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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BR Case Study: 국내 1호 바이오벤처 ‘바이오니아’

장기 비전과 단기 캐시카우 ‘양손 전략’
미충족 수요 발굴로 ‘30년 장수 벤처’ 우뚝

김윤진 | 379호 (2023년 10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국내 1호 바이오벤처’인 바이오니아는 벤처캐피털의 개념도 생소하던 시절인 1992년 국내 유전자 연구 장비와 시약 등을 판매하는 회사로 출발해 30년 넘는 시간을 생존해 왔다. 단순히 명맥만 이어가고 있는 게 아니라 연 매출의 평균 40%가량을 연구개발에 투자하면서도 현금 흐름을 유지하고, 이제는 연결 기준 2000억 원대 매출과 흑자를 내는 회사로 거듭나고 있다. 고비용, 고위험을 특징으로 하는 바이오 시장에서 바이오니아가 업계의 부침 속에서도 생존하고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은 사업 다각화를 통한 포트폴리오 전략에 있다. 본업에서 이탈하지 않으면서도 1) 미충족 수요가 큰 시장을 찾아 2) 새로운 발상으로 특허 기반 초격차를 확보하고 3) 스핀오프를 통해 스케일업하면서 신사업을 꾸준히 키워 온 것이다. 이 같은 바이오니아의 다각화 전략은 장기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단기 캐시카우 발굴이 필요하며 균형 있는 양손잡이가 돼야 한다는 시사점을 준다.



2022년부터 바이오 시장에 연일 곡소리가 나고 있다. 투자 빙하기가 닥치자 오래 누적된 적자와 자금난을 감당하지 못한 1세대 바이오 벤처 창업주들이 줄줄이 최대 주주 지위를 내려놓고 경영권을 매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투자의 씨가 마른 데다 잇단 유상증자로 지분이 희석된 결과 파멥신, 헬릭스미스, 크리스탈지노믹스, 메디포스트, 랩지노믹스, 휴마시스 등 1990~2000년대 창업한 중소벤처기업들의 주인이 대부분 바뀌었다. 바람 잘 날 없는 1세대 K바이오 기업들을 바라보는 업계 후배들의 시선도 곱지만은 않다. 신약 개발의 부푼 꿈을 안고 국내 바이오산업의 토양을 일군 선발 주자들의 기여도 크지만 그에 못지않게 이들이 남긴 상흔도 깊기 때문이다. 높은 임상 비용과 지속적인 연구개발비 투입에도 불구하고 투자 회수가 요원해 ‘돈 먹는 하마’라는 인식을 키웠고, 신라젠 등 한때 주목을 받던 일부 기업은 경영진의 도덕적 해이와 불법 행위로 바이오산업이 자본시장의 신뢰를 잃는 빌미를 제공했다.

그런 의미에서 국내 1호 바이오 벤처이자 1호 기술 특례 상장 기업인 ‘바이오니아’의 생존이 가지는 상징적 의미는 크다. 1992년 박한오 회장이 유전자 기술의 국산화를 앞세워 창업한 이 회사는 2020년 흑자 전환하며 재무 요건을 충족해 2022년 코스닥 우량 기업부에 입성했고 버티다 보면 오랜 연구개발의 결실을 맺을 수 있다는 희망의 불씨를 되살렸다. 바이오니아의 2022년 실적은 연결 기준 매출 2184억 원, 영업이익 115억 원이다. 2021년 코로나19 진단 장비와 키트 수출에 힘입어 매출 2070억 원, 영업이익 1051억 원을 기록했던 것에 비하면 수익성이 악화됐지만 코로나 특수가 끝났는데도 매출을 방어하면서 건재함을 과시했다. 같은 시기 호황을 누린 분자진단 장비 및 키트 제조사들이 코로나19 종식 이후 적자 전환하고 대규모 구조조정에 나선 것과는 대비되는 모습이다. 이처럼 바이오니아의 호실적이 가능했던 이유는 자회사 에이스바이옴의 체지방 감소 유산균 제품인 ‘비에날씬’의 판매 수입이 캐시카우(cash cow)로서 매출을 견인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최근 유럽 판매를 개시한 RNA 기반의 탈모 완화 화장품 ‘코스메르나’도 차세대 수익원으로 회사에 힘을 실어줄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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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바이오니아의 선전은 회사가 무조건 허리띠를 졸라매고 비용을 감축한 결과가 아니라 오랜 적자를 감수하며 연 매출의 평균 40%가량을 연구개발에 투입하면서 신성장 동력을 발굴해 온 결과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는 회사가 현금 흐름을 유지하면서도 여유 자금을 계속해서 신사업에 투자하면서 미래에 대비해왔다는 뜻이기도 하다. 실제로 바이오니아의 비즈니스는 크게 1) 분자진단 장비 및 키트, 시약의 판매 2) 유산균 제품 판매 3) RNA 기반 화장품 및 신약 개발로 구분된다. 한 바구니에 모든 계란을 담지 않았기 때문에 특정 사업 부문에서 손실이 발생하더라도 다른 쪽이 메워줄 수 있는 구조다.

그렇다면 어떻게 바이오니아는 국내에 벤처캐피털(VC)의 개념조차 거의 없고 자본금도 부족하던 1990년대 국산 유전자 회사로 출발해 이런 다각화된 성장 축을 갖추고 생존의 근육을 키울 수 있었던 걸까. DBR(동아비즈니스리뷰)이 바이오니아의 창업주이자 대표인 박한오 회장을 만나 회사의 포트폴리오 전략을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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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 기술의 완전 국산화’
원대한 꿈에 가려진 좁은 시장의 현실

연구원이었던 박 회장이 안정적인 정부 출연 연구기관인 유전공학센터(현 한국생명공학연구원) 문을 박차고 나와 1992년 창업을 한 이유는 분명했다. 지금까지도 바이오니아의 주요 사명 중 하나, 바로 ‘유전자 기술의 완전 국산화’였다. 창업 당시만 해도 국내에서 유전자 연구에 쓰이는 장비와 시약, 효소 등은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PCR(유전자증폭) 장비와 DNA 합성기는 물론 핵심 시약인 화학합성 DNA 올리고, 내열성 중합 효소 등 모든 기자재를 주문하면 바다 건너 배송되기까지 족히 한 달은 걸렸다. 가격도 미국 현지보다 2배가량 비쌌다.

앞으로 점점 유전자 기술 연구에 대한 수요는 커질 텐데 고가의 핵심 연구 및 생산 기자재들을 국산화하지 않으면 똑같은 아이디어로 연구를 시작해도 속도전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가면 특허와 사업화 경쟁에서 뒤처져 국내 생명공학의 미래가 없다는 게 당시 박 회장의 판단이었다. 전쟁터에 나가는데 총과 총알 등 무기를 전량 상대국으로부터 수입하면 승산이 있을 리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수입 대체에 대한 사명감 못지않게 시장성에 대한 믿음도 있었다. 당시에는 혁신 기술이었던 PCR, DNA 합성과 염기서열 분석 등에 대한 수요가 계속해서 증가하는 시기였고 국내에 이렇다 할 경쟁자도 없었기 때문에 국산 장비와 시약을 경제적 가격에 공급한다면 돈이 될 것이라고 봤다.

이에 박 회장은 자신과 아내, 동료 연구원들이 모은 종잣돈 8000만 원으로 창업을 하고 국산화할 수 있는 기자재를 하나씩 개발해 판매하기 시작했다. 벤처캐피털도 없고 은행에서 돈을 빌리기도 어려운 시절이었기 때문에 지출을 최소화해야 했다. 적자가 나면 문을 닫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던 만큼 한 푼이라도 절약하기 위해 대전 외곽에 있는 농기구 창고를 임대해 사업장으로 썼고, 점심 값 2000원을 아끼려 사업장에서 밥을 해 먹기도 했다. 이렇게 해외에 주문하면 수령까지 1개월이 걸리던 유전자 연구용 시약인 DNA 올리고를 국산화해 하루 이틀 만에 훨씬 더 저렴한 가격에 공급하자 창업한 지 6개월 만에 바로 흑자가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영세한 회사의 규모를 더 키우기엔 두 가지 한계가 있었다. 첫째, 이미 글로벌 기업들이 선점한 시장에 깊숙이 침투하기엔 벽이 높았다. 무엇보다 석박사급 연구원들은 기자재 품질에 민감하고 자신들이 학위 과정에서 연구해 온 방식을 고수하는 경향이 강했다. 자연히 미국이나 일본 등 해외에서 수학한 이들은 해외 장비에 대한 의존도가 컸다. 이들에게 창업한 지 얼마 안 된 국내 중소기업이 만든 장비가 미더울 리 없었다. 아무리 같은 품질의 제품을 가지고 경제적인 가격을 앞세운다 해도 국산 기자재를 썼다가 연구에 차질을 빚었던 경험이 있거나, 색안경을 낀 이들을 설득하기가 쉽지 않았다는 얘기다. 물론 사업 초기에는 제품의 결함으로 보수나 성능 개선이 필요했던 경우도 있었지만 제품에 객관적인 하자가 없더라도 실험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을 때 ‘장비 탓’을 하며 클레임을 거는 고객들도 적지 않았다.

이에 바이오니아 연구원들은 창업 후 약 5년 동안 20여 종의 연구 장비와 다양한 시약, 키트를 지속적으로 출시하고 성능을 개선하는 동시에 AS(애프터서비스)를 통해 생명공학 연구자 커뮤니티의 신뢰를 얻는 데 집중했다. 박 회장은 “원하는 PCR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는 항의가 들어오면 직접 찾아가 실험도 다시 해주고 필요한 데이터도 만들어줬을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면서 “명품 소비자들이 유명 브랜드를 선호하는 것은 어쩔 수 없듯이 브랜드 가치가 있는 외국 제품을 대체할 정도로 신뢰를 쌓기까지 정말 오랜 기간이 걸렸다”고 말했다. 자존심을 버리고 시작한 사업이긴 했지만 젊은 패기가 아니었다면 버티지 못했을 것이란 게 그의 설명이다. 이렇게 진정성을 계속 보여준 결과 1990년대 말에는 바이오니아가 국내 합성 DNA 기자재 수요의 80%를 공급하고 외국에서도 주문이 들어올 정도로 인식이 개선됐다.

하지만 정작 더 근본적인 한계는 바로 두 번째였다. 대학이나 연구기관 등을 상대로 열심히 영업한들 국내 유전자 연구 시장 자체가 지나치게 협소했다. 유전자 기술의 완전 국산화라는 설립 목표를 달성하기도 어렵지만 달성한다 한들 잠재 고객이 기껏해야 5000명도 되지 않았다. 1999년까지 회사가 구멍가게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원인이기도 했다. 대덕연구단지의 동료 연구자와 창업자들과 마찬가지로 DNA 합성과 염기서열 분석, PCR 등 ‘국가에 필요한 기술을 개발한다’는 자부심도 있었고 수만 편이 넘는 국내외 논문 연구에 바이오니아가 개발한 기자재가 사용됐지만 그 자부심이 큰돈을 벌어주지는 않았다. 기술을 대학과 연구소에 팔면서 수입 제품을 모방하거나 대체하기만 해서는 사업을 확장하기가 힘들다는 게 뻔히 보였다. 또 매출이 정체되다 보니 연구개발에 투자할 여력도 없었다.


장기 비전 이루려면 단기 캐시카우 발굴해야
다각화를 통한 포트폴리오 전략

[사례 1] 체지방 감소 유산균 제품

1. 미충족 수요가 큰 시장에서 정면 승부

시장 규모의 한계로 고심하던 박 회장은 고객군을 넓히기로 결심했다. 지금까지 개발해 온 연구용 장비와 기술에서의 비교 우위를 가지고 연구자들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쓸 수 있는 제품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기업의 존재 이유는 ‘고객 가치 창출’인 만큼 어떤 기술이 ‘최초’이든 ‘최고’이든 간에 다른 기술이 제공해주지 못하는 새로운 고객 가치를 만들 때 비로소 의미가 있다는 단순한 진리를 되새긴 것이다. 유전자 기술의 완전 국산화라는 설립 목표를 지속적으로 추구하기 위해서라도 안정적인 매출과 상업용 제품의 포트폴리오가 갖춰져야 했다. 박 회장은 “세계 최대의 종합 화장품 회사인 로레알도 시작은 모발 염색약이었고, 세계 최대 제약사인 존슨앤드존슨도 시작은 일회용 반창고였다”며 “상처를 소독한 부위에 감는 밴드 하나로 벌어들인 돈이 후속 R&D와 M&A의 밑거름이 돼 존슨앤드존슨을 베이비파우더부터 혁신 신약까지 전 포트폴리오를 망라하는 종합 제약사로 키워낸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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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회장은 바이오니아에도 ‘염색약’ 혹은 ‘일회용 반창고’ 같은 B2C(기업과 소비자 간 거래) 제품이 반드시 나와야 한다고 봤다. 국내 생명공학 연구에 기여하고 노벨상 수상 기술을 상용화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쩌면 사람들의 아주 작은 페인포인트 하나를 확실하게 해소하는 것이 훨씬 더 큰 고객 가치를 창출하고 회사에도 몇십 배 이익을 안겨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이렇게 ‘유전자 기술의 국산화’라는 한 우물만 파던 바이오니아는 1990년대 말부터 사업 다각화 기회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박 회장은 틈날 때마다 상업화했을 때 가장 큰 고객 가치를 만들어 낼 만한 게임 체인저가 무엇일지를 고심했다. DNA, RNA 기반의 장비 개발과 분자진단 기술 고도화에 계속 투자하더라도 그 투자의 재원이 될 만한 단기 혹은 중기의 캐시카우를 발굴하고 신성장 동력을 찾자는 구상이었다. 이를 위해 미충족 수요(unmet needs)가 큰 시장을 집중적으로 살펴봤다.

고객군이 한정된 틈새시장이 아니라 비만, 탈모, 치매 등 수많은 인구가 골머리를 앓고 있는 난제, 즉 해결의 실마리만 제공해도 단숨에 글로벌 회사로 도약할 수 있을 정도로 미충족 수요가 큰 시장에서 정면 승부하기로 한 그가 처음 눈독 들인 시장은 바로 ‘비만’이었다. 최근(2023년 9월 기준) 덴마크의 제약사 ‘노보노디스크’가 비만 치료제 하나로 럭셔리 그룹 루이뷔통(LVMH)을 제치고 유럽 시가총액 1위 기업으로 올라섰듯 바이오니아도 이런 청사진을 품고 비만 시장에 진출한 것이다. 기회는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왔다. 1999년 한국화학연구원과 함께 시작한 비만/당뇨 치료 신약 개발 프로젝트가 계기가 됐다. 하지만 치료제 개발이 쉬울 리 없었고 시장에 획기적인 비만/당뇨 약이 나오지 않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미국 식품의약국(FDA) 허가를 받았던 외국 회사의 당뇨 치료제가 부작용으로 인해 취소되고 소비자들에게 보상금 1조 원을 물어주는 등 치료제 개발에 동반되는 리스크가 너무 컸다. 비만이나 당뇨 치료의 경우 약을 평생 먹거나 장기 복용해야 하다 보니 조금이라도 독성이 발견되는 순간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기 일쑤였다. 이에 바이오니아는 사이드 프로젝트에 지나치게 높은 위험을 감수하기는 어려운 만큼 안전성을 입증하기 까다로운 약보다는 부작용이 적고 허가를 받기가 상대적으로 수월한 건강기능식품으로 눈을 돌리기로 했다.


2. 새로운 발상으로 특허 기반 초격차 확보

이렇게 고민하던 찰나에 떠오른 아이디어가 바로 ‘장내 미생물을 이용해보자’였다. 당시 한국생명공학연구원의 한 연구원이 가축의 장내 에너지 흡수를 촉진해 빠르게 살을 찌우는 효소를 개발해 사료 업체에 기술을 이전한 데서 단서를 얻었다. 이 원리를 역이용해 사람의 장내 에너지 흡수를 줄이고 살찌지 않도록 방해하는 미생물을 찾아보기로 한 것이다. 물론 ‘살 빠지는 유산균’이라는 개념은 전 세계적으로 존재하지 않았고, 유산균의 효능은 장 건강 개선이나 면역 과민 반응으로 인한 피부 상태 개선 정도가 알려져 있는 전부였다. 하지만 박 회장은 항비만, 항당뇨 효능을 가진 미생물을 발견하기만 한다면 부작용 없이 다이어트 효과를 기대할 수 있고 상품성이 있을 것이라 보고 이 아이디어를 한번 실현시켜 보기로 했다. 시장에 대한 믿음 하나로 1999년부터 장내 미생물 프로젝트에 착수한 것이다. 본업에 차질이 없도록 미생물 전공자들을 추가로 뽑아 사이드 프로젝트를 개시했고, 비용이 많이 드는 작업은 아닌 만큼 연간 1억~2억 원 수준 정도를 지속적으로 투입하면서 유산균주 탐색에 나섰다.

이렇게 박 회장이 기존에 없던 개념까지 설계하면서 유산균주 확보에 공을 들인 까닭은 새로운 발상으로 특허를 확보하는 것만이 중소기업이 살길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통상적으로 비만 감소처럼 큰 시장에서 정면 승부를 하는 대기업들은 막대한 자금력과 조직력으로 압도적인 기술 우위를 확보한다. 삼성전자 권오현 전 회장이 『초격차』 전략에서 강조하는 것처럼 시장의 리더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최고의 인재를 뽑고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춰 기술을 혁신해야 한다. 하지만 축적된 자본이 빈약하고, 최고의 인재도 연일 대기업에 빼앗기는 중소기업이 똑같은 전략으로 경쟁해서는 승산이 없다는 게 박 회장의 생각이었다. 대덕연구단지에 있는 중소 벤처들이 기댈 곳은 대기업 등 경쟁사가 빼앗거나 추격하지 못하게 국가가 보호해주는 특허뿐이었다. ‘특허 기반의 초격차’가 벤처의 살 길이라고 본 이유다. 박 회장은 “초기 창업자들이 의욕이 넘쳐 대기업을 상대로 경쟁할 수 있을 것이라 자신하지만 특허 없이 사업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와 다르지 않고 아무리 바위를 세게 쳐도 결국 계란만 깨진다”면서 “계란이 바위를 깰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특허’라는 보호막을 씌우는 것뿐”이라고 강조했다.

이렇게 박 회장의 지지에 힘입어 회사는 체지방 감소 기능이 있는 인체 유래 유산균을 찾는 작업에 수년간 매진했다. 그리고 6년 후인 2005년에야 인간 모유에서 체중 증가 억제 효과를 갖는 유산균 BNR17을 분리해냈고, 이를 가지고 2010~2012년 한국·미국·영국·독일·프랑스·네덜란드·덴마크·중국 10개국에 특허를 등록했다. 안전성과 기능성 입증 자료까지 완비해 식약처로부터 국내 첫 체지방 감소 기능성 원료로 인정을 받은 것은 2014년이었다.1 사업 진출 이후 무려 15년이 지나서야 규제 기관의 까다로운 기준을 통과하고 소비자를 상대로 한 제품 설명서와 광고에 ‘체지방 감소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기능을 홍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3. 스핀오프를 통한 역량 집중과 스케일업

그러나 인증은 사업화의 끝이 아닌 시작이었다. 실험실 수준에서 연구가 순조로웠던 것과 달리 사업화는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쳤다. 대부분의 인체 유래 유산균주가 그렇듯 BNR17 유산균주는 실험실의 5ℓ 플라스크에선 잘 자랐지만 대량 배양을 위해 발효기 크기를 확대(scale up)하는 과정에선 잘 자라지 않았다. 체지방 감소 기능성을 홍보해 소비자의 구매까지 유발하려면 제품의 전 유통기한에 걸쳐 하루 섭취량 기준 100억 마리 이상의 유산균이 살아 있어야 한다. 이 기준을 맞추려면 1g의 유산균 분말에 살아 있는 유산균 수를 최소 1500억 마리(CFU, Colony-Forming Unit) 이상으로 대량 배양하는 공정 기술이 뒷받침돼야만 경제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에 바이오니아는 국내의 대표적인 유산균 배양 전문 회사들을 전부 수소문하며 BNR17 위탁 생산을 의뢰했다. 하지만 처음 접하는 기능성 유산균주를 산업화 스케일로 양산하겠다고 선뜻 나서는 기업이 단 한 곳도 없었다. 과연 유산균 사업으로 수익을 낼 수 있을지 의구심은 커져갔고, 박 회장의 속도 타들어 갔다. 실험실에서 성공하고도 대량 양산에 실패해 제품화까지 가지 못한 많은 기업의 전철을 밟을까 노심초사했다. 당장 손실을 메우기 위해 2016년 말 소량 생산한 BNR17로 캡슐형 건강기능식품을 공급하긴 했지만 대량 배양과 양산 없이 캐시카우를 확보하기란 요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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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박 회장은 핵심 사업인 DNA 합성 등을 챙기는 데 역량과 자원을 분산하다 보면 결국 유산균 제품의 스케일업을 성공리에 마무리하고 기대했던 매출을 거두기 어려울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강하게 느꼈다. 영업과 제품 다양화, B2B(기업 간 거래) 확장을 본격화하려면 분사를 통해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고 판단한 이유다. 이 같은 문제의식에서 박 회장은 2017년 4월 프로바이오틱스 사업 전담 자회사인 에이스바이옴 신설을 이사회와 함께 승인했고, 1996년부터 10년간 바이오니아 이사를 지내고 11년간 미국 법인을 이끌던 김명희 대표에게 경영을 맡겼다. 분사에 대한 결단을 내린 데는 김 대표의 설득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신종플루를 비롯해 지카, 에볼라바이러스 등 질병 진단 장비와 키트를 만드는 회사에서 ‘먹는 제품’을 만든다고 하면 거부감이 들 수 있다면서 일반 소비자를 대상으로 한 건강기능식품 비즈니스를 바이오니아가 직접 수행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설득한 것이다. 김명희 에이스바이옴 대표는 “유산균 제품을 바이오니아의 기존 제품과 같은 바구니에 담기엔 적절치 않아 보였다”며 “분사를 통해 독립적인 브랜드 마케팅을 펼치고 모회사 간섭이나 관여 없이 독자적으로 사업 개발에 속도를 낸 것이 차별화된 입지를 구축할 수 있었던 비결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실제로 분사 이후 에이스바이옴은 국내 회사로부터 일제히 문전박대당하던 BNR17의 위탁 생산을 맡아줄 해외 파트너사를 찾아 설득하는 데도 성공했다. 회사 설립 1년 만인 2018년 4월, 미국의 UAS Labs라는 프로바이오틱스 회사와 유산균주에 대한 북미시장 독점 라이선싱 계약을 맺은 것이다. 처음에는 BNR17 생산에 관심이 없던 UAS Labs도 김 대표가 직접 해외 전시회 등을 찾아다니면서 경영진과의 면담을 끈질기게 요청하는 등 총력을 다하자 마음을 열었다. 결국 양사 간 협상 끝에 UAS Labs는 북미 지역 독점 판매의 대가로 에이스바이옴에 계약 성사금과 제품 매출액의 로열티를 지급했고, 에이스바이옴 제품의 글로벌 진출도 자연스럽게 성사됐다. 이렇듯 자회사를 주축으로 유산균의 대량 배양과 양산에 성공하면서 시장에 나온 유산균 제품이 바로 BNR17을 주원료로 한 ‘비에날씬’이다. 1999년 항비만 미생물 프로젝트 연구를 시작한 지 19년, 유산균주를 발견한 지 13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본 셈이다. 체지방 감소 기능성 제품이라는 경쟁력에 공격적인 영업 마케팅까지 더해지면서 자사 몰과 TV홈쇼핑을 통해 론칭한 비에날씬은 매진 행렬을 이어갔고, 결과적으로 에이스바이옴 매출도 2019년 158억 원, 2020년 494억 원, 2021년 1003억 원으로 뛰었다.


[사례 2] siRNA 기반 신약 및 탈모 완화 화장품

1. 미충족 수요가 큰 시장에서의 정면 승부

미충족 수요가 큰 시장을 발굴하기 위한 노력은 계속됐다. 프로바이오틱스 사업에는 우연한 프로젝트를 계기로 뛰어들었지만 사업 다각화의 성공 확률을 조금이라도 더 높이기 위해 바이오니아의 핵심 역량을 활용할 수 있는 분야부터 점검했다. 박 회장은 “당시 접했던 하버드비즈니스스쿨 연구에 따르면 전 세계 100대 기업의 사업 다각화 케이스의 성공률이 20%도 채 되지 않았다”면서 “시장의 크기만 보고 회사의 역량과 무관한 사업에 발을 들여 실패한 케이스가 많다는 것을 보고 핵심 역량을 기반으로 사업을 확장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바이오니아는 회사의 핵심 역량인 DNA 합성 기술을 활용할 방법을 지속적으로 탐색했다. 그러던 중 2001년도 네이처에 주목할 만한 RNA 기술 기반의 논문이 실렸고, 때마침 병역특례로 바이오니아에 근무 중이던 KAIST 후배가 “무조건 이 연구에 뛰어들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 신사업의 단초를 제공했다. 이 논문의 주 내용은 질병 단백질을 만드는 유전자인 mRNA를 분해하는 siRNA(이중 가닥의 짧은 간섭 RNA)를 활용하면 적은 독성으로 표적 유전자를 억제해 질병을 근본적으로 치료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논문에서 영감을 받은 박 회장은 핵심 역량을 극대화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판단, 올리고 합성 서비스의 대상을 DNA에서 RNA로 확대하는 동시에 siRNA 치료제의 연구개발에 뛰어들기로 결정했다.

이 같은 결정에 따라 회사의 원료 물질 합성팀은 곧장 유럽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관련 워크숍에 참여하고 학습하면서 1만8000여 개의 인간 유전자를 선별적으로 저해할 수 있는 siRNA 설계 알고리즘과 라이브러리도 2006~2007년 세계에서 세 번째로 확보했다. 바이오니아에 따르면 회사의 연구진은 기술을 단순히 재현, 복제만 한 것이 아니라 기존 siRNA의 가장 큰 단점이던 인간의 선천면역을 자극해 염증 반응을 일으킨다는 부작용도 없앴다. 염증을 일으키지 않으면서 다른 siRNA의 고질적인 문제점을 대부분 해결한 SAMiRNA(초분자 siRNA 나노 구조체)를 개발한 것이다. 바이오니아에 앞서 미국 제약사 ‘앨나일람(Alnylam)’ 등도 네이처 논문 발표 이후 siRNA 합성 기술을 가지고 신약 개발을 선도해왔지만 임상에서 구토나 고열 등의 부작용을 넘어서진 못한 상태였다. 약을 처방하되 항히스타민제 등을 사전 복용해 부작용을 완화하는 방식으로 수동 대응하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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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서 바이오니아는 SAMiRNA 기술이 유전 질환 치료 시장을 혁신할 잠재력이 크다고 봤다. 그리고 기술의 첫 번째 사용처로 ‘탈모 완화’ 시장을 선정했다. 탈모 완화가 가장 미충족 수요가 큰 시장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탈모를 유발하는 유전자를 억제하면서 동시에 피부 염증을 유발하지 않는 원료 물질을 개발해 기능성 제품을 만든다면 상품성이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아울러 상용화까지 시간과 비용을 단축하기 위해 1차적으로 의약품보다는 화장품 개발부터 시도하기로 했다. 비록 siRNA 기반 기술을 가지고 화장품을 개발한 전례는 전 세계적으로 없었지만 상대적으로 허가가 수월하고 빠르게 시장에 선보여 수익 모델을 확보할 수 있는 화장품 시장부터 공략했다. 이렇게 탄생한 제품이 바로 2023년 5월 유럽 등지에 출시된 바이오니아의 탈모 완화 화장품 ‘코스메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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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새로운 발상으로 특허 기반 초격차 확보

박 회장에 따르면 염증 반응을 일으키는 siRNA 문제점을 해결한 SAMiRNA의 발명은 ‘계면활성제 구조체를 활용해보자’는 완전히 새로운 발상에서 나왔다. 현재까지 siRNA 신약 개발을 선도하고 있는 앨나일람 등 해외 제약사는 siRNA 합성 과정에서 LNP(Lipid Nano Particle, 지질나노입자) 기술을 활용한다. 이는 코로나19 국면에서 모더나, 화이자 등의 mRNA 백신 개발을 가능케 한 원천 기술이기도 하다. 코로나19 mRNA 백신을 개발한 연구진이 2023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하며 그 공로를 인정받았지만 mRNA 백신은 아직 부작용의 위험에서 완전 자유롭지는 않다. 이는 염증 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는 LNP 기술의 약점이 완벽히 해결되지는 않고 있다는 방증이다. 그런데 바이오니아의 원료 물질 합성팀이 LNP 대신 계면활성제의 구조를 딴 화학물질을 만들어 siRNA를 합성하자 siRNA 원료 물질이 야기하던 염증 반응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박 회장은 “KIST 근무 시절에 계면활성제를 다룬 『서펙턴트(Surfactant)』란 책 시리즈를 파고들면서 깊이 공부한 적이 있는데 여기에서 파생된 아이디어를 접목했더니 계면활성제의 원리대로 합성이 이뤄지고 SAMiRNA가 만들어졌다”면서 “이를 발견한 날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 중 하나”라고 회고했다.

물론 아직 의약품 상용화를 위해서는 임상을 거쳐야 하고 갈 길이 멀지만 박 회장은 이렇게 자체 개발한 SAMiRNA 구조체가 신성장 동력이 될 것이라고 자신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 기술이 가지는 ‘플랫폼’으로서 가치가 크다는 설명이다. 특정 질병 유전자를 억제할 수 있다는 것은 표적 유전자만 바꾸면 얼마든지 다양한 유전 질환을 치료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 플랫폼을 가지고 단기적으로는 탈모 완화 화장품을 개발해 캐시카우로 삼고, 장기적으로는 siRNA 기반의 치매 등 난치병 치료제 개발에 도전하는 게 바이오니아가 그리고 있는 포트폴리오 전략이다. 일찍 현금 흐름을 창출하려면 의약품보다는 화장품 시장에 먼저 진출해야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미충족 수요가 가장 큰 알츠하이머 등 난치병 치료 시장을 잡아야 한다는 구상이다. 이를 위해 바이오니아는 SAMiRNA에 대한 특허를 등록하고, 이를 바탕으로 siRNA 기반 신약 후보 물질을 추출할 수 있는 인프라를 구축했다.


3. 스핀오프를 통한 역량 집중과 스케일업

바이오니아의 탈모 완화 화장품 ‘코스메르나’의 개발은 2017년 2월 태스크포스(TF) 출범과 함께 본격화됐다. 아직까지 코스메르나 사업은 본사가 추진하고 있지만 siRNA 원료 물질의 유효성 및 안전성 평가를 담당하는 연구 조직은 연구개발에만 매진할 수 있도록 분사했다. 에이스바이옴과 같은 운영 방식을 택한 것이다. 이렇게 신설된 법인이 2019년 8월 만들어진 SAMiRNA 플랫폼 기반의 신약 개발 전문 자회사, 써나젠테라퓨틱스다. 분사 이후 써나젠테라퓨틱스 연구진은 코스메르나 원료 물질의 인체 적용 시험 등 결과를 종합한 논문을 네이처 계열 국제 학술지에 발표했고 먹지 않고 주 1회 탈모 부위에 마사지하듯 바르기만 하면 탈모를 완화한다는 화장품의 효능, 성욕 감소 등의 부작용이 없다는 안전성에 대한 입증 자료까지 빠르게 완비했다.

하지만 이렇게 순탄하던 코스메르나 상용화 여정은 기능성 화장품으로 허가해달라는 신청을 식약처가 반려하면서 예상치 못한 암초에 부딪쳤다. 입증 자료를 바탕으로 2021년 6월 말 화장품 품목 허가를 신청했으나 2021년 말 “siRNA를 주성분으로 한 신청 품목은 화장품법 제2조 제1호에 따른 화장품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반려 통보가 돌아온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해외에서도 siRNA가 난치병 치료 목적의 의약품에만 쓰이고 있고 관련 허가 사례가 별로 없으니 더 많은 자료가 축적되기 전까지 화장품으로 허가해줄 수 없다는 답변이었다. 한마디로 해외에 참고할 전례가 없다는 얘기였다.

결국 국내 시장에서 벽에 맞닥뜨린 바이오니아는 유럽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2022년 7월 화장품 등 피부에 사용하는 제품에 대한 세계적인 안전성 평가기관인 독일 더마테스트에서 안전성 최고 등급을 받아 유럽 탈모 시장에 직접 진출하는 쪽으로 사업 방향을 틀었다. 유럽연합과 영국에 화장품으로 먼저 등록하고 2023년 5월 자사 몰, 6~8월 아마존 유럽 5개 스토어(영국,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 프랑스)에 입점해 판매를 개시했다. 해외 직접 B2C 영업 및 마케팅 역량은 아직 미흡하긴 하지만 일단 유럽 시장에 출시한 뒤 바이오니아와 써나젠테라퓨틱스가 함께 사용 고객에 대한 안전성 자료를 더 축적해 한국에 다시 들여오기로 계획을 수정했다.

한편, 분사 조직인 써나젠테라퓨틱스는 SAMiRNA 기술로 화장품을 넘어 의약품 시장까지 진출한다는 포트폴리오 구상에 따라 신약 후보 물질 추출과 난치병 치료제 개발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2023년 8월부터 호주에서 특발성 폐 섬유증 치료 신약의 임상 1상(1a)을 진행 중이다. 이 같은 글로벌 임상과 허가를 염두에 두고 써나젠테라퓨틱스의 본사를 한국에서 미국으로 옮겼다. 신약 개발은 물론 향후 상용화까지 생각해 자회사를 주축으로 전 세계 영업망을 구축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박 회장은 “일반적으로 임상 1상은 효능보다는 안전성을 확인하는 기초 단계에 불과하지만 siRNA 신약의 경우 사람에게서 염증 반응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만으로 큰 의미를 갖는다”면서 “인체 내 안전성이 확인되면 폐 섬유증뿐 아니라 치매 등 다른 난치병 치료제 개발도 빨라지고 글로벌 제약사와의 협업도 속도를 낼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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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상시엔 우직하게, 비상시엔 민첩하게
‘Cut the Short’로 목표 정조준

이렇게 양 날개를 펼치며 관련, 비관련 분야로 사업을 다각화해온 회사지만 지금까지 바이오니아의 포트폴리오를 보면 ‘유전자 기술의 국산화’라는 목표에서 단 한 번도 이탈한 적은 없었다. 포트폴리오 전략을 본격화한 2000년부터의 행보를 보더라도 가장 핵심적인 투자는 여전히 ‘본업’에서 이뤄졌다. 회사가 2000년 벤처 투자 붐에 힘입어 처음으로 외부 자금을 수혈했던 것도 유전자 기술의 고도화를 위한 증설 목적이었다. 바이오니아는 2000년 1월과 3월 각각 기관투자가를 대상으로 한 유상증자를 통해 32억 원과 280억 원을 차례로 조달하고, 이를 대용량 DNA 합성기 개발과 하루 3만 종의 DNA 올리고를 합성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DNA 공장 준공에 투입했다. 단순히 좁은 국내 시장에서 유전자 연구 장비와 시약만 파는 회사에 머무르지 않고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분자진단, 신약 개발 등으로 사업 영역을 넓히기 위해서는 대대적인 설비 투자가 필요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마침 2000년은 전 세계 18개국이 참여한 국제 컨소시엄이 ‘휴먼 게놈 프로젝트(인간 유전체 지도 초안)’ 결과를 발표해 인간의 질병을 결정하는 유전자를 정확히 식별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절정에 다다랐던 해였다. 바이오니아는 이런 투자자들의 관심을 놓치지 않고 유전자 기술 기반의 정밀 의료를 실현해줄 자금의 원천으로 삼았다.

이후 바이오니아는 2000년부터 연 매출의 평균 39%(18~66%)를 연구개발에 투자하면서 DNA 합성 기술을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 영역에 우직하게 투자했다. 2002년부터 2018년까지 연간 매출이 90억~280억 원 안팎을 맴돌았는데도 불구하고 PCR 방식의 분자진단 장비 및 키트도 개발하면서 핵심 역량과 관련된 제품 카테고리를 늘려 나갔다. 그리고 이렇게 유전자 기술 국산화의 길을 묵묵히 걷던 바이오니아가 글로벌 시장에 존재감을 각인할 기회는 불시에 찾아왔다. 2009년 봄 해외에서 신종플루(H1N1 인플루엔자) 유행이 번지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국내에서 유일하게 실시간 PCR 방식의 국산 분자진단 장비(Exicycler™)를 허가받은 상태였던 바이오니아는 이 기회를 잡기 위해 H1N1 바이러스의 유전체 염기서열이 인터넷에 공개되자마자 가용 인력을 총동원해 진단키트를 개발했다. 그리고 인력을 재배치하는 등 회사의 사활을 건 결과 약 2주 만인 2009년 5월 말 진단키트 개발에 성공했다. 대형 병원, 임상검사센터 등에서 임상평가도 빠르게 밀어붙여 그해 7월 신종플루가 국내에 상륙하자마자 글로벌 선도 기업 ‘로슈’보다 먼저 진단키트 판매에 들어갔고 전체 확진자의 70%에 달하는 73만 명의 검사분을 공급했다.

이처럼 평상시에 꾸준히 투자하다가 비상시에 모든 사이드 프로젝트를 멈추고 본업에 모든 자원을 결집시키는 전략은 바이오니아가 신종플루 확산을 막고 시장 기회를 포착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2008년 149억 원이던 회사의 매출도 2009년 284억 원으로 늘어났고 영업이익도 93억 원을 기록해 모처럼 흑자 전환했다. 박 회장은 “전사적 역량을 결집시켜야 할 비상시에는 정확하게 하나의 목표를 조준하고 그 목표를 향해 조직원들을 빠르게 정렬시켜야 승기를 잡을 수 있다”면서 “직선으로 갈 수 있는 지름길을 제시해(cut the short) 에너지의 분산을 막는 게 최소한의 투입으로 최대한의 효용을 얻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기회가 왔을 때 조직원을 하나로 정렬시키는 박 회장의 리더십은 코로나19 국면에서도 어김없이 발휘됐다. 2020년 코로나19 대유행기, 회사는 미국이 일시적으로 분자진단 장비 수출을 금지한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코로나19 발발 초기 미국과 유럽 국가들이 신규 확진자 급증, 생산 차질을 이유로 자국 수요 확보 우선 정책을 펼치자 그동안 개발해 놓은 진단장비 및 키트를 90여 개국에 발 빠르게 수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바이오니아는 공급 계약을 요청하는 국가가 줄을 잇는 상황에서도 카타르 등 외교적으로 중요한 협업 파트너의 요청에 민첩하게 부응하며 공급을 서두르고 직원들을 즉시 파견해 현지 관계자들에게 제품 사용법을 가르쳤다. 그 결과 700억 원 넘는 외화를 벌어들이고 2020년 한 해에 그동안의 누적 적자를 웃도는 1052억 원의 흑자를 냈을 뿐 아니라 국가의 에너지 안보에도 상당한 기여를 했다.2 기술 국산화를 위한 지속적인 연구개발 노력이 전 세계적 보건 위기 상황에서 빛을 발한 것이다.

이렇듯 코로나19라는 긴급 상황에서 벌어들인 잉여 자금은 또다시 차세대 분자진단 장비 양산을 위한 축구장 6배 넓이의 글로벌 센터 개소에 투입됐다. 그리고 2008년부터 약 15년간 기존 분자진단 장비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차세대 장비 개발에 집요하게 매달려온 결과가 이제야 출시를 앞두고 있다. 바이오니아에 따르면 코로나19 진단 등에 사용되던 기존 PCR 장비는 일반 병원에서 사용하기엔 너무 크고 기침, 가래, 설사 등의 ‘증상’만 가지고 원인 병원체를 가려내기 어렵다는 한계를 가진다. 하지만 바이오니아의 차세대 장비들은 증상만 가지고도 원인이 되는 바이러스를 족집게로 진단하고 염증 반응 및 항생제 내성까지 고려해 환자에게 최적화된 약을 곧바로 알려준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크기가 작은 데다 단순히 연구용을 넘어 정밀 진단, 개인 맞춤형 처방을 위한 ‘헬스케어 플랫폼’으로서 가치도 있기 때문에 대학이나 연구소를 넘어 1차 의료기관이나 개인병원 등에까지 보급될 수 있고, 처방약 판매 등과 연계한 다양한 비즈니스 모델도 파생될 수 있다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앞으로 바이오니아가 생존을 넘어 성장을 이어가려면 지금까지 이 플랫폼의 개발과 공격적인 공장 증축에 들인 막대한 투자금 회수가 본격화돼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아직 축배를 터뜨리기에는 이르다. 코로나19 특수로 벌어들인 자금이 분자진단 시스템을 강화하고 생산 능력을 키우는 데 들어간 만큼 회사가 예상하는 대규모 수주 계약과 대량 생산이 따라줘야만 성장에 탄력이 붙을 수 있기 때문이다.

코스메르나의 국내 식약처 허가도 여전히 넘어야 할 산이고, siRNA 기반 신약 개발도 아직 임상이 걸음마 단계라는 점에서 갈 길이 멀다.

다만 ‘축적의 힘’이 중요한 바이오 업계에서 국내 유전자 기술의 선도 업체로서 30년 이상 연구개발 역량을 축적하고, 축적의 시간을 벌어줄 안전판을 다각도로 개발해 온 바이오니아의 전략은 생존이 화두인 시대에 참고할 만한 나침반이 될 수 있다. 바이오니아의 내일에 업계가 주목하는 이유다.

DBR mini box : 성공 요인 및 시사점

활용과 탐험의 균형과 리더십으로 성장 견인



강신형
충남대 경영학부 조교수 sh.kang@cnu.ac.kr



양손잡이 경영은 기존 사업의 운영 효율 극대화를 추구하는 동시에 새로운 사업 기회를 탐험하며 환경 변화에 적응하는 경영 방식을 의미한다. 1976년 노스웨스턴대 켈로그경영대학원 로버트 던컨 교수가 주창한 개념이며 이후 제임스 마치, 찰스 오라일리, 마이클 투시먼 등의 연구를 통해 주류 혁신 이론으로 자리 잡았다. 양손잡이 경영은 주로 대기업의 성장 전략으로 논의돼 왔으나 중소기업의 성장과 도약에도 양손잡이 경영이 필요하다. 김영배 KAIST 교수는 “중소기업이 기존 역량을 이용하는 데 그치지 말고 새로운 분야와 영역에서 적극적으로 성장 기회를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i 이런 맥락에서 바이오니아는 벤처기업이 ‘양손잡이 경영’을 통해 어떻게 성장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1. 활용적 혁신과 탐험적 혁신의 균형

첫째, 바이오니아는 기존 사업을 강화하는 활용적 혁신(exploitation)에만 몰두하지 않고 핵심 역량을 확장해 새로운 사업 영역을 개척하는 탐험적 혁신(exploration)에 꾸준한 투자를 하며 둘 간의 균형을 유지했다. 창업 당시 사업 아이템은 유전자 연구용 DNA 화학합성 장비 등의 연구 기자재였다. 창업 후 6개월 만에 흑자를 낼 정도로 수요는 확실했고 PCR 장비와 시약 등으로 영역을 넓혀갔지만 유전자 연구 시장 자체가 제한적이었다. 성장 동력 확보를 위해 올리고 합성 영역을 DNA에서 RNA로 확장하고 2000년대 초반부터 siRNA 연구도 본격화했다. 이런 기술력을 바탕으로 분자진단 장비 등을 국산화하고 2009년 신종플루, 2020년 코로나19 대유행기에 진단키트와 분자진단 시스템을 적기에 개발해 큰 수익을 올렸다.

그러나 바이오니아가 다른 분자진단 키트 업체와 차이가 나는 부분은 원료부터 장비까지 자체 개발해 생산하고, 자신의 업을 연구 기자재로 한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합성 및 진단 영역을 DNA에서 RNA로 확대하는 것은 기술 발전 궤적을 따라 이동하는 활용적 혁신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자회사 에이스바이옴을 통해 사업화한 체지방 감소 기능성 유산균 제품인 비에날씬은 핵심 역량과 고객 측면에서 기존 사업과는 완전히 다른 탐험적 혁신에 해당한다. 미생물 분야이고 컨슈머 제품이므로 사업화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런 탐험적 혁신이 있었기에 코로나19 종식 이후에도 큰 매출 하락 없이 성장을 이어갈 수 있었다. 실제 에이스바이옴의 2022년 매출은 1600억 원 수준으로 본업을 능가한다.

비에날씬의 사업화 성공 경험은 siRNA를 활용한 탈모 완화 제품과 신약 개발에도 도움이 됐다. 바이오니아는 2009년 개발한 ‘초분자 siRNA 나노 구조체’를 기능성 화장품 개발에 가장 먼저 적용했다. 신약 개발이 궁극적인 목표지만 제품화에 상당한 자원 투입이 필요하기에 적은 자원으로 큰 수익을 올릴 수 있는 기능성 화장품을 우선 공략했다. 신약 개발 과정을 대형 제약사에 의존하지 않고 직접 주도하기 위한 자금 마련 목적도 있다. 아직 사업 초기라 성과를 논하기에는 이르지만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판매가 늘어날 것으로 기대한다.

바이오니아는 연구 기자재에서 분자진단 제품, 건강기능식품, 기능성 화장품, 신약 개발 등으로 사업을 확대해 왔다. 이 가운데 분자진단 부문에서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자동화된 일체형(소형) 장비로 동네 병의원에서도 정밀의료를 구현하는 핵심 플랫폼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본업에서 창출한 수익을 바탕으로 본업을 강화하고, 나아가 새로운 사업을 개척해 성장하는 방식이다. 활용적 혁신과 탐험적 혁신의 균형 유지가 바이오니아의 지속적 성장 비결이다.


2. 구조적 양손잡이 접근법의 활용


둘째, 기존 기술 능력이나 시장 지식과 관련 없는 분야로 진출하기 위해 사업 조직을 분사(spin-off)하는 등 구조적 양손잡이(structural ambidexterity) 접근법을 활용했다. 구조적 양손잡이 접근법은 신사업 추진 조직을 기존 사업 조직과 분리해 운영하는 방법이다. 사업 성격에 따라 서로 다른 조직 구조가 필요하고 신사업이 기존 사업의 논리에 얽매이지 않도록 분리하기 위함이다. 체지방 감소 기능성 유산균 역시 처음에는 바이오니아 국내 법인에서 개발을 시작했으나 사업화는 2017년 에이스바이옴이라는 자회사를 설립해 진행했다. 고객, 유통 채널, 영업 방식 등에서 큰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이후 바이오니아는 신사업 추진을 위해 분사 방식을 적극 활용했다. 2019년 siRNA 신약 개발을 위해 써나젠테라퓨틱스를 설립했고 미국 FDA 대응 및 미국 파트너들과의 교류를 위해 2022년에는 미국 법인도 설립했다. 또한 mRNA 치료제 및 백신 개발을 진행하기 위해 2021년 한국생명공학연구원과 공동으로 알엔에이팜을 설립했다. 연구 기자재 사업과는 개발 과정부터 다르기 때문에 연구개발 단계부터 별도의 법인을 설립해 신사업을 추진하는 것이다. 분사 방식은 기업 규모를 작게 유지하며 기민한 환경 대응을 가능케 하는 방법이다. 해당 사업 조직의 인력에 대한 보상 측면에서도 유리하다. 본업과 분리해 스톡옵션을 부여할 수 있고 신사업 추진 구성원들은 자회사 상장 시 지분 차익을 기대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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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탁월한 리더의 고정관념을 깨는 사고

셋째,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것은 결국 리더십이다. 창업 당시부터 박 회장은 바이오 분야의 선구자가 되기를 꿈꿨다. 사명인 바이오니아 역시 ‘바이오 파이오니어’의 합성어로 개척자 정신을 강조한다. 남들이 만든 틀에서 경쟁하기보다 ‘게임 체인저(game changer)’가 되는 것이 바이오니아의 목표다. 실제 바이오니아의 기술 개발은 박 회장의 고정관념을 깨는 사고(thinking out of the box)에서 비롯됐다. 가축 사료를 소화기관에서 흡수할 수 있게 도와주는 효소 기술을 보고 반대로 장내 소화와 에너지 흡수를 줄여주는 유산균을 생각한다든지, 초분자 siRNA 나노구조체 역시 계면활성제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개발에 성공했다.

이처럼 회사가 나아갈 방향을 정하고 비상시에 모든 자원을 특정 프로젝트에 집중하는 것 모두 박한오 회장 개인의 리더십에 의존하는 부분이 컸다. 그러나 바이오니아가 지향하는 연 매출 10조 원 규모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다른 리더십이 요구된다. 조직 규모가 커질수록 권한이양이 필요하며 리더 개인이 아닌 조직 체계를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필요성을 인식하고 바이오니아 역시 2020년 이후에는 전략기획, 재무, 인사, 생산 등 여러 외부 전문가를 영입해 본사 임원진을 강화하고 있다.

최근 들어 자신의 기술 전문성을 바탕으로 창업에 뛰어드는 교수나 박사급 연구원이 늘어나고 있다. 각 기관에서도 창업을 하나의 기술사업화 수단으로 인식하며 장려하는 분위기다. 그러나 교원 및 연구원 창업의 한계는 기술에만 초점을 둔다는 것이다. 창업에서 중요한 것은 기술이 아니라 고객 문제 해결이다. 문제의 크기가 시장의 크기를 결정한다. 기술은 문제 해결의 수단이다. 바이오니아 역시 창업 초기에는 이 부분을 간과해 성장에 한계가 있었지만 박 회장의 탁월한 리더십과 양손잡이 경영으로 성장의 돌파구를 마련했다. 한 우물을 파는 장인정신과 더불어 더 넓은 시장을 바라보는 눈, 둘 간의 균형이 지속적인 성장의 비결이다.



필자는 KAIST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KAIST에서 경영공학 석사 및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LG전자 본사 전략기획팀에서 신사업 기획, M&A, JV 등의 업무를 수행한 바 있으며 LG전자 스마트폰 사업부에서도 근무했다. 주요 연구 및 관심 분야는 경영 혁신으로 개방형 혁신, 기업벤처캐피털(CVC) 등과 관련된 논문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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