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 확률이 90%가 넘는 신약 개발 여정을 지속하려면 어떤 리더십이 필요할까. 숱한 우여곡절을 겪으며 국내 바이오 생태계 성장사를 함께해 온 브릿지바이오테라퓨틱스 이정규 대표는 ‘무덤덤함’을 필수 요소로 꼽는다. 개별 연구자 입장에서는 담당 과제가 반드시 성공해야만 하지만 관리자나 임원 레벨에선 어느 과제가 가장 성공 확률이 높은지를 생각해야 하고, 최고경영진은 과제의 태반이 실패할 거라는 전제로 의사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조언이다. 확률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완벽한 약물’을 찾아 특정 파이프라인에 매달리거나 과감히 중단하지 못하면 오히려 마라톤을 지속하기 어렵다. 데이터를 확인할 때도 ‘no(아니요)’를 가리키는 증거에 일희일비하기보다는 증거의 총체를 보고 확대해석을 경계해야 한다. 그리고 라이선스 아웃을 넘어 독자 개발과 M&A의 문까지 두드리기 위해서는 글로벌 제약사 등 경쟁사들이 이미 뛰어든 격전지보다는 미충족 수요가 크되 데이터가 나올 무렵에도 시장 기회가 남아 있을 틈새시장을 공략해야 한다.
2025년 JP모건 헬스케어 콘퍼런스에서는 한국의 혁신 신약 개발 바이오테크 기업(이하 바이오테크)이 이례적으로 행사의 핵심 무대인 ‘메인 트랙’에 데뷔해 눈길을 끌었다. 대기업도 아니고 시가총액도 크지 않은 벤처기업, 브릿지바이오테라퓨틱스(이하 브릿지바이오)가 그 주인공이다. 세계 시장에선 아직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한국의 코스닥 상장사를 JP모건이 순전히 임상 데이터의 잠재력만 보고 초청한 것이다. 글로벌 제약사들의 주무대인 메인 트랙에 삼성바이오로직스와 셀트리온이 꾸준히 서 오긴 했지만 한국 바이오테크가 신약 하나로 발표 기회를 얻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브릿지바이오가 개발 중인 희귀성 폐질환 ‘특발성 폐섬유증(IPF)’ 치료제가 임상 2상에서 경쟁 약을 뛰어넘는 폐활량 회복 가능성과 안전성을 보이자 JP모건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고 한다.11브릿지바이오의 특발성 폐섬유증 치료제 BBT-877은 지난해 12월 말 기준 표준 약제의 대표적인 부작용으로 언급되는 설사 발생 빈도가 12월 말 기준 약 8.5%으로 경쟁 약물 대비 낮았고 약효 유효성의 1차 평가 변수인 ‘노력성 폐활량(FVC)’의 평균 변화 값도 투약 24주 후 -44.3㎖로 기존 경쟁 약 임상에서 위약군 피험자들이 보인 감소폭(약 -104 ~ -134㎖)보다 낮았다.닫기
이렇게 불치병 정복의 실마리를 제시하며 글로벌 제약사의 눈도장을 찍은 브릿지바이오가 그동안 순탄한 길을 걸어온 것은 결코 아니다. 당연히 앞으로 순탄한 길을 장담할 수도 없다. 2015년 설립된 브릿지바이오는 창업 4년 만인 2019년 베링거인겔하임에 약 1조5000억 원 규모의 라이선스 아웃(기술 이전) 대박을 터뜨렸지만 이듬해 임상 2상 준비가 한창인 단계에서 잠재적 독성 우려로 기술 반환되는 아픔을 겪었다. 이후 눈에 띄는 계약 성과를 내지 못해 신약 개발을 이어가기 위해 현금을 아끼고 허리띠를 졸라매 왔다. 대형 라이선스 아웃 없이는 손익을 관리하고 지속가능한 운영을 하기 힘든 국내 바이오테크의 여건상 일부 파이프라인 개발을 중단하는 결단도 내려야 했다. 자본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특발성 폐섬유증 치료제 임상에 모든 재원을 집중하고 나머지 프로젝트는 미뤄둔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