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드백이 빠른가? 그리고 기록되는가?, 데이터-매뉴얼의 힘이 창의성의 핵심

248호 (2018년 5월 Issue 1)

PDF 다운로드 횟수 10회중 1회차 차감됩니다.
다운을 진행하시겠습니까?
아티클 다운로드(PDF)
4,000원
Article at a Glance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적합한 유연하고 창의적인 조직문화는 어떻게 만들까. 이정동 교수는 끊임없이 개선점을 찾고, 그 개선사항을 기록으로 남기는 과정에서 사후적으로 창의적이라고 불리는 결과가 나온다고 주장한다. 오랜 기간 촘촘히 쌓아온 데이터와 매뉴얼의 힘이 결국 창의성을 만든다는 것. 그렇다면 조직 내부에 ‘축적의 힘’이 쌓이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실패를 용인하는 문화, 자유롭고 빠른 피드백이 가능한 문화, 이 피드백을 꼼꼼히 기록하는 문화 등이 필요하다.
248_82_1

이정동 교수는 서울대 공과대학 교수로 한국생산성학회 회장(2011)과 한국기업경영학회 회장(2017)을 역임했다. 『효율성 분석이론』 『공학기술과 정책』 등 전공 서적과 번역서 『진화경제이론』을 출간했으며 2권의 영문 편집서를 포함해 국내외 전문 학술지에 100여 편 이상의 논문을 발표하는 등 기술경영, 기술정책 분야의 학문적 발전을 위해 다양하게 기여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축적의 시간(2015)』과 『축적의 길(2017)』이 있다.


4차 산업혁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수록 기업들의 불안감도 함께 커지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의 실체가 불분명하고 향후 기업 환경에 미칠 영향 역시 아직은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불안감이 커지면서 당장이라도 인공지능(AI)을 업무에 도입하고 조직문화를 구글처럼 바꿔야 할 것 같은 조급증도 만연하고 있다. 과거 해외 선진 기업 사례를 벤치마킹했던 것처럼 또다시 성공한 혁신 기업의 조직문화를 그대로 국내 기업에 옮겨 심으려는 시도다. 대표적인 예가 직책 대신 ∼님으로 부르는 호칭 파괴, 회의문화 개선, 보고 체계 간소화, 재택근무 등이다. 하지만 표면적으로 해외 혁신 기업들의 제도를 벤치마킹한다고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조직이 될까? 왜 국내 기업들의 이런 시도는 대부분 실패할까?

이정동 서울대 기술경영경제정책대학원과정 교수는 “단순히 호칭을 바꾸고 근무시간에 20%를 딴짓하는 데 쓰게 한다고 조직이 창의적이 되는 것이 아니다”라면서 4차 산업혁명 시대를 헤쳐 나갈 수 있는 조직문화로 ‘축적’의 문화를 제시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창조적 혁신은 한순간의 영감이나 반짝이는 아이디어 혹은 원대한 비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는 개선에서 나온다. 지치지 않고, 개선해야 할 점을 찾고, 그 개선사항을 기록으로 남기는 과정에서 창의적인 결과물이 나온다는 것. 오랜 기간 촘촘히 쌓아온 데이터와 매뉴얼의 힘이 결국 창의적 결과를 만든다는 것이 이 교수의 설명이다.

그렇다면 조직 내부에 ‘축적의 힘’이 쌓이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교수는 축적이 가능하게 하는 요소로 크게 3가지를 들었다. 시행착오를 용인하는 문화, 자유롭고 빠른 피드백이 가능한 문화, 그리고 이 피드백을 꼼꼼히 기록하는 문화가 그것이다. 특히 그는 시행착오를 용인한다는 표현에 대해 “무턱대고 실패하라는 것이 아니라 매뉴얼을 바탕으로 새로운 시도를 하고 그 피드백을 기록하라는 의미”라며 “실패를 장려한다기보다는 새로운 시도 그 자체를 장려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런 의미에서 실리콘밸리에서 유행하는 ‘빠른 실패(Fast failure)’에 대해선 “빠른 실패보다는 빠른 피드백(Fast feedback)이 더 정확한 표현”이라고 말했다.

『축적의 시간』과 『축적의 길』이라는 책을 집필해 국내 기업인들에게 큰 통찰을 준 이정동 서울대 교수를 DBR이 만나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알맞은 조직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제조업을 기반으로 성장한 한국 기업들이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조직문화를 어떻게 바꿔야 할지 골머리를 앓고 있다.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조직을 만드는 것이 최근 모든 기업의 화두인데 왜 이런 시도들이 실패한다고 생각하나.

창의적 조직문화에 대한 오해가 있는 것 같다. 창의적인 비전만으로 성공한 기업은 없다. 혁신의 문화는 끊임없는 개선에서 출발한다. 애플 아이폰이 대표적 사례 아닌가. 스티브 잡스가 갑자기 아이폰을 내놓은 것이 아니다. 아이폰은 20년 동안 스티브 잡스가 계속 불편해 하며 고쳐온 것이다. 혁신에 대한 특별한 비전을 갖고 있는 게 아니라 만족하지 않는 사람이 결국 혁신을 한다. 다른 리더와 차이가 있다면 꾸준히 지치지 않고 만족하지 못하고, 개선해야 할 점을 찾아냈다는 것이다. 조직 구성원 입장에서는 세세한 것까지 매번 불편해 하면서 조금씩 고쳐나가는 과정이 지치고 힘들 수 있다. 하지만 그 과정을 수년째 계속하면서 혁신이 생기고 블루오션이 만들어진다. 최근 우리나라를 보면 리더에게 능동적이고 창의적인 비전을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능동적인 리더일수록 변덕이 심하고 조직원들이 감당하지 못할 비전이나 과거에 없는 새로운 것을 요구하는 경향이 있다. 결국 조직원들은 이런 리더의 변덕에 맞추기 위해 다른 곳에서 벤치마킹밖에 할 수 없다. 반대로 수동적이지만 집요한 개선을 요구하는 리더의 경우 남을 벤치마킹하지 않는다. 자기 역사와 싸우는 거다. 혁신은 오히려 수동적으로 이뤄진다는 시각 전환이 필요할 것 같다.

또 4차 산업혁명에 대해 모두가 겁을 먹고 있는 것 같다. 뭔가 크게 도약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 하지만 실리콘밸리도 실상을 보면 업데이트되는 속도가 빠를 뿐이다. ASME(The American Society of Mechanical Engineers, 미국기계학회)에 B&PV(Boiler & Pressuree Vessel)에 관한 설계인증 코드가 있다. 이 설계 코드는 가압용기를 만들 때 특정 재질이나 환경 시 압력에 대한 설계 지침을 모아놓은 일종의 매뉴얼이다. 예를 들어 새로운 프로세스에 대한 공정을 만들어 달라는 개념 설계를 글로벌 라이선서 기업에 맡기면 시간이 지나 결과물을 내놓는다. 이 결과만 놓고 보면 대단히 창의적인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대부분 B&PV 코드를 참고해서 만든다. 이 B&PV 코드가 존재하는 것을 모르면 완전히 새로운, 창의적인 설계가 만들어졌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매뉴얼에 있는 내용을 응용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창의성이 필요한 것은 과정의 1%가 안 된다고 해도 될 정도다. 1910년대 B&PV 코드는 10여 페이지에 불과했다. 그때부터 새로운 것을 시도해보고, 시행착오가 생길 때마다 한 줄씩 추가해 왔다. 지금도 매일 같이 ‘new release’라는 이름으로 매뉴얼이 한 줄씩 채워진다. 현재는 12개 섹션 32권으로 구성돼 수만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으로 불어났다. 이 B&PV 코드 이야기는 혁신적인 결과물이 어떻게 얻어지는지에 대해 중요한 교훈을 준다. 창의적인 조직의 힘은 결국 이 B&PV 코드처럼 조직 내부에 자신들만의 경험을 담은 몇만 페이지의 매뉴얼이 존재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게 없으면 창의적인 결과물이 나올 수 없다. 매일 한 줄씩 매뉴얼을 업데이트하는 힘,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그 결과를 기록하는 습관, 이것이 인텔의 힘이고 구글의 힘이다. 구글이 일과 시간의 20%를 업무 외적인 일에 투자하도록 장려한다고 하니 국내 기업들도 이런 걸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걱정한다. 구글의 힘은 결코 일과 시간 중에 개인 시간을 가지는 데서 나오지 않는다. 구글이 지금까지 축적한 노하우 몇만 페이지가 결국 창의적인 역량의 핵심이다.

저서 『축적의 시간』이나 『축적의 길』에서 실패를 강조하던데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나.

글로벌 소프트웨어 회사가 창의적이라 말한다. 그런데 그런 회사의 가장 큰 특징은 앞에 이야기한 것처럼 개발 과정을 한 줄, 한 줄 기록하면서 특히 각주를 많이 단다. 대부분의 시간을 각주 쓰는 데 보낸다. 한국은 다르다. 소프트웨어 회사에서 개발자 한 명이 개발 과정을 몇 줄 쓰다가 이직했다고 해보자. 다른 사람이 그 자리에서 일을 하는데 앞에 사람이 짜놓은 코드에 각주가 없어 이해가 가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 처음부터 다시 하는 게 더 빠르다고 생각한다. 국내 소프트웨어 인력들은 귀한 업무시간의 대부분을 남의 일을 처음부터 다시 하는 데 허비한다. 알고 보면 창의성의 힘은 각주를 축적하는 데서 나온다. 그게 있으면 창의적이고 값진 데 시간이 쓰일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조직에서는 일을 많이 하지만 각주를 안 남긴다. 시행착오 경험을 안 남긴다는 뜻이다. 내가 실패를 강조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시행착오를 장려하는 게 아니라 매번의 시행에 대해 꼼꼼히 피드백하고, 기록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매번의 시행을 성공이냐, 실패냐로 단정하면 안 된다. 그래서 시행착오라는 말도 틀렸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회사에서 하는 모든 일은 결국 각주 쓰기고, 매뉴얼 업데이트다. 이 루틴이 자리 잡고 있으면 창의적 기업이라고 볼 수 있다. 습관이 안 돼 있으면 매번 같은 일을 반복해야 한다. 이러면 발전이 누적되지 않는다. 재현되지 않고, 전수도 되지 않는 개인의 요령만 생길 뿐이다.

4차 산업혁명도 이런 맥락에서 그 의미를 재해석해 볼 수 있다. 시도와 기록을 쌓을 때 이전에 했던 시도를 반복하지 않고 새로운 시도를 해 나가는 기법을 공학에서는 ‘실험계획법’이라고 한다. 적은 자원으로 되도록 많은 실험을 해보는 방법이고 쉽게 말해서 효과적으로 매뉴얼을 업데이트하는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이 실험계획법이 진화하고 있다. 예를 들어 연관기업 모두가 공유하는 GE의 프레딕스(Predix)라는 빅데이터 플랫폼을 생각해보면 된다. 이 빅데이터 플랫폼을 통해 모든 연관기업은 시행착오를 실시간으로 공유하면서 축적하고 있다. 매뉴얼을 한 줄 더 업데이트하는 속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졌다. 글로벌 기업들이 빅데이터와 인공지능 등 4차 산업혁명 기술에 목을 매는 이유가 바로 이 시행착오의 축적, 즉 ‘스케일 업’의 속도를 높이기 위해서다. 옛날의 실험계획법은 사람의 머리에서부터 논리적으로 접근해나가는 톱-다운 접근법을 썼다. 인공지능은 논리가 아니라 반대로 엄청난 자료의 더미에서부터 패턴을 읽어내는 보텀-업 접근법을 쓴다. 즉, 시행의 결과를 쌓아 올리는 것을 자료로부터 패턴을 읽어내면서 자동화하는 것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 핵심 역량으로 꼽히는 ‘유연성’과는 배치되는 이야기인 것 같기도 한데.

유연성의 진정한 의미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 예를 들어보자. 과거 동일본 대지진 직후 대응과정을 보면서 모 신문에서 ‘매뉴얼 사회의 한계’라는 제목으로 일본 사회에 대한 비판 기사를 쓴 적이 있다. 지진 직후 두 마을 중 한 마을에 생수가 동났는데 옆 마을 창고에는 생수가 쌓여 있었지만 매뉴얼에 대응법이 없어서 제대로 대응을 못했다는 비판기사였다. 우리나라 같았으면 현장에서 매뉴얼과 상관없이 융통성을 발휘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일본은 그 순간 문제가 발생했을지 모르지만 추후에 매뉴얼을 업데이트했다. 문제가 생기면 피드백을 하고, 매뉴얼에 이를 추가하는 것이다. 융통성을 발휘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좋지만 문제 자체가 발생한 사실과 결과를 정확히 피드백하고 매뉴얼을 업데이트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같은 문제가 반복된다. 그런 면에서 일본 사회는 매뉴얼 때문에 문제가 생긴 사회가 아니라 잘못된 지진 피해 대응을 통해 또 한 번 매뉴얼을 업데이트한 ‘축적지향의 사회’로 해석해야 한다. 우리 언론의 일본 사회에 대한 비난은 유연성이라는 것을 잘못 해석한 결과다. 한 기계 관련 회사를 방문해서 직접 본 다른 사례를 하나 더 들어보자. 회사 설계 부서에서 설계도를 생산 부서에 내렸다. 그런데 설계 부서가 나중에 설계에 문제가 있음을 발견했다. 놀라운 점은 설계에 문제가 있었는데도 생산이 이뤄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설계 부서가 생산 부서에 가서 보니 현장에서 융통성 있게 문제를 해결해 생산을 진행한 것을 발견했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매뉴얼이 업데이트되지 않는다. 현장의 유연성이 뛰어날수록 설계역량이 떨어지는 역설이 성립한다. 그런데 현장의 유연한 대응 역량이라는 것이 대부분 임시변통이다. 반대로 생각해야 한다. 매뉴얼을 주면 그대로 적용하고, 문제가 생기면 반드시 리포트를 제출해서 피드백하고 업데이트해야 한다. 이때 피해야 할 것은 문제가 생겼다고 보고했을 때 징계하고, 실수했을 때 혼내는 분위기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매뉴얼 업데이트 사이클이 돌아가지 않는다. 겉보기엔 문제가 없는 듯이 잘 돌아가지만 조직은 정체된다.

4차 산업혁명 시대가 도래하면서 비즈니스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지만 핵심은 변하지 않는다. 수만 페이지 매뉴얼을 만들고, 빠르게 업데이트할 수 있는 시스템을 고민해야 한다. 혁신이 수동적 축적의 사후적 결과라고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것 때문이다. 비전을 갖고 유연하게 움직인다고 창의적이 되지 않는다. 조금씩, 그러나 끊임없이 매뉴얼을 업데이트하기만 해도 창의적이 된다.

상당수 대기업들은 책임을 공유하기 위해 복잡한 의사결정 체계를 활용하고 있다. 이런 위계적 조직문화의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높은데.

위계적인 조직문화는 실행에 특화된 효율적인 사이클이었다. 그것만 잘해도 중진국은 가능하다. 우리나라 역시 초기 산업화를 진행하면서 빠르게 성장하는 데 위계적 조직문화의 덕을 많이 봤다. 하지만 그 수준을 넘어가려면 스스로 매뉴얼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 한국은 외국 사례를 벤치마킹해서 잘 활용했다. 이제 글로벌 챔피언을 꿈꾼다면 바뀌어야 한다. 우리나라 기업들 사이에서 이런 문제 제기가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다는 걸 보면 많이 성장했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이런 고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 기업들이 많은 부분에서 프런티어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전환기를 긍정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이참에 조직 운용 등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창의가 아니라 매뉴얼을 업데이트하는 ‘스케일업 혁명’을 해야 한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변화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실패를 용인하기에는 리스크가 너무 커지고 있다는 분석도 있는데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프로젝트 사이즈를 줄여야 한다. 국내 기업뿐 아니라 해외 기업도 몇백억씩 투자되는 프로젝트가 실패하면, 심지어 미국에서도 CEO는 결과에 책임을 진다. 자리에서 내려오기도 하고 심하면 조사도 받는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계속 강조하지만 그 경험을 통해 조직 내에 매뉴얼이 한 번 더 업데이트되는지 여부다. 위험 부담을 줄이고 싶으면 시행의 사이즈를 줄여야 한다. 그리고 중간 검토 회의를 공개적으로 자주 열어서 과정을 모니터링하고 피드백을 주고받아야 한다. 시행을 권장한다는 뜻이 중간 과정이 어떻게 되든지 건드리지 말고 방치하라는 뜻이 아니다. 지속적으로 경과를 오픈하고 계속 회의를 하고 모니터링해야 한다. 작은 프로젝트 유닛을 책임지고 키워나가는 방식을 유지해야 한다. 비즈니스 책임의 단위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최근 유행하는 애자일 방법론과 비슷하게 들린다.

맞다. 하지만 애질리티를 잘못 해석하면 레드오션에서 재빨리 벗어나 민첩하게 새로운 시장으로 옮겨야 한다는 뜻으로 들릴 수도 있다. 무조건적인 애질리티는 위험하다. 후지필름의 예를 들어보자. 후지필름은 필름 회사로 유명하지만 핵심 경쟁력은 ‘증착기술’이다. 그런 후지가 필름 비즈니스를 하다 시작한 게 디스플레이 사업이다. 이를 두고 어떤 컨설팅 회사는 후지가 레드오션에서 블루오션 시장으로 민첩하게 움직였다고 분석하기도 했지만 이는 잘못된 해석이다. 후지필름은 몇십 년에 걸쳐 증착한 분야에서 경험과 내공을 쌓아온 것일 뿐이다. 자신의 그림을 그려 나가야 하는 시대일수록 빠른 무빙이 아니라 깊이를 가져야 한다. 깊이를 더하기 위한 방법으로 4차 산업혁명의 핵심 기술인 빅데이터나 인공지능 등 기술을 활용하는 것이지 이 기술 자체가 핵심은 아니다. 비유하자면 우물을 깊게 파기 위해 넓게 파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

단순히 조직의 제도나 체계를 유연하게 해서 될 일은 아니라는 말인가?

민첩한 조직은 사후적으로 그렇게 보이는 것일 따름이다. 민첩하지 않아야 민첩해진다. 조직을 너무 유연하게 하고 자주 바꾸는 방식은 매뉴얼 업데이트라는 혁신적으로 일하는 원칙에 방해가 된다. 끊임없이 매뉴얼 업데이트에 집착하다 보면 조직 전체적으로 피로감을 느끼지 않겠냐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지친다고 생각하는 조직 문화가 잘못된 것이다. 구글, 페이스북 같은 글로벌 기업의 구성원들이 비교적 신나게 회사에 출근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자기 인생의 스케일업을 위해 회사에 스스로 인생의 매뉴얼을 한 줄씩 더 업데이트하러 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마인드로 출근을 하니 신나고 자발적일 수밖에 없다. 회사에서 월급을 받고 있지만, 이미 기업가정신을 갖고 있는 것이다. 실리콘밸리의 성공한 창업자 평균 나이가 47.2세다. 20대가 대세일 것 같지만 실제 성공한 창업자들은 그렇게 어리지 않다. 이게 의미하는 것은 창업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40대 후반까지 월급쟁이로 남의 회사에서 자신만의 역량을 쌓을 수 있는, 다시 말해 자신을 스케일업할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가진 후에 창업을 해야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회사 역시 개인들이 고수가 될 수 있는 경로를 만들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순환 근무제는 최소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순환 근무가 보편화돼 있으니 직원들이 모두 비슷한 역량을 갖추게 되고 승진에 목을 매면서 스트레스가 쌓이는 것이다. 선진 조직은 매니지먼트 트랙이 아닌 고수의 트랙을 많이 마련했고 이것이 사회로 투영되면 국가경쟁력이 된다. 천천히 움직이는 곳에서 4차 산업혁명 등 패러다임의 전환이 생긴다.

흔히 말하는 장인이나 마이스터의 개념과 비슷한가?

도제(apprentice)제도 같은 방식과는 다르다. 이런 방식은 같은 일을 반복해 숙련하는 것이다. 그런 것은 무의미하다. 이런 기술은 기계로 대체된다. 혁신가는 매번 조금씩 다르게 보는 사람이다. 그래서 영역을 넓혀 간다. 매번 다른 방법으로 생각하고, 시도하고, 배우는 자세를 가진다. 이런 사람은 ‘축적된 고수’이다. 그러나 자기만의 방식을 고수하면서, 닫힌 마인드, 유연성이 없는 사람을 ‘퇴적된 장인’이라고 한다.

대기업들의 스타트업 인수나 외부 혁신 기업과의 제휴도 좋은 방법인가?

스스로 갖고 있지 못한 경험을 사오거나 가져오는 것은 좋다. 인수합병(M&A), 인력 유동 등의 방법으로 외부 인력을 영입하는 건 바람직한 현상이다. 다만 이럴 경우 바로 성과를 요구하면 안 된다. 예를 들면 10년짜리 경험을 갖고와 우리 조직의 매뉴얼로 흡수하는 과정을 신중히 겪어 나갈 수 있도록 시간을 갖고 진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실상은 보통 1∼2년 안에 성과를 요구하기 때문에 제대로 되지 않는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혁신 기업을 인수합병하는 본질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는 점이다. 해당 혁신 기업이 쌓아 놓은 매뉴얼이 있는지, 우리 기업의 본질은 무엇인지, 두 회사가 합쳐지면 각자의 매뉴얼이 시간을 갖고 시너지를 낼 수 있는지 등을 살펴봐야 한다. 후지필름이 그랬듯 자기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편집자주

이 기사의 제작에는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인턴연구원 여인호(경희대 외식경영학과 4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장재웅 기자 jwoong04@donga.com
동아비즈니스리뷰 253호 Beyond Time 2018년 7월 Issue 2 목차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