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회원가입|고객센터
Top
검색버튼 메뉴버튼

우리가 잘못 아는 ‘못된’ 문화

‘진실한 꾸중’은 어디 갔는가

김영훈 | 388호 (2024년 3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한국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칭찬에 약하고 꾸중에 강했다. 꾸중은 사람을 고무시키고 동기를 부여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미국 사람들은 칭찬을 밥 먹듯이 한다. 성과가 좋지 않더라도 칭찬이 동기부여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과연 어느 쪽이 맞을까? 연구 결과는 양쪽 모두 틀렸음을 보여준다. 잘했을 때는 칭찬해주고, 못했을 때는 꾸중해야 더 나은 성과를 낼 수 있다. 언젠가부터 한국에서도 미국처럼 칭찬을 많이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하지만 과도한 칭찬은 오히려 사람을 망칠 수 있다. 진실한 꾸중을 할 줄 아는, 용기 있는 ‘꼰대’가 필요한 시대다.



20년이 훨씬 지났지만 아직도 잊지 못하는 순간이 있다. 신혼여행을 다녀온 바로 다음 날이었다. 나와 아내는 식탁에 앉아 아내가 3시간 30분 동안이나 준비한 첫 음식을 마주했다. 김치찌개였다. 김치찌개를 보며 나는 설지만 아내는 상당히 긴장한 눈치였다. 으레 그랬던 것처럼 숟가락으로 김치찌개 국물을 떠서 맛을 봤다. 길어봐야 3초를 넘기지 않는 시간이었지만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순간을 기억하고 있다. 맛이 없었다. 맛이 안 좋은 것이 아니고 그냥 문자적으로 맛 자체가 없었다. 평생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맛이었다.

그 3초의 순간에 수많은 생각이 내 머릿속을 어지럽게 했다. 물끄러미 웃으며 기대에 찬 얼굴로 내 얼굴을 바라보는 아내를 보며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나는 직감적으로 3개의 선택지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첫째는 김치찌개가 아주 맛있다고 선의의 거짓말을 하는 것이었고, 둘째는 김치찌개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는 것이었으며, 셋째는 김치찌개가 맛이 없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내가 내 입만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에 두 번째 선택지는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세 번째 선택지가 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신혼 초부터 싸우고 싶지도 않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칭찬에 대한 수많은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교육이었다. 물론 나는 김치찌개가 엄청 맛있다고 선의의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밥을 두 그릇이나 먹었다.

나는 그날 밥을 먹으며 재밌는 심리학 실험 하나를 설계하게 됐다. 내 선의의 거짓말로 아내의 음식 솜씨가 정말로 더 좋아질까 궁금했다. 발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딱 3개뿐이었다. 첫째는 사람들의 믿음처럼 아내의 음식 솜씨가 점점 더 좋아지는 경우, 둘째는 사람들의 믿음이 무색하게 아내의 음식 솜씨가 그 수준에 머무르는 경우, 마지막 셋째는 (더 안 좋아질 것도 없지만) 아내의 음식 솜씨가 점점 더 안 좋아지는 경우였다. 나는 이 답을 찾아 지난 20년간 칭찬과 꾸중에 관해 연구했다.


GettyImages-1410091127_[변환됨]



칭찬과 꾸중에 대한 우리의 믿음

지금도 서점을 돌아다니다 보면 칭찬의 효과에 관해서 역설하는 책들이 많다. 한때 우리는 ‘서로 칭찬합시다’라는 구호를 내세우며 학교에서나 직장에서 전 국민이 칭찬하기를 연습한 때도 있었다. 왠지 사람을 처음 만나면 칭찬할 구석을 억지로라도 찾게 된다. 칭찬으로 대화를 시작해야 할 것 같기 때문이다. 하물며 어린아이를 만나더라도 첫 문장은 항상 “야, 너 너무 예쁘게 생겼다”라고 해야 한다. “어머, 얼굴이 너무 좋아 보여요.” “더 젊어지신 것 같아요”라는 말들을 우리는 첫 인사말의 관용어처럼 사용한다. 하다못해 “와, 피부가 어떻게 그렇게 좋으세요”라고 하며 피부 상태까지 소환한다. 꾸중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우리는 칭찬을 먼저 하는 배려(?)를 잃지 않는다. 칭찬을 무슨 만병통치약처럼 생각하는 것 같다. 칭찬의 내용이 사실이든 아니든 그리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우리가 원래부터 이런 태도를 지녔던 건 아니다. 우리는 원래 칭찬과 거리가 먼 민족이었다. 칭찬을 아부와 권모술수로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지금도 칭찬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사람이 많다. 오히려 우리는 꾸중을 미덕으로 생각하는 민족이었다.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우리는 꾸중이라는 매를 들었다. 혹독한 꾸중으로 사람을 바로 잡으려고 했고, 더 성장시키려 했으며, 일에 대한 동기를 올리려고 했다. 학교생활은 꾸중의 연속이었다. 꾸중은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본질이었다. 집에서도 꾸중을 듣지 않으면 하루가 지나가지 않을 정도였다. 자녀를 꾸중한 담임 선생님을 찾아가 어머니는 머리를 조아렸고 더 혼내 달라는 부탁을 잊지 않았다. 직장 생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꾸중과의 사투가 직장 생활의 핵심이었다. 모르는 아이라 할지라도 동네 어른들은 잘못된 아이를 꾸짖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어른의 사명이었다. 꾸중은 사랑과 관심의 표현이었고 사람을 성장시킬 수 있는 중요한 뿌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이런 꾸중을 우리 삶 속에서 더는 찾아볼 수 없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꼰대’라는 시대적 장벽 앞에서 꾸중은 온데간데없이 자취를 감췄다. 대신 칭찬이 난무하는 시대가 열렸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핵심에는 미국 문화권에 기초를 둔 긍정심리학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긍정심리학의 본질은 버리고 껍데기만 수입했다. 긍정심리학을 무조건 칭찬하기 혹은 무조건 자신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기로 해석하고 적용했다. 꾸중에 힘들어하던 우리에게 긍정심리학은 그렇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꾸중에 대한 전통적인 태도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칭찬과 꾸중을 바라보는 한국인과 미국인의 태도

칭찬과 꾸중에 대한 동서양의 차이는 아주 극명하다. 특히 미국 사람들은 칭찬을 밥 먹듯이 한다. 칭찬에 대한 단어들도 수없이 많다. Excellent! Fantastic! Great! Wonderful! Phenomenal! Outstanding! Impressive! Super! Very Good! Awesome! Extraordinary! Top-Notch! Brilliant! Remarkable! 이런 단어들이 일상의 삶에 녹아 있다. 이런 단어들을 사용하지 않고는 몇 문장도 말하기 어려울 정도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꾸중에 관한 단어는 별로 없다. 이런 태도에는 칭찬과 꾸중을 바라보는 미국인들의 철학이 숨어 있다. 칭찬은 사람을 고무시키고 동기를 부여한다고 믿는다. 비록 성과가 기준에 못 미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꾸중에 대해서는 적대적인 태도를 보인다. 꾸중은 동기를 잃게 한다고 믿는다. 비록 현실적이고 객관적인 꾸중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칭찬에 약하고 꾸중에 강했다. ‘오케이!’라는 말은 아주 훌륭한 성과가 나왔을 때 쓰는 단어였다. 미국인 처지에서 생각하면 박해도 너무 박한 단어가 아닐 수 없다. 특별한 말이 없으면 잘했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이런 한국인의 태도에도 미국인과는 다른 철학이 숨어 있었다. 꾸중은 사람을 고무시키고 동기를 부여한다고 믿었다. 비록 성과가 좋은 경우라 하더라도 말이다. 최고 수준의 성과를 낼 때까지 꾸중이 이어졌다. 꾸중을 동기부여의 수단으로 사용했다. 하지만 칭찬은 동기를 떨어트릴 수 있다고 믿었다. 그 수준에 만족하며 나태해질까 봐 걱정했다.


GettyImages-1299866493_[변환됨]



칭찬과 꾸중,
뭐가 더 높은 성과를 예측할까?

미국 사람들은 성과가 좋지 않더라도 칭찬을 통해서 동기부여를 하려고 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성과가 좋더라도 꾸중을 통해서 동기부여를 하려고 한다. 누구의 태도가 옳은 것일까? 미국 사람들의 믿음처럼 성과가 낮은 사람에게 “잘했다!”라고 칭찬하면 동기부여가 돼서 그다음 과제에서는 더 높은 성과를 얻을 수 있을까? 아니면 한국 사람들의 믿음처럼 성과가 높은 사람에게 “잘하지 못했다!”라고 꾸중하면 더욱 동기부여가 돼서 그다음 과제에서 더 높은 성과를 얻을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과학적 답을 얻기 위해서 필자는 심리학 실험 하나를 실시했다.1 실험 참여자를 모집한 후 10문제로 구성된 수학 시험을 치르게 했다. 그 후에 시험을 잘 본 사람들을 두 그룹을 나눠서 한 그룹에는 “시험을 아주 잘 봤다”라는 칭찬을 했고 다른 그룹에는 “시험을 잘 못 봤다”라는 꾸중을 했다. 시험을 잘 못 본 사람들도 두 그룹으로 나눠서 한 그룹에는 “시험을 아주 잘 봤다”라고 칭찬했고 다른 그룹에는 “시험을 잘 못 봤다”라는 꾸중을 했다. 그 후에 모든 실험 참여자에게 다른 시험 하나를 더 치르게 했다. 칭찬과 꾸중이 그다음 시험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결과는 어땠을까? 한국인의 믿음처럼 시험을 잘 본 사람들이 꾸중을 받았을 때 두 번째 과제에서 더 높은 성적을 얻었을까? 미국인의 믿음처럼 시험을 잘 못 본 사람들이 칭찬을 받았을 때 두 번째 과제에서 오히려 더 높은 성적을 얻었을까?

데이터를 분석하고 깜짝 놀랐다. 먼저 시험을 잘 못 본 사람들의 도표(A)를 보면 미국인의 믿음이 틀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험을 잘 못 본 사람들에게 칭찬을 하면 꾸중할 때보다 두 번째 과제에서 성적이 더 낮았다. 과장된 칭찬은 동기를 부여하기는커녕 오히려 동기를 떨어트렸다. 거짓된 칭찬에 만족하고 안주하며 노력하지 않은 결과였다. 하지만 시험을 잘 못 본 사람들을 꾸중했을 때는 성적이 더 높아졌다. 결론적으로 시험을 못 본 사람들에게는 꾸중을 해야 함을 의미한다.

20240226_162441


그럼 시험을 잘 본 사람들은 어땠을까? 도표(B)를 보면 한국인의 믿음이 틀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험을 잘 본 사람들을 꾸중하면 칭찬할 때보다 두 번째 과제에서 성적이 더 낮았다. 비현실적인 꾸중은 동기를 부여하기는커녕 오히려 동기를 더 떨어트렸다. 과장된 꾸중을 듣곤 포기를 해버리고 노력하지 않은 결과였다. 하지만 시험을 잘 본 학생들을 칭찬했을 때는 이후 성적이 더 높아졌다. 결론적으로 시험을 잘 본 사람은 제대로 칭찬해야 한다는 뜻이다.

결론은 의외로 간단하다. 잘했을 때는 잘했다고 이야기하고, 못했을 때는 못했다고 이야기해야 한다. 그래야만 현실을 직시하고 적절한 준비와 노력을 하게 된다. 그것이 성과를 올리는 유일한 길이다. 어떻게 보면 너무 자명한 사실이지만 현실에서는 예상외로 이런 법칙들이 잘 실현되지 않는다. 한국인과 미국인은 각기 다른 방법으로 일에 대한 동기를 부여하려고 한다. 미국인은 칭찬의 힘을 과신해 잘하지 못한 사람에게도 칭찬해 일에 대한 동기를 끌어올리려고 한다. 좋은 시도인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그런 접근은 자만을 불러오고 낮은 성과로 마무리된다. 한국인의 믿음도 틀린 것은 매한가지다. 한국인은 전통적으로 꾸중의 힘을 과신해 잘한 사람들에게도 꾸중해 일에 대한 동기를 더 올리려고 한다. 지혜로운 방법처럼 보이지만 결국 그런 접근은 포기를 불러오고 낮은 성과로 마무리된다.

사실은 사실대로 말해야 한다. 피드백은 정확하고 현실적일 때 효과가 훨씬 더 좋다. 동기를 높이기 위해서 잔머리를 굴려서 잘한 사람에게 못했다고 다그치거나 못한 사람에게 잘했다고 하는 건 더 낮은 성과를 초래할 뿐이다. 아쉽지만 언제부턴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은 사람이 바른말을 하는 데 많은 부담감과 어려움을 겪고 있다. 왠지 더 칭찬해야 할 것 같기도 하고, 때로는 더욱더 꾸중해야 할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과학적 진실은 여전히 현실적이고 객관적인 피드백에 무게를 두고 있다. 칭찬이 정당할 때는 칭찬을 해야 하고 꾸중이 정당할 때는 꾸중해야 한다. 그래야 더 높은 성과를 기대할 수 있다.


한 사람의 인생을 가장 쉽게 망치는 방법

한 사람의 인생을 가장 쉽게 파괴할 방법이 있다. 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게 말이다. 더 나아가 좋은 이미지까지 남기면서. 답은 바로 과도한 칭찬, 정당하지 않은 칭찬을 하는 것이다. 비현실적인 칭찬일수록 좋다. 필자가 진행한 수많은 연구 중에서 한 가지의 실험 결과만 공유했지만 지금까지의 모든 연구를 종합해 봐도 같은 결과가 도출됐다. 과도하고 비현실적인 칭찬은 성과를 떨어트리고, 성취동기를 낮추며, 자기 불구화 현상을 유도할 뿐 아니라 우울 정도까지 높인다. 성공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이 인생에서 원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칭찬보다 더 치명적인 것이 없다.

물론 과도한 꾸중도 같은 결과를 초래한다. 비현실적인 꾸중을 하면 된다. 정당하지 않은 꾸중을 하면 된다. 그런 꾸중을 받은 사람은 삶에서 중요한 것들을 한꺼번에 잃어버리게 된다. 하지만 요즘같이 긍정심리학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과도한 꾸중을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도 꾸중에 대한 중요한 사실 중 하나는 현실적이며 정당한 꾸중은 성과를 오르게 하고 성취동기를 올린다는 사실이다. 현실적인 꾸중은 꼭 필요하고 한 개인의 성과와 정신 건강에 큰 도움이 된다. 꾸중해야 할 때 꾸중하지 못하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성과가 떨어지고 성취동기가 낮아지며 자기 불구화 현상을 보이고 높은 우울증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 시대에 꼭 필요한 것은 과도한 칭찬이 아니고 현실적이고 객관적인 꾸중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꾸중을 버린 지 오래다. 과도한 칭찬만 남아 사람들을 혼미케 할 뿐이다.


칭찬과 꾸중으로 조작되는 사람들

진실한 꾸중이 필요할 때 오히려 칭찬하는 사람이 많다. 좋은 뜻으로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칭찬이 상대방의 삶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정당하지 않은 칭찬을 동기부여의 수단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동기부여는커녕 성과를 낮출 수 있다. 칭찬을 많이 하면 사람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내가 진행한 연구를 종합해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훨씬 더 우울하고 불행한 삶을 살 확률이 높다. 그 칭찬이 정당하지 않고 과했다면 말이다. 칭찬은 칭찬할 만할 때 해야 한다. 현실적이고 객관적인 칭찬만이 의미가 있다. 칭찬을 만병통치약처럼 사용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멘탈이 점점 약해지고 삶에 대한 동기를 잃어가고 있다.

잘못된 칭찬으로 아이들을 쉽게 조작할 수 있다. 하지만 조작은 오래가지 않는다. 언젠가는 결국 실체가 없으므로 무너질 수밖에 없다. 현실성을 강조하는 피드백이 너무 메마르고 인간미 없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정당하지 않은 칭찬이 오히려 인간미가 없다. 조잡스러운 조작일 뿐이다. 평생 조작할 수 있다면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는 현실이라는 거대한 시장과 벽을 맞대고 살아야 한다. 그 장벽에서 견딜 수 있는 조작은 없다. 과장되면 과장될수록, 정당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사람들이 겪어야 할 고통과 아픔은 커질 것이다. 과장된 칭찬은 사랑도 아니고 배려도 아니다. 그냥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은 어설픈 이기심일 수 있다. 그 이기심이 채워질 수만 있다면 그래도 반은 성공했다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이기심도 절대 채워질 수 없다. 현실성 없는 칭찬은 누구나 공허한 말임을 얼마 가지 않아 알아버리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를 칭찬하고 꾸중하는 게 중요하다.

오늘날 우리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진실한 꾸중일 수 있다. ‘꼰대’라는 이름으로 꾸중이 사라지는 지금이 안타깝다. 긍정이 더 필요한 때라고 외치지만 현실성 없는 긍정은 어차피 설 자리가 없다. 그렇다고 정당하지 않은 꾸중을 하자는 게 아니다. 그런 꾸중의 아픔은 이미 충분히 경험했다. 이제는 그런 꾸중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 객관적이고 현실적인 꾸중을 하자는 것이다. 정당한 꾸중이 없어 약해져 가는 사람들을 보는 게 안타깝다. 이 위기를 무한한 긍정과 칭찬으로 덮으려는 노력은 더욱더 안타깝다. 더 깊은 수렁으로 사람들을 인도하기 때문이다. 진실한 꾸중이 사랑이고 배려다. 진실한 꾸중 없이는 성장도 발전도 불가능하다. 진실한 꾸중이 멘탈을 더 강하게 하고 어려운 시련과 아픔을 헤쳐 나가게 한다. 이제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용기를 낼 때다. 좀 더 진실한 꾸중으로 사람을 대해야 한다. 좀 더 큰 용기를 낼 수 있다면 ‘진실한 꼰대’가 되면 좋겠다. 이들이 함께 사는 세상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 아닐까.


어떻게 적용할까?

많은 사람은 진실한 꾸중을 하는 데 두려움과 우려를 느낀다. ‘쓸데없이 꾸중했다가 관계가 깨지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다. 특별히 관계 중심적인 우리나라의 경우 이런 우려가 더 크게 다가오는 것이 사실이다. 또 하나의 우려는 ‘꾸중한다고 쟤가 듣기나 하겠어?’ 하는 생각이다. 물론 많은 사람이 꾸중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끝나기만 기다리는 게 꾸중이다. 속으로는 꾸중하는 사람에게 ‘너나 잘하세요!’라고 외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우려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생각이다. 꾸중한다고 모든 관계가 다 깨지는 것도 아니고 모두가 꾸중을 거부하는 것도 절대 아니다. 이 갈림길은 꾸중하는 사람의 태도에 달려 있다.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있다면 두려워하지 말고 용기를 내 꾸중하기를 바란다. 그것이 사람을 살리는 길이다. 친구든, 직원이든, 동료든, 식구든 상관없다. 꾸중받는 순간에는 마음이 서운할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당신의 꾸중에 감사할 것이고 관계가 오히려 더 좋아질 것이다. 아끼는 마음 없이 꾸중하면 아마도 당신의 꾸중을 듣는 척만 할 것이고 관계도 더 안 좋아질 수 있다. 하지만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까진 없는 상황이더라도 이 세상 누군가는 이런 역할을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무도 바른말을 해주지 않으면 그 사람을 버리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

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용기 있는 꼰대가 필요한 시대다. 그런데 누가 이런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공적인 기관에서 공식적인 타이틀을 가진 사람이 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그런 일을 하라고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기업의 대표든, 인사를 담당하는 임원이든, 부장이든, 팀장이든, 선생님이든 상관없다. 얄팍한 인기몰이를 위해서 진실한 꾸중을 피하고 의미 없는 칭찬과 좋은 말만 날린다면 이것보다 이기적인 마음이 따로 없다.
  • 김영훈 |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

    필자는 사회심리학자이자 문화심리학자이다. 미국 사우스플로리다대에서 학사, 아이오와대에서 석사, 일리노이대에서 사회심리학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12년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로 부임한 뒤 2013년 ‘연세대학교 언더우드 특훈교수’에 선정 및 임명됐고 2015년 아시아사회심리학회에서 ‘최고의 논문상’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차라리 이기적으로 살 걸 그랬습니다』 『노력의 배신』이 있다. 삼성, LG, 사법연수원, 초·중·고등학교 학부모 연수 등 각종 기업과 공공기관에서 칭찬과 꾸중에 관한 강연을 하고 있다.
    younghoonkim@yonsei.ac.kr
    이 필자의 다른 기사 보기
인기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