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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novator’s Insight

“세계 최고가 되자는 비전을 공유했죠, 그랬더니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정지영 | 179호 (2015년 6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 혁신

 

 2007 EBS는 사상 최악의 해를 맞았다. 시청률은 곤두박질치고 있었고 제작비는 역대 최저 수준으로 줄었다. 이때 김유열 EBS 학교교육본부장(당시 편성기획부장)이 획기적인 기획안을 내놨다. 프라임 타임대의 프로그램 70%를 폐지하고 어린이·교육과 다큐멘터리로의 선택과 집중을 외친 것이다. 많은 이들의 우려가 있었지만 7년 뒤 EBS는 환골탈태했다. 시청률은 3배 이상 올랐고 EBS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도 크게 개선됐다. 다큐멘터리 수상실적도 2007년에 비해 10배 가까이 올랐다. 선택과 집중, 그리고 직원들과 비전을 공유했던 것이 긍정적인 결과를 불러왔다.

 

 

편집자주

이 기사의 제작에는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인턴연구원 남궁용주(이화여대 국제학부 4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EBS에서 처음으로 적자가 났다. 적자 보전을 위해 제작비가 대폭 삭감됐다. 2007년 제작비는 2000년 공사화된 이후 사상 최저로, KBS 대하사극 1개 시리즈 수준이었다. 시청률도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제작 여건마저 악화되면 그 끝을 알 수 없는, 더 잃을 것도 없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새로 온 편성기획부장은 파격적인 혁신안을 내놨다. 프라임 타임대의 프로그램 70%를 폐지하고 다큐멘터리와 야외 촬영물로 이를 대체하는 안이었다. 기존 프로그램 폐지로 시청자의 등을 돌리게 할 수도 있는데다 다큐멘터리 장르의 대폭 도입으로 프로그램당 제작비가 올라갈 수 있는 기획이었다. 한마디로 무지막지한 개편안이 도입된 것이다. ‘불가능하다’ ‘비현실적이다’ ‘무모하다는 반응들이 쏟아졌다. 그 후 7년이 지났다.

 

하락하던 시청률은 상승세로 돌아섰다. 프라임 타임대의 지난해 시청률은 2007년 개편 전에 비해 3배 이상 올랐다. 매년 평균 30% 이상씩 상승했다. 같은 기간 다른 공중파 채널의 프라임 타임대 시청률이 줄어든 추세를 감안하면 독보적인 성과였다. 다큐멘터리 수상실적도 2007년에 비해 10배 가까이 올랐으며 EBS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도 크게 개선됐다.1 삼성은 2009 EBS의 변신을 가치혁신의 성공사례로 꼽고 사례 취재를 통해 임직원을 교육시키기도 했다. 강의 위주의 수능방송에서 고급 교양 교육방송으로의 변신을 성공적으로 해낸 점이 의미가 크다는 것이다. 2007년 편성기획부장으로 EBS의 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끈 김유열 EBS 학교교육본부장을 만났다.

 

2007년 편성기획부장으로

발령 났을 당시 EBS의 상황이 어땠나.

공사가 적자가 나는 일은 잘 없는데 당시 EBS가 경영적자를 냈다. 맨파워로 움직이는 언론사에서 구조조정을 하기란 쉽지 않다. 이때 그나마 손쉽게 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부분이 제작비였고, 자연스럽게 예산이 많이 줄었다. 공사가 되고 나서 가장 낮은 수준의 제작비를 받게 됐다. 제작비가 줄면 콘텐츠는 직격탄을 맞을 수밖에 없다. 편성기획부장으로서 콘텐츠 타격에 대한 걱정이 엄청났다. 한마디로 유례없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김유열 EBS 학교교육본부장(51)은 서울대에서 동양사학을 전공하고 서강대 언론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2000년과 2007년 각각 편성기획부장을 지내며 EBS 혁신을 주도했다.

 

당시 편성기획부장으로서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어떤 생각들을 했나.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그 안에서 최선의 성과를 낼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했다.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기존에 우리가 잘해오던 교육용 프로그램에 더해 다큐멘터리 분야를 집중 편성하기로 했다. 교육 관련 콘텐츠는 우리가 잘해오고 있었고 문제는 다큐멘터리 콘텐츠의 수준을 높이는 것이었다. ‘다큐프라임’ ‘세계테마기행’ ‘극한직업’ ‘리얼실험 프로젝트X’ ‘다큐 인’ ‘원더풀 사이언스등을 신설하는 안을 만들었다. 이를 통해 결과적으로 교육과 다큐멘터리라는 두 분야의 키워드를 EBS가 장악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편성기획부장으로 와서 가장 먼저 떠올린 단어는 혁신이었다. 제작비가 적다고 해서, 불충분하다고 해서 현재 시청률을 유지하는 것이 최선이 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나름대로 치열하게 고민해 편성계획안을 구성했다. 우선 프라임 타임대인 오후7∼11시에 어린이용 프로그램과 뉴스를 제외하고는 스튜디오에서 만드는 프로그램을 거의 다 없앴다. 그리고 세계테마기행, 극한직업, 다큐프라임, 해외 다큐멘터리 등을 매일 내보내기로 했다. 이렇게 저렇게 머리를 굴려보니 프라임 타임대의 기존 프로그램 70%가 폐지됐다. 시대의 초상, 시사-세상에 말걸다 등의 프로그램이 없어졌다. KBS로 치면 저녁 9시 뉴스, 월화드라마, 수목드라마 등이 다 폐지된 셈이었다.

 

 

매일 다큐멘터리를 내보내려니 당연히 비용이 고민이었다. 다큐멘터리는 여러 장르 가운데서도 가장 비용이 많이 드는 장르다. 어떻게 할 것인가. 내가 내린 답은반복해서 사용할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들자라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1000만 원짜리 다큐멘터리 세 개를 만들면 3000만 원이 든다. 3000만 원짜리 다큐멘터리 하나 만들어서 세 번 틀어도 3000만 원이다. 똑같은 돈이 든다. 보통 문화상품이라는 건 일정 수준의 감동을 넘어야 가치가 발현된다. 3000만 원짜리 한 편을 세 번 보는 게 감동적일까, 1000만 원짜리 세 번을 한 번씩 보는 게 감동적일까. 고심 끝에반복해서 사용할 수 있는, 고품질의 콘텐츠를 만드는 게 낫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1000만 원짜리 프로그램 하나, 1500만 원짜리 프로그램 세 개를 폐지하고 5000만 원짜리 다큐멘터리를 만들기로 했다. 이 생각은콘텐츠는 내구재인가, 소비재인가하는 질문에서 시작된 것이기도 하다. 경영학 책을 읽다보니 문득 이런 궁금증이 생겼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결론은 간단했다. 소비재처럼 만들면 소비재, 내구재처럼 만들면 내구재인 것이다. ‘벤허’ ‘로마의 휴일’ ‘톰과 제리는 아빠와 아들이 함께 보는 작품이다.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지루해지는 작품이 아니다. 이처럼 쓰고 또 써도 줄지 않는, 오히려 가치가 커지는 콘텐츠를 만들고 싶었다.결론을 말하자면 효과가 있었다. 다큐프라임은 현재 40%를 반복 사용하고 있다. 우리의 계획이 실현됐다. 덕분에 우리가 원했던 대로 갑갑한 스튜디오 프로그램 대신 하늘에 닿을 듯한 고지대의 고대 도시와 사막의 밤하늘에서 무수히 쏟아지는 별들, 휘황찬란한 오로라와 하얗게 부서지는 바다, 또 빈민촌의 아이들이 보여주는 천진난만한 웃음 등을 그대로 전달할 수 있었다. 기존의 것에서 가치가 덜한 것은 빼고, 가치 있는 것들은 극대화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믿었고 그렇게 계획을 짰다.

 

제작비가 많이 드는 다큐멘터리로의 집중을 선택했다.

비용과 콘텐츠의 균형을 어떻게 맞췄나.

고품질의 프로그램을 생산하고 편성하지만 동시에 여러 방면에서 비용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야 했다. 고품질과 저비용, 서로 상반되는 말처럼 들리지만 어딘가에서 균형추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우선 다큐멘터리 중심으로 간 이상 해외 취재는 많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해 여러 언론사에서 해외 취재를 줄이는 추세였지만 EBS에서는 오히려 이를 늘렸다. 대신에 제작카메라를 바꿨다. 기존보다 작은 6㎜ 카메라를 도입해 해외 촬영 인력을 줄였다. 카메라맨, 출연자, 연출자 각 1명씩 총 3명이 한 팀을 이뤘다. 카메라 교체로 출장 인력을 절반 정도 줄일 수 있었다. 또 한 번 출장을 가면 한 회분만 찍는 것이 아니라 최소 4편 정도, 일주일치 분량을 촬영해오도록 했다. 어차피 출장비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항공료 등은 고정비이니 그 안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많은 영상을 담아오도록 한 것이다. 나중에 계산해보니 정말로 회당 원가가 대폭 삭감됐다. 사람들한테 말하면 깜짝 놀랄 정도로 제작비를 줄였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대책을 짜내니 방법이 나왔다.

 

생각해보면 고품질,

선택과 집중, 이런 것들은

EBS의 정체성과도 매우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인 것 같다.

 

파격적인 도전의 결과는 어땠나.

우리는 세계테마기행을 평일 오전과 오후, 또 일요일 저녁까지 해서 세 번씩 내보냈다. 가장 걱정됐던 건 콘텐츠의 반복 사용에 대한 소비자들의 반응이었다. 물론 우리는 질 좋은 콘텐츠를 내보내자고 했지만 소비자들로부터 항의를 받을 수도 있는 일이잖은가. 그런데 웬걸. 같은 영상을 여러 번 틀었는데 아무런 저항이 없었다. “왜 같은 프로그램을 계속 내보내느냐” “이상하다는 등의 전화나 피드백을 받은 적이 없다. 신기하게도 어떤 방송은 반복해서 내보낼수록 시청률이 올라갔다.

 

생각해보면 고품질, 선택과 집중, 이런 것들이 EBS의 정체성과 매우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인 것 같다. EBS의 대표 프로그램인 다큐프라임의 정신이 뭘까. 아카데미즘, 바로 학문주의다. 학문은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며,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변질되는 것이 아니다. 고전으로 불리는 책이나 영화는 수십 번 읽고 반복해서 봐도 매번 새롭게 되살아난다. 지금까지는 책을 위주로 한 고전이 많았는데 EBS는 동영상, 다큐멘터리도 고전의 가치를 지닌다는 걸 보여줬다. EBS는 다른 방송사처럼 시의성 있는 이슈들을 다루지 않는다. 수학, 문명, 진리 등과 관련한 영상을 만든다. 오늘, 내일, 그리고 몇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들로 프로그램을 만든다. 보통 시청률이 높은 방송사는 이처럼 완전히 혁신하기가 어렵다. 기존의 것을 바꿀 필요도, 의지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EBS는 시청률이 완전 바닥인데다 예산도 없었다. 도전해서 실패해도 상대적으로 잃을 게 없었던 셈이다. 그래서 이런 시도를 해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계획과 전략이 좋다고 해도 이것이 곧바로 결과물의

품질을 높여주는 것은 아니다.

교육·다큐멘터리 중심으로 EBS를 변신시킨다는 전략적 결단을 내린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이 프로젝트에 동참할 사람들을 모으는 것이었다. PD들을 대상으로 3주간 합숙 캠프를 진행할 계획을 짰다. 당시 EBS는 다큐멘터리 제작 경험이 풍부하지 않았다. 이런 단점을 극복하고 전략적 콘셉트를 지켜가기 위해서는 장기간의 공동 기획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특수부대를 창설하는 각오로 팀 구성작업에 돌입했다. 경험은 다소 부족할지라도 EBS의 미래를 이끌어갈 수 있는 젊은 PD를 포함해 국장급, 부장급 등 총 17명의 PD를 모았다. 전체 PD 인력 중에 약 30% 정도였다. 후배들을 일일이 만나면서 이 프로젝트에 힘을 모아 달라고 부탁했다. 태어난 지 1년도 채 안 되는 아기가 있음에도 합숙에 참여한 PD가 있을 정도로 EBS PD들의 혁신에 대한 의지는 뜨거웠다.

 

캠프는 엄격하게 진행됐다. 3주 동안 주말을 제외하고 특별한 이유 없이는 외출도 허용되지 않았다. 이런 일은 EBS에서 전무후무했다. 신입도 아니고, 그것도 자기 고집이 센 PD들에게 이런 방식의 프로그램에 대한 동의를 얻고 그들을 열정적으로 참여시킨다는 게 쉬운 일이겠는가. 오전에는 사내외 전문가 특강, 명작 다큐멘터리 시사가 있었고, 오후에는 공동기획, 밤에는 팀워크 훈련 등을 했다. PD들은 매일 일정 개수의 아이템을 내야 했다.

 

다큐멘터리 제작 수준을 높이기 위한 취지가 강했지만 단순히 다큐멘터리에만 초점을 맞추진 않았다. 합숙 프로그램에서 강연 분야를 다양하게 구성했다. 마케팅, 글로벌, 광고, 출판, 영화, 컴퓨터그래픽 등의 분야에서 전문가를 불렀다. ‘내셔널지오그래픽관계자를 초대하기도 했다. 우리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중요한 것은 PD들의 창의성이었다. 아이템 제출은 짧은 시간 동안 여러 개를 내게 하는 방식으로 했다. 오랜 고민은 자칫 창의력을 잃게 하고 안전한 길만을 선택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순간적인 통찰력에서 의외의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뒀다. 일종의 브레인스토밍 방식이었다. 수업을 듣고, 매일 아이디어를 짜내야 하는 힘든 과정이었지만 PD들은 지치지 않았다. 정규 교육이 끝나도 자발적으로 새벽까지 남아서 아이템 토론을 계속할 정도였다. 결과적으로 3주 합숙교육은 원래 실력 있던 PD들을 한 단계 더 성장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것이 퀄리티로 이어진 것 같다.

 

 

 

합숙에서 여러 가지 일들을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초점을 맞췄던 것은 무엇이었나.

합숙에서 이런 말을 했다. “경험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어디를 보고 있느냐하는 것이라고. 사람들은 흔히 작품을 만드는 것은 손과 발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작품은 눈으로 만드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면 처음부터 와플을 만들려고 하면 힘들다. 그런데 와플을 만드는 모습을 보여주고 유사품을 만들라고 하면 쉽다. 초등학생도 할 수 있다. 갑자기 유명 스포츠카를 만들라고 하면 못하지만 나무를 깎아서 그와 비슷한 모양을 만들라고 하면 할 수 있다. 사실 인간의 보편적인 능력은 비슷하다. 천재적인 머리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사람도 있지만 그들은 실제 0.1%에 불과하다.

 

어떤 것을 보느냐에 따라서 사람의 능력은 아주 달라진다. 내가 보는 것 이상으로, 꿈꾸는 것 이상으로 실현되는 일은 없다. 에베레스트를 올라가겠다고 마음먹은 사람만이 에베레스트를 오를 수 있다. 겨우 뒷동산이나 오르겠다고 하는 사람은 절대로 에베레스트를 오를 수 없다. BBC 다큐멘터리 수준의 작품을 만들겠다고 작정하고 노력하면 BBC 수준으로 만들 수 있다. 무엇을 바라본다는 건 사실은 모든 일의 시작인 셈이다. 어떤 것의 100%를 못하더라도 그것의 80% 이상은 만들 수 있다. 그래서 PD들에게 매일 BBC, NHK 다큐멘터리를 보여줬다. 최소한 NHK 다큐멘터리 수준을 넘는 작품을 만들자고 했다.BBC처럼 사전 제작 형식으로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이렇게 우리의 비전을 만들었다. 비전을 세워놓은 다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이것을 달성할 수 있을까를 다 함께 고민했다. BBC, NHK에서 만든 것을 보고 그들이 만드는 방식과 방향성 등을 공부했다. 쉽게 말해 벤치마킹을 한 거다.

 

합숙에서 가장 중요했던 건 우리도 세계적인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꿈을 공유하는 것이었다. 기술적인 부분에 대한 공부도 있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최고를 향한 꿈을 공유하는 시간이었다. 혼자만 하는 건 시스템화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같이 꿈을 꾸면 이루기가 더 쉽다. 옆의 사람이 꿈을 꾸고, 그 주변 사람까지 꿈을 꾸면 그 꿈은 막연한 몽상이 아니고 실현될 가능성이 있는 꿈이 된다. 그래서 매일같이 유명 다큐멘터리를 보고우리는 저런 걸 만들어야 하는 숙명을 가진 자들이다라고 강조했다.

 

흔히 예술을 한다고 하면 사람들은 함정에 빠진다. 예술은 굉장히 창의적인 활동이라천재들만 잘할 수 있다라는 편견을 갖는 것이다. 사실은 예술에 꼭 필요한 창의성도 기획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내가 한국 최초로 공룡 관련 다큐멘터리를 만들겠다고 하자. BBC에는 이미 100% 컴퓨터그래픽(CG) 형식으로 만든 공룡 다큐멘터리 ‘Walking with Dinosaur’가 있다. 수준이 굉장히 높다. 근데 우리는 한반도의 공룡으로 작품을 만드는 거다. 한반도 공룡 전문가와 함께 한반도 공룡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를 만들면 그것은 BBC의 다큐멘터리를 따라 한 것이 아니다. 완전히 새로운 훌륭한 다큐멘터리가 창조되는 것이다. 이렇게 새로운 작품도 기획될 수 있다. 다양한 것들에서 통찰력과 아이디어를 얻어 최고의 것이 탄생된다. 나는 이것들이 가능하다고 믿었고, 우리 동료들을 믿었다. ‘우리는 해낼 수 있어’ ‘EBS의 미래가 우리의 어깨에 달려 있다’ ‘우리가 해내야 해라는 말들을 많이 했다.

 

이렇게 했더니 정말 놀라운 결과를 불러왔다. 3주 동안 PD들이 새로운 사람으로 변했다. 합숙에서 했던 말들은 일종의 제사의식 같은 것이었는데, 이게 PD들에게 어떤 공통의 스피릿을 불러왔다. 공격명령만 내리면 바로 고지를 점령할 의지에 불탄 특급용사로 변신한 것이다. 콘텐츠를 강화하자고 해도 잘 안 된다고? 작품 하나의 세세한 전략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사람들에게 세계 최고가 될 수 있다는 꿈을 심어주고 그것을 조직원 여럿이 공유하면 된다. 그렇게 하니 놀라운 결과로 돌아왔다.

 

많은 기업들이 비전을 공유하고 조직원들의 참여를

이끌기 위해 노력하지만 실패한다.

EBS는 무엇이 달랐나.

공유와 참여다. 여러 기업에서 이 말들은 오직 언어적으로만 존재한다. 실질적으로 조직원들을 참여시키는 곳이 생각보다 적다. 관련 자료를 나눠주고 같이 본다고 해서 뭔가를 공유하는 게 아니다. 공유는 삶 속에서, 스킨십을 하면서 이뤄진다. 우리는 3주 동안 단체합숙을 한 것이 도움이 됐다. 우리는 합숙에서 PD들이 낸 아이디어를 매일 전원 참여 방식으로 평가했다. 일명 공모방식으로, 아이디어에 대해 합숙 참가자 25명 전원이 찬반투표를 할 수 있었다. 아이디어가 통과되면 사전제작방식으로 자신이 원하는 다큐멘터리를 만들 수 있도록 했다. 특정 동물이 사라진 과정을 재현하는 것, 심리실험을 하는 것 등 기존에 없던 형식의 아이템들이 많이 나왔다.

 

다큐멘터리 위주의 개편을 하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무엇인가.

다큐멘터리란 장르는 태생부터 교육적이다. 교육적 메시지를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그릇이 다큐멘터리라고 믿었다. 영국의 존 그리어슨이 1926 28 <뉴욕 선(The New York Sun)>지에서 다큐멘터리란 말을 처음 사용했는데기록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의미로 쓰였다. 평소 어린이와 교육용 프로그램을 만들어온 EBS에는 가장 적합한 장르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에서 다큐멘터리는 교양인의 장르임에도 불구하고 비용이 많이 들고 시청률이 낮다는 이유 때문에 여러 방송사에서 외면을 받았다. 국민들로부터 칭찬을 들을 수 있고 교육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효과적이라면 EBS로서는 다큐멘터리에 목맬 가치가 충분한 거 아닌가.

 

2000년 편성기획부장일 때 EBS는 어린이 교육을 타깃으로 해서 선택과 집중을 했다. 이때의 성공 경험이 다큐멘터리 중심으로 편성안을 개편하는 데 큰 힘이 됐다. 2000년 공사가 된 후 어린이 콘텐츠 비율을 크게 확대했다. 당시만 해도 어린이 분야에서 시청률이 지상파 방송 4사 가운데 4위였다. 그런데 유아·어린이로 TV 콘텐츠를 집중하면서 관련 프로그램 편성비율을 획기적으로 늘렸다. 1200분에서 거의 4배인 4500분까지 편성해 편성비율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기도 했다. 이렇게 집중하니 EBS는 어린이 채널이라는 인식이 강화됐다. 2006년부터 어린이 분야에서 EBS가 시청률 1위를 차지했다. 어린이들의 활동시간에 EBS를 틀면 언제나 자신들이 좋아하는 프로그램이 나왔다. 커피는 스타벅스, 자동차는 벤츠, 스마트폰은 애플처럼 어린이 프로그램은 EBS라는 인식이 각인된 것이다. 다큐멘터리도 다르지 않다고 봤다. 저녁 시간대를 다큐멘터리로 꽉 채우면 이 장르를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이 EBS를 볼 것이라 생각했다. 니치마켓에서 1등을 하는 것이 경쟁마켓에서 꼴찌를 하는 것보다 낫다. 경쟁마켓에서는 블록버스터로 승부를 봐야 하지만 니치마켓에서 니치버스터2 로 족하다. 블록버스터나 니치버스터가 수익 측면에선 비슷하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다큐멘터리 분야 시청률에서 1등을 하는 것이 여러 측면에서 나을 것이라 판단했다.

 

 

스티브 잡스를 예로 들어보자. 스티브 잡스가 회사에서 쫓겨났다 돌아오면서 제품의 종류를 4종으로 줄였다. 기존 제품 70%를 없앴다. 애플이 추구한 것은 하나의 이데올로기와 심플함이었다. 한 카테고리 안에서 하나의 제품을 만드는 기업과 여러 개의 제품을 만드는 기업 중에서 소비자들에게 더 강한 인상을 줄 수 있는 기업은 어느 쪽일까. 바로 전자(前者). 제품이 여러 가지면 파는 사람도 속속들이 알기 어렵다. 삼성전자 제품 26가지를 260번 노출시키려면 각각 10번씩의 기회밖에 없다. 하지만 애플은 오로지 하나의 제품으로 260번을 노출시킬 수 있다. 또 하나의 예를 들면 독일의알디라는 슈퍼마켓 체인이 있다. 여기에는 총 품목이 700개 정도다. 하나의 호치키스, 하나의 포스트잇만 취급한다. 반대로 월마트는 한 매장에 15만 개 정도의 상품이 있다고 한다. 집중과 선택이라는 전략을 통해 알디는 원가경쟁력을 높이고 품질경쟁력도 높일 수 있다.

 

EBS는 집중을 통해다큐멘터리와 어린이 프로그램은 EBS라는 등식을 심었다. 누구나 채널 레파토리는 정해져 있다. 무제한이 아니다. 보통 사람들은 한 5∼6개 정도다. 현재 PP까지 포함하면 채널이 수백 개다. 그중에 다큐멘터리, 어린이라는 장르를 장악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해냈고, 앞으로 이런 추세는 더 강화될 것이라 기대한다. 다큐멘터리를 주로 보는 세대가 40대 이상인데 갈수록 이쪽 인구가 두터워지고 있다. 시장이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지금 2%대의 시청률을 내고 있는데 3%대까지 올라갈 것으로 예상된다.

 

요즘에는 기존에 없던 것들이 고정자산의 역할을 톡톡히 하는 시대다. IPTV와 넷플릭스 등에서는 과거의 아카이브에 있던 것을 꺼내서 돈을 벌고 있다. VOD 시대가 오면서 영화도 고정자산이 됐다. 2007년 개편과 함께 EBS에서는 다큐멘터리도 고정자산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한 다큐멘터리의 가치는 1년이 지나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점차적으로 감가상각이 된다고 보자. 100억 원짜리 작품을 만들고 내구연한이 10년이라고 하면 그 아이템이 내년에는 90억 원짜리가 된다. 그런데 여기에다 100억 원짜리 작품을 또 하나 만들면 EBS 190억 원의 가치를 소유하게 된다. 작품을 만들수록 가치는 늘어난다. 사람들은 EBS를 보면서 얼마나 돈이 많아서 ‘5000만 원짜리 다큐멘터리를 매일 틀 수 있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사람들의 인식에서 평가하는 자산가치가 있는데 우리는 그 가치를 얻는 것이다. 이렇게 시간이 지나면 모든 다큐멘터리는 EBS의 훌륭한 자산이 될 것이다. 실제 EBS 아카이브에 소장된 다큐멘터리의 가치는 이미 엄청나다. 다른 방송사의 프로그램은 다큐멘터리만큼의 지속적인 가치를 보장하기가 힘들다. 이것이가치혁신이고, 나는 이 전략을 가지고 EBS의 가치를 설계했다. 다큐멘터리 위주의 개편안은 옳았다고 생각한다.

 

아이디어는 어디에서 얻나.

이 문제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내가 언제, 어디에서 프로그램 아이디어를 떠올릴까. 거의 90%는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떠올린 것이었다. 아이디어는 번잡한 회의 속에서 잘 나오지 않는다. 고독하게 혼자 있을 때 나오는 것 같다. 세계적인 천재들이 3B라고 말하지 않았나. 3B는 침대(BED), 욕실(BATH), 벤치(BENCH)에서 창의적인 아이디어들이 많이 나왔음을 일컫는 표현이다. 나도 그랬다. 실제로 혼자 있는 차 안에서 많은 아이디어를 떠올랐다. 그 때문에 출근하는 일이 굉장히 흥분되고 짜릿했다. 차를 타면 상상가, 몽상가가 됐다. 차 안에서 세계테마기행, 다큐프라임, 한국기행, 다문화부부열전, 달라졌어요 등 대부분의 핵심 아이디어가 나왔다. 그래서 나는 누구에게나 절대고독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시간을 하루에 30분 이상 갖는 건 창의력을 키우는 데 크게 도움을 줄 것이다. 사람들이 차에 타서 음악을 듣는 대신 망상의 습관을 가지길 추천한다.

 

하지만 망상이 다가 아니다. 이것을 구체화하고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학습과 지식이 필요하다. 학습을 함으로써 단순히 새로운 내용을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내 인식 속에서 다른 것들과 유기적으로 얽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야 한다. 단순히 책을 읽으란 것이 아니다. 책을 읽고 망상을 하고, 자신만의 것을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책에는 수많은 망상과 상상의 모티브가 있다. 독서와 학습은 상상의 방아쇠를 당겨 현실적인 아이디어를 내놓게 만든다. 그때 기록하면 좋은 결과물을 낼 수 있다. 아이디어를 내는 것은 천재들의 높은 아이큐와는 상관이 없다. 어떤 고민과 해결법을 찾기 위해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공부하다 보면 뭔가가 나온다. 꾸준한 학습을 하면 어떤 고민의 순간에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나는 늘 EBS는 무엇을 먹고살 것인가를 고민한다. 그래서 책을 읽으면서, 학습을 하면서 이것들을 어떻게 EBS에 긍정적으로 결합시킬 수 있을지 생각하고 아이디어를 구상했다.

 

EBS의 성공 비결은 무엇이었다고 생각하나.

지금의 시대정신은 감성이다. 계몽주의는 없다. 감성, 그리고 진정성이 없으면 사람들을 사로잡기 힘들다. 제일기획에서 EBS의 부상에 대해 분석한 것도 진정성, REAL이었다. EBS 다큐멘터리의 핵심은 진정성이다. 시대정신이랑 굉장히 잘 맞아떨어진 거다. EBS 프로그램은 여러 가지 것들에 찌들고 지친 사람들을 받아주고 있다. 여러 가지 정보가 피곤할 정도로, 우리를 압도할 정도로 넘친다. 그런데 세계테마여행 등은 아무런 자극적인 정보도 제공하지 않는다. 그냥 세계의 풍경에 풍덩 빠지도록 했다. 청명한 하늘과 캄보디아에서 발가벗고 개울가에 풍덩 몸을 담그는 아이들을 보고 사람들은 스스로를 치유하는 것이다. 스튜디오를 일부러 알록달록 화려하게 꾸밀 필요도 없다. 이런 것이 성공의 힘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떤 콘텐츠든 예전처럼 화려하고 장엄하기만 한 것들은 이제 한물갔다. 현실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EBS 다큐멘터리에서 실제 사람들의 삶을 생생하게 보여준 것이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 같다.

 

EBS 개편 과정에서 반대 의견이 많았을 것이다.

어떻게 극복했나.

프로그램 하나를 폐지한다고 해도 반발이 엄청나다. PD들에게 자신이 만드는 프로그램은 종종 자식으로 비유되기도 할 정도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프로그램을 폐지하는 것을 ‘Killing the baby’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런데 무려 프로그램의 70%를 폐지했으니 반발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경영진이 보내준 절대적 신뢰 덕분이다. 당시 사장은 교육부 관료 출신으로 방송에 편견이 없는 분이였다. 내가사전 제작해서 좋은 프로그램을 내놓을 테니 1년만 기다려 주세요라고 했을 때 날 믿어줬다. 어떤 반발이 들어와도, 어떤 문제제기가 들어와도 기다려달라고 했는데 그렇게 해주신 거다. 경영진이 주변의 다른 말들에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고 편성라인에서 올린 편성안을 거의 100% 수용했다. 제작예산 범위 내에서 최대한의 자율성을 보장했다. 동료들의 지원도 큰 도움을 줬다. 처음에 비현실적이라며 의구심을 갖던 동료들은 3주간의 합숙 캠프 후 스스로 다큐멘터리의 훌륭한 창조자가 됐고 이들이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줬다.

 

EBS 개혁을 시도하면서 느낀 게 있는데 그것이 바로 열외와 소외였다. 기존보다 많은 제작비를 투입해서 1년에 2∼3개 뛰어난 작품을 만들고 싶어 하지, 누가 1500만 원짜리 다큐멘터리만 만들고 싶겠나. 모든 사람에게 같은 기회를 줄 수 없다는 게 힘들었다.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공모 시스템을 운영했다. 상사가 지정한 PD들만 선택받는 게 아니라 좋은 아이디어를 제공한 사람이 기회를 잡을 수 있는 방식을 만들었다. 이 덕분에 실제 다큐프라임에 응모했던 90% 이상의 PD가 한 번 이상 다큐프라임을 제작할 수 있었다. 응모제에서 선택된 작품인 만큼 수준이 뛰어났음은 물론이다.

 

또 하나 느낀 것은 절대 타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10을 집어넣어야만 성공한다고 하자. 그런데 주위에서하나만 봐 줘’ ‘한 번만 빼줘이런 말들을 한다. 대개의 경우는 타협한다. 주변에서 반발하면 적당히 다독거리고 의견을 수용해서 원안을 수정한다. 그때 마음이 약해져서 하나를 빼주면, 그게 바로 실패로 가는 길이 될 수 있다. 개혁하려면 십자가를 짊어질 각오를 해야 한다. 욕먹을 각오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어차피 실패하면 모든 걸 책임지게 돼 있다. 성공에는 주인이 많아도 실패에는 주인이 없는 법이다. 그래서 나는 성패의 갈림길에 섰다고 판단되면 그 어느 하나도 타협하지 않았다. ‘정말로 이렇게 해야 성공하겠다라는 확신이 들면 그 어느 누구하고도 타협을 해서는 안 된다.

 

정지영 기자 jjy201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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