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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의 깨달음이 살아가는 이유'

243호 (2018년 2월 Issue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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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 at a Glance
『담론』은 신영복 교수의 성공회대 마지막 강연록을 녹취해 정리한 책이다.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무기징역형을 받고 1988년 특별 가석방으로 출소, 1998년 사면 복권된 신영복 교수는 20년 수감 생활과 동양 고전 연구를 통해 얻은 깨달음을 강연과 글로 풀어냈다. 그는 특히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가슴에서 끝나지 않고 발로 뛰는 공부를 해야 하며 그런 공부가 자기 자신과 세계를 바라보는 틀을 바꿀 수 있다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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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의 경지에 이른 위인들의 공통점 중 하나로 수감 생활이 꼽힌다. 다산 정약용은 18년의 귀양살이를 통해 대학자가 됐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넬슨 만델라 대통령 역시 감옥생활을 거친 후 정치에 눈을 떠 노벨 평화상까지 수상했다. 이들은 혼자만의 시간을 통해 자신을 단련시켰다. 『담론』의 저자 신영복 교수도 감옥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면서 세상의 이치를 터득했다.

공부의 이유, 문사철과 시서화의 조화

저자에 따르면 인식에는 두 가지 틀이 있다. 문사철과 시서화다. 문사철은 이성, 시서화는 감성을 훈련한다. 우리는 언어로 사고하면서 문사철이란 인식 틀에 스스로를 과도하게 가두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언어라는 그릇은 지극히 왜소하다. 작은 컵으로 바닷물을 뜨는 것과 같다. 예컨대 역사는 역사가가 역사적 사실을 선별하고 재구성하는 것이다. 과거 역사를 온전히 재현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철학도 마찬가지다. 철학은 세계의 본질과 운동을 추상화한다. 신영복 교수는 이런 인식의 틀을 깨뜨리는 데서 공부가 시작된다고 강조한다.

신영복 교수는 공부의 이유를 문사철의 추상력과 시서화의 상상력을 유연하게 구사하고 적절히 조화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우리 조상은 문사철과 시서화를 통해 이성과 감성 훈련을 동시에 받았다. 덕분에 추상력과 상상력을 따로 기르는 데 그치지 않고 이 둘을 적절히 배합해 구사할 수 있는 유연함을 발휘했다.

추상력이 복잡한 것을 간단하게 압축하는 것이라면 상상력은 작은 것에서 큰 것을 읽어내는 능력이다. 문사철은 개념과 논리를 만드는 추상력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된다. 추상력은 복잡한 문제에 직면했을 때 문제 핵심이 무언지 정확하게 집어낼 수 있게 해준다. 문사철을 공부하는 목적은 얽혀 있는 문제에서 핵심을 요약하고 추출할 수 있는 추상력을 키우기 위해서다. 반대로 상상력은 작은 것, 사소한 문제 속에 담겨 있는 의미를 읽어내는 능력이다. 작은 것은 큰 것이 작게 나타났을 뿐이다. 겉으로 드러난 빙산의 일각만으로도 전체를 볼 수 있는 상상력을 키워야 한다. 사소하게 보이는 것만 있을 뿐 사소한 것은 없다. 한 마리 제비를 보면서도 봄이 왔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어야 한다.

머리에서 가슴, 발까지의 여행

징역 초기 신영복 교수는 다른 수감자들과 잘 섞이지 못하는 왕따였다고 한다. 겉으로 내색은 안 했지만 다른 죄수들을 분석하는 습관 때문이었다. 죄수들은 그가 자신들을 업신여긴다고 생각했다. 왕따도 결국 자신이 변해야 벗어날 수 있다. 그는 다른 죄수들과 같은 환경에 처했다면 자신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란 깨달음을 얻으면서 생각을 고쳐먹는다. 다른 사람 생각에 관여하거나 고치려 하는 대신 그의 의견을 인정하고 존중하려 했다. 이런 과정을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 여행’이라고 그는 표현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이었다. 가슴이 공감과 애정이라면 발은 실제 변화를 의미한다.

공부란 두 발을 땅에 내딛는 노력이다. 저자는 감옥에서 문도득(道得)이라는 재미난 이름의 목수 노인을 만났다. 신 교수는 이 목수가 땅바닥에 나무 꼬챙이로 아무렇게나 집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는다. 목수는 주춧돌부터 시작해서 지붕을 맨 나중에 그렸다. 일하는 사람은 집 그리는 순서와 집 짓는 순서가 같았다. 하지만 저자는 지붕부터 그렸다. 여기서 저자는 실천하는 사람과 이론만 있는 사람의 큰 차이를 깨닫는다. 그는 목수의 집 그림 앞에서 자기 변화를 결심한다. 창백한 관념성을 청산하고 건강한 노동성을 키우기로 결심한다. 자기 개조를 시작한 것이다. 저자는 우선 기술을 배우고 일하는 품성을 키웠다. 신사복 만드는 일도 하고, 구두 만드는 일에도 도전했다. 나중에는 양화공 반장도 3∼4년 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왕따에서 벗어났다. 말투가 바뀌고 다른 수감자들로부터 인간적인 신뢰를 얻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처럼 차이와 다양성은 자기 변화로 이어지는 새로운 출발점이자 계기가 돼야 한다. 차이는 공존의 대상이 아니라 감사(感謝)의 대상이자 학습의 교본, 변화의 시작이 될 수 있다.

교도소 내 인간관계란 금전적 관계도, 명령과 복종의 권력 관계도 아니다. 말 그대로 인간성의 바탕 위에 세우는 관계다. 싸워도 압승이면 안 되고 신승이어야 한다. 험한 욕설도 주고받으며 다른 수감자와 비슷한 수준의 인격적 파탄을 보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싸움 이후 관계의 회복이 불가능해진다. 신영복 교수는 일부러 떡신자 노릇을 했다고 한다. 떡신자란 위문품이 있는 모든 종교집회에 빠짐없이 나타나는 사람이다.

교도소 기준으로 저자는 교정극난자로 분류됐다. 교정이 불가능한 자란 뜻이다. 감옥엔 이동문고가 있다. 개인이 사적으로 책을 갖고 있다가 사람들에게 돌리는 책을 말한다. 그에겐 책이 30∼40권쯤 있었지만 직접 갖고 있는 대신 사람들에게 다 깔아놨다. 하지만 그 책을 누가 보고 있고, 본 후에는 누구에게 가야 하고, 무슨 책을 누가 챙겨두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았다. 교도소 내에는 그들만의 막강한 네트워크가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교도소는 목욕탕 수준의 적나라한 공간이다. 무엇 하나 숨길 수가 없다. 어항 속 금붕어 같다. 진정한 변화가 아니면 작동하지 않는다.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 교도소 표현으로 ‘멕기’가 벗겨진다고 한다. 보통 수감자들은 수감 일을 하나씩 지워나간다. 무기수는 하루하루가 의미 있어야 한다. 깨달음으로 채워지고 자신이 변할 수 있어야 그 긴 세월을 견딜 수 있다. 고통 자체가 안겨주는 엄청난 각성이 있다. 축구선수, 이동문고, 떡신자 생활은 그가 고통을 견디는 힘이 됐는데 그중에서 가장 큰 은혜는 깨달음이었다. 하루하루 누적된 작은 깨달음은 인내와 변화의 저력이 됐다. 인생 자체가 공부라고 저자는 말한다.

문신의 위악

죄수들은 문신을 한다.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다. 호락호락하게 보이면 살아남지 못한다. 문신은 자기가 험상궂고 성질 사나운 인간임을 선언하는 것이다. 위선의 정반대인 ‘위악’이다. 문신 소유자들은 대부분 후회막급이다. 문신의 위력이 없을 뿐 아니라 문신이 전과자의 표식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위악이 약자의 의상이라면 위선은 강자의 의상이다. 의상은 위장이다. 겉으로 드러날 뿐 그 본질이 아니다. 시위 현장도 마찬가지다. 붉은 머리띠는 단결과 전의를 상징하는 약자들의 위악적 표현이다. 강자들의 현장은 법정이다. 검은 법의는 엄숙성과 정숙성이다. 시위 현장의 소란과 대조적이다. 동물의 세계에서는 약한 동물들이 비명을 지른다. 약한 동물을 먹이로 삼는 맹수는 소리 없이 움직인다. 문제는 위선이 미덕으로, 위악이 범죄로 재단되는 것이다. 약자의 위악은 잘 보이지만 강자의 위선은 잘 보이지 않는다. 잘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잘 보지 못한다. 그런데 감옥에서는 위선이 잘 보인다. 미셸 푸코는 “감옥은 감옥 바깥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들은 감옥에 갇혀 있지 않다는 착각을 주기 위한 정치적 공간”이라고 말했다. 위선과 위악의 베일을 걷어내는 공부를 해야 한다. 이 점에서 우리는 실패하고 있다. 화려한 무대와 의상, 오디오와 비디오의 현란한 조명, 수많은 연설이 만들어내는 환경 속에서 현실 직시는 불가능하다. 실패의 더 큰 원인은 인간 이해의 천박함에 있다. 공부는 바깥보다 자신의 내면을 심화하는 과정이다.

영국에서는 모범생을 귓구멍(earole)이라고 부르는데 귀와 hole의 합성어다. 귓구멍은 경멸적 표현이다. 귀는 신체기관 중 자기표현 능력이 가장 수동적인 부위다. 듣기만 하는 녀석이란 뜻이다. 날라리들은 스스로 사내(lads)라고 자부한다. 날라리들은 학교 교육을 간파하고 있다. 학교 공부를 열심히 하면 계층 상승이 가능하다는 것이 허구임을 꿰뚫고 있다. 날라리들은 비공식적인 또래 집단을 만들어 자기들의 정체성을 집단적으로 확보하고 자기들의 비판적 세계관을 공유한다. 공부, 실력, 자격, 성실 등이 부질없음을 간파하고 그것을 거부한다. 반항을 통해서 다져지는 결속, 거기서 확인되는 우정과 의리에 가치를 부여한다. 하지만 그들의 계급의식은 사회의 제약 속에서 좌절된다. 결국 그들이 저항의 대상으로 삼았던 그 사회의 노동력을 충원하는 집단으로 전락한다.

나를 보다 좋은 사람으로 변화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관계야말로 최고의 관계다. 결혼을 결심한 여인에게 이유를 물었다. 그녀는 “그 사람과 함께 살면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인간관계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최고의 답변이다. 하지만 주변에서 그런 답변은 듣기 힘들다. 능력 있고 편안하게 해주기 때문이라는 답변이 많다. 천박하다. 빵 없이 살 수는 없지만 빵만으로 살 수는 없다. 관계의 최고 형태는 입장의 동일함을 뛰어넘는 곳에 있다. 서로를 따뜻하게 해주는 관계, 깨닫게 해주고 키워주는 관계가 최고의 관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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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과불식의 희망

석과불식(碩果不食)은 저자가 가장 아끼는 희망의 언어다. 20년을 견디게 한 화두다. 『주역』에서 산지박(山地剝)의 효사에 나오는 말이다. 산지박괘는 산이 위에 있고, 땅이 아래에 있다. 괘의 이름 박은 빼앗긴다는 뜻이다. 모두 음효이고 맨 위만 양효라 이게 언제 음효가 될지 알 수 없다. 석과불식은 바로 이 마지막 하나 남은 양효의 효사를 뜻한다. 씨 과일은 먹지 않는다는 뜻이다. 지혜인 동시에 교훈이다. 씨 과일은 새싹으로 돋아나고, 다시 자라서 나무가 되고, 이윽고 숲이 되는 장구한 세월을 품고 있다. 이는 세 단계로 나눠 볼 수 있다. 첫째, 엽락(葉落)이다. 잎사귀를 떨어뜨려야 한다. 잎사귀는 환상과 거품이다. 엽락은 환상과 거품을 청산하는 것이다. 『논어』의 불혹과 같은 뜻이다. 여기서의 혹은 의혹이 아니라 미혹이고 환상이다. 가망 없는 환상을 더 이상 갖지 않는 것이 불혹이다. 거품을 청산하는 단호함이다. 어려울수록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하고 환상과 거품을 청산해야 한다. 둘째, 체로(體露)다. 엽락 후의 나무는 나목(羅牧)이다. 잎사귀에 가려져 있던 뼈대는 훤히 드러난다. 칼바람에 뼈대가 드러나는 것이다. 나무를 지탱하는 구조가 드러난다. 우리가 할 일은 바로 구조와 뼈대를 직시하는 일이다. 환상과 거품으로 가려져 있던 우리의 삶과 근본 구조를 직시하는 일이다. 뼈대는 세 가지다. 정치적 자주성, 경제적 자립성, 문화적 자부심이다. 개인이든 사회이든 뼈대를 튼튼히 해야 한다. 뼈대가 우리를 서 있게 한다. 셋째, 분본(糞本)이다. 분은 거름이다. 분본이란 뿌리를 거름하는 것이다. 낙엽이 뿌리를 따뜻하게 덮고 있다. 뿌리가 곧 사람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사람은 자체로 최고의 가치를 갖고 있다. 엽락과 체로에 이어 분본을 해야 한다. 뿌리가 바로 사람이며 사람을 키우는 것이 분본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거름하거나 분본해본 적이 없다. 무엇이든 구입한다. 사람도 구입하고, 쌀도 구입한다. 거름하고 키우고 기다리는 문화가 사라지고 있다. 사람을 키우는 일이야말로 그 사회를 인간적인 사회로 만드는 일이다. 사람은 다른 가치의 하위 개념이 아니다. 사람은 목적이다. 사람을 키워내는 것으로써 절망과 역경을 극복하는 것, 이것이 석과불식의 교훈이다.

산지박괘의 다음 괘가 지뢰복(地雷復)이다. 땅 밑에 우레가 묻혀 있다. 산지박괘의 상효, 즉 단 한 개의 석과가 땅속에 깊이 묻혀 있다. 석과가 땅속에 우레와 같은 가능성으로 묻혀 있다. 복은 다시 시작한다는 뜻이다. 광복절의 복이다. 산지박이란 절망의 괘가 지뢰복이라는 새로운 시작으로 이어진다. 절망의 괘가 희망의 괘로 이어진다. 엽락, 체로, 분본의 과정을 거쳐서 석과는 새싹이 되고 숲이 된다.

공부는 삶의 이유

여러분은 왜 살아가는가? 그 이유를 갖고 있는가? 오랜 감옥생활에서 그가 자살하지 않은 이유는 햇볕 때문이다. 겨울 독방에서 만나는 햇볕은 비스듬히 벽을 타고 내려와 마룻바닥에서 최대의 크기가 됐다가 맞은편 벽을 타고 창밖으로 나간다. 길어야 두 시간, 가장 클 때가 신문지 크기였다. 신문지만 한 햇볕을 무릎 위에 받고 있을 때의 따스함은 살아 있음의 절정이었다. 그가 살아가는 이유는 하루하루의 깨달음과 공부였다. 인생에는 자기만의 이유가 있어야 한다. 자기의 이유를 갖고 있는 한 아무리 멀고 힘든 여정이라도 결코 좌절하지 않는다. 자기의 이유를 줄여서 말하면 자유가 된다.

“정(鄭)나라에 차치리(且置履)라는 사람이 있었다. 자신의 발을 본뜬 탁(度)을 집에 두었다. 시장에 신발 사러 갔는데 탁을 가지고 오는 것을 깜박 잊은 것이 생각났다. 그리고는 탁을 가지러 집으로 돌아갔다. 다시 시장에 왔을 때 장이 이미 파하여 신발을 살 수 없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사람들이 물어봤다. ‘직접 신어보면 될 것을 어째서 신어보지 않았소?’ 차치리가 대답했다. ‘탁은 믿을 수 있지만 나는 믿을 수 없어서요(寧信度 無自信).’” 직접 신어보면 될 것을 탁이 없으면 신발도 못 사는 차치리 이야기는 우스꽝스럽지만 사실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일을 할 때 창의적으로 뭔가를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도 자신을 믿지 못하고 남들이 만들어놓은 틀 속에 안주하려는 것도 그렇고, 제도나 이론이라는 탁(度)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박제화된 지식의 노예가 돼버린 모습도 그렇다. 그 원인은 교육에 있을 것이다.

고전은 오래된 미래다. 아날학파의 창시자 페르난도 브로델은 구조주의와 역사를 결합해 독특한 사관을 피력했다. 바다에는 심층, 중간층, 표층이 있다. 피라미드의 하부에 해당하는 부분이 구조사이다. 피라미드의 중간 부분이 국면사, 맨 위 상층 부분이 사건사이다. 사건사는 바다로 치면 해면의 파도에 불과하다. 주로 정치적 변화가 사건에 속한다. 역사를 인물 중심으로 서술하거나 정치적 사변 중심으로 서술하면 역사의 깊이를 보지 못한다.

『주역』은 우리에게 성찰, 겸손, 절제, 미완성의 중요성을 가르쳐준다. 성찰은 자기중심이 아니다. 시각을 외부에 두고 자기를 바라보는 것이다. 자기가 어떤 관계 속에 있는가를 깨닫는 것이다. 겸손은 자기를 낮추고 뒤에 세우며 자기 존재를 상대화해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 배치하는 것이다. 절제는 자기를 작게 갖는 것이다. 주장과 욕망을 자제하고, 매사에 지나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절제하면 부딪칠 일이 없다. 미완성은 목표보다 목표에 이르는 과정을 소중히 생각한다. 네 가지 덕목을 한마디로 하면 지산겸(地山謙)이다. 땅속에 산이 있는 형상이다. 땅속에 산이 있으니 겸손하다. 군자는 이를 본받아 많은 데를 덜어 적은 데에 더하고 사물을 알맞게 하고 고르게 베푼다. 주역은 물 뜨는 그릇과 같다. 바닷물을 그릇으로 뜨면 그릇에 담긴 물은 바닷물이긴 하지만 바다는 아니다. 『주역』은 작은 그릇이지만 세계를 뜨기 위해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들어낸 것이다. 『주역』에서는 변화를 역이불역 불역이대역(易而不易 不易而大易)으로 요약한다. 변하면서 변하지 않는데 바로 그 변하지 않는다는 것도 크게 보면 변한다는 의미다.

저자는 강의 마지막에 그날의 강의 요지를 적게 한다. 안다는 것은 복잡한 것을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잘산다는 것은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깨어 있기 위해서는 고전을 통해 주기적으로 자극을 받고 자극을 통해 생각을 정리해야 한다. 이 책이 그런 역할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한근태 한스컨설팅 대표 kthan@assist.ac.kr
 
필자는 서울대 섬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애크론대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핀란드 헬싱키경제경영대에서 경영학 석사 학위(MBA)를 받았다. 대우자동차 이사, IBS컨설팅그룹 상무, 한국리더십센터 소장 등을 지냈다.
동아비즈니스리뷰 259호 Agile Transformation 2018년 10월 Issue 2 목차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