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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BR Case Study: 농산물 유통 스타트업 ‘록야’의 성장 비결

감자 계약재배로 농가-기업 불만 동시 해소
AI-데이터 활용, 가격 예측 정확도 높여

김윤진 | 417호 (2025년 5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가장 오래되고 낙후된 산업인 농업을 혁신한다는 일념으로 지난 14년 동안 단 한 번의 역성장도 없이 국산 농산물 공급망과 가격 질서를 재편해 온 록야의 성장 비결은 무엇일까.

1. 낮은 생산성과 불안정한 가계 소득에 시달리는 농가들의 애로사항을 해결하고 현장을 지키면서 한국의 농업을 가장 깊이 이해하는 회사가 됐다.

2. 기업들의 수급이 차질을 빚는 위기의 순간 해결사를 자처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고객과의 약속을 지키며 B2B(기업 간 거래) 비즈니스에 강한 회사가 됐다.

3. 계약 재배 시스템의 성패가 농산물 가격의 정확한 예측에 달려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일찌감치 데이터와 AI를 농업 혁신의 도구로 활용했다.

4. 안전지대에서 벗어나 끊임없이 도전하되 실패로부터 배우면서 강점에 집중하고 최적의 파트너를 찾아 약점을 보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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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감소, 고령화, 기후변화. 인류 미래의 뇌관으로 떠오른 이 사회 문제들로부터 직격탄을 받는 산업은 어디일까. 여러 후보가 있겠지만 위기의 최전선에 벼랑 끝 ‘농업’이 있다는 데는 누구도 이견을 제기하기 어려울 것이다. 인구가 빠져나간 농촌, 고령화되고 영세한 농가, 갈수록 변덕스러워지는 기후는 농산물의 생육과 작황을 뒤흔들며 농업의 지속가능성을 위협하고 있다. 농민들은 “이제 정말 못 해 먹겠다”고 아우성이고, 소비자들은 치솟는 식탁 물가에 연일 한숨을 내쉰다.

이렇게 늙고 쇠락해 가는 한국 농업의 미래를 고민하면서 20대 청년 시절부터 40대가 된 지금까지 14년간 농업의 혁신에 매달려온 이가 있다. 바로 애그테크(AgTech, 농업과 IT의 융합) 스타트업 ‘록야’의 권민수 대표(43)다. 그는 경직된 유통 시스템을 깨고 소농 중심의 비효율적 구조를 넘어 하나의 농산물로 세계를 제패한 뉴질랜드의 제스프리(Zespri), 미국의 썬키스트(Sunkist) 같은 기업이 되겠다는 청운을 품고 창업에 나섰다. 키위와 오렌지를 각자의 이름으로 세계화한 이 두 글로벌 브랜드처럼 품종 개량, 과학적 재배와 유통, 철저한 품질과 브랜드 관리를 통해 성공 신화를 써내려 가겠다는 당찬 포부였다.

2011년 ‘한국의 제스프리’를 꿈꾸며 출사표를 던진 권 대표가 고른 품목은 다름 아닌 감자였다. 강원대에서 원예학을 전공한 그는 감자 관련 회사에서 실무 경험을 쌓은 뒤 2011년 본격적으로 창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감자라는 단일 품목에 승부수를 던진 배경에는 감자가 강원도를 대표하는 작물이라는 점 외에도 시장 규모가 크고 감자튀김, 감자칩 등 전 세계 어디에서나 사랑받는 중요한 식량작물이라는 전략적 판단이 작용했다. 게다가 유행을 타지 않고 수요도 꾸준했다. 권 대표는 감자를 단순히 판매하는 데 그치지 않고 품종 개발부터 종자 생산, 수확, 선별, 저장, 가공, 유통까지 전 과정을 수직 계열화하겠다는 야심 찬 목표를 세웠다. 감자를 통해 농업을 다시 설계하고자 한 것이다.

그렇게 탄생한 ‘록야’는 감자를 중심축으로 삼아 농산물 유통의 구조적 병폐를 정면으로 돌파하며 지금의 자리에 섰다. 가장 오래된 산업인 농업을 혁신한다는 일념으로 14년 동안 농산물 공급망과 가격 질서를 재편해 온 것이다. 그는 낙후되고 해결할 숙제가 많은 산업일수록 역설적으로 부가가치를 창출할 여지가 클 것이라 내다봤고 그 생각은 적중했다. 농가는 안정적인 판로를 확보해 생계 걱정 없이 생산에만 전념하길 원했고, 기업은 안정적인 공급처를 확보해 일관된 품질의 작물을 조달하길 원했다. 하지만 농업과 기업 양면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이 둘을 매끄럽게 연결하는 연결고리는 없었다.

이 틈을 정확히 간파한 록야는 농가와 기업을 잇는 플랫폼으로서 농업의 유통을 혁신한다면 시장을 열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농가의 구조적인 저생산성과 낮은 소득을 해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사업의 사회적 가치도 크다고 봤다. 이렇게 록야는 농가와 기업의 불만을 모두 해소해 줄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하고 농심, 해태, 이마트, 아워홈, 삼성웰스토리, 신세계푸드 등 유수의 기업에 가공·마트·급식용 감자를 안정적으로 공급하면서 B2B 강자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물론 현실적인 장벽에 부딪히기도 했다. 이에 단일 품목으로 세계 시장을 장악하겠다는 청사진은 일부 수정이 불가피했다. 그 대신 록야는 감자만을 깊이 파고드는 ‘I 자형’ 사업을 넘어 채소, 곡물, 화훼까지 74여 종의 품목을 아우르는 ‘T자형’ 기업으로 진화하고 있다. 컬리, 쿠팡 등 주요 이커머스 플랫폼에서도 ‘KF365’ ‘I AM GROUND’ 등의 브랜드로 록야의 상품이 품목별 판매 상위권마다 포진해 있다. 이제는 국내 농산물 유통 시장에서 록야의 손길이 닿지 않는 품목을 찾기 힘들 정도다.

또한 록야는 AI 열풍이 시작되기 한참 전인 2017년부터 데이터 분석 자회사 ‘팜에어(FarmAir)’를 설립해 농업에 AI를 선제적으로 접목했다. AI와 빅데이터를 무기로 여러 산업에 뛰어든 스타트업들과 달리 농업이라는 뿌리 깊은 도메인에서 출발해 AI를 혁신의 ‘도구’로 삼았다는 점에서 결이 다르다. 권 대표는 “와인이 포도 품종뿐 아니라 테루아(terroir)라고 부르는 토양과 기후의 영향을 받듯이 농업에는 종자와 토양, 재배 환경 등 수많은 변수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면서 “농사의 기본을 이해하지 못한 채 뛰어들면 경험적으로 100전 100패”라고 강조했다.

록야 역시 온라인 커머스 진출, 한국형 스마트팜 구축 등에서 숱한 실패와 시행착오를 겪었다. 하지만 젊은이들이 외면하는 농업 분야에 과감히 도전장을 내밀고 농부들과 함께 14년째 현장을 지켜 온 회사의 발걸음은 1차 산업도 디지털 융합, 비즈니스 모델 혁신을 통해 달라질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준다. 이에 록야는 2024년, 창업 이래 최대 매출인 323억 원과 영업이익 9억 원을 각각 달성하며 흑자 전환에도 성공했다. DBR이 창업 첫해 매출 1억 원에서 출발해 단 한 번도 역성장 없이 농산물 유통 외길을 걸어온 록야의 혁신 여정을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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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가와 기업을 잇는 다리,
양쪽의 불편을 다 알아야 한다


2011년 창업 초기 록야는 무작정 농산물 생산에 뛰어들어 직거래하면 돈을 벌 것이라 생각했다. 겨울에는 감자 값이 비싸고 농산물 가격의 계절 변동이 뚜렷하니 겨울철에 감자를 팔면 수익이 나겠다는 순진한 생각이었다. 실제로 강원도 춘천 비닐하우스를 빌려 직접 감자를 재배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몇 평 남짓한 땅에 온종일 매달려도 농사는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겨우 수확한 감자를 땡볕에 방치했다가 시커멓게 타버려 결국 전량 폐기 처분하면서 피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농사의 고됨을 피부로 느낀 후에는 일반 중간도매상처럼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방식으로 시세차익을 노려보기도 했다. 정부에서 발표하는 연간 생산량, 생산 면적, 가격 등 통계를 엑셀로 분석해 시장의 흐름을 예측하려는 시도도 해봤다. 하지만 하필 2012년 유례없는 흉작이 닥치면서 ‘머리 꼭대기 가격에 사서 발목에서 파는’ 최악의 결과를 맞았다. 막심한 손해 앞에 농가에 도로 감자를 되사 달라고 사정도 해봤지만 들어줄 리 없었다.

이렇게 농사와 가격 예측의 높은 벽을 절감하고 나서야 록야는 비로소 제스프리, 썬키스트같이 농부들의 협동조합으로 출발한 기업들이 왜 경영과 생산을 분리했는지 뼛속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생산을 알아야 경영을 할 수 있는 것은 맞지만 둘은 전혀 다른 전문성이 요구되는 영역이었다. 함부로 생산에 손대기보다는 농부들을 파트너로 삼고 그들이 생산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록야는 유통과 경영의 전문성을 키우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렇다면 더 많은 농가와 손잡고 이들이 생산에 집중하게 하려면 유통 기업은 무엇을 해야 할까? 사업은 이 질문에서 다시 출발했다. 대용량 판매처를 뚫어야 하지만 인터넷의 바다에 무작정 뛰어들어 무한 경쟁할 자신도 없었다. 마케팅에 쓸 예산도 없어 B2C(기업·소비자 간 거래) 비즈니스는 쉽지 않겠다는 판단이었다. 이에 ‘가장 많은 감자를 필요로 하는 곳은 어디일까’라는 질문에 집중했더니 제과회사가 눈에 들어왔다. 감자의 대량 수요처, 감자 없이는 돌아가지 않는 산업이었다. 물론 누구나 납품하길 원하는 인기 제과 회사를 상대로 감자를 판다는 것은 신생 회사가 넘보기 힘든 목표였다. 하지만 충분한 물량을 확보할 수 있는 판로가 어디인지부터 정하자 전략이 조금 더 선명해졌다. 해답은 B2B였고, 다음 과제는 농가와 기업이 겪는 불편과 애로 사항을 명확히 진단하는 일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농사의 밸류체인(value chain)을 아우른다는 회사의 비전을 실현하려면 먼저 양극단에 놓인 이해 당사자들의 페인 포인트를 해결해줄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1) 농가의 페인 포인트:
불안정한 출하처와 가계 소득

목표가 생긴 권 대표는 감자를 재배하는 농가들을 파트너로 끌어들이기 위해 발로 뛰기 시작했다. 지역 농업기술센터나 기관 명단을 손에 쥔 채 직접 농가들을 찾아다녔다. 강원도 양구군 산골 해안면을 시작으로 현장에서 불편을 듣고 해법을 찾는 ‘보텀업(bottom-up)’ 방식, 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식 도전에 나선 것이었다. 다행히 강원도 고랭지에 감자 생산지가 집중돼 있어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지 않고도 충분히 시장조사를 할 수 있었다. 모든 농가가 반겨 주진 않았지만 다섯 집 중 한 집은 대화를 허락했다. 그들 역시 농업의 현실에 불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업 농부라고 해서 농사로 생계를 꾸리기가 쉬울 리 없었다. 이들은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낯선 청년들에게 조심스레 고민을 털어놓았다. 가장 큰 애로 사항은 수확이 끝난 후에야 기업과 계약을 맺는 구조였다. 재배 전 계약이 아니므로 수확한 물량을 원하는 만큼 구매해주는 곳이 없었다. 출하처 자체를 구하기도 어렵지만 전국 생산량이나 시세에 대한 정보가 부족해 구매자가 부르는 가격에 끌려갈 수밖에 없는 것도 문제였다. 이런 상황에서 록야는 “감자를 정해진 가격에 전량 매입해주겠다” “안정적인 판로를 개척해주겠다”며 열정적으로 농가 설득에 나섰다. 하지만 아무리 절실해도 농사도 지어본 적 없는 젊은이를 덜컥 믿기엔 현실은 냉혹했다.

이에 창업자는 말보다 행동으로 증명하기로 했다. 농부들과 똑같이 새벽 6시에 밭에 나가 감자 포대를 나르고, 트랙터로 밭을 갈고, 창고에서 감자를 선별했다. 2월 파종부터 봄감자, 가을감자까지 수확철이면 현장 밭일은 일상이 됐다. 권 대표는 “트랙터, 로더1 자격증도 있고 포크레인이나 지게차는 전업 농부들보다 잘 탈 정도로 농사의 기본기부터 익혔다”면서 “감자 박스를 트럭에 싣고 내리는 까대기도 같이하면서 진심을 전달했다”고 회상했다. 함께 밥을 먹고 술 한잔 기울이며 푸념을 듣는 사이 록야를 믿고 소량의 감자를 맡기는 농가가 하나둘 생겨났다. 이들 중 상당수는 지금까지도 10년 넘게 록야의 핵심 파트너로 함께하고 있으며 한 농가는 초창기 록야에 외상으로 감자를 제공해주기까지 하면서 회사가 첫발을 뗄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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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기업의 페인 포인트:
불안정한 공급처와 품질 관리

농가의 신뢰를 쌓아가는 동안 기업 측의 불만을 파악하기 위한 시장조사도 이어졌다. 농가와 주변 지인들을 통해 수소문해 보니 농심 등 대기업이라 해서 기존 감자 공급처에 100% 만족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기업들 역시 더 안정적인 가격에 균일하게 관리된 품질의 원재료를 확보하고자 하는 갈증이 있었다.

이 같은 수요를 확인한 록야는 한 가지 전략적 해법을 떠올렸다. 바로 일반 감자보다 ‘씨감자’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시중에 판매되는 감자를 다시 땅에 심는다고 감자가 자라는 게 아니다. 고품질 감자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량 씨감자’가 필요하다. 문제는 감자 묘를 따서 배양, 증식한 뒤 씨감자를 재배하는 데만 약 3~5년이 걸리며 그 과정도 결코 간단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당시 씨감자는 국가 주도로 재배됐지만 정부가 전체 수요를 충족하지 못하고 있었다. 더욱이 농우바이오 등 대형 종자 회사들은 토마토나 파프리카처럼 수익성이 더 높은 종자 개발에 몰두하느라 씨감자 시장에 뛰어들지 않았다. 그 결과 민간에서 씨감자는 수요보다 공급이 항상 모자랐다.

이런 공백을 놓치지 않은 록야는 창업자가 보유한 씨감자 관련 경험과 기술을 무기로 이 시장을 선점하기로 했다. 씨감자를 확보해 안정적인 원료 공급이라는 비교 우위를 앞세우면 불안정한 공급과 품질 관리로 고심하는 기업들을 설득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한 것이다. 지금은 문을 닫은 곳도 있지만 농심이나 오리온 등 대형 식품회사들이 자체 씨감자 연구소를 운영할 만큼 씨감자 확보는 실제 기업들에도 중요한 전략적 과제였다.

이에 록야는 씨감자 공급망을 강원도를 넘어 경상, 전라, 충청 등 전국 산지로 확대해 나갔다. 그리고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체득했다. 씨감자 재배에 필요한 노하우와 종자를 농가들과 적극 공유하면 계약이 훨씬 수월해진다는 것이었다. 먼저 주는 게 있어야 오는 게 있는 자연스런 이치였다. 록야는 다양한 농가와 접촉해 함께 땀 흘리며 데이터를 나누고 영농 기술을 전수했다. 이렇게 축적된 정보는 일종의 ‘집단 지성’으로 작동하기 시작했고 그 위에 쌓인 신뢰는 한층 두터워졌다.


계약 재배 시스템의 안착,
문제가 있는 곳에 기회가 있다

대기업의 공급 불안정이라는 페인 포인트를 해결하기 위해 씨감자 산지를 확보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지만 B2B 영업이 처음부터 일사천리로 풀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농가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록야가 깨달은 교훈은 ‘문제가 있는 곳에 기회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 철학은 기업을 상대로 한 영업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진짜 기회는 위기 속에서 찾아왔다. 감자 가격이 폭등하거나 기존 공급처가 물량을 제때 못 맞추는 시기야말로 록야 같은 신생 기업이 존재감을 드러낼 타이밍이었다. 어차피 시장이 늘 좋을 수 없다면 어려울 때 들어가 좋을 때 수익을 내자는 마음으로 록야는 감자 작황과 상관없이 기업 문을 두드렸다.

실제로 감자 수급이 불안정한 시기, 씨감자 기반의 생산 네트워크를 구축한 록야의 차별점은 강력한 무기가 됐다. 대기업들도 서서히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비록 처음부터 1차 벤더로 선정되진 않았지만 공급망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록야를 찾는 손길이 점점 늘어났다. 이렇게 후순위 벤더로 입성한 록야는 대기업의 수급이 차질을 빚을 때마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입지를 넓혀갔다.

그렇게 뚫은 첫 고객이 농심이었다. 장마로 연일 비가 쏟아져 일반 농가들이 수확을 멈추고 농심 공장의 가동이 끊길 위기에서 록야는 발 빠르게 움직였다. 직접 호미를 들고 파트너 농가를 찾아가 빗속에서 함께 감자를 캤다. 어렵게 마련한 물량은 30t 미만으로 많지 않았지만 가장 절실한 순간 해결사를 자처한 경험은 기업의 신뢰를 얻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이렇게 큰 회사인 농심의 문턱을 넘자 유사한 식품 회사들과의 거래도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또한 감자밭에 서리가 내려 수확에 차질이 생겼을 때는 농가들과 함께 약 1983㎡(약 6000평) 규모의 밭 전체에 덮개를 씌워 보온 조치를 하는 등 계약한 물량을 맞추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약속은 지킨다는 일관된 자세는 록야를 ‘B2B에 강한 회사’로 만드는 밑거름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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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농가들과 기업 양측의 신뢰를 얻은 록야는 이들의 불만을 동시에 해소할 수 있는 해법으로 ‘계약 재배’ 시스템을 도입했다. 미국 등 농업 선진국에서는 농산물 생산의 약 40%가 계약 재배로 이뤄질 만큼 널리 정착돼 있지만 당시 한국에서는 아직 생소한 방식이었다. 계약 재배는 수확 후 구매처를 물색하는 기존 방식과 달리 재배를 시작하기 전에 물량과 가격을 확정하고 생산하는 방식을 말한다. 록야는 불안정한 출하처로 고심하는 농가, 안정적인 원재료를 공급받길 원하는 기업 양쪽의 니즈를 충족할 사업 모델로 계약 재배 형태가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농산물 시장은 작황에 따라 물량과 가격이 크게 출렁이기 때문에 농가들이 어떤 해에는 왕창 돈을 벌었더라도 다음 해에는 손실을 떠안는 일이 반복돼 왔다. 농가의 생계를 위협하고 식탁 물가의 안정도 해치는 구조였다.

이전까지 시장에 계약 재배가 안착되지 못한 이유는 물량과 가격 예측이 어려워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방식을 보급하려면 누군가는 손해를 감수해야 했다. 이에 록야는 농가에 “원하는 감자를 정해진 가격에 다 사주겠다”고 하고, 기업에는 “원하는 감자를 정해진 가격에 다 공급하겠다”고 약속한 뒤 그 사이에서 발생하는 가격과 품질 변동에 따른 손실은 중간 유통상인 회사가 떠안는 방식을 택했다. 일단 전국 곳곳의 농가들을 최대한 많이 파트너로 포섭해야 궁극적으로 출렁이는 수확량과 가격을 안정화하고 작황 변동에 따른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마진이 적은 사업 구조상 계약이 늘어나야 박리다매라도 수익을 낼 수 있었다. 계약 재배의 규모를 키우기 위해 초창기에는 어쩔 수 없이 출혈을 감수한 측면도 있었다.

이 과정에서 억울한 일도 겪었다. 한번은 강원도 정선의 한 농가가 록야가 준 종자 때문에 농사를 망쳤다며 배상해달라고 다짜고짜 요구하기도 했다. 같은 종자를 받은 다른 농가들은 문제없이 재배했는데도 본인들은 실패하자 책임을 회사에 돌린 것이다. 이들이 손해를 입은 이유가 만의 하나의 확률로라도 진짜 종자 탓일까 싶어 결국 보상을 해주는 결정을 내렸다. 권 대표는 “농가들이 이렇게 윽박지르며 군기를 잡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실제로 보상해준 업체는 우리가 처음이었다고 한다”면서 “그 일이 미안했는지 그 농가도 지금은 완전히 우리 편이 돼 함께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 외에도 계약금만 받고 농사를 짓지 않거나 수확한 농산물을 다른 곳에 넘기는 이른바 ‘먹튀’ 사례도 있었다. 당시 엔젤 투자로 받은 시드머니 1억 원도 다 날리고 은행 대출까지 받으면서 수익 없이 버텨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용만큼은 저버리면 안 된다’는 철학을 바탕으로 계약 이행에는 전력을 다했다. 그 결과 돈은 못 벌었어도 록야가 약속한 대금을 지급하지 않거나 고객에 납품을 지연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는 게 회사의 설명이다.

또한 록야는 더 많은 농가를 설득하기 위해 가계 소득 보장을 최우선 가치로 두고 조건을 설계했다. 단기적인 시세차익보다 우수한 농가와의 장기 파트너십이 회사의 성장에 더 중요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농가의 전체 재배 면적 중 약 70%에만 계약을 맺고, 감자 값이 비쌀 때는 농가가 직접 판매해 추가 수익을 낼 수 있는 여지를 남겨뒀으며, 반대로 값이 폭락할 때는 약속된 물량 이상으로 감자를 매입해주기도 했다. 납품 기준에 맞지 않아 대기업에서 반품된 감자도 다시 농가에 떠넘기지 않고 록야가 자체적으로 처리했다. 이처럼 록야는 핵심 파트너로 삼은 농가의 총체적인 소득을 높이는 데 집중하면서 신뢰를 쌓아갔다. 권 대표는 “농가를 단순한 공급처가 아닌 생산 공장으로 생각했다”며 “공장 운영비가 비싸다고 공장 문을 닫지 않듯 농가가 요구하는 가격이 비싸다고 거래를 중단하거나 한 푼 더 받으려 협상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렇게 생산자 관점에서 접근했기 때문에 우수 농가 대부분이 의리를 지키며 지금까지도 더 높은 가격을 제안하는 경쟁사가 아닌 록야와 손을 잡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처럼 철저한 실행력과 진정성으로 록야는 5년 동안 발로 뛰며 감자의 생산자와 수요자를 연결하는 계약 재배 플랫폼으로 성장했다. 2015년에는 농림축산식품부가 주최한 창업경진대회 ‘나는 농부다’ 시즌1에서 꼬마감자 재배에 관한 특허로 우승하며 이름을 알리기도 했다. 먹기 편한 한입 크기 꼬마감자의 재배는 정체돼 있던 감자 수요를 넓히고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기 위한 록야의 전략적 시도였다.2 이렇듯 젊은 창업자가 전국 산지에서 우수한 감자 품종과 재배 기술을 확보하며 두각을 나타내자 시장에서도 점차 ‘대한민국 감자 1등’이라는 수식어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록야는 2016년 단일 품목인 감자 하나로 연 매출 63억 원을 내며 본격적인 성장 궤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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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직 계열화의 현실적 제약,
수평적 확장에서 돌파구를 찾다

하지만 ‘한국의 제스프리’ 같은 회사가 되기 위해서는 성장의 기폭제가 필요했다. 창업 초기 5년간은 인건비를 아끼려 직원 없이 창업자가 일당백처럼 뛰었고 사무실과 가구도 빌려 쓸 만큼 고정비 지출을 최소화했다. 하지만 사업을 본격적으로 확장하고 인력을 채용하려면 외부 투자 유치가 불가피했다. 이에 그동안 투자 없이 자생력을 키워온 록야도 2017년부터 외부 자금을 조달했다. 늦깎이로 처음 3억 원을 받은 데 이어 같은 해 말 10억 원을 유치하면서 이듬해에는 시리즈 A에 진입했다. 농업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투자자들에게 성장 잠재력을 보여주고 설득하는 IR(Investor Relations)이 순탄치는 않았지만 사회적 가치 및 임팩트 투자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1차 산업의 혁신을 지향하는 록야의 매력도 함께 부각됐다. 이렇게 실탄을 확보한 록야는 유통 채널 확장과 동시에 가공으로 영역을 넓혔고 2018년 10월 아산에 감자 가공 공장을 설립했다. 농가들은 생산에만 전념하도록 하되 그 외 과정은 록야가 다 처리하는 구조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종자에서 시작했지만 궁극적으로 수직 계열화를 완성하고 부가가치를 높이려면 최종 완제품 생산에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는 판단이었다.

그렇다고 직접 완제품 생산 공장을 짓는 일은 위험 부담이 컸다. B2B에서도 고객 관점의 접근을 중요하게 고려했듯 B2C를 겨냥한 완제품 생산에서도 고객 관점의 접근이 중요하다고 본 록야는 설비 투자보다는 제품 차별화에 집중했다. 권 대표는 “이미 제조 공장은 넘쳐나는데 고객이 원하는 상품이 없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했다”며 “공장을 새로 짓기보다는 가격이든 품질이든 기존 제품의 문제를 찾아 고객이 원하는 가공품을 개발하는 데 집중했다”고 말했다. 이런 전략에 따라 이미 대기업 상품들을 제조하고 있는 기존 공장들을 수소문한 끝에 생산 능력을 100% 가동하지 못하고 유휴 설비가 있는 곳들과 손잡았다. 즉 풀 캐파(capacity)를 채우지 못한 공장의 여유를 활용하되 기성 제품의 가격, 중량, 맛, 디자인, 이름 등에 변화를 주면서 가공으로의 확장을 실현해 갔다.

하지만 머지않아 록야는 한계를 느꼈다. 완제품 가공과 판매는 자본력과 마케팅 싸움임을 깨달은 것이다. 고구마말랭이, 유기농 옥수수 팝콘 등 세부 카테고리별 1등을 하거나 입소문 난 상품들도 만들었지만 국민 간식처럼 ‘대박 제품’은 나오지 않았다. 규모의 경제를 달성하고 물류비를 상회하는 매출을 내려면 유휴 설비를 사용하는 것을 넘어 공장까지 직접 짓고 광고와 홍보에도 투자를 더 해야 하는데 이 시장에서 일반 식품 및 과자 회사들과 힘을 겨뤄 이길 자신이 없었다. 실력 있는 젊은 농가들이 우리 농산물을 가지고 이색 아이디어 상품을 출시하려 할 때 돕는 정도이지 완제품 가공과 판매로 본격 돈을 벌긴 힘들겠다는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B2C 확장을 위해 온라인 커머스도 시도해 봤지만 고배를 마셨다. ‘좋은 상품을 최저가에 팔면 자동으로 1등이 될 것’이라는 순진한 믿음이 패착이었다. 네이버 스마트스토어, 11번가, G마켓 등 주요 플랫폼에 입점하고 관련 인력도 고용해 6개월간 판매에 공을 들였지만 물량이 좀처럼 팔리지 않았다. 관건은 좋은 품질이나 가격이 아니라 좋은 품질과 가격을 ‘얼마나 잘 알리는지’였다. 또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광고비만 쏟아부어야 하는 게 아니라 록야가 중요하게 여기는 신뢰와 정직이라는 가치를 잃을 위험도 있어 보였다. 이렇게 B2C의 높은 문턱을 맛본 록야는 자사의 강점과 약점을 명확히 했다. 회사의 경쟁력은 1) 농업(감자)을 누구보다 잘 알고 2) 구매에 대한 이해도가 높으며 3) B2B 영업에 강하다는 것이었다. 반면 구매를 잘한다고 판매도 잘하는 것은 아니며 B2B에 강하다고 B2C를 잘하는 것도 아니었다. 리테일과 커머스는 자본력이나 브랜드 인지도가 떨어지는 록야의 비교 우위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 회사가 내린 결론이었다. 감자를 중심으로 농산물과 관련된 전체 밸류체인을 장악하겠다는 야심 찬 ‘한국의 제스프리’ 꿈은 현실적 제약 앞에서 방향을 틀 수밖에 없었다.


컬리와 협업해 얻은 기회,
신선식품에 대한 진심이 통하다

이렇게 록야가 현실 감각을 찾을 즈음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이 무렵 감자만으로 시장을 확장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판단 아래 회사는 양파, 고추, 무 등으로 품목을 확대하기로 방향을 선회했다. 단일 품목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은 것이다. 다행히 감자는 육종, 재배, 구매, 관리 등 모든 측면에서 난도가 높은 작물이기 때문에 A부터 Z까지 전 과정을 경험해 본 록야에 있어 다른 작물로의 수평적 확장은 비교적 수월했다.3 새로 추가된 품목의 주요 산지, 종자 특성, 공급 구조 등 전체 밸류체인도 손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이렇게 고객이 원하고 수익성이 높은 작물 위주로 우선순위를 정해 포트폴리오를 확장하니 수익성도 자연스럽게 개선됐다.

한편 커머스에 있어서도 직접 판매하기보다는 중소형 혹은 신생 회사와 파트너십을 맺는 방향으로 전략을 틀었다. 이 과정에서 신생 스타트업이었던 컬리와의 인연이 시작됐다. 권 대표가 2018년 컬리의 한 MD와 농산물 도매시장에서 우연히 마주친 것이 계기였다. 컬리도 이제 갓 출범한 작은 회사였지만 신선식품의 중요성에 대한 두 회사의 진심이 통하면서 파트너십은 일사천리로 성사됐다. 양사는 ‘Farm to Table’이라는 철학, 즉 전국 산지에서 확보한 농산물을 중간 유통을 최소화하고 합리적 가격에 소비자의 식탁으로 연결한다는 비전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록야가 유통하는 감자와 깐대파, 마늘, 양파, 토마토 등 100여 개가 넘는 신선 농산물이 ‘최저가’ 표시를 달고 컬리의 자체브랜드(PB)인 KF365 혹은 I AM GROUND 등의 이름으로 입점하게 됐다. 그리고 이 협업은 록야의 외형 성장에 중대한 변곡점이 됐다.

파트너십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2022년 일반 벤처캐피털들이 록야를 외면할 때도 컬리는 전략적 투자자(SI)로 참여해 록야의 숨통을 틔워줬다. 자금줄이 말라가던 상황에서 사실상 구원투수 역할을 한 것이다. 전략적 투자자를 물색하던 권 대표는 컬리의 김슬아 대표에게 단순한 파트너십을 넘어 지분 관계로 나아갔을 때의 시너지를 설득했다. 그는 커머스 플랫폼이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카테고리가 많지 않으며 특히 신라면 같은 가공식품이나 전자제품처럼 유통채널이 많은 품목의 경우 플랫폼이 가격 결정력을 갖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결국 한 끗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신선식품의 가격과 품질임을 강조한 것이다. 특히 농산물은 신선식품 중에서도 축산에 비해 영세 생산자가 압도적으로 많고 가격과 품질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다른 커머스 플랫폼 대비 차별화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분야라고 주장했다. 더욱이 농산물은 경기와 무관하게 소비자 수요가 유지되는 필수재다. 이에 권 대표는 유통업체들이 도태되는 이유는 많지만 ‘신선’을 놓치는 것이 본질적인 이유라며 신선식품을 향한 컬리의 진심에 기대 호소했다.

5~6개월간의 심사 과정을 거쳐 컬리는 2022년 록야에 100억 원을 투자했고 양사의 윈윈 관계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컬리 역시 록야와 협업함으로써 균일한 품질의 농산물을 소비자에게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면서도 타 채널 대비 높은 마진을 누리고 있다. 코로나 시기에는 록야의 꽃 브랜드인 ‘농부의 꽃’이 컬리를 통해 화훼 새벽 배송을 처음 시도해 시장에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화훼 농가들이 코로나로 어려움을 겪던 상황에서 농가 소득을 보장하고 판로를 마련하자는 록야의 제안을 컬리 MD가 수용하며 성사된 프로젝트였다. 중간 유통 단계를 건너뛰고 신선한 꽃을 식탁 위에 바로 올린다는 콘셉트에 소비자들도 환호했다. 그 덕분에 해당 브랜드는 180만 송이 이상 팔려 약 30억 원에 달하는 매출을 달성하고 농가와 상생하는 대표 사례로 방송 보도에도 다수 소개됐다. 권 대표는 “컬리는 의사결정이 빠르고 열려 있어 ‘농부의 꽃’처럼 사회적 가치 중심의 제안도 바로 수용해줬다”며 “농가와의 상생을 실현하는 동시에 마케팅 효과까지 거둘 수 있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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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 기반의 가격 예측,
복잡한 경우의 수를 통제하다

록야는 AI 열풍이 불기 한참 전인 2017년 데이터와 AI 기반 농산물 분석 회사 ‘팜에어’를 세웠다. 2016년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 대국이 계기였다. 평소에 바둑에 관심이 많던 권 대표는 대국 결과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복잡한 경우의 수가 얽힌 바둑에서 인간이 AI에 완패하는 모습을 보면서 농업이라는 예측 불가능한 산업에서도 AI가 새로운 기회를 열어줄 수 있겠다는 가능성을 포착했다. 농산물 중에서도 감자는 기후변화에 민감한 작물이었다. 폭우와 폭염, 서리, 장마, 태풍, 가뭄 등 모든 변수가 품질에 영향을 미치며 하나만 삐끗해도 한 해 농사를 망치기 일쑤였다. 생산과 수요가 늘 요동치는 와중에도 록야는 계약한 농가에 대한 책임, 기업과의 약속을 동시에 지켜야 하는 입장이었다. 계약 재배가 보편화되기 위해서는 출하 시점에 가격이 크게 요동치지 않도록 경우의 수를 통제하는 게 관건이었다. 농산물 가격을 예측하는 역량이야말로 록야 비즈니스를 좌우할 핵심 경쟁력이었다는 의미다. 전국에 여러 산지를 두고 위험을 분산하긴 했지만 기상 이변이 더 잦아질 것에 대비하려면 능동적인 가격 예측이 필요했다.

가격 예측 도구로서 AI의 잠재력에 눈을 뜬 권 대표는 곧바로 시장조사에 착수했다. AI가 가장 빠르게 침투하고 있는 산업군을 탐색하던 중 증권업계에서 ‘로보 어드바이저’ 도입이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는 직접 증권사 로보 어드바이저 팀들을 찾아다니면서 AI가 주식시장의 다양한 변수를 바탕으로 주가를 예측하고 자동으로 투자 의사결정까지 내려준다는 것을 알게 됐다. 권 대표는 “그동안 농업에서 고민해오던 문제와 주식시장의 구조가 놀랍게도 맞아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AI야말로 농업의 미래라는 확신이 들었다”고 말했다. 더불어 제스프리, 썬키스트 등 글로벌 농산물 기업들이 이미 데이터 기반 의사결정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을 접한 뒤 확신은 더욱 강해졌다.

하지만 AI에 대한 인프라도, 인재도 부족하던 시기였다. 이에 권 대표는 일일이 증권사 문을 두드리면서 로보 어드바이저 팀을 설득했다. B2B 영업 때 하던 그대로 중소 증권사들의 문제점과 애로 사항을 파고들어 기회를 찾았다. 신성장 동력이 절실한 중소 증권사들에 농업이 얼마나 큰 시장인지를 보여주면서 “AI가 농업의 게임체인저가 될 것” “농장에 인공지능 혁명을 일으키겠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결국 중소 증권사와의 공동 투자를 통해 합작 법인 ‘팜에어’를 설립했고 이후 팜에어는 록야가 지분을 전량 인수하면서 100% 자회사가 됐다.

팜에어의 초기 도전은 쉽지 않았다. 약 3년간 구축한 가격 예측 알고리즘이 시장의 기대만큼 성과를 내지 못한 것이다. 권 대표는 실패의 원인을 기존 증권사 출신 인력들이 과거 경험에 매몰돼 있었던 데서 찾았다. 로보 어드바이저 개발 경험이 있는 이들은 과거 주가 예측 모델에 적용했던 오래된 알고리즘을 고집했고 자신들이 만든 모델의 우수성을 증명하려 장황한 지표들을 내세우곤 했다. 그러나 록야에 정말 중요한 지표는 단 하나, ‘농산물 가격 예측 정확도’였다. 그 단순한 결괏값을 높이기 위해 필요한 것은 화려한 수식이 아니라 농업에 맞는 유의미한 변수를 찾아내는 일이었다. 하지만 기존 팀은 이 과제 앞에서 번번이 실패했다. 이에 권 대표는 2020년 과감히 팀을 재정비하고 경력은 없더라도 신기술을 유연하게 수용할 수 있는 주니어 위주로 다시 채용했다. 그리고 특별한 알고리즘을 새로 만들 필요 없이 오픈소스를 활용해도 되니 오로지 ‘농산물 가격 예측’이란 목표에만 집중하라고 주문했다. AI(인공지능)는 ‘목적’이 아니라 철저히 농업의 문제를 푸는 ‘도구’여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그렇게 1~2년이 지나자 성과가 나타났다. 공개된 AI 기술을 적극 활용하자 농축산물 경매 가격과 날씨, 수출입 정보, 지역별 출하량 등 다양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실시간 가격 예측을 하는 ‘테란(TERRAN)’이 완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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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란의 출현은 계약 재배를 핵심 모델로 운영하는 록야의 경쟁력을 높여줬다. 과거 엑셀을 돌리다 포기했던 ‘쌀 때 사고, 비쌀 때 파는’ 전략을 AI 기반의 정확한 가격 예측을 바탕으로 실현하고, 최적의 계약 조건을 설정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아울러 생산자에게는 안정적인 수익을, 소비자에게는 경쟁력 있는 가격을 동시에 제공할 수 있게 됐다. 권 대표는 “이제는 농산물을 사들인 뒤 팔지 못하거나 재고가 쌓여 손해를 떠안는 일은 없다”면서 “매일 주요 품목에 대해 약 1억 건에 달하는 데이터가 생성되고 있으며 이를 토대로 최저가에 신선한 농산물을 제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아무리 구글, 오픈AI 같은 빅테크일지라도 대한민국 농업의 맥락과 기상 조건, 변수별 가중치를 이해하지 못하면 테란의 성능을 따라올 수는 없을 거라는 설명이다. 단순히 데이터를 쌓는 것보다 어떤 데이터가 한국 농업의 맥락에서 의미가 있는지를 아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얘기다.

테란은 록야 내부의 효율성과 수익성 제고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매출원이 됐다. 이마트, 롯데웰푸드 등 테란 서비스를 구독하는 기업들이 생긴 것이다. 증권업계에서 블룸버그 단말기를 구독하듯 록야는 블룸버그와 같은 가격에 단말기 서비스를 제공하며 가격과 기상, 수출입, 출하량 정보를 실시간으로 수집해 기업들의 의사결정을 지원하고 있다. 이렇게 AI와 데이터를 활용한 시스템은 농가와 기업 모두가 더 효율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돕는 도구가 되고 있다.


한국형 스마트팜의 실패,
농업 혁신의 본질로 돌아가다

사업 외연을 넓혀가는 과정에서 록야는 뼈아픈 좌절도 경험했다. 2024년 12월 31일부로 철수한 한국형 스마트팜 사업이 대표적 실패 사례다. 기후와 날씨의 영향을 줄이고 균일한 품질을 유지할 수 있는 스마트팜(지능형 농장)은 분명 미래 농업의 한 축이다. 농업의 지속가능성을 고민하는 록야가 스마트팜에 눈을 돌린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2020년 대대적으로 출범한 이 사업은 투자금 전액을 날리고 접는 결과로 이어졌다. 회사의 14년 역사에서 가장 큰 실패였고 이 사업을 전담했던 공동 창업자도 그 책임을 지고 2025년 3월 사임했다. 지금까지 해외에도, 국내에도 스마트팜 사업으로 손익분기점(BEP)을 맞춘 기업이 없는데 섣불리 규모를 키우고 공격적으로 투자한 게 화근이었다.

록야의 접근은 이랬다. 양상추 같은 일반 채소나 가공품이 아니라 건강기능식품, 화장품, 의약품 등 바이오산업에 활용할 수 있는 기능성 원료들을 재배하면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실제로 상처 치료제 ‘마데카솔’의 원료인 병풀에서 유효 성분을 추출하거나 새싹 인삼에서 유래한 유산균을 제품화하는 등의 실험적 시도가 이어졌고, 효능 면에서는 성과도 있었다. ‘그린바이오(농업·식량·환경 분야에 바이오 기술을 접목한 산업)’라는 이름 아래 투자자들의 관심도 뜨거웠다. 이에 록야는 약대 출신의 고급 인력들을 채용하고 연구 인프라와 스마트팜 시설에 막대한 투자를 감행했다. 하지만 효능이 입증됐다 한들 완제품으로 상업화해 판매하는 것은 록야로서도 강점이나 경험이 없던 분야였다. 이는 과거 온라인 커머스 실패에서도 이미 확인했던 부분이었다. 그럼에도 투자자들의 관심을 끌 만한, 화려한 외형을 갖추는 데 몰입한 결과는 시간이 흐를수록 부메랑이 돼 돌아왔다. 권 대표는 “농업을 혁신한다는 우리의 출발점과 본업을 잠시 잊었던 것 같다”면서 “차라리 온라인 커머스 사업을 실패했던 때처럼 한 6개월 가볍게 시도해보고 접었더라면 괜찮았을 텐데 너무 일찍부터 무겁게 시작했다”라고 말했다.

투자금을 잃은 뒤 록야는 기존 인력과 건물, 스마트팜을 대폭 축소했다. 그리고 비즈니스 모델을 바꿨다. 직접 상업화까지 하는 대신 보유한 특허를 기반으로 기업들과 지식재산(IP) 계약을 체결해 로열티 수익을 올리는 구조로 전환한 것이다. 이는 록야가 강점을 가진 B2B 영업 능력을 살리는 전략이었다. 권 대표는 “기후변화가 심화되는 미래 농업 환경에서 스마트팜이 필요하다는 데는 여전히 이견이 없다”면서도 “이 사업은 사회적 가치 차원에서 대기업이 투자할 영역이지 스타트업이 감당하기엔 본업의 뿌리를 흔들 수 있는 사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실패를 통해 록야는 한 가지 확실한 경영 원칙을 정립했다. ‘기업은 결국 수익을 내야 한다’는 가장 원초적인 사실을 되새긴 것이다. 이를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내부 역량에 대한 이해였다. 당연한 얘기 같지만 스타트업이 자금을 유치하는 과정에서 투자자를 의식하다 보면 잊기 쉬운 철칙이었다. 시장 트렌드도, 사회적 가치도 수익을 낸 다음 이야기였다. 농업이 단기간에 큰돈을 벌 수 있는 산업은 아니기 때문에 외부 자본은 필요하지만 새로운 인력 채용과 투자를 통해 내부에 없던 역량을 전부 외부에서 수혈하려는 건 위험한 발상이었다. 스마트팜 사업을 추진할 때도 신규 인력에 의존할 계획을 세우기 전에 기존 직원들이 얼마나 신사업을 수행할 전문성과 시장 이해를 갖추고 있는지부터 점검했어야 했다.

다음으로 국내뿐 아니라 해외를 포함해 실제로 수익을 내는 회사가 있는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당시 스마트팜 분야에서 국내외를 막론하고 투자 붐이 일고 우후죽순 관련 스타트업들이 등장하던 시기였지만 막상 돈을 벌고 있는 기업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자본 집약적 특성상 투자금을 회수하기 전에 자금을 소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초가 시장을 지배할 것’ ‘우리는 다를 것’이라며 마치 실패란 없을 것처럼 투자를 감행했고, 결과는 참담한 실패였다. 권 대표는 “전 세계적으로 성공 사례는커녕 수익을 낼 기미조차 없었는데 실리콘밸리 혁신 신화에 취해 현실을 냉정하게 보지 못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 같은 원칙을 얻은 록야는 본업에 다시 집중하기 위해 고정비 지출을 줄이고 창업 초기처럼 사무실도 10분의 1 규모로 축소하며 재택근무로 전환했다. 대신 AI 기반의 가격 예측, 계약 재배 의사결정, 선별 및 포장 자동화 등 록야가 잘하는 분야를 더욱 고도화했다. 이렇게 데이터를 기반으로 해당 시점에 작황이 좋고 수익성이 높은 작물 중심으로 포트폴리오를 재조정하고 공정을 자동화해 비용을 절감하자 회사는 금세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단기간에 기하급수적 성장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핵심 역량에 집중하고 꾸준히 영업이익을 내며 내실을 다지자 현금 흐름이 개선됐고 매출 역시 창사 이래 최고치를 경신했다.

물론 록야의 도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음 목표는 오프라인 확장이다. AI를 통해 농산물 가격과 수요를 정밀하게 예측할 수 있는 역량을 확보한 만큼 최저가에 농산물을 제공하고 효율적으로 재고를 관리할 수 있는 오프라인 매장을 운영하겠다는 게 권 대표의 구상이다. 이미 자회사 팜에어는 AI로 쿠팡, 이마트, 홈플러스 등 대형 마트의 신선식품 가격을 한눈에 비교할 수 있는 ‘팜에어카트’ 서비스를 상용화했다. 록야는 이 최저가를 기준으로 가장 경쟁력 있는 가격과 품질을 갖춘 오프라인 유통 체인을 구축하려 한다. 온라인에서는 이미 컬리, 쿠팡 등 파트너십이 자리 잡혀 있으니 자체 오프라인 판로를 뚫어 유통망을 넓히겠다는 전략이다.

포부는 크다. 수도권을 중심으로 3년 내 100개 매장을 열고 브랜드를 소비자에게 각인시키겠다는 계획이다. 자체 매장을 통해 구매력을 키우고, 결과적으로 가격 협상력도 높여 품종 개발과 유통 전반에 재투자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대형 마트와 정면 승부를 벌이기보다는 GS더프레시 등 슈퍼마켓 규모로 포지셔닝해 틈새시장을 노리려 하고 있다.

온라인이 오프라인 유통을 빠르게 잠식하는 시대에 록야의 이 역발상이 성공할지는 미지수다. 안전지대(comfort zone)를 벗어난 도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감자 회사에서 출발해 AI 기반 종합 농업 기업으로 도약하기까지 숱한 도전과 시행착오를 견뎌낸 록야는 이제 ‘한국 농업을 가장 잘 아는 회사’로 불릴 만큼 단단해졌다. 산지에서 식탁까지, 국산 농산물의 여정과 가격 구조를 변화시키고 있는 록야의 실험은 이 시각에도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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