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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의 『논어』란 무엇인가

논어의 ‘친구’는 그냥 친구가 아니다

김영민 | 270호 (2019년 4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동서양을 막론하고 ‘친구’를 주제로 한 논의는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다. 고대 그리스의 작가들은 친구의 개념에 대해 많은 토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친구 간의 사랑을 뜻하는 ‘필리아(philia)’를 강조했다. 이 같은 친구 간의 관계나 친구 간의 사랑, 즉 ‘우애(友愛)’는 『논어』에서도 중요하게 짚었다. 『논어』에서 ‘친구’는 두 번째 문장부터 등장한다. ‘친구가 멀리서 찾아오면 즐겁지 아니한가.’ 그렇다면 『논어』에서 등장하는 ‘친구’는 누구인가. 답은 문장 첫머리에 등장하는 글자인 유(有)의 의미를 해석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어법상 논란이 있는 방(方)에 대한 분석도 필요하다. 이에 대한 해석이 이뤄져야 ‘유붕자원방래(有朋自遠方來)’의 참뜻에 다가갈 수 있다. 사실 『논어』의 ‘친구’는 독자들이 생각하는 ‘일상에서 사귀는 친구’와는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여기에는 시대와 정치사상의 맥락이 담겨져 있다. 이를 알아가는 것이 『논어』를 읽는 재미를 더한다.



멀리서 찾아오는 친구가 있으면 즐겁지 아니한가?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논어』 해설 3: 친구는 누구인가?
어법상의 논란 1: 유(有)
『논어』 첫 번째 문장 못지않게 널리 알려진 두 번째 문장, ‘친구가 멀리서 찾아오면 즐겁지 아니한가’는 어법상 난해한 부분을 포함하고 있다. 문장 첫머리에 등장하는 글자인 유(有)부터가 어렵다. 예컨대, 김용옥은 “‘유붕자원방래(有朋自遠方來)’라 할 때 ‘유붕(有朋)’의 ‘유’는 잘 해석이 되질 않는다”라고 말한 바 있다.(김용옥,『논어한글역주』권1, 통나무, 2009, 253쪽) 그러면 유붕의 유와 관련해 어떤 논란이 있는지 먼저 살펴보자.

먼저 이 ‘유(有)’라는 글자가 원래 ‘유’가 아니었다는 주장이 있다. 당나라 육덕명(陸德明)의 『경전석문(經典釋文)』 별본(別本), 청나라 홍이훤(洪頤煊)의 『독서총록(讀書叢錄)』 등은 유붕(有朋)이 아니라 우붕(友朋)으로 된 『논어』 판본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논어』 텍스트 내에서 ‘우붕(友朋)’이라는 표현이 사용된 적은 한 번도 없다. 따라서 『논어』 첫 부분에 나오는 유붕을 우붕으로 간주하자는 주장은 근거가 부족하다. 그런 점에서 일단 ‘유붕자원방래(有朋自遠方來)’의 첫 글자는 우(友)가 아니라 유(有)라고 전제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그럴 경우, 이 ‘유’의 해석 방식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나누어진다.

첫째, ‘유’를 ‘어떤’이라는 뜻의 형용사로 간주할 수 있다. 예컨대, 류종목은 ‘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가지고 있다’ ‘소유하다’라는 뜻의 동사로 뒤에 오는 명사를 목적어로 삼지만 때로는 불특정의 사람이나 사물을 표시하는 관형어가 돼 뒤에 오는 명사를 수식하기도 한다. 이 경우 ‘어느’ ‘어떤’으로 풀이할 수 있는데 이는 현대 중국어의 유(有)와 마찬가지다.”(류종목,『논어의 문법적 이해』, 문학과지성사, 2000, 14쪽.) 요컨대, 유(有)라는 글자에는 ‘어떤’이라는 사전상의 뜻이 있기에 유붕자원방래(有朋自遠方來)에 나오는 유(有)에도 그러한 뜻을 적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해석을 적극적으로 따른 『논어』 번역자가 최석기와 이강재다. 1 유(有)를 ‘어떤’이라는 뜻의 형용사로 봤을 경우, 유붕(有朋)은 ‘어떤 친구’와 같이 번역할 수 있다. 그러나 『논어』에서 유(有)가 ‘어떤’이라는 뜻으로 사용된 경우는 드물다.



둘째, ‘유’를 ‘있다’라는 술어라고 볼 수도 있다. 고전 한문에서 존재의 있고 없음이나 많고 적음을 나타내는 어휘인 유(有), 무(無), 다(多), 소(少) 등의 글자는 어순에 관한 한 비슷한 패턴을 보여준다. 그 글자들이 술어로 사용될 때에는 주어가 술어의 뒤에 오는 것이다. 따라서 유붕자원방래(有朋自遠方來)의 ‘유’ 앞에 아무런 글자가 오지 않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유’의 주어는 무엇인가? 크게 보아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첫째, 붕(朋)을 유(有)의 주어라고 간주하는 것이다. 이럴 경우, ‘유붕’의 번역은 ‘친구가 있어’가 된다. 뒤에 오는 ‘자원방래’는 그렇게 존재하는 친구가 행하는 일을 묘사하는 별도의 구절이 된다. 둘째, ‘붕자원방래’ 전체를 ‘유’의 주어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럴 경우 ‘유붕자원방래’의 번역은 ‘멀리서 찾아오는 친구가 있으면’이 된다.

이토록 여러 해석이 분분하다면 우리는 ‘유붕자원방래’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 이에 관련해 류종목은 “이 ‘유붕’은 ‘친구가 있어서’로 풀이할 수도 있고 ‘어떤 친구’로 풀이할 수도 있지만 이 두 가지 의미는 궁극적으로 같은 것이기 때문에 구분하기도 어렵고, 또 굳이 구분할 필요도 없다”라고 말한 바 있다.(류종목, 2000, 14쪽.) 과연 그럴까? 같은 글자가 문법적으로 완전히 다르게 해석되는 경우에 과연 그에 따른 문장의 의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 실제, ‘유붕자원방래’에 대한 현행 한국어 해석들은 류종목의 희망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현행 『논어』 한국어 번역자 중 한 사람인 이한우는 이렇게 주장한다. “그리고 첫머리에 ‘유붕(有朋)’이라 했다! 주의해야 한다. 먼저 벗이 있다. 그리고 자신처럼 배우고 늘 쉬지 않고 (몸에) 익히기를 좋아하는 그 벗(동지·同志)이 (먼 곳에 갔다가 식견을 넓힌 다음) 먼 곳에서 돌아오니 나 또한 그로부터 새로운 식견을 얻을 수 있어서 즐겁지 않겠는가라고 봐야 한다. 즉, 즐거움의 대상이 멀리 다녀온 친구와의 재회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그 친구로부터 새롭게 듣게 되는 식견을 통해 책이나 스승으로부터 배운 것 이외의 지식을 넓히게 되는 것이어야 문맥에도 적합하다.” (이한우,『논어로 논어를 풀다』, 해냄, 2012, 27쪽.) 즉, 이한우는 ‘유붕자원방래’에 나오는 ‘친구’는 원래 가까이 있다가 어딘가 먼 곳에 다녀온 친구를 지칭한다고 본 것이다. 다시 말해서 멀리서 온 새로운 친구는 ‘유붕자원방래’에 나오는 ‘친구’에 포함되지 않는다. 이러한 이한우의 독특한 해석은 ‘유’의 주어가 ‘붕’이라고 보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한우와 정반대의 해석을 하는 이는 신정근이다. ‘특히 자가용이나 비행기와 같은 교통수단이 없던 옛날에 처음 보는 이가 자신을 찾아와 무엇을 한 누구 아니냐고 물을 때, 그 사람의 가슴은 몇 번이 닫혔다 열렸다 했을 것이다.’(신정근,『공자 씨의 유쾌한 논어』, 사계절, 2009, 47쪽.) 신정근은 왜 ‘유붕자원방래’에 나오는 ‘친구’를 처음 보는 친구로 간주해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을 하지 않고 있기에 그의 해석이 얼마나 근거가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한우의 해설과 신정근의 해설을 비교해보면 문두의 ‘유’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친구가 멀리서 찾아오면 즐겁지 아니한가’의 뜻이 크게 달라진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유붕자원방래’에 나오는 ‘유(有)’라는 글자에 대해 보다 정확한 이해를 할 필요가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고대 중국어 전문가 동치국(董治國)의 연구는 계발적이다. 동치국에 따르면 ‘유붕자원방래’는 고대 중국에서 널리 사용된 ‘유(有)+겸어(兼語)+자동사(불급물동사·不及物動詞)’ 문형을 취한 것이다. (동치국, 고대한어구형분석상해(古代漢語句型分類詳解), 톈진 난카이대학출판사(天津: 南開大學出版社), 2016, p.137) 이 문형에서 유(有) 뒤에 나오는 단어는 문장 내에서 복수의 역할을 하면서 ‘유’를 ‘어떤’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한다. 『논어』 내에서 그와 같은 문형을 취하는 문장이 그 밖에도 여러 개가 나온다는 점에서 동치국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논어』 선진(先進) 22에는 ‘유부형재(有父兄在, 부형이 계시는 경우에)’라는 문장이 나오고, 『논어』 옹야(雍也) 14에는 ‘유담대멸명자, 행불유경(有澹臺滅明者 行不由徑, 담대멸명이라는 이가 갈 때 지름길로 가지고 않고)’라는 문장이 나온다. 그리고 『맹자』등문공상(滕文公上) 3에도 ‘유왕자기(有王者起)…’ (왕이 일어나면)와 같은 문장이 나온다. 이러한 패턴을 고려한다면 유붕(有朋)을 ‘어떤 친구’로 풀이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유붕자원방래’라는 문장은 ‘멀리서 찾아오는 친구가 있으면’ 정도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그 친구가 처음 만나는 친구인지, 원래 가까이 있어서 기존에 알던 사람인지는 이 문장을 분석해서는 알 수 없다.

어법상의 논란 2: 방(方)
‘유붕자원방래(有朋自遠方來)’에서 어법상 문제가 되는 또 하나의 글자가 ‘방(方)’이다. ‘방’에 대해서는 크게 보아 세 가지 해석이 있다. 첫째, ‘바야흐로’라는 뜻의 부사로 ‘방’을 해석하는 경우, 둘째, ‘먼 곳’이라는 뜻을 가진 이음절어인 원방(遠方)의 일부로 해석하는 경우, 셋째, ‘방’을 ‘나란히’라는 뜻의 부사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 청나라 때 고증학자인 유월(兪樾)은 『논어평의(論語平議)』에서 『설문해자(說文解字)』의 ‘방’자 해설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방’에는 나란하다는 뜻이 있다. … 지금 학자들이 잘못하여 ‘원방’ 두 글자를 이어진 문장으로 보는데 그렇지 않다.”(유월 저, 이강재, 김효신 역주, 『고증학자는 논어를 어떻게 읽었나』, 학고방, 2006, 24쪽.) 유월의 이러한 해석에 대해 김용옥은 “고증학자의 졸렬한 해석이다”(김용옥, 2009, 254쪽)라고 질타했는데 어떤 점에서 졸렬한지는 알 수 없다.

『논어』가 역동적으로 편집되던 시기인 한나라 때 문헌 『사기』를 살펴보자. 『사기』에서는 ‘원방’을 예외 없이 ‘먼 곳’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사기』 유림열전(儒林列傳)에는 ‘제자로서 먼 곳으로부터 와서 수업한 이가 백여 명이었다(弟子自遠方至受業者百餘人)’라는 표현이 나온다. 그리고 『사기』 공자세가(孔子世家)에는 ‘공자는 관직을 맡지 않고 물러나 시, 서, 예, 악을 닦았다. 제자들이 더욱 늘어나서 먼 곳으로부터 이르렀다(孔子不仕 退而修詩書禮樂 弟子彌衆 至自遠方)’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러한 문장들에 사용된 ‘방(方)’은 ‘바야흐로’ 혹은 ‘나란히’라는 부사로 기능하기 어려운 위치에 있다. 비교적 이른 문헌인 『사기』에 이러한 표현이 나온다는 점을 감안할 때 ‘원방’을 ‘먼 곳’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된다. 또 하나 특기할 점은 ‘원방’이라는 표현이 배움을 논하는 맥락에서 거론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2

그러면 『사기』보다 시대적으로 좀 더 『논어』와 가까운 문헌이라고 판단되는 『맹자』를 살펴보자. 전국시대 문헌인 『맹자』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신농의 교설을 떠들고 다니는 자 허행이 있었는데 초나라부터 등나라에 이르렀다. 발길이 문에 이르러 문공에게 말했다: 먼 곳 사람(遠方之人)이, 임금께서 인한 통치를 베푸신다는 말을 듣고, 거처를 하나 얻어 백성이 되고자 합니다.’ 여기에 사용된 ‘먼 곳 사람(遠方之人)’이라는 표현은 원방(遠方)이 ‘먼 곳’이라는 뜻을 가진 이음절어로 사용됐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부사 뒤에는 ‘지(之)’가 오지는 않기 때문이다. 『맹자』의 이 구절은 다른 면에서도 흥미롭다. 『사기』에서 ‘원방’이라는 표현이 배움의 맥락에서 논의된 반면 『맹자』에서는 ‘원방’이라는 표현이 통치의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논어』 텍스트 내에서 이미 ‘원(遠)’이라는 글자가 통치의 맥락에서 거론된 적이 있다: ‘섭공이 통치에 대해서 물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가까운 이들은 기뻐하고, 먼 곳에 있는 이들(遠者)은 찾아온다(葉公問政. 子曰, 近者說, 遠者來).’ 3

이상의 논의를 종합해 보면 유붕자원방래(有朋自遠方來)는 친구들이 배움 혹은 통치와 관련해 먼 곳으로부터 오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러한 유동적 상황은 주(周)나라의 통치가 불안해지면서 사람들이 각 제후국 사이를 빈번하게 오가게 된 역사적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논어』에 나오는 친구는 누구인가?
보통의 독자들은 ‘친구가 멀리서 찾아오면 즐겁지 아니한가’에 나오는 ‘친구’를 우리가 일상에서 사귀는 친구 일반을 의미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율곡 이이는 일찍이 이러한 ‘친구’ 이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바 있다.


‘어려서 한 떼의 고기처럼 놀고, 커서도 두각(頭角)이 성글어짐이 없는 이런 사람을 벗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아니다. 한 동리에서 자라고 동문수학(同門受學)하여 단 하루만 못 봐도 마치 삼추(三秋)를 떨어져 있는 듯이 생각되는 이런 사람을 벗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아니다. 서로 부모가 뵙고 통가(通家)까지 하여 그야말로 정이 교칠(膠漆)과 같아 흉회를 털어 보일 만한 사람이 어찌 벗이 아니겠나! 아니다. 벗이라고 하는 것은 지(志)를 벗하고, 도(道)를 벗하는 것이다.’ 4


배병삼은 이러한 율곡 이이의 논의를 활용해 『논어』 첫 구절에 나오는 친구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붕은 어릴 적 이웃집 친구나 초등학교 동창생을 의미하지 않는다. … 살아가는 방식이 같은 동행자, 같은 길을 걷는 도반(道伴) 또는 같은 뜻을 가진 사람(同志)이 붕(朋)이다. 그러니 ‘붕’이란 여태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사람이어도 좋다. 일면식도 없지만 저 멀리서 ‘나의 길(my way)’을 알아서 (전해 듣고서) 찾아와 동감을 표하거나 핵심을 찔러 비평해주는 사람, 바로 그런 사람이 여기서 말하는 붕이다.”(배병삼,『한글세대가 본 논어』1, 문학동네, 2002, 23쪽.) 이와 같은 『논어』 해설이 크게 문제가 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논어』 첫 구절에 나오는 친구의 의미를 음미하기 위해서는 그에 관련된 역사적 맥락을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어떤 것의 의미는 그것이 무엇과 대조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율곡 이이나 배병삼이 ‘붕(朋)’의 의미를 해설할 때, 대조하는 대상은 자연스럽게 친숙해진 이들로서의 친구다. 즉, 단순한 친교 집단과 구별되는, 강한 목적의식을 공유하는 집단으로서 ‘붕(친구)’을 정의한 것이다. 그러나 고대 중국의 역사 세계 속에서 ‘붕’이 호명되는 맥락은 그와는 사뭇 달랐다. 당시의 역사적 맥락을 알아보기 위해 『좌전(左傳)』에 나오는 두 문장을 살펴보자. 5


‘천자가 국(國)을 세우고, 제후는 가(家)를 세우고, 경은 측실을 두고, 대부는 이종을 두고, 사는 자제들을 부릴 조력자로 삼는다.’ 사유예자제(士有隸子弟) 6
(天子建國,諸侯立家,卿置側室,大夫有貳宗,士有隸子弟)

‘천자에게는 공(公)이 있고, 제후에게는 경이 있고, 경은 측실을 두고, 대부는 이종을 두고, 사에게는 붕우가 있다(士有朋友) … 잘하면 상 주고, 잘못하면 고치고, 재난을 당하면 구제하고, 실패하면 바꾼다. 왕 이하 각기 부형과 자제가 있어서 그 통치를 도와 살핀다.’ 7
(天子有公, 諸侯有卿, 卿置側室, 大夫有貳宗, 士有朋友… 善則賞之, 過則匡之, 患則救之, 失則革之. 自王以下各有父兄子弟以補察其政)


이 두 예문에 ‘사유붕우(士有朋友)’라는 표현과 ‘사유예자제(士有隸子弟)’라는 표현이 유사한 맥락에서 사용됐다는 점을 주목하라. 그러면 『논어』에 나오는 ‘붕(友)’과 ‘자제(子弟)’라는 표현이 호환적으로 쓰였을 가능성이 높음을 알 수 있다. 공자는 ‘자제’라는 표현을 제자들에게 사용하고 있으므로 『논어』에서 ‘친구’란 동년배로서의 친구만을 지칭한다기보다는 제자를 포함하는 넓은 개념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위 예문에서 붕우 혹은 자제는 ‘사(士)’를 돕는 조력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 두 구절은 제후(諸侯)에게 경(卿)이라는 조력자가 있고, ‘경’에게는 측실(側室)이라는 조력자가 있고, 대부(大夫)에게 이종(貳宗)이라는 조력자가 있듯이 사(士)에게는 붕우(朋友)라는 조력자가 있음을 나타낸다. 즉, ‘친구(朋友)’란 누구에게나 있는 범박한 의미의 친구가 아니라 사(士) 계층에 특화된 조력자였다. 조직상의 위계에 있어서 제후는 경보다, 경은 측실보다, 대부는 이종보다 우위에 있다. 따라서 사(士)와 붕우(朋友)의 관계 역시 원래는 그처럼 위계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원래 사(士)와 붕우(朋友)는 조직상 평등한 관계는 아니었던 것이다. 붕우 혹은 자제들은 ‘사(士)’와 혈연관계는 없지만 가까이에서 사(士)들을 핵심적으로 보좌하며 마치 ‘부형자제(父兄子弟)’처럼 ‘사’가 행하는 정사를 도왔던 것이다. 왕지(王志, 2009)에 따르면 통치층의 말단에 위치한 사(士)는 ‘붕우(朋友)’를 모집해 자신에게 종속시켜서 자신이 정치에 종사함에 있어서 예법을 보좌해주게끔 했다고 한다. 이러한 역할을 부여받은 존재인 ‘친구(朋)’는 신정근이 유붕자원방래(有朋自遠方來)를 해설하면서 다음과 같이 묘사한 친구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사이버 공간에 자신을 알리는 뭔가를 만들어놓으면 우리는 시간이 있을 때마다 그곳을 가서 방문자가 얼마나 있었는지, 조회 수가 얼마인지, 댓글이 얼마나 달렸는지 신경을 무지 쓴다. 방문객의 수에 웃음을 지은 적이 있다면 우리는 공자가 말한 즐거움에 동참할 수 있다.’(신정근, 2009, 47쪽)

요컨대 유붕자원방래(有朋自遠方來)에 나오는 ‘친구’는 현행 『논어』 한국어 번역본들이 제시하는 모습보다 훨씬 정치적인 함의를 띤 존재들이었다. 통치에 관련된 기능을 수행하는 사(士)를 돕는 존재였으며, 그들이 모여 논하는 학(學) 역시 통치를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주제와 밀접히 관련이 있었다. 게다가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 활동했을 당시의 역사적 맥락에서는 이른바 ‘친구(朋)’는 사(士)와 평등한 관계에 있다고 보기 어렵다. 그런데 『논어』를 읽다 보면 당시에 여전히 위계적인 관계 속에 존재하던 붕우가 보다 수평적인 관계로 나아가고 있는 동학이 느껴진다. 그것은 공자의 시대에 이르러 잘 조직화된 위계적 질서가 와해되는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위계적 질서가 느슨해짐에 따라 횡적 움직임이 증대했고 친구들은 먼 곳으로부터 와서 통치와 배움에 대해 논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점은 『논어』의 관련 구절을 읽어나가면서 보다 분명해질 것이다.

공자 이전의 학(學)은 대체로 정부 중심의 관학(官學)이었으며 관학의 특징은 종적인 위계와 가르침의 수직적인 전수에 있다. 주나라 전성기에 귀족들을 가르쳤던 사씨(師氏)나 보씨(保氏) 같은 직책이 그러한 수직적 성격의 관학을 담당했다. 8

반면, ‘친구가 멀리서 찾아오면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말은 학(學)에 종사하는 이들의 횡적인 움직임을 나타낸다. 그러한 수평적인 움직임은 학(學)이 위계적인 관학의 성격으로부터 풀려나 상대적으로 민간의 영역으로 내려온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그런데 민간의 영역이라고 해서 오늘날 생각하는 풀뿌리 민주주의의 세계를 연상해서는 안 된다. 그 세계는 여전히 사(士)의 세계다.


정치사상의 맥락에서 본 ‘친구’
위계적인 관계 속에 존재하던 친구가 점차 수평적인 관계로 이동하는 흐름은 전국시대(戰國時代, 기원전 403년∼기원전 221년)에 이르러 더욱 가속화된다. 그리하여 『논어』 못지않게 친구라는 주제를 빈번히 다루고 있는 텍스트인 『맹자』에는 다음과 같이 과감한 발언이 나온다. ‘나이 많음을 의식하지 않고, 신분의 높음을 의식하지 않고, 상대의 형제를 의식하지 않고 벗하라. 벗한다는 것은 상대의 덕을 벗하는 것이니 의식하는 바가 있어서는 안 된다(不挾長, 不挾貴, 不挾兄弟而友. 友也者, 友其德也, 不可以有挾也).’ 9 이 정도에 이르면 ‘친구 관계’란 친족 관계나 법적 관계와 명백히 구별되면서 그러한 관계들과 권위를 다툴 수 있는 자율적인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이쯤 되면 서양 정치사상사에서 발전해 온 친구의 개념과 비교해 볼 수 있는 맥락을 얻게 된다.

고대 히브리어에는 친구에 해당하는 별도의 어휘가 없다. 반면, 플라톤이나 고대 그리스의 작가들은 친구 개념에 대해 상당히 많이 토론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점에 착안한 정치 사상가 알란 블룸(Alan Bloom)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친구 관계’라는 것 자체를 창안해냈다고까지 주장한다.(Alan Bloom, Love and Friendship, Simon&Schuster, 1st edition, 1993, p.438.) 『논어』를 비롯한 고대 중국의 여러 텍스트에서 친구라는 관계에 대해 폭넓은 토론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러한 알란 블룸의 주장은 과장된 것 같다.

한편 서양 정치사상의 역사에서 친구를 혈연이나 다른 법적인 제약에 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선택의 연합으로서 간주해 온 것은 『논어』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유용하다. 서양 정치사상사에서 즐겨 다룬 질문, 이를테면 친구는 가족, 연인, 군신, 시민 관계와 어떻게 같고 다른가 하는 질문은 정치적 삶 일반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질문이다. 정치적 삶을 다루고 있는 한 『논어』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다. 특히 기존에 『논어』가 가족의 중요성을 설파해 온 텍스트처럼 여겨져 온 분위기를 감안한다면 『논어』에 자주 등장하는 친구에 대한 논의에 한층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논어』가 가족보다는 친구를 강조하는 텍스트였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가족에 대한 논의만큼이나 친구에 대한 논의가 『논어』에서 중요하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알란 블룸은 가족 관계와 친구 관계를 대척점에 놓는다.(Alan Bloom, 1993, p.423.) 그에 따르면 친구는 특정 공동체에 기반한 법, 종교,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관계, 즉 자유로운 선택에 기반한 관계인 반면 가족은 혈연에 기반한 부자유스러운 관계다. 『논어』에서 가족 관계와 친구 관계를 동시에 강조하고 있다면 과연 어떻게 이처럼 다른 두 인간관계를 양립시키고 있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논어』에 나오는 친구에 대한 여러 논의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


필자소개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kimyoungmin@snu.ac.kr
필자는 하버드대에서 동아시아 사상사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고 브린모어대 교수를 지냈다. 영문 저서로 『A HISTORY OF CHINESE POLITICAL THOUGHT(2018)』가 있다. 동아시아 정치사상사, 비교정치사상사 관련 연구를 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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