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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VB(실리콘밸리은행) 파산의 교훈

유동성 단맛 빠져 자기자본의 가치 망각
경영진 위험관리 실패가 ‘뱅크런’ 불지펴

김형균 | 383호 (2023년 12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2023년 실리콘밸리은행(SVB)의 파산은 미국 역사에서 세 번째로 큰 은행 파산으로 기록됐다. 글로벌 스타트업의 희망이었던 SVB의 파산 원인을 두고 일각에서는 연준의 급격한 금리 인상, 정부의 규제 정책 실패를 든다. 다른 한편에서는 SNS를 통해 빠르게 소식이 확산되는 실리콘밸리의 지역적 특성이 뱅크런을 부추겼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하지만 SVB 파산으로 이어진 뱅크런의 근본적인 원인은 경영진의 위험관리 실패였다. 금리에 민감한 고레버리지 사업인 은행은 자기자본의 가치를 보존하는 위험관리의 역할이 중요한데 경영진은 단기 수익에 눈멀어 잘못된 의사결정을 했다. 투자 전문가들도 유동성 파티의 단맛에 취해 SVB의 위기 징조를 발견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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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3월 9일 아침 9시, 실리콘밸리의 창업가 알렉산더 토레네그라는 200여 명의 테크 기업 창업자가 모여 있는 한 채팅방에서 실리콘밸리은행(SVB)에 대한 질문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지켜봤다. 오전 10시, 채팅방의 일부 사람이 SVB에서 예금을 인출할 것을 권유했다. 토레네그라는 그날 예정된 회의를 전부 취소했다. 그리고 아내에게 SVB에 있는 모든 개인 자금을 다른 은행으로 옮길 것을 부탁했으며 회사 직원들에게도 같은 지시를 내렸다. 그의 팀원 중 한 명은 치과에서 진료를 받다가 진료를 중단하고 예금을 인출하기 위해 집으로 달려가야 했다. 토레네그라가 SVB에 예금돼 있던 개인 자금과 회사 자금을 다른 은행으로 옮기는 동안 그의 수많은 채팅방은 SVB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혼란스러워하는 대화들로 뒤덮이고 있었다. 그는 SVB에서 대규모 예금 인출, 즉 뱅크런이 일어나고 있음을 직감했다."1 "

SVB의 시작과 끝

SVB는 미국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 남쪽 지역이 하이테크 붐과 함께 실리콘밸리라고 불리기 시작하던 시기인 1983년, 밥 메데리스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됐다. 하버드 MBA를 졸업하고 스탠퍼드대에서 건설사업관리 수업을 파트타임으로 가르치고 있던 메데리스는 학생들이 창업을 위한 투자금을 구하는 모습을 보고 SVB 사업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다. 그는 당시 웰스파고은행의 임원이던 친구 빌 비거스태프와 포커 게임을 하던 중에 아이디어를 구체화했고, 또 다른 웰스파고 임원 로저 스미스를 CEO로 영입한 뒤 유명인들로부터 투자금을 유치해 1983년 산호세에 은행을 열었다.

그들은 테크 기업 중심의 은행을 만들려는 계획하에 사업을 키워 나갔다. 지역신문과 온라인 구인 웹사이트의 채용 공고에서 스타트업, Pre IPO, 창업가 등의 단어가 들어가 있는 기업들을 추려낸 후 그들의 사무실로 직접 찾아가서 SVB의 사업을 소개했다. 시스코시스템스 같은 기업들이 초기 고객이 됐다.

메데리스는 그가 재직했던 스탠퍼드대의 인맥을 활용해 스타트업 테크 기업들의 기술을 검증한 후 치명적인 결함이 없으면 대출을 해줬다. 실리콘밸리의 성장과 함께 번창한 SVB는 1988년 나스닥에 상장했고 1990년대 초반 예금 규모 10억 달러를 달성했다. 1990년대 후반 닷컴버블을 거치며 위기가 있었지만 이를 극복하고 수많은 실리콘밸리 테크 기업이 의지할 수 있는 동반자가 됐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도 잘 극복한 SVB는 2010년대에 들어서도 창업 열기 및 벤처캐피털(VC) 성장과 함께 꾸준히 성장했다.

그리고 2020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야기한 팬데믹이 찾아왔다. 가파르게 상승했다가 하락한 SIVB2 의 주가 차트(그림 1)에서 볼 수 있듯이 팬데믹은 SVB에 처음엔 커다란 기회를 제공해주는 듯했지만 결과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의 씨앗이 됐다. 이제는 모두가 알고 있는 결말처럼 2023년 3월 SVB는 파산이라는 운명을 맞이했으며 2021년 11월 장중 763.22달러라는 역사적 최고가를 기록한 주식은 1년이 조금 지난 시점에 휴지 조각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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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끝없이 성장할 것 같던 2021년과 파산이라는 운명을 맞이한 2023년 사이에 SVB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SVB의 파산은 당시 미국 역사에서 두 번째로 큰 은행 파산3 으로 기록됐으며 지금으로부터 불과 수개월 전에 일어난 사건이다. 또 경영진의 위험관리 실패의 교과서적 사례로 지구 반대편의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시사점이 있다.

SVB에 과연 무슨 일이?

1. 위험관리에 완전히 실패한 경영진

2021년과 2022년의 어느 날 SVB의 임원들은 회사의 내부 위험관리 모델에 입력된 몇 가지 가정(assumptions)을 수정했다. 수정 전 모델에 따르면 금리가 인상될 경우 은행의 미래 수익에 현저히 부정적인 영향이 있을 것으로 예상됐는데 SVB는 그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하는 대신 모델의 몇 가지 가정을 수정함으로써 금리가 올라도 회사의 수익에 영향이 거의 없어 보이게 만들었다. 수정 전 모델은 금리가 2% 상승하면 미래 현금흐름이 27% 이상 감소하는 것으로 예측했지만 수정된 모델하에서는 그 영향이 5% 미만으로 감소했다."4 " SVB 전 직원의 말을 인용한 미국 언론에 따르면 이러한 모델 수정을 주도한 사람은 최고재무책임자(CFO)였던 댄 벡이었으며 은행의 자산부채관리위원회(Asset Liability Management Committee)도 이를 승인했다. 그리고 이 내용은 2021년 말과 2022년에 연방 및 주(state)의 은행 규제 기관에도 보고가 됐다.

2019년 말 약 618억 달러였던 SVB의 예금 규모는 2021년 말에 약 1890억 달러로 3배가량 늘었다. 이는 절대적인 규모뿐만 아니라 다른 은행들과 비교해서도 압도적으로 큰 증가폭이었다. 예금의 급증은 팬데믹 기간 동안 초저금리하에서 테크 기업들과 VC들로 흘러 들어간 막대한 유동성 덕분이었다. 그들은 주체할 수 없는 현금을 SVB에 예치했다. SVB로 몰려든 예금은 초저금리 상황에서 거의 공짜나 다름없었다.

은행은 예금을 원료로 삼아 대출과 투자를 통해 수익을 창출하는 비즈니스다. 즉, 은행 입장에서 예금은 부채이자 비용의 원천이고, 대출과 투자는 자산이자 수익의 원천이다. 따라서 수익원인 대출처가 없는 상태에서 예금만 증가하게 되면 아무리 금리가 낮아도 은행 입장에서 좋지 않다. SVB는 지역 특성에 따른 사업 구조 때문에 예금자와 대출자 대부분이 테크 기업 또는 VC였다. 따라서 이들로부터 막대한 규모의 현금이 예금됐다는 사실은 이들의 대출 수요가 거의 없을 것이라는 의미였다. 이런 상황에서 SVB의 경영진은 주로 2020년 하반기부터 2021년까지 막대한 규모의 예금과 자기자본을 장기 채권에 투자했는데 이것이 SVB를 파산으로 이끈 결정적 판단 착오였다. 2022년 말 기준 SVB의 자산 중 약 43%가 고정금리 장기 주택저당증권(MBS)과 같은 만기보유증권(Held-To-Maturity, HTM), 약 12%가 매도가능증권(Available-For-Sale, AFS)으로 자산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만기보유증권을 포함한 투자자산의 비중이 다른 은행들 대비 압도적으로 높았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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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VB의 경영진은 급증한 단기 예금을 가지고 금리 변동 위험, 유동성 위험 등을 관리하는 대신 장기 채권에 투자하면서 단기 이익을 추구하는 의사결정을 했다. SVB가 투자한 HTM 채권의 평균 금리는 1.56%였는데 결과적으로 이때가 채권 가격이 가장 비쌀 때였다.

단기 예금으로 장기 채권에 투자한 의사결정은 은행 경영진이 가장 신경 써야 할 위험관리가 전혀 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MBS나 미 국채는 유동성은 높지만 이러한 장기 채권의 시장가격은 금리의 작은 변화에도 매우 큰 영향을 받기 때문에 금리가 인상될 경우 자산가치가 쪼그라들 수 있다. 물론 만기보유증권은 회계적으로 만기까지 팔지 않을 자산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시가의 변동이 재무제표상의 자기자본에 반영되지 않으며 취득원가로 기록된다. 그러나 시장참여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회계상의 숫자가 아닌 시장가치다.

위험관리 측면에서 SVB의 경영진이 내린 또 다른 결정적 오판은 금리 헤지(hedge) 전략의 변경이었다. SVB는 금리 인상에 대한 헤지 목적으로 2021년 말 매도가능증권에 대해 약 150억 달러의 금리 스와프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2022년에 예금 규모가 감소했고 수익성 악화를 우려한 SVB의 경영진은 2022년 1분기에 50억 달러의 스와프를 청산해 약 2억 달러의 이익을 봤다. 이어 2분기에는 60억 달러를 청산해 약 3억 달러의 이익을 실현했다. 단기적으로 작은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 은행 위험관리의 핵심인 금리 변동에 대한 헤지를 대거 청산한 것이다. 이러한 의사결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SVB의 경영진은 2022년 2분기 보고서에서 금리 인상이 아닌 금리 인하 가능성에 대응하는 방향으로 초점을 이동했다고 밝혔다. 결국 SVB는 2022년 말 약 5억6000만 달러의 헤지 상품만 보유하게 되고, 2023년에는 매도가능증권에 대한 헤지가 거의 없는 상태가 됐다. 금리 변동 위험을 관리한 것이 아니라 단기 이익을 추구하면서 금리 방향성에 베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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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경영진의 기대와 희망과는 달리 연준(Fed)이 2022년부터 금리를 계속 인상하자 기업들이 자금 조달을 하기 어려운 환경이 됐다. 이들은 예금을 인출해 사업 자금을 확보해야 했고 더 높은 예금 금리를 찾는 기업들 역시 예금을 인출하기 시작했다. 2022년 중반 약 2000억 달러에 달하던 SVB의 예금 규모는 2023년 1분기, 약 1700억 달러로 15% 감소했다. SVB는 실제로 2018년 말 또는 2019년에 이뤄진 내부 스트레스테스트에서 2년간 예금의 최소 3분의 1이 빠져나갈 수 있다고 나왔는데 경영진은 이를 무시하고 스트레스테스트 모델을 수정했을 뿐이었다.6

2022년의 금리 인상은 SVB 투자자산의 시장가치를 크게 훼손시켰다. SVB의 HTM과 AFS 포트폴리오의 시장가치는 2022년 내내 급감했으며 2022년 말 HTM의 시장가치가 장부가치 대비 120억 달러 낮아짐으로써 119억 달러인 유형보통주자본(Tangible Common Equity)을 초과해 실질적인 자본잠식 상태가 됐다.

지속적인 예금 인출에 대응하기 위해 SVB는 투자자산을 팔든지 자본을 확충해야 했다. 그러나 자산 중 만기보유증권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았기 때문에 유동성이 부족했다. 만기보유증권도 팔아서 유동성을 확보할 수 있지만 1달러라도 파는 순간 재무제표상 만기보유증권 포트폴리오 전체를 더 이상 만기보유증권으로 분류할 수 없게 되며 시장가치도 조정해야 하는 것이 문제였다. 그렇게 되면 가치가 약 120억 달러나 줄어 자본잠식 상황이 수면 위로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주주 가치는 휴지 조각이 되고 예금이 보호받지 못하는 자본잠식 상황이라는 것이 알려지는 순간 뱅크런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SVB는 유동성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2023년 3월 8일에 12억5000만 달러의 유상증자, 제너럴아틀란틱(General Atlantic)을 대상으로 한 5억 달러의 3자 배정 증자, 5억 달러의 우선주 증자를 통한 자본 확충 방안을 발표했다. 그리고 동시에 210억 달러의 매도가능증권을 매각함으로써 18억 달러의 세후 손실을 확정 지었다. 유동성을 확보하려는 경영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SVB는 대규모 손실을 확정 지으면서까지 매도가능증권 대부분을 매각하고 추가적으로 대규모 증자까지 한다는 소식이 기폭제가 되면서 다음 날인 3월 9일, 420억 달러의 대규모 뱅크런이 발생했다. 이는 은행 전체 자산의 약 20% 규모로서 은행의 유동성 자산을 초과하는 규모였다. 결국 3월 9일, SVB의 주가는 60% 폭락했으며 다음 날 주식 거래가 정지됐다. 그리고 SVB는 공식적으로 파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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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정에서 뱅크런을 촉발한 또 다른 요인은 고객이 테크 기업에 편중된 SVB의 비즈니스 모델상 이 은행의 예금 대부분(94%)이 미국연방예금보험공사(FDIC)로부터 예금자 보호를 받지 못하는 25만 달러를 초과하는 자금이라는 사실이었다.

고객이 지역적으로 몰려 있고, 비슷한 성격의 스타트업들이며, 트위터 등 소셜미디어를 통해 작은 소식도 즉각적으로 전파되는 분위기도 뱅크런을 가속화한 또 다른 요소였다. 다만 이는 뱅크런이 쉽게 일어날 수 있었던 요인일 뿐이다. 더욱 중요하게 봐야 할, 뱅크런의 실제 원인은 결국 자기자본 가치를 보존하지 못한 경영진의 위험관리 실패였다. 경영진의 인센티브인 보수 역시 단기 이익과 주가수익률에 연동돼 있을 뿐 위험관리 지표에 연동돼 있지 않았다. 그런데 상황이 이렇게 악화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파산 일주일 전인 2023년 3월 3일, SVB는 발간된 정기주주총회 의결권 권유 문서(2023 Proxy Statement)에서 경영진의 위험관리를 2022년의 업적으로 칭송하는가 하면 “CEO는 지속적으로 발전하는 위험관리에 대한 리더십을 보여줬고, CFO는 위험관리 문화를 장려했다”고 자화자찬했다. 결국 SVB는 파산했고 주식은 휴지 조각이 됐다.

은행업은 자기자본 대비 부채의 규모가 훨씬 큰 고(高)레버리지 사업이기 때문에 은행의 경영진에게는 자기자본 가치를 키우는 임무와 동시에 자기자본 가치를 잘 보존하는 위험관리가 매우 중요하다. 더구나 은행은 단순히 하나의 기업을 넘어 국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은행업이 다른 산업과 다른 또 한 가지는 부채인 예금이 언제든지 인출될 수 있고, 이론적으로 일시에 인출되는 뱅크런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뱅크런은 예금주들이 예금이 보호받지 못할 수도 있다고 인식하는 순간 발생한다. 예금이 보호받지 못하는 경우는 은행의 부채 규모(예금)가 자산보다 큰 경우, 즉 자본잠식 상태일 것이다. 이는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 때처럼 자산 회수 가능성이 낮아져 자산이 손상되거나 자산 가격이 크게 하락할 경우에 일어난다. 이번 SVB 사태가 2008년 금융위기와 달랐던 점은 대출 및 투자자산의 부실화에서 온 위기가 아니라 그 무엇보다 안전한 MBS와 국채에 너무 많이 투자했는데 발생한 사태라는 점이다. 따라서 은행 경영진은 매 순간 자기자본 가치가 보존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지금 뱅크런이 일어나서 은행을 청산하더라도 자본가치가 ‘0’ 이상이 될 수 있도록 재무상태표를 관리해야 하는 것이다. 은행의 경영진에게는 손익계산서보다 재무상태표 관리가 핵심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시기, JP모건의 제이미 다이먼 회장은 ‘요새화된 재무상태표(Fortress balance sheet)’라는 용어를 통해 예상치 못한 시장 충격을 견딜 수 있도록 유동성을 잘 갖추고 자기자본이 보호받는 튼튼한 재무상태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JP모건은 이런 원칙을 바탕으로 금융위기에도 오히려 파산한 베어스턴스와 워싱턴 뮤추얼을 인수하는 등 더 크고 견고한 은행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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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패시브 펀드, VC 등 투자 업계의 무관심

경영진뿐만 아니라 SIVB의 대다수 주주도 특별히 문제를 감지하지 못했다. SIVB의 주요 주주들은 패시브 펀드들이었다. 이들 입장에서 SIVB는 그들이 보유한 수많은 주식 중에 극히 미미한 일부일 뿐이었다. 기업의 현황을 더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책상에 앉아 서류를 읽고 분석할 인센티브가 없었다.7 거의 알려져 있지 않지만 ESG 펀드를 운용하는 트릴리움에셋매니지먼트(Trillium Asset Management)라는 자산운용사가 2022년과 2023년 3월에 SIVB에 주주 제안을 했는데 그 내용은 이사회가 회사의 인종차별 현황에 대한 감사를 하라는 것 정도였다. 은행업에서 가장 중요한 자기자본 보호 및 위험관리와 관련된 주주 제안은 빠졌다. 결국 트릴리움에셋메니지먼트는 2023년 3월 13일 성명서를 통해 보유한 SIVB 주식을 전액 상각했다고 밝혔다.

미국의 유명 VC 세쿼이아캐피털(Sequoia Capital)의 파트너 마이클 모리츠는 SVB가 파산한 지 3일 후인 2023년 3월 13일 ‘모두가 우리를 못 본 체할 때 SVB는 테크 기업을 위해 자금을 공급해줬다(SVB provided for tech when everyone else ignored us)’라는 제목의 파이낸셜타임스 기고를 통해 SVB가 파산하면 미국이 더 가난해질 것이라며 SVB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다는 점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그는 기고문에서 파산한 그 주에도 세쿼이아가 투자한 기업의 창업가들에게 즉시 SVB에 은행 계좌를 열 것을 권유했다고 밝혔다. 약 3개월 후인 그해 6월 연방예금보험공사(FDIC)가 실수로 블룸버그에 유출한 자료에 따르면 세쿼이아는 SVB의 파산 당시 외부 고객 가운데 두 번째로 많은 약 10억 달러의 예금을 SVB에 예치하고 있었다.

세쿼이아같이 전문적인 VC들이 SVB와 거래하면서 그들의 위험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심지어 주변에까지도 이 은행과의 거래를 권유했다는 사실은 사뭇 놀랍다. 투자 전문가라면 SVB의 재무상태표만 주기적으로 확인했어도 어렵지 않게 위험을 파악할 수 있었을 텐데 그 누구도 SVB의 재무제표를 열어보지 않았거나 오랫동안 지속된 유동성 파티를 즐기고 있었던 것 같다. 또 다른 벤처캐피털리스트인 케이트 미첼은 심지어 SVB 이사회의 위험위원회(Risk Committee) 의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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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신용평가사들의 고장 난 사전 위험 발견 기능

신용평가사 무디스와 S&P는 SVB의 파산 직전까지 SVB의 신용등급을 투자 적격 등급으로 분류하다가 문제가 드러난 이후 정크 등급으로 강등했다. SVB가 마지막 순간 증자를 통해 자금을 확충하려 했을 때 강등된 신용등급은 상황만 악화시킬 뿐이었다. 신용평가사들이 부실 모기지채권을 우량 등급으로 분류해 비난의 대상이 됐던 2008년 금융위기 때와 판박이다. 신용평가사들은 패시브 펀드와 같이 ‘자신이 책임을 안고 현실 문제에 참여하라’는 의미의 ‘스킨인더게임(skin in the game)’을 하지 않는 특징을 가지고 있어서 위험의 사전적 발견 및 경고에 항상 실패하고 사후적으로 대처하는 경향이 있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4. 미국 정부의 은행 규제 정책 변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의 대형 은행들에 대해 강한 규제가 이뤄졌다. 그중 매우 중요한 한 가지 규제는 대형 은행들의 경우 보유한 AFS증권의 미실현손실을 규제자본(regulatory capital) 계산에 포함하도록 한 것이다. 회계적으로 AFS증권의 미실현손익은 은행의 순이익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 대신 재무상태표에 기타포괄손익누계액(AOCI)으로 자기자본에 반영된다. 은행이 보유한 AFS증권의 상당 부분이 금리에 민감한 MBS, 국채 등이기 때문에 AOCI는 은행 자기자본의 변동성을 크게 심화시킬 수 있다. 이에 따라 은행의 회계상 자기자본이 아닌 티어1 보통주자본(CET 1 capital)과 같은 규제자본을 계산할 때는 자기자본에 AOCI를 반영하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에서 바젤Ⅲ은행 규제가 시행됨에 따라 자산 규모가 2500억 달러 이상이거나 100억 달러 이상의 부내(on-balance sheet) 해외 익스포저를 가진 대형 은행들은 규제자본에도 AOCI를 반영해야 하게 됐다. 이는 금리 인상에 따라 AFS증권의 미실현손실이 발생하면 규제자본이 감소한다는 의미로 대형 은행들은 위험관리를 더 강화해야 함을 의미했다.

그런데 2019년 트럼프 정부는 은행 규제를 완화하면서 규제 적용 기준을 자산 규모 7000억 달러, 부내 해외 익스포저 750억 달러로 크게 완화했다. 2019년의 미국 은행 규제 완화는 SVB뿐만 아니라 4개의 초대형 은행을 제외한 나머지 대형 은행들의 규제 수준을 낮췄고, 이는 은행 산업의 위험관리 기조를 전반적으로 약화시켰다. SVB의 파산은 AFS보다는 HTM증권의 가치 감소에서 기인한 것이지만 AFS에 대한 규제 변화가 은행의 전반적인 규제 기조 완화에 기여한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규제 정책뿐만 아니라 규제 기관의 적극적인 감시와 경고 기능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것 같다. 주 및 연방 은행감독 기구들에 SVB의 위험관리 모델 가정 변경에 대한 보고가 됐지만 그 누구도 문제를 발견하거나 후속 조치를 하지 않았다.

사전에 위험을 감지한 소수의 투자자

뉴저지 소재 투자회사 레이징캐피털벤처스(Raging Capital Ventures)의 윌리엄 마틴 대표는 SVB의 실적 발표 하루 전인 2023년 1월 19일, X(구 트위터)의 기업 계정에 SVB에 대한 다음과 같은 분석 글을 올렸다.

“SVB의 예금이 2020년과 2021년에 걸쳐 급증했는데 SVB는 이 돈으로 HTM증권을 엄청나게 샀다. SVB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이 HTM증권 포트폴리오에 있다. SVB는 채권시장의 정점에서 10년 이상 만기를 가진 평균 금리가 고작 1.63%인 모기지증권 880억 달러를 매입하는 등 채권 투자를 700% 늘렸다. 이 HTM증권은 2022년 3분기 말 기준 159억 달러의 시장가치 손실을 보고 있는데 이는 115억 달러의 유형보통주자본 규모를 뛰어넘는 금액이다. 따라서 이 은행이 만일 오늘 청산한다면 파산 상태다. 여기에 더해 연준의 금리 인상으로 SVB의 예금이 급속도로 빠져나가고 있으며 이자비용이 급증하고 있다. SVB의 예금이 이렇게 급속도로 빠져나가면 SVB는 증자를 하거나 엄청난 손실을 감수하고 HTM 채권을 팔아야 한다. 미실현 재무상태표 손실로 인해 고객들도 거래상대방위험을 느끼고 불편해 할 것이다. 경영진이 채권시장의 정점에서 채권을 샀다는 사실은 숨기기 힘들다. 내일 발표될 실적과 올 한 해는 굉장히 흥미로울 것이다. (공시: 나는 SIVB에 대한 공매도 포지션을 취하고 있다.)”

지금 돌이켜보면 너무나 정확한 분석이다. SVB가 파산한 후 마틴은 인터뷰를 통해 성실한 투자자라면 매우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며 경영진 및 거래상대방위험을 전혀 신경 쓰지 않은 VC 등 이해관계자들의 나태함을 지적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은행 분야를 맡아온 투자은행 오펜하이머의 분석가 크리스 코토우스키는 2022년 9월 SIVB의 투자 의견을 매수에서 중립으로 하향 조정했다. 같은 해 5월에 투자 의견을 상향했던 그는 불과 4개월 만에 자산 규모 미국 16위 은행을 자회사로 두고 있는 SIVB에 대한 투자 의견을 바꿨다. 그러나 그는 이 은행을 분석하던 20여 명의 애널리스트 중에 그해 12월에 SIVB에 대한 투자 의견을 매도로 낮춘 모건스탠리의 애널리스트 마난 고살리아와 더불어 투자 의견을 하향 조정한 몇 안 되는 분석가 중 한 명이었다. 2023년 3월 8일까지도 대부분의 월스트리트 전문가에게 SVB의 앞날은 한없이 밝아 보였다.

이번 SVB의 파산을 연준의 급격한 금리 인상, 정부의 규제 정책 실패 등에서 찾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을 근본적인 원인으로 보기는 힘들다. 금리 정책과 정부 규제는 언제든지, 어떤 방향으로든 변화할 수 있기 때문에 기업들, 특히 금리에 민감한 고레버리지 사업인 은행은 이러한 변화에 항상 잘 대비하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주주와 예금자를 안전하게 보호하는 경영진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적절한 견제와 감시를 받지 않는 경영진은 SVB 사례와 같이 위험을 인지하지 못하고 위험관리에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패시브 투자자 또는 신용평가사, 증권사 애널리스트와 같이 기업의 정확한 상태 파악과 본인의 이익이 연동되지 않은 시장참여자들은 그 기능과 역할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앞서 어느 펀드매니저가 SVB 사태를 예견했듯 성실한 일부 투자자(특히 집중 투자하는 헤지펀드들)는 경영진이 보지 못하는 기업의 현실을 더 잘 파악할 수 있다. SVB 사례에서 경영진이 사전에 이들과 같이 현명한 투자자들(설사 그것이 공매도 투자자들이라 하더라도)의 분석과 의견을 경청했더라면 선제적 대응을 통해 파산까지 이르지 않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은행에 대한 규제는 당연히 필요하다. 하지만 끝없이 진화하는 규제 속에서도 SVB 사태와 같은 일이 항상 발생한다. 적절한 규제와 함께 기업의 현실과 가격 발견 기능이 잘 작동하도록 시장 원리를 지키는 일도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경영진도 회사에 대해 진심으로 조언하는 실력 있는 투자자들과 많이 대화하고 수시로 의견을 경청해야 할 것이다.
  • 김형균 | 차파트너스자산운용 본부장

    필자는 고려대 경영대학에서 학사를, 컬럼비아경영대학원에서 MBA 학위를 취득했으며, 한국거래소와 미국 은행 주식 및 채권 투자와 행동주의 투자에 특화된 뉴욕 소재 헤지펀드 홀드코에셋매니지먼트(HoldCo Asset Management), 디앤에이치투자자문 등을 거쳐 현재 차파트너스자산운용에서 행동주의 투자를 총괄하고 있다.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의 이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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