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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BR mini box I: ‘패밀리 오피스’ 글로벌 현황

가족기업 자산을 관리하는 운용사… 한국형 모델 시급

김병국 | 389호 (2024년 3월 Issue 2)
가업으로 일군 재산을 유지하려면 이를 위한 관리도 필수다. 최근 몇 년 새 새로운 투자처를 통해 부를 쌓은 고액 자산가가 많아지면서 이들의 자산관리 방식에도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대표적인 예인 ‘패밀리 오피스(Family Office)’는 초고액 자산가들이 개인 자산을 운용하고 관리하기 위해 설립한 별도의 자산운용사를 뜻한다.

패밀리 오피스의 기원은 200여 년 전 독일-유대계 혈통의 로스차일드 가문(Rothschild Family)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금융 산업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한 로스차일드 가문은 집사를 두어 자산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도록 했고 이것이 패밀리 오피스의 효시가 됐다.

패밀리 오피스는 주로 미국과 유럽에서 발전해 왔으며 가족기업의 자산 증식과 가업 승계를 위한 수단으로 활용됐다. 최근에는 홍콩과 싱가포르 등 아시아로 패밀리 오피스가 확산되고 있다. 전 세계 곳곳에 설립된 패밀리 오피스의 운용 자금만 2000조 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사모펀드와 벤처캐피털의 운용 자금을 넘어서는 규모다.

홍콩은 정부와 금융권이 앞장서 세계 유수한 패밀리 오피스를 적극적으로 유치하고 있고, ‘아시아 금융허브’로 떠오른 싱가포르에서도 몇 년 새 패밀리 오피스 설립 붐이 일고 있다.

1년 전 업무상 싱가포르를 방문했을 때 자산운용사 대표를 만난 적이 있었다. 중형 SUV 구입비가 4억 원에 달하고 30평대 아파트의 월 임대료가 1000만 원에 이른다고 했다. 이렇게 고물가의 거주 환경에도 불구하고 싱가포르에 전 세계 부호가 몰리는 이유가 무엇일지 궁금했다. 싱가포르 금융당국인 통화청(MAS)에 따르면 싱가포르 내 패밀리 오피스는 2020년 약 400곳에서 올해 2월 기준 872곳으로 두 배 이상 급증했다. 이는 싱가포르 정부가 2020년부터 금융 활성화 대책의 하나로 시행 중인 ‘가변자본기업(VCC)’ 제도가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제도를 통해 싱가포르에서 자금을 운용하는 법인은 법인세, 소득세 등을 면제받고 공시 의무나 승인 절차 없이 각종 금융상품에 투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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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시장·산업 전반에 긍정적 효과

이처럼 글로벌 패밀리 오피스를 자국에 유치하게 되면 많은 투자자가 모이게 돼 금융시장에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고 현지 기업에 대한 투자도 활성화된다. 그뿐만 아니라 세무나 회계 등 업계에도 부가적인 가치를 창출할 수 있어 산업 전반에 긍정적 효과가 기대된다.

패밀리 오피스는 크게 싱글 패밀리 오피스(SFO), 멀티 패밀리 오피스(MFO), 가상 패밀리 오피스(VFO)로 나뉜다. 싱글 패밀리 오피스는 개인 지분으로 설립돼 특정 가문에만 맞춤형 자산관리 서비스를 제공한다. 주로 재단이나 신탁, 헤지펀드 등의 형태로 운영된다. 대표적인 예가 스웨덴 발렌베리 재단이다. 이 재단은 발렌베리 가문의 모든 지분을 갖고 있으며 중간 지주회사를 통해 각각의 기업을 지배한다.

멀티 패밀리 오피스는 증권사, 보험사, 은행 등 금융회사가 여러 자산가의 자산관리를 해주는 방식이다. 싱글 패밀리 오피스에 비해 운영 비용이 적고 여러 전문가를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가상 패밀리 오피스는 정보 플랫폼을 통해 자산관리 서비스를 제공한다. 팬데믹 이후 비대면 환경에 관심이 많아지고 가문 구성원의 거주 지역이 다양해지면서 생긴 방식이다.

기존 금융 회사들도 프라이빗뱅킹 서비스를 통해 패밀리 오피스의 역할을 일부 수행하고 있으며 금융 투자에 주로 집중하는 멀티 패밀리 오피스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는 한 명의 자산가가 아닌 다수의 자산가를 유치해 운영한다는 점에서 싱글 패밀리 오피스와 차이가 있다. 싱글 패밀리 오피스의 경우 자산관리뿐만 아니라 가업을 이을 후계자를 양성하고 관리하는 인적 자산 관리, 가업의 평판과 사회적 책임을 관리하는 사회적 자산 관리 등을 포괄해 종합적인 서비스를 제공한다.

최근 전 세계 자산가들은 신탁을 설정한 후 지주사 형태의 중간 회사를 설립해 외국에 패밀리 오피스를 두고 재산을 관리하는 방식을 많이 활용한다. 패밀리 오피스의 경우 자산가 개인의 신념에 따라 투자 등의 활동을 할 수 있다. 미국에서는 패밀리 오피스들이 인공지능(AI)이나 블록체인 등 신기술에 적극적으로 투자하며 산업계에서도 높은 관심을 끌고 있다. 최근 ESG 경영이 이슈가 되면서 가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데도 집중하고 있다. 또 개인과 기업의 자산을 엄격히 분리할 수 있어 가업 운영의 투명성을 높이는 역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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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재단과 신탁 통한 운영 어려워

해외에서 오랫동안 패밀리 오피스가 발달한 것과 달리 국내에서는 이제서야 패밀리 오피스 개념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봉제인형 회사에서 시작해 2008년 종합유선방송사업자인 씨앤앰을 매각한 이민주 회장이 매각 자금 1조5000억 원을 관리하기 위해 세운 에이티넘파트너스가 패밀리 오피스의 시초로 꼽힌다. 화장품 업체 카버코리아를 유니레버에 매각한 이상록 전 회장이나 롯데그룹에 지분을 매각한 허재명 전 일진머티리얼즈 사장 등도 패밀리 오피스를 2023년 설립했다.

국내 패밀리 오피스가 아직 성숙하지 못한 것은 가업과 자산가에 대한 부정적인 사회적 인식과 더불어 세제 등 제도적 한계 때문이다. 국내에서는 여러 제약 요건으로 인해 재단이나 신탁을 통한 싱글 패밀리 오피스의 운영이 어려운 실정이다. 재단을 세워 패밀리 오피스를 운영하려 해도 공익재단은 의결권 있는 발행 주식 또는 출자 총액의 5% 미만으로 보유할 때만 증여세가 면제된다. 따라서 재단을 통한 가업승계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신탁의 경우에도 신탁 재산에 속한 주식이 발행한 주식 총수의 15%를 초과했다면 그 초과분으로 의결권을 행사할 수 없다. 또한 한국에서는 패밀리 오피스를 설립하려 해도 자본시장법상 자산운용을 하기 위한 금융업 라이선스가 필요하고, 법인 원천소득에 대해 법인세가 부과되고, 세후 소득의 배당 과정에서 다시 소득세가 부과되는 등 이중과세 조정이 되지 않는다.

그 결과, 국내의 싱글 패밀리 오피스는 개인 투자 회사나 자산운용사의 형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때 자산가들은 프라이빗뱅커(PB)에 의존해 투자하는 경우가 많은데 최근 잇따른 모 증권사 PB 직원의 일탈 사건에서 보듯 사고 위험이 존재한다. 이런 제도적 한계 때문에 자산가들은 낮은 세율 및 이중과세 조정 등 세제 혜택 등이 있는 싱가포르에 패밀리 오피스를 세우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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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제 없애고 자산가에 대한 인식 바꿔야

국내 패밀리 오피스 시장은 앞서 말했듯이 멀티 패밀리 오피스 형태로 증권사, 보험사, 은행 등의 전통 금융사들이 선도하고 있다. 다만 기존 금융사들의 자산관리는 해당 회사 내의 상품 위주 영업 방식에 국한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주먹구구식 운영이 아닌 패밀리 오피스라는 큰 그릇을 통한 통합적인 서비스가 절실하다. 이를 위해 소유주 관점의 오너십 관리(Manage Ownership)와 기업의 성장을 지원하는 비즈니스 관리(Manage Business)로 나눠 패밀리 오피스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운영하는 시스템을 고려해 볼 수 있다.

패밀리 오피스는 단순한 자산관리뿐만 아니라 대를 이어 가족의 자산을 지키고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등 사회적 책임을 통해 가문의 가치를 드높이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패밀리 오피스 설립과 발전을 가로막는 불합리한 규제는 없애고 제도를 보완하는 한편 자산가에 대해 막연히 부정적인 인식을 갖기보다 기업과 사회가 함께 발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고액 자산가와 젊은 기업가의 부가 패밀리 오피스를 통해 해당 자산 및 인력이 국내에 머물게 하고 해당 자금이 다시 건전한 투자 활성화로 이어질 수 있도록 제도적 보완 및 마중물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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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병국 | 삼일PwC 파트너

    필자는 성균관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2013~2016년 우리은행에서 전문계약직으로 근무했다. 2002년부터 삼일PwC 딜 부문에서 기업실사, 가치평가 및 인수합병(M&A) 거래 주관을 담당하고 있다. 현재 PwC의 오너십 기반 서비스 플랫폼인 EPB(Entrepreneurial & Private Business Service) 센터에 소속돼 있다. YTN, KDB생명, MG손보 등의 매각 자문을 수행했으며 라임·옵티머스 등 펀드 실사, 우리금융지주 민영화, 현대상선, 해양진흥공사 설립 자문 등 다수의 재무 실사를 진행했다.
    byungguk.kim@pwc.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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