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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꿰고 있어라, 뺏기지 않으려면…

한근태 | 274호 (2019년 6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역사에서 배우지 못한 자는 불운한 역사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 한국은 왜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을까? 일본만큼 변화에 대한 준비가 돼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은 메이지유신 운동이 있기 전부터 이미 세상이 돌아가는 사정을 훤히 꿰고 있었다. 포르투갈과 네덜란드를 통해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일찍 글로벌 시장에 눈을 떴고, 철도 교통망 등 탄탄한 인프라를 바탕으로 활발히 여행을 다녔으며, 교육과 출판업의 발달 덕분에 지적 수준도 높일 수 있었다. 빠른 근대화를 가능케 했던 일본 에도시대의 역사는 새로운 도전과 기회를 맞이하고 있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8·15 광복절을 맞이할 때마다 우리 언론은 일제의 잔악한 침략과 수탈에 초점을 맞춘다. 정신대 할머니 얘기와 배상금 문제를 들먹이며 일본을 미워하는 데 에너지를 쓴다. 그런데 왜 나라를 빼앗겼을까? 우리는 어떤 문제를 갖고 있었을까? 지금처럼 살면 불행한 역사를 반복하지는 않을까? 이런 반성의 목소리는 별로 들리지 않는다. 19세기 후반은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기다. 전 근대국가에서 근대 국가로 진화해야 하는 과제를 모든 국가가 갖고 있었다. 결과는 어땠을까? 일본이 압도적 우등생이었다. 중국은 열등생, 조선은 낙제생이었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었을까? 1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일본을 이겼는가? 발전의 결과물 중 하나인 노벨상 수상 건수를 살펴보자. 한국에는 김대중 대통령이 받은 평화상 하나뿐이다. 다른 분야는 하나도 없고, 앞으로도 나올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일본은 2017년 현재 무려 25개에 달한다. 일본인 이름이 수상 명부에 오르지 않은 적이 한 해도 없다. 경제 규모나 다른 지표는 볼 것도 없이 게임이 인 된다. 지금도 일본은 압도적 우등생이고, 우리는 예전보다 나아졌지만 아직 열등생 수준이다.

문제는 한국이 이런 일본을 우습게 안다는 것이다. 과연 일본이 우습게 알아도 되는 나라이고, 그 근거는 있는가? 지금 일본이 다시 쳐들어온다면 이를 막을 수 있을까? 나는 이 같은 물음에 대해 회의적이다. 전 세계에서 일본을 우습게 보는 유일한 나라는 한국이다. 도대체 왜 우습게 보는 것일까? 나는 이를 무지의 결과물로 해석한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것이다. 질문을 바꿔보자. 일본은 어떻게 성공적인 근대 국가를 만들 수 있었을까? 보통 메이지유신에 성공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와 비슷하게 서양 문물을 수용하려 했던 운동은 한국에도 있었고, 중국에도 있었다. 한국에는 김옥균이 주도한 갑신정변이 있었고, 중국에는 양무운동이 있었다. 근데 한국과 중국의 운동은 실패하고 메이지유신은 성공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 책은 바로 그 질문에 대한 답이다.

갑작스러운 변화는 불가능하다. 한국과 중국은 변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지만 일본은 오래전부터 변화에 대한 준비를 해 왔다. 메이지유신이 결정적 역할을 한 건 사실이지만 그 이전 시대부터 착실하게 발전해 왔기 때문에 변화가 가능했다. 포르투갈과 네덜란드를 통해 외국 사정을 잘 알았고, 여행을 통해 사고가 개방됐고, 교육과 책을 통해 온 국민이 지적으로 성장했다. 한마디로 일본은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잘 알았고, 우리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 도대체 에도시대 일본에는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몇 가지 측면을 살펴본다.



첫째, 인프라

강자는 도로를 만들고, 약자는 도로를 부순다는 로마 격언이 있다. 우수한 국가일수록 사회 인프라가 튼튼하고, 그렇지 못한 국가일수록 인프라 수준이 빈약하다. 일본은 오래 전부터 인프라에 많은 투자를 했다. 에도는 18세기 중반 인구 100만 명이 거주하는 세계 최대의 도시였다. 어떻게 이런 도시를 만들 수 있었을까? 도쿠가와 이에야스 덕분이다. 그는 수도를 교토에서 에도로 옮긴 뒤 인프라 건설에 관심을 가졌다. 처음 착수한 것이 치수사업과 상수도 개통, 택지 마련을 위한 매립 공사였다. 택지 마련을 위해 내륙으로 올라간 것이 아니라 아예 바다를 메워 땅을 만들기로 했다. 매립 대상지는 ‘히비야이리에(日比谷入江)’였다. 현재 도쿄 중심 히비야는 ‘入江’이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육지가 아닌 바다였다. 성 북쪽 간다야마(神田山)를 깎은 토사로 바다를 메우고 땅을 만들었다. 도심 운하를 파면서 나온 흙들도 다 털어 넣었다. 수만 명의 인원이 산을 깎고, 흙을 운반하고, 바다를 메우고, 지반을 다져 1년 만에 여의도 면적 절반에 해당하는 광대한 매립지를 조성했다. 지금의 히비야공원에서 신바시와 하마초에 걸쳐 있는 지역이다. 이에야스의 목표는 두 가지였다. 다이묘의 세력을 견제하는 것과 에도 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것이다. 이를 위한 두 가지 제도가 천하보청과 참근교대제였다. 둘 다 다이묘의 등골을 빼는 것이 목적인데 이게 예기치 않게 일본을 발전시켰다.

우선, 천하보청이다. 이는 쇼군이 다이묘들에게 부과하는 공공사업 역무를 말한다. 다이묘와 쇼군은 주종관계가 아니다. 쇼군은 다이묘에게 세금을 징수할 수 없다. 다이묘의 충성 서약은 전시에 쇼군을 군사적으로 지원할 군역만 의무화했다. 다른 식으로 견제해야만 했는데 인프라의 책임을 다이묘들에게 부과한 천하보청이 그것이다. 세금 대신 성곽 축성, 제방과 도로 건설 등 전쟁기간 시설 관련 공사에 다이묘가 인력과 자재를 제공하도록 의무를 부가한 것이다. 에도의 히비야 매립 사업, 에도성 축성, 고카이도 정비 등은 천하보청의 결과물이다. 천하보청에 대한 순응 정도를 다이묘의 충성심 기준으로 삼았다. 저항할수록 더 많은 의무를 부과하고, 순응할수록 의무를 줄여줬다. 말을 잘 들으면 봐주고, 말을 안 들으면 과한 과제를 주는 식이다. 천하보청의 묘미는 국가의 부가 고스란히 인프라로 전환된다는 점이었다. 돈으로 거두면 그 과정에서 많은 비효율이 발생한다. 왜곡된 자본의 축적과 잉여가 발생한다. 하지만 세금 징수가 아닌 결과물 형태로 의무를 부과하자 관리비용 등 매몰비용이나 착복으로 인한 증발 없이 모든 투입이 실물 인프라로 이어졌다. 중앙에 징세권이 없다는 것이 천하보청과 맞물려 예기치 못한 결과를 낳은 것이다.

다음은 참근교대제다. 참근이란 에도에 상경해 머무는 것, 교대는 영지로 복귀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1년 단위로 각 번의 번주를 정기적으로 에도에서 머물게 하는 일종의 인질제도다. 그런데 이 제도는 예상치 못한 효과를 낳았다. 먼저, 경제적 파급 효과였다. 참근교대에는 막대한 비용이 소요된다. 적게는 100명에서 많게는 500명 이상의 대규모 인원이 수백㎞가 넘는 거리를 이동하는 데 소요되는 비용을 전적으로 다이묘가 부담해야 했다. 독자 징세권에 따라 치러야 하는 대가였다. 하루라도 약정된 날보다 늦게 도착하면 막부의 질책과 막대한 비용 출혈이 발생하기 때문에 각 번은 사전에 선발대를 파견해 치밀하게 일정을 짜는 한편 도로 사정이 열악하면 스스로 비용을 부담해 도로를 개보수하는 등 심리적·경제적 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동할 때 오늘날 화폐 단위를 기준으로 수행원 1인당 식비와 숙박비로 하루 6000엔 정도를 상정할 경우 평균 3억∼4억 엔 정도의 경비가 편도 이동에 소요됐다. 이런 다이묘가 전국에 270여 가문이나 산재해 있었으니 지금 돈으로 매년 수조 원이 길거리에 뿌려진 셈이다. 여기에 여행 경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큰 에도 체재비가 더해지면 다이묘 세수의 절반을 넘을 정도로 막대한 금액이 참근교대에 소요됐다. 참근교대가 가져온 가장 큰 부산물은 에도의 눈부신 발전이었다. 중앙과 지방의 최고 엘리트 집단이 에도라는 한 도시에 거주하게 됨으로써 발생하는 사회경제적 효과는 실로 엄청났다. 수십만 명의 다이묘와 수행원들이 소비자로 유입되면서 에도에는 거대한 소비 시장이 형성됐다. 이들의 저택과 수행원 숙소, 공공 인프라 마련을 위한 토목·건설·건축업은 물론 다이묘 일행의 생활을 위한 외식업, 공예업, 운수업, 복식 문화에 따른 섬유업과 의상업, 문화생활을 위한 출판업, 공연업과 향락산업에 이르기까지 현대 도시를 방불케 하는 다양한 분야의 상업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됐다.



또 다른 하나는 여행의 대중화다. 여가에 일찍 눈뜬 유럽에서도 서민 여행이 대중화된 것은 19세기 이후였다. 철도교통망이 정비되고 나서야 비로소 거주지를 떠나 타 지역을 여행하는 사회 문화적 현상이 확산됐다. 그런데 일본은 에도시대 중기부터 이미 일반 서민층 사이에서 여행 대중화가 시작됐다. 서구와 비교해도 100년이나 앞선 것이다. 이 같은 여행 생태계는 근대화에 큰 의미를 갖는다. 여행은 본질적으로 인적 이동과 교류를 의미하며 정보 유통이란 측면에서도 물건의 이동보다 파급 효과가 크다. 여행이 대중화되기 위해서는 물질적·사회적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 이동에 필요한 교통망, 숙박 시설, 치안, 희구의 대상이 되는 명소·명물, 유희 또는 오락거리가 존재해야 한다. 일시적이나마 노동에서 벗어난 여가 시간과 이동의 자유가 있어야 한다. 일본은 전근대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여행 대중화의 조건이 충족됐다. 일본은 18세기 중엽에 이미 연간 100만이 넘는 여행객이 전국을 누비는 세계 최고의 여행 천국이었다.


둘째, 교육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사회구성원의 비율을 식자율이라고 한다. 식자율은 한 국가 또는 사회의 지적 수준을 좌우하는 결정적 요인 중 하나다. 19세기 초반에도 인구의 70∼80%가 글을 읽고 쓸 줄 알았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대단한 수준이다. “편지로 서로 의사를 전달하는 습관은 영국보다 더 폭넓게 퍼져 있다. 일본인들은 우편의 재미에 푹 빠져 있기라도 하듯 서로 짧은 편지를 주고받기를 좋아한다.” 외국인 눈에 비친 일본인의 모습이다. 어떻게 이게 가능했을까?

우선 공교육이다. 공교육의 핵심은 번교인데, 번교란 각 번의 무사 계급인 번사의 자제들을 위한 지배층의 핵심 교육 기관이다. 각 번의 사정과 처지에 맞는 인재 육성 교육이 가능했다. 고도의 자치권을 행사하는 번의 입장에서 필요한 지식과 전문성을 갖춘 인재상은 다양할 수밖에 없었다. 번교 개혁의 대표적 사례가 사쓰마번의 조시칸이다. 사쓰마번은 지정학적으로 대륙 정세에 대한 정보 입수가 빠르고 서양 세력과의 접촉이 불가피한 곳이다. 그러다 보니 기존 유교와 무예 중심의 전통교육에서 탈피해 신시대에 맞는 곳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선박을 위한 교육, 과학기술을 위한 교육, 중국어 연구를 위한 교육, 서양식 병기와 군학을 위한 연구 등. 이들은 단순히 수입만 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1865년 사쓰마번은 영국에 3명의 사절단과 15명의 유학생을 보냈다. 영국, 프랑스, 프로이센, 네덜란드, 벨기에 등을 순방하고 일부는 미국까지 갔다. 사쓰마번은 삿초동맹의 일원으로 메이지 정부 수립의 주역이 됐다.

서민 교육은 데라코야라는 사설 교육기관에서 이뤄졌다. 이 기관은 실용적이고 수요자 중심이었다. 요미, 가키, 소로반으로 이뤄져 있으며 글을 읽고, 쓰고, 주판을 할 줄 아는 서민 양성에 초점을 뒀다. 오라이모노를 읽고 습자를 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작문 능력이 향상됐다. 신지식인의 산실로는 주쿠라는 교육기관이 있었다. 대표적인 주쿠가 바로 쇼카손주쿠다. 이 조슈번의 작은 주쿠에서 지도를 받았던 학생들은 막부 타도의 선봉에 서서 메이지유신을 주도했다. 이들은 존황양이(尊皇攘夷)의 강한 신념을 가진 요시다 쇼인의 제자들이었다. 구사카 겐즈이, 다카스기 신사쿠,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이 그들이다. 난학(蘭學) 전문 주쿠, 의학 전문 주쿠 등이 있었고 나가사키 근교의 나루타키주쿠는 서양 의학과 식물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데키주큐의 문하생들인 후쿠자와 유키치는 1858년 자신의 교육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게이오기주쿠를 설립했고, 이게 오늘날 게이오대학으로 발전했다. 주쿠와 데라코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사회 변화의 원동력을 제공했다. 첫째,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누구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을 제공했다. 둘째, 일종의 민간 교육 시장을 형성했다.

에도시대 교육의 특징은 지배계층만을 대상으로 하는 공교육이 아니라 서민을 대상으로 하는 사교육이 발달했다는 것이다. 에도시대를 관통하는 교육의 특징은 서민도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사회의 건전한 유지와 발전을 위해 익혀야 할 지식과 교양이 필요하다는 사회적 공감대다. 이에 따라 일상생활에 필요한 실용 교육, 직업 생활에 필요한 봉공 교육, 공동생활에 필요한 도덕 교육 등이 서민 교육의 중심 내용으로 강조됐다. 물론 신분제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한계는 있으나 모든 사회 구성원은 공동체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기초 교육이 필요하다는 인식은 전근대사회에서 앞선 교육관이었다.


셋째, 출판문화의 활성화

16세기까지 일본의 출판 문화는 유럽, 중국은 물론 조선에 비해서도 뒤처져 있었다. 그러나 전쟁의 시대가 끝나고 평화의 시대가 도래하자 상황은 역전됐다. 17세기 이후 일본의 출판 문화는 엄청나게 성장한다. 17세기 중반 200여 개의 출판업자가 경쟁하고, 18세기 중반이 되면 연간 1000여 종의 신간이 쏟아져 나오며, 19세기에 접어들면서는 모든 국민이 책을 필수품으로 활용하는 출판 대국이 된다. 전근대 사회에서 어떻게 이런 기적 같은 변화가 가능했을까? 판권, 대여업에 비결이 있었다. 책을 찍어낼 수 있는 판목이 출판업자의 생명 같은 주요 재산이 되자 판목의 소유 및 이용 권리 규범으로 판권이란 개념이 만들어졌다. 소유 양도가 가능한 재산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주식처럼 소유권을 분할하는 것도 가능해졌고, 배타적 소유권도 인정받을 수 있었다. 쇼시라고 출판사, 인쇄소, 서점의 일관 공급 체계를 갖춘 출판 프로듀서가 출판 생태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 출판은 작가가 기요즈리라는 원고를 작성하면 판각 전문가인 호리시, 인쇄 전문가 스리 등 직인이 분업과 전문화의 원리에 따라 제판, 인쇄, 제본을 했다. 상당한 초기 투자가 필요했다.

그러다 보니 렌털 비즈니스도 나왔다. 18세기 중반 200개가 넘는 대본소가 성업했다. 대본소마다 200군데 넘는 단골 거래소가 있었고, 인기 드라마처럼 독서 열풍이 전국을 휘감았다. 기존에 딱딱하고 재미없던 책이 엔터테인먼트 상품이 됐다. 상업 자본과 유통망에 힘입어 출판 시장이 크게 성장했다. 18세기 말 인구 100만의 에도에 출판업자들이 모여 연간 수백 종의 신간을 발행하는 본격적인 상업 출판시대가 꽃을 피웠다. 구사조시 서적과 우키요에 등의 화첩류, 본격 모노가타리인 요미혼 등이 큰 인기를 모으면서 에도는 교토를 제치고 제1의 출판 시장으로 도약했다. 에도의 출판 시장에서는 각종 오락물, 실용서, 여행 가이드북 등 다양한 장르가 개척됐고, 출판사의 의뢰를 받아 전문적인 취재를 하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전업 작가가 출현하는 등 현대 출판 시장을 방불케 하는 비즈니스 생태계가 구축됐다.

국민들의 지식수준이 문명 수준을 결정하고, 그것은 사실 국가의 경쟁력이다. 그리고 이 경쟁력을 판단할 수 있는 강력한 지표 중 하나가 출판물과 책을 사보는 인구의 숫자다. 일본은 1774년 네덜란드의 해부학 책인 『해체신서』를 번역 출간했다. 이는 대단한 사건이었다. 그전까지는 서양 문물을 물건의 형태로 접하거나 대화를 통해 단편적 내용을 파악하는 수준이었다. 책에 그려진 그림이나 약간의 아는 단어를 통해 추측할 뿐 책이 지식 흡수에 거의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해체신서』의 출간은 난학자들에게 번역에 대한 욕구를 심어 줬다. 사실 이전부터 지식인들은 서양의 책에 적혀 있는 꼬부랑글자 뜻만 알면 그 지식을 모두 자기 것으로 흡수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역서가 없었던 것은 제대로 된 사전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번역의 필요성을 느낀 일본 학자들은 사전을 편찬해 본격적인 번역서의 시대를 열었다.

국가의 힘은 개인이 가진 지식의 합에 비례한다. 일본이 다수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며 높은 과학기술, 인문·사회과학 수준을 자랑하는 건 하루아침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이미 에도시대부터 책이 보편화되고, 번역이 일상화되고, 대부분의 일본인이 다양한 분야의 책을 열심히 읽어서 가능했다. 지식의 뿌리가 깊다는 것이다.


넷째, 글로벌

일본은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으로 부른다. 조선에서 도공을 데려왔기 때문이다. 도자기에 관한 한 조선이 원조이고, 일본은 짝퉁이다. 하지만 도자기를 상업화해 글로벌 상품으로 만든 건 일본이다. 이들은 일찌감치 해외 박람회에 자신들이 만든 도자기를 전시해 외국의 고객을 확보했다. 일본 파빌리온에 진열된 길이 2m짜리 초대형 화병은 서구인을 놀라게 했다. 사이즈와 품질 면에서 압도적 우위를 보인 아리타의 자기들은 관람객들의 찬사를 받으며 일본 파빌리온 최고의 인기 전시물이 됐다. 당시 만국박람회는 요즘 위상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엄청난 국제 행사였다. ‘교육과 문화’를 주제로 개최된 빈 박람회에는 수백만 명의 유럽인 관람객이 다녀갔고, 아리타야키를 비롯한 일본의 회화·공예품은 관람객들의 뇌리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박람회 내내 화제를 불러 모았던 만큼 아리타야키는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뒀다. 참가단이 준비해 간 찻잔, 접시 등의 소품들이 현장에서 불티나게 팔렸고, 일본 국내에 추가 주문이 쇄도했다. 1872년 4만5000엔이었던 일본의 도자기 수출액은 빈 박람회가 개최된 1873년에는 11만6000엔으로 2.5배 이상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빈 박람회에 출품된 아리타야키는 일본의 도자기 수출 전체를 견인하는 위력을 발휘했다.



역사에서 배우지 못한 자는 불운한 역사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 강하면 살아남고, 약하면 짓밟힌다. 우리는 힘을 기르지 못해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역사를 갖고 있다. 지금은 어떤가? 지금 충분한 힘을 갖고 있는가? 일본이나 중국이 쳐들어온다면 이를 막을 수 있는가? 안전하게 국민들을 보호할 수 있는가?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사람이다. 힘도 없으면서 큰소리치고 대항하려는 사람이다. 그 끝은 얻어터지는 것일 수밖에 없다. 최선은 무얼까? 힘없을 때 조용히 힘을 기르는 것이다. 이 책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필자소개 한근태 한스컨설팅 대표 kthan@assist.ac.kr
필자는 서울대 섬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애크런대에서 공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핀란드 헬싱키경제경영대에서 경영학 석사 학위(MBA)를 받았다. 대우자동차 이사, IBS컨설팅그룹 상무, 한국리더십센터 소장 등을 지냈다.
  • 한근태 한근태 | - (현) 한스컨설팅 대표
    -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 교수
    - 대우자동차 이사 IBS 컨설팅 그룹 상무
    - 한국리더십센터 소장
    kthan@assist.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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