로써 달러 가치를 하락시킨다. 이는 플라자합의 때와 유사한 다자간 외환시장 개입 전략이다. 특히 유로존, 중국, 일본 등 막대한 달러 자산을 보유한 국가들이 핵심 협약 대상으로 지목된다.
∆초창기 미 국채 전환: 대규모 달러·미 국채 매도가 미국 국채금리 상승을 초래하지 않도록 협약 참여국들은 잔여 미 국채 보유분을 만기가 매우 긴 100년 만기 채권 등으로 교체하도록 유도된다. 이처럼 국채 만기 구조를 연장(termed-out)하면 단기 채권 매도 압박을 줄여 미국의 자금 조달 비용 상승을 완화시키는 효과가 있다. 100년 후 무슨 일이 생길지 어차피 누가 알 것인가? 게다가 ‘물가에 관한 재정이론(FTPL, fiscal theory of price lev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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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따르면 향후 재정건전성이 향상될 것이란 기대로 물가는 하락한다.
∆관세와 안보 지렛대 활용: 미국은 협상 상대국들을 압박하기 위해 고율 관세 부과 및 안보 지원 축소를 지렛대로 사용한다. 즉 “합의에 응하면 관세를 낮춰주고 미국의 안보 우산(동맹)을 계속 제공하겠다”는 조건을 내걸고, 반대로 따르지 않을 경우 미 국채 보유에 대한 ‘사용료(penalty)’를 부과하거나 안보상 지원을 축소하는 채찍을 동원한다. 실제로 1971년 닉슨 행정부도 금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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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지 선언과 함께 10% 추가 관세를 부과해 동맹국들의 환율 절상을 이끌어낸 바 있다. 이처럼 경제·통화 정책과 관세 압박을 동시에 활용한 전례는 오늘날 마러라고 구상의 전략적 기반으로 다시 조명되고 있다.
∆일방적 달러 평가절하 조치 (플랜 B): 만약 다자 협상이 실패할 경우 미국 단독으로 외환시장 개입 자금 조성이나 해외 공식 보유 자산에 대한 과세 등 극단적 조치를 고려한다. 예컨대 해외 중앙은행들이 들고 있는 미 국채 이자에 1%의 ‘보유세(user fee)’를 매겨 달러 자산 이탈을 유도하고 필요시 미 연준이 국채를 매입해 시장의 충격을 흡수하는 방안 등이 거론된다. 이 협약을 현실화하기 위해 누가 협상 테이블에 나올 것인지가 중요하다. 1985년에는 미국이 주도하고 동맹국인 일본, 서독, 프랑스, 영국 등이 참여해 비교적 수월하게 합의를 도출했다. 하지만 오늘날 미국의 주요 무역적자 상대국들은 중국, 멕시코, 베트남 등 미국 안보에 덜 의존적인 국가들이다. [그림 1]에서 보듯 1985년과 2024년 미국의 최대 무역적자 상대국 리스트는 상당히 다르다.
마러라고 합의의 근본적 어려움:중국의 반대와 동맹국의 제약마러라고 합의 구상이 현실화되는 데는 여러 중대한 장애물이 있기에 실현 가능성은 낮을 것으로 평가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경제적 이해관계의 충돌마러라고 구상은 여러 국가의 경제적 이해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미국은 다른 국가들의 통화가 강세로 전환되기를 바라지만 중국은 내수 부진과 디플레이션 압력을 완화하기 위해 오히려 위안화의 안정적 약세를 선호한다. 일본 역시 엔화가 큰 폭으로 절상하는 것보다는 안정이 되는 데 무게를 두고 정책을 펼치고 있다. 유럽의 경우 현재 경기부양을 위해 금리인하 등의 완화적 통화정책을 취하는 중이어서 유로화의 강세는 수출 감소로 이어져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이러한 상황에서 각국이 자국 경제에 부담을 주는 통화 절상 조치를 기꺼이 받아들일 가능성은 낮다.
특히 중국의 반대는 결정적 장애 요인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은 1985년 플라자합의 이후 일본이 겪은 거품 붕괴와 장기 침체(이른바 ‘잃어버린 10년’)를 반면교사로 삼아 이와 유사한 통화 절상 압력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다. 또한 2025년 현재 지속적인 소비 부진 속에 수출 부문에서의 성장에 기대를 걸고 있는 만큼 위안화 가치 상승으로 수출 경쟁력이 약화되는 상황을 피하려 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무역전쟁이 장기화되더라도 섣불리 위안화 절상 방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처럼 주요 경제권마다 자국의 경제 여건에 따른 상반된 통화 정책 선호를 갖고 있으므로 미국의 의도대로 다자간 통화 조정에 합의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또한 경제적 손익계산 측면에서도 마러라고 합의는 매력적이지 않다. 각국 중앙은행이 대량의 미 국채를 매각해 달러 약세를 유도하면 미 국채 가격 폭락과 금리 급등을 초래할 수 있는데 이는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 금융시장에 충격을 줄 위험이 있다. 그러한 재정·금융 불안정 위험은 정책 공조에 대한 억제 요인으로 작용한다. 예컨대 대규모 국채 매도는 민간 투자자들의 공포 심리를 자극해 연쇄 매도를 부를 수 있고 각국이 보유한 달러 자산의 가치도 급락해 협조 당사국들 자신이 경제적 손실을 입는 결과를 낳는다. 더구나 미국이 요구하는 초창기 국채로의 전환이나 금리 인하 역시 투자 수익률을 떨어뜨려 상대국 입장에서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조치다. 요컨대 경제적 인센티브 부재와 높은 시장 위험성 때문에 동맹국들조차 이 합의에 선뜻 참여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2) 지정학적 갈등 및 정치적 제약마러라고 합의가 직면한 또 다른 장애물은 지정학적 긴장과 정치적 실행 가능성이다. 이 구상은 본질적으로 미국이 경제·안보 패권을 지렛대 삼아 타국의 협조를 이끌어내려는 일방적 전략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관세 부과(무역 보복)와 안보 지원의 조건부 제공을 협상 수단으로 활용해 동맹국들을 압박함으로써 평소 같으면 받아들이기 힘든 환율 정책 양보를 얻어내고자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강압적 접근법은 오히려 동맹국들의 반발과 불신을 초래할 것이다. 실제로 트럼프 정부가 추진한 이른바 상호주의 관세 부과는 유럽연합 및 캐나다·멕시코 등 주요 동맹들에 무역 보복과 같은 반발 조치를 불러왔다. 달러 약세 조치에 대한 협조가 필요한 상황에서 중국과 유럽을 강하게 자극해 갈등을 불러일으킨 바람에 이들의 동의를 얻어내기가 극도로 어려워졌다. 요컨대 미국의 일방적 압박은 국제 공조의 정치적 기반을 약화시킨 것이다.
또한 마러라고 합의 대상국들의 면면을 보면 지정학적 레버리지가 제한적임을 알 수 있다. 1985년 플라자합의 당시에는 미국의 안보 동맹국들(영국, 프랑스, 서독, 일본 등)이 협상의 당사자였고 이들은 미군 기지를 받아들이는 등 미국 안보 우산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반면 현재 미국이 거대한 무역적자를 기록하는 주요 상대국들(중국, 멕시코, 베트남 등)은 미국의 안보 보호에 기대지 않는 국가들이며 따라서 안보상의 당근을 제시해도 통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가령 중국이나 베트남은 미국과 안보 협력이 없고 멕시코 역시 미국의 군사적 보호에 의존하는 처지가 아니어서 미국이 제시하는 ‘안보-무역 맞교환’ 논리에 반응할 유인이 적다. 이처럼 지정학적 이해관계가 맞지 않는 상대에게는 미국의 협상력이 제한될 것이다.중국의 경우를 보면 미·중 관계의 구조적 경쟁 심화로 인해 정치적 신뢰가 거의 없는 상태이다. 트럼프 행정부하에서 미국은 관세전쟁과 기술 봉쇄로 중국을 견제해왔고 중국은 이에 반발하며 자국 중심의 공급망 구축과 위안화 국제화 등을 모색해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이 미국 주도의 환율 합의에 선뜻 동참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중국 정부로서는 미국의 요구에 굴복하는 모습으로 비칠 경우 국내 정치 공학상 용납되기 어렵고 미국이 제시한 합의가 자국 경제에 장기적으로 해가 될 것이라는 판단을 내릴 가능성이 크다.
유럽 동맹국들 역시 마찬가지로 국내 여론과 주권 경제 정책의 측면에서 미국의 압력에 순응하기 부담스러운 입장이다. 더군다나 트럼프 대통령 시절 미·EU 간에는 무역·방위비 분담을 둘러싼 갈등이 깊어졌는데 이런 앙금이 남은 상태에서 유럽 국가들이 미국의 통화 약세 전략에 적극 호응할 가능성이 낮은 것이다. 캐나다와 멕시코의 경우에도 NAFTA 재협상과 관세 위협을 겪으면서 대미 불신감이 누적됐으며 자국 통화가치 상승 시 자국 수출 경쟁력이 약화될 우려 때문에 미국의 요구 수준 이상의 협력을 제공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더 나아가 마러라고 구상의 일방적 실행은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어 정치적으로 실행하기 더욱 어렵다. 만약 미국이 다자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한 채 일방적으로 외국의 미 국채 보유에 페널티(예: 이자 송금에 대한 과세)를 부과하거나 외환시장 개입에 나설 경우 이는 동맹국들을 포함한 각국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이러한 조치는 국제 금융시장의 신뢰를 훼손해 각국이 달러 자산 의존도를 축소하고 대체 통화나 독자적 금융망을 모색하도록 부추길 위험이 있다. 실제로 전문가들은 마러라고식 조치가 미 연방준비제도의 통화정책 독립성을 약화시켜 시장의 불안을 가중시키고 궁극적으로는 달러화에 대한 국제적 신뢰 저하와 탈달러화 가속을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또한 설령 일부 국가를 설득해 공동 개입을 시도한다 해도 글로벌 외환시장의 규모가 1980년대에 비해 훨씬 커진 오늘날에는 과거와 같은 개입 효과를 장담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있다. 요컨대 정치·외교적 협력 기반의 취약성과 실행 시 파급효과에 대한 우려 사항 모두가 마러라고 합의 실현을 가로막고 있다. 결론적으로 마러라고 합의 구상은 미국 입장에서 매력적인 전략으로 포장될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경제적 이해관계의 구조적 상충과 국제정치적 제약으로 인해 성공하기 어려운 계획으로 평가된다.
마러라고 합의가 본격적으로 논의되면 달러는 안전자산으로서의 효용이 떨어져 가치가 단계적으로 하락하고 그 과정에서 원·달러 환율 변동성이 급격히 확대될 가능성이 높다. 미국이 달러 약세를 유도하는 동안 연준이 물가 안정을 위해 긴축 기조를 유지하면 정책 신호가 엇갈려 시장은 방향성을 헷갈려 할 것이다. 또한 협정에서 배제될 가능성이 큰 중국이 대응 차원에서 위안화 절상을 지연시키거나 무역 제재에 나설 경우 글로벌 밸류체인 비용 구조도 함께 흔들릴 것이다. 이때 달러화 매출 비중이 높은 한국 수출 기업은 환산 매출이 즉각적으로 줄어드는 반면 달러화로 결제하는 원자재·부품 수입 비용이 높은 기업은 헤지 비용까지 이중으로 부담해야 한다. 게다가 주요 교역 상대국이 관세 보복이나 결제 통화 다변화를 단기간에 추진하면 예상 현금흐름 자체가 불확실해질 것이다. 따라서 한국 기업은 달러 가치 조정의 직접 충격뿐 아니라 교역 구조 재편, 공급망 리레이아웃, 결제 통화 변화 등 복합적 리스크에 노출될 수 있다. 이러한 시나리오를 전제로 글로벌 선도 기업들이 채택해 온 자연적 헤지, 내부 네팅, 공급망 다변화 전략을 종합적으로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
해외 사례와 외환 리스크 관리 시사점글로벌 기업들은 급변하는 환율 환경 속에서 생존을 걸고 다양한 대응 전략을 펼치고 있다. 그중에서도 몇몇 선도 기업은 혁신적인 환리스크 관리로 주목받고 있다. 달러 약세와 환율 충격을 오히려 기회로 활용한 이들의 사례는 향후 한국 기업들이 비슷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취할 수 있는 교훈을 준다.
먼저 유럽의 항공기 제조사 에어버스(Airbus)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에어버스는 매출의 상당 부분을 미 달러화로 벌어들이지만 생산비용은 유로화로 지출한다. 달러 약세로 유로화 가치가 뛰면 수익성이 급격히 나빠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 기업은 두 가지 축으로 환리스크를 통제했다.
하나는 자연적 헤지다.
에어버스는 부품 조달과 생산 거점을 다변화해 비용의 약 60%를 달러화로 발생시키는 구조를 만들었다. 미화로 비용을 지출하면 달러 매출이 줄어들 때 자동으로 지출도 줄어드는 효과가 나와 환율 변동의 순영향을 줄일 수 있다. 여기에 더해 에어버스는 일부 항공기 거래를 유로화로 결제하도록 유도함으로써 달러 의존도를 낮추려는 노력도 기울였다.다른 한 축은 파생상품을 활용한 적극적 헤지 전략이다. 에어버스는 환율 변동이 실적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순노출액 대부분을 수년 치에 걸쳐 선물환으로 고정했다. 실제로 2019년 중반 기준으로 약 147억 달러 규모의 선물환 계약을 장부에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는 향후 몇 년간 예상되는 달러 매출을 미리 확정된 환율에 팔아둔 것이다. 이처럼 수년에 걸친 장기 헤지 포트폴리오를 운영함으로써 달러화가 급락하더라도 에어버스의 유로화 표시 수익은 안정될 수 있었다. 트럼프 1기 후반기에 달러 가치가 급격히 떨어지며 유로화가 3년 만의 최고치로 상승했을 때도 에어버스는 이런 선제적 대응 덕분에 환율로 인한 타격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물론 환율이 유리하게 움직일 경우 추가 이익 기회를 일부 포기하게 되는 단점도 있다. 하지만 에어버스는 환변동으로 인한 이익의 급등락을 억제하는 것을 환리스크 관리의 최우선 목표로 삼아 일관되게 대응했다. 외부 환경 변화에 따라 이들은 헤지 규모와 기간을 유연하게 조정하는데 예컨대 달러 약세가 장기화할 조짐이 보이면 헤지 기간을 더 늘리거나 가격변동보험 역할을 하는 옵션 활용을 검토하는 식이다.
탄탄한 내부 통제 체계도 에어버스의 성공 요인이다. 전사 차원의 통화위원회가 수시로 환율 상황을 점검하고 수십억 달러에 이르는 헤지 포지션을 모니터링하면서 필요시 전략을 손질한다. 이처럼 자연적 헤지와 파생상품 헤지를 정교하게 결합한 에어버스의 대응은 환율 급변에도 실적을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한 모범 사례로 평가받는다.
일본의 자동차 제조사 도요타도 좋은 벤치마킹 대상이 될 수 있다. 도요타는 오랫동안 엔화 강세에 취약한 기업으로 꼽혀 왔다. 생산기지를 본국에 크게 의존하면서 차량을 해외로 수출하는 구조상 엔화 가치가 뛰면 수익성이 급감하는 일이 반복됐다. 트럼프 1기에 달러 약세로 인해 엔화가 강세 압력을 받자 도요타는 오히려 이 계기를 제조 및 판매 전략을 재편하는 환리스크 개선 기회로 삼았다. 핵심은 ‘만들어서 수출’하던 방식을 ‘현지에서 생산·판매’하는 방식으로 전환한 것이다. 사실 이 전략은 도요타가 수년 전부터 단계적으로 추진해온 것이다. 엔화 강세로 큰 어려움을 겪었던 도요타는 과거 일본 내 생산 일부를 미국과 태국 등으로 이전하기 시작했고 이를 통해 환율 변동성을 낮추고 수익성을 높이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현재 일본 자동차 업계는 생산의 3분의 2가 해외에서 이뤄질 정도로 구조가 바뀌었고 이는 20년 전 40% 미만이 해외 생산 물량이던 것에 비해 크게 개선된 수치다.
해외 현지 공장에서 현지 통화로 비용을 지출하고 현지 시장에 판매하면 본사 입장에서는 환율 변동에 따른 손익 변동이 크게 줄어든다. 예를 들어 도요타가 미국 켄터키 공장에서 자동차를 생산해 미국 소비자에게 달러로 판매하면 달러 매출이 줄어들 때 달러 비용도 함께 줄어들어 엔화로 환산한 순이익 변동폭이 축소된다. 실제로 도요타는 미국 내 생산 비중을 지속적으로 높여왔으며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압력까지 겹치자 인기 차종 RAV4의 미국 현지 생산 확대를 검토하기에 이르렀다. 25%에 달하는 높은 관세를 피하는 한편 엔화 변동을 헤지하려는 전략적 선택이었다. 다만 거대한 제조시설을 이전하는 일은 시간과 비용이 수반되기에 단계적으로 추진됐고 2020년대 후반 이후까지 내다보는 장기 계획으로 진행되고 있다.
도요타의 공급망 재편 전략은 환리스크를 구조적으로 줄였을 뿐 아니라 품질관리와 현지 시장 대응력 측면에서도 긍정적 효과를 가져왔다. 엔화 강세 시기의 고통을 교훈 삼아 도요타는 본사 생산의 손익분기점 환율을 파격적으로 높이는 내부 목표까지 세웠다. 한때 “엔·달러 환율이 1달러당 85엔 수준의 초엔고가 와도 국내 생산기지가 버틸 수 있도록 한다”는 계획을 공언했을 정도다. 이렇듯 환율 변동에 견딜 체력을 기르기 위해 생산공정 효율화, 비용 절감, 부품 현지 조달 확대 등 전방위로 노력을 기울인 덕분에 최근 엔저(엔화 약세) 국면에서는 오히려 추가 이익을 누리는 여유까지 생겼다.
물론 도요타도 모든 환리스크를 자연 헤지만으로 해결한 것은 아니다. 여전히 일본에서 생산해 수출하는 물량에 대해서는 선물환 등을 활용해 수개월~1년 치 환율을 고정하는 금융 헤지도 병행한다. 또한 환율 전망에 따라 유연하게 대응하기 위해 부분적으로 옵션 계약을 활용하거나 분기별로 일정 비율씩 나눠 환헤지 비중을 조정하는 등 정교한 재무 전략을 접목해왔다. 중요한 점은 도요타가 환율이라는 외부 변수에 휘둘리지 않도록 생산부터 재무까지 전사적 대응체계를 구축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오늘날 도요타는 환율이 출렁일 때마다 일희일비하기보다 미리 짜 놓은 시나리오대로 차분히 대응하는 내성이 생겼다. 달러 약세든 강세든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든 일정 범위 내에서는 견딜 수 있게 된 것이다.에어버스와 도요타 사례에서 보듯 파생상품을 통한 재무적 헤지와 자연적 헤지 수단으로서의 공급망·가격 전략, 이를 실행하는 조직적 대응체계의 삼박자를 환리스크 관리 성공의 열쇠로 꼽을 수 있다. 달러 가치 급락과 환율 요동이라는 외풍 속에서도 두 기업은 각자의 방식으로 방파제를 높여 피해를 최소화했고 때로는 변화에 능동적으로 적응해 경쟁우위를 지켰다. 그렇다면 트럼프식 약달러 및 변동성 국면에서 한국 기업들은 어떤 위험에 노출되고,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원·달러 환율이 급격히 떨어지면 수출에 의존하는 한국 기업들의 가격경쟁력 약화와 환산 이익 감소가 불가피하다. 전자·자동차·조선 등 주요 수출 업종의 경우 환율 10원 움직임에 수십억 원의 손익 변동이 발생한다는 것이 정설이다. 트럼프 1.0 행정부 시절 실제로 달러가 약세로 돌아서면서 원화가 강세를 보이자 일부 분기 대기업 실적이 환차손으로 곤두박질친 사례도 있었다. 더 큰 문제는 환율 변동성의 증폭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소셜미디어를 통한 돌발적인 정책 발표로 시장을 흔들었던 전력이 있는데 가령 예고 없이 관세 부과 조치를 발표한 날에는 환율이 요동치며 평소 구축해둔 환헤지 포지션이 일시적으로 손실을 보는 일도 벌어졌다. 이처럼 예측 불가능한 이벤트로 환율이 급변하면 대비가 부족한 기업은 순식간에 환차손 충격을 받을 수 있다.
한국 기업들이 노출될 위험은 크게 세 갈래로 요약된다. 첫째, 수익성 악화 위험이다. 환율 급변으로 인한 환차손은 영업이익을 갉아먹어 재무 실적을 훼손시킨다. 헤지 없이 방치할 경우 수출 비중이 높은 기업일수록 분기 실적이 환율 방향에 좌지우지돼 경영의 연속성이 떨어진다. 둘째, 가격경쟁력 저하다. 달러 약세로 원화가 강세가 되면 해외시장에서 한국 제품의 가격이 상대적으로 비싸져 판매량이 줄 수 있다. 특히 미국 시장에서 현지 업체나 통화 약세 국가의 경쟁사들과의 경쟁에서 밀릴 우려가 있다. 셋째, 비용 상승 및 이중 변동성이다. 달러 약세 국면에서는 흔히 원자재 가격이 상승하는 경향이 있는데 국제 원자재가 달러로 거래되기 때문이다. 원화 가치가 올라도 정작 유가나 원자재 가격 급등으로 원자재 수입 비용이 치솟으면 제조 원가가 상승하는 이중고를 겪을 수 있다. 더욱이 환율 변동성이 크면 기업들은 가격 책정과 투자 결정에 불확실성이 높아져 보수적으로 움직이게 되고 이것이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수도 있다.
한국 기업의 외환 리스크 관리 시사점이러한 위험들에 대비해 한국 기업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 앞서 살펴본 해외 선도 기업들의 사례는 몇 가지 시사점을 제공한다. 우선 환헤지 원칙과 목표를 명확히 설정해야 한다. 환율 변동이 기업 가치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면 이를 방치하기보다 적극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경영진의 책무다. 에어버스가 환 변동으로 인한 이익 변동 억제를 최우선 목표로 삼았듯 한국 기업들도 “환율은 예측이 불가능하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는 식의 수동적 태도를 버리고 관리 가능한 범위로 위험을 좁히겠다는 원칙을 세워야 한다. 이를 토대로 각 사의 상황에 맞는 통화 헤지 전략을 수립하는데 이때 한 가지 수단에만 의존하기보다 파생상품 헤지와 자연적 헤지의 병행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첫째로 파생상품을 활용한 환헤지 강화가 있다. 선물환, 통화스와프, 옵션 등 파생상품을 적극 활용하면 환율을 미리 고정하거나 최악의 상황에서 방어막을 칠 수 있다. 예컨대 조선업처럼 수년 뒤 달러로 대금을 받는 산업이라면 계약 시점에 선물환으로 달러를 팔아버림으로써 미래 환율을 고정해버릴 수 있다. 실제로 삼성중공업 등 국내 조선사들은 수주 직후 선물환 등을 통해 향후 달러 유입액의 거의 100%를 헤지함으로써 환율 변동이 이익에 미치는 영향을 사실상 ‘0’으로 만드는 전략을 쓰고 있다. 제조업체들도 수출 예상 물량의 일정 비율을 선물환으로 미리 팔아 두는 방식으로 환율 급변에 대비할 수 있다. 트럼프 1.0 시기 불확실성이 높아지자 미국 다국적기업들이 기존보다 헤지 기간을 2~5년으로 늘려 환율을 오래 고정해두려 한 것처럼 한국 기업들도 달러 약세 국면에서는 헤지 기간을 평소보다 장기로 가져가는 방안을 검토할 수 있다. 단기 변동성이 큰 시기일수록 향후 일정 기간 동안 고정된 환율을 미리 정해두는 ‘장기 환헤지(장기 포워드 계약)’를 활용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장기 포워드 계약을 체결하면 기업은 미래의 환율이 급격히 변동하더라도 미리 약정한 환율로 외화를 교환할 수 있어 환율 리스크를 최소화할 수 있다.
물론 장기 헤지를 통해 확보한 환율이 실제 미래 환율보다 불리하게 작용할 경우 기업은 더 유리한 환율을 활용할 기회를 놓쳐 기회비용이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손실 가능성을 감내할 수 있다면 장기 헤지는 환율 급변 상황에서도 기업의 비용 구조와 수익 전망을 보다 안정적으로 예측할 수 있게 해주며 전체적인 경영 계획 수립과 재무 안정성 확보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
아울러 통화 옵션을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것도 방법이다. 옵션은 보험료(프리미엄)를 내고 최악의 경우를 회피할 권리를 사두는 것으로 환율 방향에 대한 자신이 없을 때 유용하다. 앞서 사례에서 본 미국 기업들은 불확실성이 높아지자 선물환 일변도에서 벗어나 옵션으로 눈을 돌리는 추세를 보였다. 옵션을 쓰면 환율이 크게 불리하게 움직일 때는 보호받고 유리하게 움직이면 그 혜택을 누릴 수도 있다(단, 보험료 비용은 발생). 최근에는 계약 실행 시점을 융통성 있게 조정할 수 있는 윈도 포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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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상품도 나와 불확실한 현금흐름 일정에 대응하고 여러 만기에 걸쳐 유리한 환율로 거래할 수 있는 구조화 상품 등도 활용되고 있다. 기업 특성에 맞게 이러한 다양한 헤지 수단의 포트폴리오를 짜는 것이 중요하다.
다만 파생상품 헤지에 나설 때 유의할 점은 과도한 투기를 경계하는 것이다. 헤지는 어디까지나 실수요 범위 내에서 이뤄져야지 환차익을 노려 과도한 베팅을 했다가는 자칫 본업 이상의 손실을 볼 수 있다. 대만 TSMC는 “예상 순노출 범위 내에서만, 그것도 6개월 치까지만 파생 헤지를 건다”는 식의 원칙을 세워두고 과욕을 부리지 않고도 필요한 방어 조치를 수행해 내고 있다. 또한 헤지 거래 상대방(은행 등)에 대한 신용위험 관리와 회계상 파생상품 손익의 변동성에 대한 대비(헤지회계 활용 등)도 병행돼야 한다.
둘째로 자연적 헤지를 극대화하는 경영 전략이 요구된다. 자연적 헤지란 기업의 비용 구조나 운영 구조를 조정해 통화 노출을 상쇄시키는 방법이다. 도요타 사례에서 대표적으로 볼 수 있듯 생산기지와 공급망을 수출시장 인근으로 재배치하는 것은 가장 강력한 자연 헤지 수단이다. 한국 기업들도 미국 현지 생산이나 해외 공장 증설을 통해 비즈니스의 로컬라이제이션을 꾸준히 추진하고 있다. 특히 대미 수출 비중이 큰 기업들은 향후 보호무역이 재현될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고 미국 내 생산·투자 확대를 전략적 옵션으로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것은 관세 리스크를 줄여줄 뿐 아니라 달러로 벌어들인 돈을 달러로 쓰게 해주므로 환율 변동을 자연스럽게 상쇄해준다. 모든 회사를 다 해외로 옮길 수는 없겠지만 수출 비중 상위 기업들부터 점진적으로 생산 거점을 다변화한다면 거시적인 환율 리스크 분산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자연적 헤지는 생산지의 이동뿐 아니라 조달 통화와 차입 통화의 다변화를 통해서도 구현된다. 예를 들어 원자재나 부품을 구입할 때 결제통화를 달러로 지정해두면 달러 매출이 줄어들 때 달러 결제비용도 줄어들어 순노출이 감소한다. 유니레버(Unilever)는 전 세계 69개국에 300여 개 공장을 두고 현지 통화로 매출을 올린 뒤 본사 통화(유로화)로 환산하는 구조인데 현지 법인들이 가능한 해당 통화로 차입을 일으키도록 유도함으로써 환산손익의 변동을 줄이고 있다. 많은 한국 기업도 마찬가지로 해외 자회사 운영자금을 현지 통화로 조달하며 본사 입장에서 환율 변동 시 자산가치 변화를 상쇄하고 있다. 또한 해외사업이 커질수록 달러 등 외화 표시 부채를 일부 가져가기도 한다. 그렇게 하면 원화 환산 부채 규모가 달러 약세 시에 줄어드는 효과가 있어 해외 자산가치 하락을 부분 보전해준다. 다만 이 경우 이자비용 증가나 재무비율 변동 등도 따르니 종합적인 관리가 필요하다.셋째로 조직 내 환율 대응체계의 고도화가 필수적이다. 환리스크 관리는 재무팀 몇 사람이 수동적으로 환전하는 수준을 넘어 기업 전반의 리스크 관리 문화로 스며들어야 효과를 발휘한다. 글로벌 석유기업 셸(Shell)은 25개국 700여 개 사업부의 통화 포지션을 본사에서 한데 모아 관리하는 온라인 플랫폼을 구축해 통화 노출을 무려 70%까지 상쇄(netting)했다. 중앙에서 각 지역의 노출을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상계하다 보니 굳이 시장에서 헤지할 필요가 줄어들어 비용 절감 효과도 컸다. 이처럼 전사적 통합 시스템을 도입하면 환율 정보를 투명하게 공유하고 신속히 대응할 수 있다. 한국 기업들도 이제 ERP와 연계한 실시간 환위험 모니터링 시스템 도입을 시도하고 있다. 수작업 엑셀로 각자 관리하는 시대는 이미 끝난 지 오래다. 자동화된 시스템은 순간순간 변하는 환율에 따른 노출액 변화를 계산해주고, 위험 한도를 넘어서면 경고를 보내주며, 나아가 최적의 헤지 거래 제안까지 해줄 수 있다.
최근 일부 선진 기업들은 AI 알고리즘을 활용해 환율 데이터와 주문·매출 데이터를 통합 분석함으로써 헤지 의사결정을 지원받고 있다. HP의 경우 빅데이터 기반의 자체 알고리즘으로 통화 거래 프로세스를 최적화해 수백만 달러의 비용 절감 효과를 봤다. 우리 기업들도 전문화된 전담 조직과 첨단 시스템에 투자해 환율 대응 역량을 높여야 한다. 또한 최고재무책임자(CFO)뿐 아니라 사업부서도 환율 변동에 민감하게 대응하도록 내부 의사소통 체계를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환율이 급변하면 가격 전략이나 마케팅, 원가관리까지 연동해서 움직여야 하는데 이를 위한 시나리오별 대응 매뉴얼을 미리 마련해 둬야 한다. 예를 들어 원화 강세가 일정 폭 이상 진행되면 수출 가격을 조정하거나 수출 비중을 줄이고 내수로 전환하는 등의 플랜 B를 가동하는 식의 의사결정 체계를 정형화할 필요가 있다.
끝으로 환율 리스크 관리에 대한 인식 전환과 문화 구축도 빼놓을 수 없다. 환리스크 관리는 궁극적으로 불확실성에 대비한 보험을 드는 것과 같다. 눈에 보이는 비용(헤지 비용이나 투자 비용)은 당장 아깝게 느껴질 수 있지만 큰 폭풍이 닥쳤을 때 회사를 지켜주는 안전벨트 역할을 한다. P&G는 과거 “우리는 헤지에 돈 쓰지 않고 가격에 이를 전가시키겠다”는 접근을 내세웠다가 예상치 못한 비용 급증으로 곤혹을 치른 사례도 있었다. 물론 헤지 전략은 각 사의 상황과 성향에 맞춰야 한다. 광산 기업 앵글로아메리칸(Anglo American)은 “통화와 원자재 가격이 장기적으로는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경향이 있어 자연 상쇄된다”는 이유로 통화를 거의 헤지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처럼 자연적 상쇄 효과가 크거나 헤지 비용이 과도할 경우 헤지를 최소화할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제조·수출 기업에 환율은 ‘관리하지 않으면 안 될 위험’이다. 그렇다면 비용 대비 효과를 극대화하는 ‘똑똑한 헤지’를 지향해야 한다. 완벽한 방어가 어려우면 핵심 노출이라도 방어하고, 비쌀 때는 규모를 줄이고 쌀 때는 늘리는 식의 탄력적인 대응이 중요하다. 또한 일정 수준의 손실은 감내하되 치명타만 피하는 적정선 관리도 한 방법이다. 예컨대 환율이 매우 불리하게 움직일 때만 발동되는 옵션을 합리적인 수준에서 걸어 두고 웬만한 변동은 내부 비용 절감으로 버티는 식의 혼합 전략도 생각해볼 수 있다. 어떤 방식이든 중요한 것은 경영진이 환율을 통제 불능의 영역으로 치부하지 말고 능동적 리스크 관리 대상으로 인식하는 변화다.
한국 경제는 대외의존도가 높아 환율의 영향력이 막대하다. 트럼프식 환율 위험이 다시 펼쳐진다면 이는 곧 한국 기업들에 대한 일종의 스트레스 테스트(stress test)가 될 것이다. 그러나 환율 리스크는 준비된 자에게는 위협이 아닌 관리 가능한 변수에 불과하다. 앞서 살펴본 글로벌 기업들의 모범 사례는 환율 급변기에 오히려 전략의 진가가 드러났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에어버스처럼 환율이 출렁일 때 적절한 헤지로 예정된 이익을 지켜내고, 도요타처럼 공격적인 사업 구조 개편으로 환율에 덜 의존하는 체질을 만들어내며, 나아가 불확실성을 조직적으로 관리하는 기업은 어떤 환경에서도 흔들림 없이 성장 궤도를 이어갈 수 있었다. 환율 리스크로 인한 아픈 경험이 많은 한국 기업은 이제는 한 발 앞서 대비하는 역량을 보유하고 있고 이에 꾸준한 투자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상시적 위험 요소가 될지 모를 ‘환 변동성의 시대’에서, 지금이야말로 환리스크 관리 전략을 점검하고 업그레이드할 적기이다. 그간 외환 관련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많은 경험을 쌓은 한국 기업들이 환위험을 오히려 기회로 살릴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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