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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R5. Interview: 박유경 APG 책임투자팀 이사

“ESG, 높은 점수만 받으려 하면 역효과
핵심 이슈 5가지에 집중해 ESG 전략 실천하라”

이방실 | 308호 (2020년 11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한국 기업의 ESG 수준

최고경영진과 이사회에서 ESG의 중요성을 인지하고는 있으나 일관된 전략하에 진정성 있게 추진하지 못하는 상황. ESG 요인을 사업에 내재화해 고유의 해법과 모델에 따른 실행 필요. 중요성(materiality) 분석에 따른 핵심 이슈 5가지에 우선 집중해 ESG 전략 실천.

진정성 있는 ESG 경영의 요건

비주력 사업부서 아닌 핵심 사업부서에서 환경•사회 리스크를 줄이려는 노력과 장기 전략에 따른 일관성 있는 의사결정 필요. 그린본드를 발행하면서 석탄 발전 프로젝트에 투자하는 등의 이중성 금물. 결국 모든 건 최고경영진과 이사회의 책임.



네덜란드 최대 연금 운용사인 APG(All Pensions Group)는 책임투자(responsible investing)와 ESG(환경•사회•지배구조) 분야에 전문성이 높은 자산운용사로 유명하다. 네덜란드 공무원연금(ABP)을 비롯해 건설•에너지 분야의 연기금 자산을 위탁받아 운용하는 회사로 운용자산(AUM) 규모는 약 5380억 유로(2020년 6월 기준)에 달한다.

APG는 올해 초 한국전력이 인도네시아와 베트남 등에서 계획하고 있는 석탄 발전 사업을 문제 삼아 약 600만 유로에 달하는 한전 지분을 매각했다. 당시 APG는 파이낸셜타임스를 통해 “세계 금융 시장이 석탄 발전 부문에서 등을 돌리고 있는 상황에서 한전 최고경영자와 이사진은 그들의 결정에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1 고 지적했다. 주식 매각이라는 행동으로 전 세계적인 ‘저(低)탄소’ ‘탈(脫)석탄’ 움직임에 역행하는 한전을 압박함과 동시에 한전 이사회에 대해 공개적으로 책임을 물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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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G에서 11년째 아시아•태평양 지역 책임투자팀을 총괄하고 있는 박유경 이사를 DBR에서 화상으로 인터뷰했다. 박 이사는 지난 2009년 APG에 합류한 이후 11년째 아태 지역 내 책임투자를 주도해 온 인물이다. 그는 국내 대기업들에 매서운 질문과 쓴소리를 서슴지 않는 인사로 정평이 나 있다. 대표적으로 2015년 3월 현대차 정기주총 당시 특별 발언을 통해 이사회에 거버넌스 위원회를 설치하라고 요청하면서 현대차 이사회가 국내 최초로 주주권익보호 담당위원(투명경영위원회 소속)을 선임케 하는 데 주효한 역할을 했다. 같은 해 9월엔 해외 연기금 자산운용사에 소속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건과 관련해 금융위원회 국정감사 참고인으로 출석했을 만큼 인지도와 영향력이 큰 인물이다.

2009년 APG에 합류하기 전 약 10년간 베어링증권, 살로먼스미스바니(現 씨티그룹글로벌마켓증권) 등 증권사에서 애널리스트로 일한 박 이사는 “과거 재무적 수치만 가지고 회사를 분석했을 때 기업의 실체를 10% 정도 파악했다면 지금은 다양한 이해관계자와 소통하고 비재무적 측면까지 고려하면서 겨우 50% 정도 이해하게 된 것 같다”며 “책임투자자로서 사람과 환경, 사회에 이로운 변화를 만들어 내고 싶다”고 말했다. 인터뷰 주요 내용을 소개한다.

APG에서 11년째 책임투자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지속가능경영의 관점에서 그간 한국 기업에 어떤 변화와 진전이 있었다고 생각하나.

불과 3∼4년 전만 해도 ‘ESG 1.0’ 시대에 머물러 있었지만 이제 ‘ESG 2.0’ 단계에는 와 있는 것 같다. ESG 1.0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관련 부서에서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발간하고 있긴 하지만 정작 이사회 단에서 지속가능성에 대한 이해도가 매우 낮은 수준을 말한다. 보고서를 발간해 봤자 외부 컨설팅 기관에 의뢰해 작성하거나 퇴임을 앞둔 연로한 이사나 고참 부장이 말단 사원 한 명 데리고 만드는 수준이었다고 할까. 당연히 사내에서도 보고서를 꼼꼼히 읽어본 사람이 많지 않고 최고경영진이나 사외이사들도 전혀 관심이 없어 다 따로따로 노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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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G 2.0은 최고경영진과 이사회가 ESG가 중요하다는 사실 자체는 인지하고 공부하려는 의지가 있는 단계다. 과거 한직이라 여겨졌던 CSR 팀원들이 회사에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임원진에게 ESG의 중요성에 대해 설명하는 상황이라고 보면 된다. ESG를 신경 쓰지 않으면 비즈니스에 타격을 받을 수 있다는 걸 자각하고, 어떻게 해야 환경•사회적 책임을 다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는 시기다.

ESG 3.0은 최고경영진과 이사회 단에서 책임을 갖고 ESG를 챙기는 단계다. 이 단계의 특징은 최고경영자(CEO)와 이사회 의장이 ESG에 대해 굉장히 정통한 이들로 구성된다는 점이다. 2.0 단계와 비교했을 때 가장 큰 차이라고 할 수 있다. 3.0 단계에 도달하면 ESG 관련 공시를 투명하고 성실하게 이행하는 건 기본이고, ESG를 사업에 내재화해 본인들만의 해법과 모델을 찾아 차근차근 실행해 나가려 한다. 이건 ESG에 대한 진정성이 없이는 이루기 힘들다.

투자자로서 ESG와 관련한 기업의 진정성을 어떻게 판단하나.

캐시카우(cash cow) 역할을 하는 핵심 사업부서에서 환경•사회 리스크를 줄이고 새로운 기회를 창출하려는 노력이 있는지 여부를 살핀다. 안타깝게도 한국 기업들 중에는 비즈니스 포트폴리오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핵심 사업부에서 환경에 끼치는 해악을 줄이려는 노력은 하지 않은 채 비주력 사업부서에서 소규모로 진행하는 친환경 사업을 최대한 부풀리려고 하는 곳들이 종종 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행위다. 이런 행동이야말로 ‘그린워싱(green washing, 위장 환경주의)’의 대표적 예다.

장기 사업 전략 측면에서 일관성 있게 의사결정을 내리고 있는지 여부도 중요하다. 현재 국내 대부분 금융회사가 ESG 관련 상품을 확대하겠다며 한쪽에선 그린본드를 발행하면서, 다른 한쪽에선 석탄 발전 프로젝트에 투자하는 이중적 행태를 보이고 있다. 머리와 손발이 따로 노는 꼴이다. 한국전력의 최근 행보는 정말 도가 지나칠 정도다. 한전 이사회에서 인도네시아 자바 9•10호기 석탄 발전 사업에 이어 베트남 붕앙2 석탄 발전 사업 역시 예정대로 추진하겠다고 결정했다. 국내에선 탈석탄 정책 기조에 맞춰 석탄 발전 비중을 축소하고 있으면서 해외 개도국에선 되레 석탄 발전 프로젝트에 뛰어들어 기후변화에 역행하고 있다. 원래 갖고 있는 석탄 발전도 문을 닫아야 할 판에 개도국에 새로 석탄 발전소를 짓겠다는 건 도대체 말이 안 된다. 책임투자를 중시하는 APG로선 도저히 용납이 안 된다.

내가 APG에서 11년째 일하는 동안 석탄 관련 인프라 프로젝트 투자는 단 한 건도 승인된 적이 없다. 투자팀에서 애초에 이런 프로젝트를 들고 오지도 않지만, 혹시 가지고 와도 책임투자팀에서 ‘노(No)!’라고 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말로만 탄소 배출과 기후변화에 대해 떠들 게 아니라 투자 원칙을 실제 의사결정에 적용하는 데 있어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진정성을 스스로 증명해 내는 길이다.

물론 어려운 일이다. 원칙을 실제 비즈니스 의사결정으로 녹여내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건 결국 지배구조에 달려 있다. 궁극적으로 최고경영진과 이사회가 기후 리스크 같은 환경•사회 문제에 대해 깊이 이해하지 못하면 해결할 수 없다.

환경(E), 사회(S), 지배구조(G) 세 가지 요인 중 G가 가장 중요하다는 뜻인가.

APG 내부에서도 생각이 좀 다를 수 있다는 전제하에 얘기하자면, 그렇다. 나는 지배구조가 가장 기본이 되고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지배구조가 엉망인 회사에서 환경•사회 문제를 잘 처리할 수는 없다. 환경•사회 문제는 지배구조의 틀 안에서 풀 수밖에 없고, 그래야 한다. 기업은 건전한 지배구조를 통해 지속적으로 성장해 수익을 창출해야 하고, 지속가능한 성장과 수익 창출이라는 틀 안에서 환경과 사회에 기여해 나가야 한다.

물론 어떤 경우엔 환경이나 사회 문제 단일 사안이 회사의 존망을 위태롭게 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다른 예를 들 것도 없이 APG가 그랬다. 지난 2007년 APG2 투자 포트폴리오에 집속탄(cluster bomb) 및 지뢰 제조업체가 상당 부분 포함됐다는 사실이 네덜란드 TV의 한 시사 프로그램을 통해 이슈화됐다. 당시 최고투자책임자(CIO)는 “집속탄이 도덕적으로 혐오할 만한 대상이란 건 인정하지만 우리의 전략은 투자수익률을 높이는 것이므로 때론 수익률이 높은 무기 산업에 투자할 수도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해 논란을 가중시켰다.3

그때만 해도 집속탄 투자를 금지하는 회사 내부 가이드라인이 없었기에 당시 CIO로선 할 법한 이야기였지만 어쨌든 이 사건으로 엄청난 비난이 쏟아졌다. 이런 문제 있는 회사에 자신들의 연금을 맡길 수 없다며 분노한 네덜란드 국민들로 인해 사회적 허가(social license to operate)를 상실하고 회사가 거의 망할 위기에 처했었다. 결국 이 일을 계기로 APG는 대오각성했고, 그 결과 지금처럼 진정성 있게 책임투자를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책임투자 측면에서 다른 글로벌 연기금과 차별화되는 APG만의 특징은 무엇인가.

현지에 책임투자 전담 인력을 배치하고 로컬의 시각에서 로컬 기업들과 장기적, 지속적으로 대화하며 일관된 책임투자 원칙을 구현해 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내가 APG에 아시아 책임투자 담당자로 합류했던 시기가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이었다는 점만 봐도 이 회사가 얼마나 책임투자를 중시하는지를 알 수 있다. 당시엔 기존 직원들도 대량 해고를 할 만큼 상황이 안 좋았던 시기였다. 그런데 APG는 금융위기 때임에도 불구하고 글로벌 연기금 가운데 최초로 아시아 현지 책임투자 담당자를 신규 채용했다. 그때부터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글로벌 연기금 가운데 아시아 현지에 책임투자 담당자를 두고 있는 곳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반면 APG는 인원을 차츰 늘려 나를 포함해 현재 총 5명이 홍콩에서 책임투자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4

현지 시장에 담당자 몇 명 두는 게 뭐 그리 대수냐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기본적으로 책임투자를 제대로 구현하려면 지속적이고 상시적인 주주 관여 활동(engagement)이 필수다. 기업은 투자자가 1년에 한두 번 전화 걸고 이야기한다고 해서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성가시다고 느낄 만큼 최소 몇 년간은 집요하고 끈질기게 문제를 지적해야 변화가 시작된다. 해당 회사 IR팀이나 경영진과만 대화해서 될 일도 아니다. 공급망 내 협력사, 고객사, 시민단체, 필요하다면 정부 관계자나 국회의원들까지 다양한 이해관계자와 대화해야 한다. 이를 위해선 반드시 지역별로 같은 시간대에 있는 나라에 책임투자 담당자를 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엔 정해진 가이드라인에만 의존하게 돼 피상적인 수준에서만 책임투자를 구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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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이 ESG 문제는 지역별, 나라별 상황에 맞게 커뮤니케이션해야 한다. 가령, 유럽에선 동물 존엄성을 매우 중시하지만 아시아, 특히 중국 같은 곳에선 기본적인 인권 보호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런 기업들을 상대로 아무리 동물 복지에 신경 쓰라고 얘기해봤자 실현 가능성도 낮고 바뀌지도 않는다. 시간과 자원이 한정돼 있는 상황에선 ESG 사안의 경중을 따져 더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할 중대한 문제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라도 현지 시장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현지 인력을 책임투자 담당자로 배치하는 건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아무리 집요하고 끈질기게 주주 관여 활동을 한다 해도 지난 수십 년간 기업의 존재 이유를 수익 극대화로만 여겨왔던 회사들을 바꾸기란 쉽지 않을 것 같다.

분명히 의미 있고 보람 있는 일이지만 만만치 않은 일인 것도 맞다. 이제는 상황이 많이 좋아졌지만 처음 책임투자를 시작했을 때만 해도 상당히 힘들었다. 제대로 주주 관여 활동을 하려면 그냥 전화 통화나 콘퍼런스 콜만 해선 안 된다. 본사에 직접 찾아가 회사 경영진을 만나고 공장에도 직접 가서 실사를 하곤 하는데, 문전박대를 당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미팅이 주선되면 다행이고, 설령 면담이 성사된들 심정적으로는 이미 내쳐져 싸늘한 분위기에서 대화가 오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크게 괘념치는 않는다. 중요한 건 나를 통해 전해지는 APG의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상시적인 대화나 이사회에서의 의결권 행사 같은 통상적인 방식으로 문제 해결이 어려운 경우다. 인권이나 산업재해처럼 민감한 이슈가 특히 그렇다. 이때는 좀 더 강력한 방법이 필요하다. 내 경우엔, 문제가 되는 회사의 최고경영진이 변화 의지를 보이지 않으면 그 회사의 핵심 고객을 찾아가 우회적으로 압박한다. 해당 회사로 하여금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주요 거래처를 놓쳐 당장 비즈니스에 큰 타격을 입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기 위해서다.

국내 모 중공업 회사 A에 대해 실제로 이렇게 한 적이 있다. A사는 부실한 안전 관리로 근로자 사망 사고가 해마다 끊이질 않았다. 10년간 무려 130명이 넘는 근로자가 목숨을 잃었었다. 투자자로서 나는 이 문제를 계속 지적했고 개선을 요구했지만 A사는 말만 앞세울 뿐 실질적인 행동이 따르질 못했다. 참다못해 경영진과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려고 지방 조선소 현장까지 찾아갔는데 A사 고위 임원에게 들은 말은 ‘원래 건설업에선 사람이 죽습니다’였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이었다. 네덜란드에선 하다못해 닭을 사육하는 데도 동물 복지를 운운하는데 우리나라는 닭도 아닌 사람, 그것도 인명에 대해 이렇게밖에 말을 못하나 싶어서 화가 치밀었다.

솔직한 마음 같아선 당장에라도 유력 언론사에 제보해 대서특필하게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고객 자산을 위탁받아 운용하는 입장에서 그럴 순 없는 일이었다. 특히 A사 주식을 보유하고 있을 때 이런 행동은 투자 가치에 반하는 것이라 더더욱 해서도 안 된다. 그래서 일단 A사 보유 주식이 단 한 주도 남아 있지 않을 때까지 기다렸다. 마침내 그 순간이 왔을 때, 지체 없이 수화기를 들었다. 그리고 머스크(Maersk)를 비롯한 글로벌 해운회사들에 일제히 연락해 A사에서 지난 10년간 130명 이상의 근로자 사망 사고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A사에 선박 건조 주문을 했다가 문제가 생기면 당신네 회사 평판까지 안 좋아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솔직히 이런 방법이 옳은지는 모르겠다. APG 내에서 책임투자 업무를 같이하는 동료들이 모두 나처럼 행동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사람의 생명과 직결돼 있는 근로자 안전 문제는 정말 꼭 해결하고 싶다. 기후변화 문제도 그래서 관심이 크다. 이건 특정 환경에 노출된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이슈가 아니라 전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당장 우리가 죽을 수도 있다. 이런 중요한 문제를 기업들이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미리 대처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게 책임투자자로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투자자들의 주주 관여 활동을 지나친 경영 참여라고 보는 시각도 일부 존재한다. 특히 해외 투자자들이 많이 요구하는 것 중 하나가 배당인데, 지나친 배당 요구로 기업의 연구개발(R&D) 투자 여력이 모자란다는 지적도 있다.

당치 않은 주장이다. 주주 관여 활동은 경영 참여가 아니다. 경영진이 어떤 의사결정을 내렸을 때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하라는 것이다. 그건 주주에 대한 당연한 책무(accountability)다. 거기에 경영 참여라는 프레임을 씌우는 건 말도 안 된다. 이렇게 몰아붙이는 이유는 소위 ‘경영권’에 위협이 된다는 논리인데, 이 또한 어불성설이다. 경영권이란 말은 개념도 존재하지 않는, 속된 말로 ‘족보’가 없는 용어다. 경영인은 회사에서 돈을 받고 그 대가로 회사를 경영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은 자일뿐이다. 경영에는 권리가 아닌 의무만 있다.

주주들의 배당 요구 때문에 R&D 여력이 없다는 주장 역시 억지다. 애초에 투자자들이 왜 배당을 요구하는지에 대해 제대로 이해를 못하고 이런 논리를 펼친다. 투자자들이 배당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회사 전체의 자본관리정책(capital management policy)이 무엇인지를 알려달라는 소리다. 지속적인 가치 창출을 위해 자본을 어떻게 배분할 것인지에 대해 주주에게 책임을 다해 설명하라는 것이지 번 돈을 전부 다 배당으로 내놓으라는 게 아니다. 참고로 자기자본수익률(ROE)이 높은 기업엔 투자자들이 먼저 나서서 배당하지 말고 투자하라고 한다.

투자자 입장에서 제일 무서운 건 ‘유휴 현금(idle cash)’이다. 가치 창출을 위해 어디에도 쓰이지 않고 그냥 남아도는 현금이 가장 위험하다. 이런 돈은 결국 정상적으로 쓰이지 않고 쓸데없는 부동산 매입이나 대주주의 이익을 위해 남용되는 등 비정상적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이는 결국 기업 가치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게 되고,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배당을 요구하는 것이다. 미래 성장 동력이 될 프로젝트를 발굴해 제대로 된 R&D 투자는 하지도 않으면서 무조건 현금만 쌓아놓으려고 하는 게 문제지, 투자자들의 배당 요구 때문에 R&D 여력이 부족하다고 주장하는 건 앞뒤가 바뀐 소리다.

APG에서 투자 의사결정은 어떤 프로세스로 실행되나.

주식, 채권, 부동산, PE(Private Equity) 등 모든 투자 자산에 책임투자 원칙을 적용하지만 구현 방식은 조금씩 다르다. 우선, 주식과 채권의 경우 책임투자팀에서 액티브 투자 포트폴리오 매니저들이 배제해야 할 기업 명단을 정해준다. 참고로 2019년 말 기준 APG의 투자 배제 기업 리스트에 올라와 있는 회사는 총 159개5 다. 2017년까지만 해도 투자 배제 기업 수는 집속탄이나 대인 지뢰, 핵무기 제조업체 등 22개에 그쳤지만 2018년 담배 산업에 대한 투자를 전면 중단하기로 결정하면서 배제 기업 수가 크게 늘었다. 사실 재무적 측면의 기업 가치로만 보면 담배 회사는 엄청나게 좋은 포트폴리오다. 지난 100년간의 성과를 좀 과장되게 말하자면 그래프가 수직 상승해 하늘을 찌른다. 이런 산업군을 투자 대상 종목군에서 완전히 배제했다는 건 돈이 두둑하게 들어 있는 지갑을 그냥 내다 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상당히 어려운 결정이었고 회사 차원에서도 오랜 기간 고민했지만 사람들의 건강을 해치는 산업에 돈을 대주는 건 옳지 않다고 보고 과감하게 배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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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책임투자팀이 제시한 투자 배제 원칙에 따라 투자 대상 자산군이 정해진 후엔 투자 대상 회사들을 크게 1) 수익성과 리스크는 물론 지속가능성 측면에서 모두 우수한 기업들(leaders)과 2) 수익성 및 리스크 측면은 양호하나 지속가능성과 지배구조 측면에서 뒤처져 있는 기업들(laggards)로 구분한다. 당연히 전자엔 적극적으로 투자를 진행하고, 후자의 경우엔 주주 관여 활동을 통해 ESG 측면에서 개선될 여지가 있는 기업들(potential improvers)만 선별해 투자한다. 특히 ESG 개선 필요가 있는 요주의 기업들에 대해선 포트폴리오 매니저와 책임투자팀이 긴밀히 협력해 적극적으로 주주 관여 활동을 하며 관련 리스크를 개선해 나가기 위해 노력한다. 대개 2∼3년 안에는 가시적인 변화가 나타나기를 기대하며 시간이 흐른 뒤에도 별다른 진전이 없고 개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지분을 매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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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이나 인프라 투자 같은 대체투자의 경우엔 투자 포트폴리오 매니저가 좋은 프로젝트를 발굴해 실사(due diligence)를 시작할 때 책임투자 프로세스가 가동한다. 즉, 포트폴리오 매니저가 투자 실사를 진행할 때, 책임투자팀에선 ESG 실사를 수행한다. 양측에서 실사가 모두 끝나면 투자팀은 투자제안서를, 책임투자팀은 ESG 분석 보고서를 각각 투자위원회에 올린다. 투자위원회의 공개 토론을 거쳐 경영진으로부터 최종 승인을 받은 프로젝트에 대해선 투자금을 회수할 때까지 책임투자팀과 투자팀이 함께 주주 관여 활동을 수행한다.

이처럼 투자 자산군에 따라 책임투자 원칙이 적용되는 프로세스는 조금씩 다르지만 투자 포트폴리오 매니저 역시 책임투자팀 소속 직원들과 함께 책임투자를 실제 구현하는 주체라는 점에선 모두 동일하다.

현시점에서 국내 주요 대기업의 ESG 수준에 대해 평가해 달라.

삼성전자는 주지하다시피 지배구조(G) 측면에서 아직 숙제가 남아 있다. 하지만 환경(E)과 사회(S) 측면에선 상당한 수준에 올라와 있다. 정보 공개도 매우 상세하고 성실히 수행하고 있다. 무엇보다 어떤 이슈가 터졌을 때 문제를 해결하는 속도, 주주나 시민단체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에게 대응하는 속도가 매우 빠르다.

현대차그룹은 천문학적인 입찰 금액으로 한전 본사 부지를 인수해 논란을 빚었던 6년 전만 해도 지배구조 문제가 정말 컸던 곳이다. 당시 이사회는 정확한 입찰 가격도 모른 채 만장일치로 한전 부지 입찰 안건을 승인해 주주들의 공분을 샀다. 하지만 이후 다행스럽게도 많은 개선이 이뤄져서 현시점에선 국내 그룹 중 가장 업그레이드된 이사회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이사회 면면을 보면 글로벌 비즈니스 감각을 갖춘 훌륭한 전문가들이 사외이사로 포진해 있다.

LG는 20여 년 전 국내 대기업 집단 최초로 지주사 전환을 추진하며 지배구조 개선에 있어 선도적인 모습을 보였다. 문제는 현재 지배구조 수준이 20여 년 전 그때 그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다른 그룹사들은 총수 구속이나 행동주의 헤지펀드의 공격 등 여러 가지 사건사고와 외부 압력으로 인해 그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지배구조를 업그레이드해왔지만 아이러니하게도 LG는 그런 불미스런 일을 한 번도 겪지 않아서인지 진전이 없다. 국내 주요 그룹사 중 회사 최고경영진과의 직접 대화가 불가능한 곳은 LG뿐이다. 최고경영진과 투자자들 간 직접 대화야말로 글로벌 비즈니스 동향과 핵심 이슈에 대해 가장 유익한 피드백을 받을 수 있는 창구라는 점을 깨달았으면 한다.

SK그룹의 경우 수페스추구협의회라는 조직을 통해 그룹 지배구조에 대한 나름의 해법을 찾은 것으로 평가된다. 최태원 회장이 앞장서서 사회적 가치를 진정성 있게 강조하고 있는 점 역시 칭찬할 만하다. 다만, SK그룹 내부 구성원들의 인식 수준은 솔직히 여기에 미치지 못한다. 사회적 가치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일부 계열사에선 S 하나만 잘하면 ESG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도 좋아질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다. 특히 SK이노베이션은 온실가스 배출 상위 100개 기업에 대한 탄소 배출 감축을 압박하는 글로벌 투자사들의 이니셔티브인 ‘기후행동 100+(Climate Action 100+)’ 리스트에도 올라가 있다. 사회적 가치 창출도 중요하지만 주력 비즈니스에서 끼치는 환경적 해악과 그로 인한 리스크를 어떻게 관리해 나갈 것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ESG 요인은 워낙 다양할 뿐 아니라 회사마다 중요한 이슈도 각기 다르다. 따라서 중요성(materiality) 분석을 통해 각 회사에 가장 중요한 핵심 이슈 다섯 가지에 우선 집중해 ESG 전략을 실천했으면 한다. 남들에게 중요하다고 나에게도 중요한 건 아니다. 남들이 짜놓은 프레임워크에 함몰돼 이것저것 모든 걸 다 하려다 보면 자칫 왜 ESG를 관리하고 지속가능경영 전략을 추구하는지에 대한 이유와 목적은 사라진 채 단순히 높은 ESG 점수를 얻는 데만 목을 매는 결과를 낳게 된다. 앞서 언급했던 동물 복지 문제가 대표적 예다. 물론 중요한 문제고, 특히 유럽에선 민감한 이슈지만 아시아에선 인권 문제 해결이 더 시급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남들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들을 무조건 따르려 하기보다 정말 자기 회사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제를 우선순위화해 역량을 집중했으면 한다.

기업 실무자들 입장에선 그래도 기왕이면 높은 ESG 점수를 받는 게 좋은 것 아니냐고 생각하고 이것저것 다 챙겨야 한다는 부담감을 가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솔직히 나는 MSCI나 서스테이널리틱스(Sustainalytics) 같은 외부 ESG 평가기관에서 내놓는 리포트는 참고만 할 뿐 내가 직접 각 기업의 ESG 리스크를 분석한다. 아마 APG 외에 다른 글로벌 연기금들도 상황은 비슷할 것이라 생각한다. 절대 외부 평가기관에서 내놓은 ESG 총점만 놓고 기계적으로 의사결정을 내리는 곳은 없을 것이다. 외부 평가기관이 미리 정해놓은 틀에 따라 산출된 점수가 얼마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회사의 어느 부분에 리스크가 존재하는지를 찾아내고, 이를 어떻게 관리하고 대처해 나갈 것인지에 대해 파악하는 게 훨씬 중요하다.

더욱이 ESG 요인, 특히 안전(safety) 관련 문제는 어제 좋다고 해서 오늘도 괜찮은 게 아니다. 오늘 작업장이 안전하다고 내일도 안전하다는 보장은 없지 않은가. 이건 달리 말해 대개 1년 이상의 시차를 두고 업데이트되는 외부 기관의 ESG 평가 결과에만 의존하는 투자자는 거의 없다는 뜻이다. 투자자들이 자체적이고 상시적으로 주주 관여 활동을 수행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게 모니터링을 하다 보면 외부 기관이 내놓는 분석 보고서를 굳이 보지 않아도 회사의 문제가 무엇인지 잘 알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외부 ESG 평가 기관의 리포트는 투자자들이 수없이 참고하는 많은 자료 중 하나일 뿐이라는 점을 기억하기 바란다. 부디 한국 기업들이 ESG 평가에서 높은 점수를 받는 데만 너무 천착하지 말고, 나름의 철학과 전략을 가지고 우선순위를 정해 ESG 전략을 세워 실행해 나가길 바란다.
  • 이방실 이방실 | - (현)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기자 (MBA/공학박사)
    - 전 올리버와이만 컨설턴트 (어소시에이트)
    - 전 한국경제신문 기자
    smi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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