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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치드렁크 예술감독 펠릭스 바렛 인터뷰

무대, 대사, 플롯도 없는 기괴한 공연? 참여와 소통으로 놀라운 몰입감 제공하다

배미정 | 236호 (2017년 11월 Issue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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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 at a Glance

극장 체험의 룰이 파괴되고 있다. 전통적인 연극에서 관객은 객석에 가만히 앉아 배우들이 읊는 대사를 듣는 관찰자였다. 그런데 최근 무대와 관객의 경계를 없애 관객이 배우와 소통하면서 능동적으로 공연에 참여하는 형식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디지털 가상 세계에 익숙한 관객들이 제대로 몰입할 수 있는 예술적 체험을 제공하고자 하는 연극계의 실험이자 도전이다. 영국 극단 펀치드렁크의 공연 ‘슬립노모어’는 기존 형식의 파괴로 대중성과 상업성까지 확보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이머시브 연극(immersive theatre)’이라는 장르를 개척하고 연극계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었다. 증강현실(VR) 같은 첨단 기술까지 활용하면서 이전에 없던 관객 체험을 창조하고 있다.

편집자주

이 기사의 제작에는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인턴연구원 김경민(연세대 경영학과 4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무대도, 대사도, 플롯도 없는 기괴한 공연이 뉴욕 오프-브로드웨이(Off-Broadway)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연회색 플라스틱 가면을 쓴 관객이 배우를 따라, 혹은 홀로 자유롭게 건물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는 파격적인 구성은 ‘이머시브 연극(immersive theatre)’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 최근에는 중국 상하이에 진출하는 데 성공하면서 글로벌하게 존재감을 인정받고 있다. 뉴욕을 방문하면 꼭 놓치지 말아야 할 연극으로 국내 공연 마니아들 사이에서도 입소문을 타고 있는, 영국 공연그룹 펀치드렁크(Punchdrunk)의 ‘슬립노모어(Sleep No more)’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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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립노모어는 뉴욕시 맨해튼 남서부 첼시 지역의 맥키트릭(McKittrick)호텔에서 2011년 3월부터 7년째 장기 공연 중이다. 맥키트릭호텔은 펀치드렁크가 오직 슬립노모어 공연을 위해 세 개의 낡은 창고 건물을 개조한 가상의 호텔이자 극장 공간이다. 큰 틀의 줄거리와 배역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맥베스’를 원작으로 한다. 공연 제목도 왕을 살해한 맥베스가 “더 이상 잠을 잘 수 없다”며 자책하며 절규하는 대목에서 따왔다. 조명, 음악, 실내디자인 등 전체적인 무대 배경은 히치콕의 필름 누아르에서 영감을 받았다. 공연장인 맥키트릭호텔과 관객이 처음 호텔에 입장해서 안내되는 재즈 바 맨덜리(Manderley)는 히치콕의 영화 ‘현기증’과 ‘레베카’에서 각각 따온 이름이다. 이 연극의 예술감독 펠릭스 바렛(Felix Barrett)은 과거 인터뷰에서 슬립노모어를 열 단어 내로 간단히 소개해달라는 질문에 “맥베스와 히치콕의 필름 누아르를 3개의 창고 건물에 옮겨놓은 작품”이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실제 공연은 익히 알려진 맥베스와 히치콕의 영화를 뛰어넘는 완전히 새로운 경험을 관객들에게 선사한다. 맥키트리호텔에 입장해 로비의 재즈 바 맨덜리에서 음악을 즐기던 관객들은 5분 간격으로 10여 명씩 무리 지어 엘리베이터를 타고 서로 다른 층에 안내된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뛰어가는 배우를 만나게 되는데 그를 따라가면 왕의 침실에 몰래 들어가는 맥베스와 마주할지도 모른다. 잠든 덩컨 왕의 얼굴을 베개로 짓눌러 살해하는 맥베스를 침대 머리맡에서 숨죽여 지켜보다가 다른 한편에서 손에 피를 묻힌 맥베스를 따라 갑자기 도망치듯 뛰어나갈 수도 있다. 또 다른 방에서는 맥베스와 그의 아내가 욕조에서 피를 씻으며 온몸으로 괴로움을 표현한다. 배우들은 실제 나체로 서로 뒤엉켜서 지난 밤 끔찍한 살인의 기억을 지우려는 듯 몸부림친다.

어떤 관객은 공연 시작부터 이야기의 엔딩 무대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 맥베스와 모든 출연진이 최후의 만찬을 하듯 긴 식탁에 둘러앉아 회한의 몸짓을 쏟아내는 모습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감지할 수 있다. 그러고 나서 다른 방에서 맥베스가 왕을 살해하는 장면을 보더라도 이야기의 흐름은 전혀 끊어지지 않는다. 관객들은 스스로 공연의 배우이자 연출자가 돼 자연스럽게 자기만의 맥베스를 만들어 간다.

슬립노모어를 본 관객들은 공통적으로 기존에 경험하지 못했던 연극의 새로운 공간과 형식에 열광한다. 전문가들은 관객들을 충격에 빠뜨린 펀치드렁크의 새로운 공연 형태를 ‘이머시브 연극’이라고 정의했다. 이머시브 연극이란 “무대와 관객석의 경계가 와해된 공간적 환경을 제공하고, 관객이 직접 이동하며 창의적으로 내러티브를 구성하는 참여형 공연 형태”를 말한다. 기존 연극과 차별화된 형식은 전통적인 ‘극장 제도’와 ‘언어 텍스트’ 중심의 공연 관습에서 탈피하려는 시도의 연장선이자 디지털 기술의 발전으로 가상현실에 익숙해진 관객들에게 진정한 몰입감(immersion)을 제공하려는 실험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1

슬립노모어의 관객들은 최대 3시간의 공연 시간 동안 6개 층으로 이뤄진 맥키트릭호텔 내부로 안내돼 100여 개가 넘는 방을 자유롭게 드나들면서 공간을 탐색하거나, 때론 홀로 외딴 방에 이끌려 배우와 일대일 접촉을 하는 등 극본 없는 연극을 체험한다. 어두침침한 조명, 방마다 흘러나오는 서스펜스적인 음악, 괴기한 소품으로 꾸며진 실내는 관객으로 하여금 맥베스의 과도한 욕망이 가져온 비극의 오싹함을 오감으로 느끼게 만든다.

슬립노모어는 2011년 뉴욕 초연 당시 각종 상2 을 받으며 작품성을 인정받은 데 이어 장기 흥행으로 대중성과 상업성까지 높이 평가받으면서 학계의 연구 대상3 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국내 연극계에서도 최근 들어 이머시브 연극의 공간과 관객 참여 형식을 도입하려는 시도들이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국내 이머시브 연극은 아직 팬들의 흥미를 자극하는 수준에 불과해 이머시브 연극이 과연 무엇이며, 무엇에 도전하고 있으며, 앞으로 어떻게 나아갈지에 대한 뚜렷한 비전은 확립되지 않았다.

DBR은 2000년 펀치드렁크 극단을 창립하고 슬립노모어 등 주요 작품들의 총예술감독을 맡아온 펠릭스 바렛에게 이머시브 연극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e메일로 물어봤다. 바렛은 영국에서 펀치드렁크를 통해 연극산업 발전에 끼친 공로를 인정받아 2016년 영국국가공로훈장(MBE)을 받았다.

2003년 초연한 슬립노모어(Sleep No More)가 런던, 뉴욕에 이어 상하이에서까지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이런 성공을 예상했는가. 전 세계 사람들이 열광하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슬립노모어는 2003년 런던, 2009년 보스턴에서 공연하고, 2011년 3월부터 지금까지 뉴욕 맨해튼 첼시에서 공연하고 있다. 이 공연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 것으로 기대했지만 이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을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뉴욕에서 7년 가까이 3000회 이상을 공연하면서 매진 행렬을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라고 있다. 작년 12월에 론칭한 상하이 공연도 곧 1주년을 맞이하게 된다.

디지털 시대에 신체적 상호작용이 점점 줄어들면서 사람들의 현실(real-life) 경험에 대한 갈망이 커지고 있다. 슬립노모어는 공연 중 관객들의 휴대폰 사용을 엄격히 통제한다. 말을 해서도 안 된다. 관객들로 하여금 오로지 공연 현장에 몰입하도록 이끈다.

작품은 다양한 스토리 라인과 매혹적인 안무로 구성돼 있다. 관객들은 1930년대 맥키트릭호텔(McKittrick Hotel)이라고 명명된 6층 건물의 100여 개의 방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면서 실제 소품을 만져보고 때론 배우와 상호작용하면서 입체적인 경험을 할 수 있다.

관객은 가면을 썼기 때문에 작품을 감상하는 동안 익명성을 보장받는다. 그들은 3시간 공연 내내 자신이 체험하고 싶은 것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매 공연을 세상에 하나뿐인 자기만의 공연으로 만드는 것이다. 사람들이 펀치드렁크의 공연을 계속 찾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본다. 관객들은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자기만의 이야기를 짜나갈 수 있다. 관객들 개개인이 연출자가 되는 셈이다.

 

2000년에 설립된 극단 펀치드렁크는 ‘이머시브 연극(immersive theatre)’이라는 장르의 개척자이자 선도자로 잘 알려져 있다. 2000년대 초중반 영국을 중심으로 형성된 이머시브 연극은 펀치드렁크를 통해 상업화, 대중화되면서 미국뿐 아니라 한국에도 붐이 일기 시작했다. 이머시브 연극을 시도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나는 대학생 때부터 이런 스타일의 작품을 연출하기 시작했다. 전통적인 연극 방식은 무대와 관객석을 구분하고, 관객을 수동적인 존재로 만든다. 나는 관객들을 관객석의 안락한 장소에서 벗어나 어떤 내러티브를 따를지 자기만의 의사결정을 해야 하는 세계로 이끌고 싶었다.

회사 이름인 펀치드렁크는 우리가 관객으로 하여금 느끼게 만드는 방식을 의미한다. (편집자주: 펀치드렁크란 권투선수가 연타를 맞고 거듭되는 뇌진탕으로 인해 겪는 외상성 뇌장애, 정신기능의 둔화, 착란 발작, 기억상실 등을 일컫는 의학용어로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혼미한 상황을 묘사할 때 쓰인다.)

우리 작품에서 ‘관객’은 가장 중요한 요소다. 우리는 늘 관객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 무대가 어떻게 보이는지보다는 관객이 극의 중심에 있을 때 어떻게 느낄지를 더 고민한다. 관객이 경험할 디테일을 꼼꼼히 신경 쓴다는 점이 다른 작품과 차별화된 특성이라고 볼 수 있다.

 

펀치드렁크와 연출자 펠릭스 바렛이 생각하는 이머시브 연극이란 무엇인가.

사실 우리 스스로 우리 작품을 설명하면서 ‘이머시브’란 용어를 사용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이머시브 연극이 연극계에 새로운 장르로 부각되면서 펀치드렁크 작품도 ‘이머시브’하다고 묘사되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머시브 연극이란 용어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지만 그보다도 ‘장소 친화적(site sympathetic)’ ‘경험적(experiential)’이라는 용어를 더 선호한다. 이런 용어를 통해 우리는 ‘장소특정적(site-specific)’ ‘프로미나드(promenade)’ ‘전통적(traditional)’이라고 불리는 연극의 관습과 차이를 드러낸다.

(편집자주: 장소특정적 연극은 기존 극장 공간이 아닌 특정한 장소의 위치와 맥락에서 발전되는 공연으로 장소 자체의 사회, 역사, 문화, 정치적 맥락과 긴밀히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펀치드렁크 공연의 내용이나 형식은 공간 자체의 맥락에서 분리되는 경향을 보인다. 어떤 곳이 공연장으로 선택되든지 간에 장소가 관객 경험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주체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장소 친화적이다.4

펀치드렁크는 슬립노모어의 공연장인 맥키트릭호텔이 경제대공황이 끝나갈 무렵인 1939년 뉴욕 첼시 지역의 초호화 호텔로 지어졌지만 개장을 불과 6일 앞두고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지금까지 문을 열지 못한 비운의 호텔이라고 소개한다. 관객들은 호텔 로비와 무도회장, 객실로 꾸며진 각 층을 돌아다니면서 실제 1930년대 지어진 맥키트릭호텔에 도착한 듯한 착각에 빠진다. 과거 대형 클럽이 있었던 낡은 건물을 신비로운 역사적 건물로 재탄생시키면서 관객들의 역사적 상상력을 자극한다.

프로미네이드 연극은 관객이 관객석에 앉아 있지 않고, 돌아다니면서 보는 연극으로 형식적으로만 보면 펀치드렁크의 연극도 여기에 속한다. 하지만 펀치드렁크는 관객이 자발적으로 이동하면서 공연의 일부가 되고 새로운 경험을 창조해낸다는 점에서 ‘경험적’이라고 스스로를 차별화시킨다.)

우리는 서로 상이한 장소에 맞게 작품을 창조한다. 또 관객에게 작품의 감각적이고 상상적 세계를 탐구할 수 있는 신체적 자유를 제공함으로써 아주 특별하고 유일무이한, 강력하고 개인적인 경험을 선사하고자 한다. 그래서 펀치드렁크의 개별 공연들은 누가 보는지에 따라 완전히 다른 공연, 매우 복합적이고 정의하기 어려운 경험이 된다. 앞으로 펀치드렁크의 작품들은 지금까지 언급되지 않은, 완전히 새로운 용어로 정의해야 할지 모른다.

슬립노모어를 본 관객들은 기존 연극과 다른 경험에 굉장한 충격을 느낀다. 반응들이 상당히 감정적이다. 스토리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도 많다. 예술감독으로서 관객이 무엇을 느끼길 기대하는가.

나는 우리 작품을 본 관객들이 보이는 각양각색의 반응에 굉장히 관심이 많다. 나는 관객들이 비선형적인 방식으로 내러티브를 따라갈 수 있도록 작품을 발전시키고자 한다. 슬립노모어의 경우 대사가 없다. 우리는 몸짓으로 스토리를 전달하며, 우리가 상상한 가상의 세계는 숨겨진 단서들로 가득 차 있다.

펀치드렁크는 맥키트릭호텔을 완벽히 재현하기 위해 인테리어뿐 아니라 작은 소품에까지 굉장한 공을 들였다. 미국 각지의 벼룩시장, 앤티크숍을 돌아다니면서 앤티크 가구와 장식품, 희귀한 소품을 구해 배치했는데 예컨대 수십 명의 예술가를 동원해 만든 손편지들도 곳곳에 숨겨져 있다. 관객들은 이런 소품들을 직접 발견하고, 냄새를 맡고 만지면서 감각적 체험에 몰입할 수 있다.

관객들은 작품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그로부터 더 많은 것을 경험할 수 있다. 전통적인 연극과는 굉장히 다른 방식의 소통이다. 공연에 몸을 맡길수록 더 황홀한 경험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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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공연에 대사를 활용하지 않는지 궁금하다. 이머시브 연극에서 언어의 역할은 무엇인가.

대사를 쓰면 관객의 뇌가 심장보다 먼저 반응하게 된다. 말보다는 음악과 배우의 몸짓과 같은 언어가 관객들에게 훨씬 더 직접적이고 강력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다음에 관객의 뇌가 감각의 조각들을 짜 맞추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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