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회원가입|고객센터
Top
검색버튼 메뉴버튼

히타치 턴어라운드

“회사가 침몰하면 내가 최후에 탈출한다” 경영자의 배수진, 혁신의 키가 되다

이우광 | 163호 (2014년 10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 전략,혁신

 

히타치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큰 손실을 기록하며 위기에 빠졌다. 당시 히타치 회장은 본사 부사장을 끝으로 자회사의 명예직을 전전하던 가와무라 다카시를 사장 겸 회장으로 발탁했다. 위기에 빠진 히타치는 외부인의 눈으로 위기를 진단해야 했다. 그래서 60대 후반의흘러간 인사까지 불러서 방향키를 맡겼다. 이런 결단은 성공이었다. 가와무라 회장과 경영진은 히타치의 정체성을소셜이노베이션으로 정하고 체질 개선에 나섰다. 사회 인프라 사업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히타치의 강점을 최대한 살린 결정이었다. 이후 수익을 내더라도 정체성을 살리지 못하거나 중장기적으로 적자가 예상되는 사업은 과감히 정리했다. 그 결과 매출액은 줄었으나 위기에서 벗어났으며 재무제표는 흑자로 돌아섰다. 히타치의 회생은 중국 기업에게 쫓기는 한국 기업에게 시사점을 남긴다. 향후에도 IT 분야에서 경쟁력을 되찾기 어렵다고 판단한 히타치는 다른 일본 전자업체와는 달리 여전히 일본 기업들이 강하게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는 사회 인프라 분야에 집중했고 결국 위기에서 벗어났다.

 

명암 엇갈리는 소니와 히타치

2014 9월 소니는 1958년 상장 이래 처음으로 무배당을 발표했다. 2015년도 적자가 2300억 엔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 4684억 엔의 적자를 낸 이후 아직도 적자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편 2009 3월 히타치제작소(이하 히타치)는 소니보다 훨씬 많은 7873억 엔의 손실을 기록했다. 당시 일본의 제조기업이 낸 적자 규모로는 최대였다. 그것도 창업 100주년인 2010년을 바로 1년 앞둔 시점에서 기록한 성적표다.

 

그러던 히타치가 2014 3월에는 5328억 엔이라는 영업이익을 기록했다. 히타치에게는거함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소니가 TV·휴대폰 등 주로 IT사업에 주력하는 기업이라면 히타치는 전력과 철도, 수도, 정보통신, 가전 등 거의 모든 분야의 전자사업에 손을 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내에서는대마불사의식이 팽배해침몰하는 거함에 비유되기도 했다. 침몰 위기의 거함이 새롭게 순항하기 시작하고 있다. 무엇이 일본 전자산업을 대표하는 두 기업의 명암을 갈랐을까?

 

히타치 개혁의 성공 요인으로 이단아의 반란을 빼놓을 수 없다. 가와무라 다카시(川村隆史) 전 회장과 나카니시 히로아키(中西宏明) 현 회장이 이단아 반란의 주역이다. 두 사람은 침몰하는 거함을 개조했다. 이들이 히타치를 어떻게 개혁했는지 그 과정을 살펴보자.

 

뜻밖의 인사가 개혁 주도자로 등장

히타치 개혁은 2009 3월 실시한 기상천외한 사장단 인사에서 시작됐다. 2003년 히타치 본사 부사장을 마지막으로 퇴사한 후, 자회사의 명예직을 전전하던 가와무라를 회장 겸 사장으로 발탁한 것이다. 히타치는 한 번 사장으로 발탁되면 8∼10년은 자리를 유지하는 게 관행이었다. 1999년 쇼야마 에츠히코(庄山悅彦)가 신임 사장으로 취임했기 때문에 당시 부사장이었던 가와무라에게는 사실상 사장이 될 가능성이 사라졌다. 그런 인물이 위기의 히타치를 구원할 회장 겸 사장으로 발탁되자 히타치에서는 물론 경제계 안팎이 크게 놀랐다. 이미 사내 경쟁에서 탈락했던 인물이 부활했기 때문이다. 이뿐만 아니다. 가와무라와 함께 개혁을 추진할 부사장 5명의 인사도 예상 밖이었다. 미국 자회사에서 불려온 나카니시를 비롯해 국내 자회사에서 2, 영업·정보통신 책임자 등에서 발탁됐다. 당시 히타치의 경영을 책임지던 임원은 아무도 없었다. 이제 이단아들이 일본 최대 전자기업인 히타치 경영에 전면 등장한 것이다. 이런 인사를 두고경영진의 나이가 점점 젊어지는 게 추세인데, 시대에 역행하는 것은 아닌가” “히타치에 그 정도밖에 인재가 없는가라는 비판이 들끓었다. 당시 가와무라는 이미 69세로 은퇴를 눈앞에 둔흘러간 사람에 불과했다.

 

가와무라 역시 회장이었던 쇼야마에게서 사장 취임 요청을 받았을 때 당황했다. 그리고 고민했다. 지인들은히타치 적자가 7000억 엔을 넘는다” “만년을 더럽히느니 거절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하룻밤을 고민한 후 그는 곧 승낙했다. 자회사를 돌며 밖에서 히타치 본사의 문제점에 대해 느낀 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현재 히타치는 외부에서 히타치를 바라본 사람에게 개혁을 맡길 수밖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도 이해하고 있었다. 매출이 10조 엔이 넘는 거대한 본사는 전략의 명확성과 결단의 스피드가 떨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규모가 작은 자회사 경영에서는 재무상황을 보며 전략을 즉시 수립하고 빠른 결단을 내릴 수가 있다. 위기에 봉착한 히타치는 그런 경영자가 필요했다. 가와무라는 자회사 경영을 경험한 자신에게 위기의 히타치를 빨리 개혁하라고시곗바늘을 되돌린 인사를 단행한 쇼야마의 결단이 옳다고 생각했다. 대신 그는 사장과 회장을 겸직하겠다는 조건을 걸었다. 비상사태에는 스피드가 무엇보다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가와무라는 스스로가 히타치의라스트 맨(last man)’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가 이렇게 결심한 배경에는 2가지 에피소드가 얽혀 있다. 하나는 히타치공장 설계과장 시절 공장장에게 배운 라스트 맨 정신이다. 당시 공장장은내가 창문을 뒤로하고 앉아 있는 이유는 허세를 부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공장이 침몰하면 직원들이 먼저 탈출하고 나는 마지막에 창을 부수고 탈출하기 위해서다라고 말했다. 경영자는 회사가 망하는 최후까지 남아서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는라스트 맨 정신이 각인됐다.

 

 

또 다른 에피소드는 그가 직접 겪은 1999 7월 발생한 항공기 납치 사건이다. 당시 업무로 하네다발 홋카이도행 비행기를 탔는데, 흉기를 든 납치범이 조종실에 들어가 기장의 조종간을 탈취했다. 비행기 마니아인 범인은 기수를 바꿨고 비행기는 지상에 있는 자동차가 확실하게 보일 정도로 낮게 날았다. 당시 기내에는 비번인 베테랑 조종사가 지역 이동을 위해 타고 있었다. 위기상황을 알아챈 비번 조종사는 승객에게 협조를 구해 조종실 문을 열고 들어가 범인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했고 조종간을 간신히 끌어올려 지상 300미터까지 내려간 비행기를 다시 날아오르게 했다. 비행기는 다시 하네다로 돌아왔고 조종사를 뺀 나머지 승무원과 승객은 무사했다. 당시 승무원들은 비상상황 매뉴얼에 따라안심하세요라고만 말했을 뿐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했다. 비번 조종사는 비행기가 위기상황임을 알아채고 위험하다는 승무원의 제지를 무릅쓰고 조종실에 들어가 조종간을 빼앗았다. 가와무라는 이런 위기의 상황에서 라스트 맨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겼다. 또 그는경영자가 된다면 스스로 라스트 맨이 돼야 한다고 다짐했다. 이런 각오를 발휘할 기회가 가와무라에게 찾아왔기 때문에 사장 취임을 승낙한 것이다.

 

 

히타치의 아이텐티티를 되찾다

개혁을 구상하던 5월 가와무라는 한 여직원에게 e메일을 받았다. 그녀는사람들은 이전에 히타치를 불침함이라고 불렀으나 지금은 침몰하는 거함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런 말보다 더 슬픈 것은 우리가 이미 이런 시선에 익숙해져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e메일을 읽은 가와무라는 영국 군함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군함은 출항하지 않더라도 매년 1㎝씩 가라앉고 운항속도가 느려져 결국 폐함하게 된다. 폐함은 배가 점점 낡아져서가 아니라 배의 중량이 매년 조금씩 늘어나기 때문이다. 승무원들이 함정 근무에 익숙해지면 개인 물품을 늘리는 게 폐함의 원인이다. 영국 해군은 사물 적재 규정을 엄격하게 정해 늘어난 개인 물품을 철저하게 검사한다. 가와무라는 히타치를 영군 군함에 비유해히타치 병을 치유하기로 했다.

 

먼저 가와무라가 주력한 것은 모든 사원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것이었다. 히타치의 아이덴티티를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히타치 창업자 오다이라 나미헤이(小平浪平)는 국산 전기기계 양산을 목표로 5마력 전동기를 제작해 회사를 세웠다. 히타치의 출발은 사회 인프라 사업과 기술이다. ‘오락의 소니, 생활의 마쓰시타, 인프라의 히타치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히타치의 기본은 역시 전력과 철도, 수도 등 사회 인프라다. 가와무라는 IT로 고도화된 사회 인프라의 실현을소셜이노베이션이라고 정의하고 종합전자회사가 아니라세계적인 소셜이노베이션 기업을 새로운 아이덴티티로 설정했다.

 

아이텐티티를 가장 먼저 고려한 이유는 회생을 위해서는 재무 건전정도 중요하지만 재무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으로는 지속적인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무엇을 위해서 일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임직원들에게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서는 기업은 미래 청사진을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임직원 36만 명에게 히타치가 한마음이 될 것을 호소했다. 전 세계 95곳의 사업소를 직접 방문하면서 주로 30대 과장급 직원들과 소통했다. 아이덴티티를 설정하고 임직원의 마음을 하나로 묶으며 사업 책임자들에게는 라스트 맨 정신을 강조했다.

 

당시 히타치에게 무엇보다도 시급한 과제는 공모를 통한 증자였다. 11월 공모 증자를 실시했다. 가와무라가 취임한 직후 히타치의 자기자본비율은 11.2%까지 내려갔고 자기자본이 1조 엔에도 미치지 못했다. 2010년에도 1000억 엔의 적자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자기자본비율은 10% 이하로 내려갈 것이 뻔했다. 자기자본비율이 10% 이하로 내려가는 회사의 주식이 시장에서 팔릴 리 만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모증자와 전환사채로 약 3500억 엔의 자본조달을 추진했다. 이미 발행한 33 7000만 주의 1.5배에 해당하는 48억 주를 증자하려는 것이다. 히타치의 증자는 27년 만이었다. 투자자들은지금 증자하면 주식은 3할 이상 떨어지는데 왜 증자하는지 모르겠다. 오히려 돈을 빌리는 게 낫지 않나라고 비난했다. 국내보다는 해외투자자의 비난이 더 매서웠다. “왜 회사를 이렇게까지 방치했는가등의 비난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가와무라는 성실하게 해외 투자설명회를 열었다. 당시 투자설명회는 증자를 위해 필요한 과정이었다. 하지만 히타치 개혁 관점에서 보면 부차적인 효과가 컸다. 경영성과를 외부에서 평가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고 기업을 제3자의 눈을 의식하면서 경영해야 한다는 교훈도 얻었다. 해외 투자설명회를 통해 말단 직원부터 경영진까지 모든 임직원이 내향적 경영에서 외향적 경영으로 체질을 개선하는 좋은 계기였다.

 

 

아이텐티티를 가장 먼저 고려한 이유는

회생을 위해서는 재무 건전정도 중요하지만

재무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으로는 지속적인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빠르고 과감한 부실사업 정리

가와무라는 의사결정을 신속하게 하기 위해 최고경영회의 구성원을 6명으로 줄였다. 가와무라와 새로 취임한 부사장 5명이 그 대상이었다. 가와무라는 5명의 부사장을 분신이라고 부르며 권한을 위임했다. 자신의 장점을 최대한 발휘하게 하는 의사결정 시스템을 만들었다. 취임 100일 이내에 가시적 성과를 내기 위해 경영회의 구성원 개혁공정표를 만들었다. 가장 큰 과제는종합전기회사라는 낡고 무거운 이미지를 벗고 전력, 철도 등 사회 인프라 사업에 어떻게 경영자원을 집중하느냐에 대한 것이다. 먼저 수익성이 없다고 판단되는 IT사업을 분리했다. 4월에는 비메모리반도체 자회사인 르네사스를 NEC와 통합하기로 했고, 9월에는 히타치플라즈마디스플레이 미야자키공장을 양도했다. 휴대전화사업도 조인트벤처로 분리했다. 반도체와 TV패널, 휴대폰 등 IT관련 부실사업을 모두 정리했다.

 

한편 주력사업 강화도 동시에 추진했다. 사회 인프라 사업에 집중하기로 했지만 7000억 엔이 넘는 적자를 낸 기업이 취할 수 있는 전략 선택의 폭은 넓지 않았다. 자금 여유가 없기 때문에 M&A로 주력 사업을 보강할 수 없다. 그래서 40개의 주요 자회사 중 사회 인프라 사업과 관련이 있는 회사는 완전 자회사로 남기고 그렇지 않는 자회사는 떼어낸다는 방침을 정했다. 수익성이 좋고 사회 인프라 사업과 관련이 깊은 그룹 상장 자회사 5개사를 100% 자회사로 만들어 수익이 밖으로 흘러나가지 않도록 했다. 이를 위해 TOB(공개매수)로 약 3000억 엔을 조달한다고 공표했다. 신속한 개혁은 거함, 느린 소 등의 오명을 불식시키기에 충분했다.

 

가와무라는 경영체질 개선에도 나섰다. 당시 히타치에서는 대마불사의 생각이 팽배해서 어느 사업부문의 수익성이 나빠져도어떻게 되겠지라는 생각이 지배했다. 가와무라는 이를 근본적으로 바꾸기 위해 각 사업부문(시스템사)을 독립채산제로 운영했다. 각 분야의 사장들은 기관투자가나 미디어를 불러 경영방침과 매출액을 공약하고 업적에 대한 신용평가를 받도록 했다. 실적이 좋으면 본사에서 자금을 지원했다. 지금까지 최종 의사결정은 본사 사장이 했다. 하지만 가와무라는 각 사업부문(시스템사) 사장이 라스트 맨으로 최종 의사결정을 내리도록 했다. 사업부문 사장들이 라스트 맨의 역할을 맡으면 생각을 바꿔야 했다. 적자가 발생하면 과거처럼 다른 사업부문으로 적자를 떠넘길 수 없게 됐다.

 

가와무라는 취임 1년 후인 2010 4월 사장직을 나카니시에게 넘겼다. 가와무라 회장, 나카니시 사장 2인 체제로 전환한 것이다. 가와무라는 라스트 맨으로 일단 위기의 히타치를 구해낸 것으로 자신의 역할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는 중장기적으로 사회 인프라 기업으로서 탄탄한 수익구조를 구축하는 게 시급한 과제라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부실사업뿐만 아니라 장래성이 없는 사업은 수익이 나더라도 과감하게 분리하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필요가 있었다. 이런 개혁은 자신보다는 나카니시가 적임자라고 판단했다. 실제 나카니시는 구조조정을 잘 진행했다.

 

2011 3월 당시 수익을 내고 있던 하드디스크드라이브(HDD) 사업을 매각하기로 했다. 히타치는 IT사업을 강화하려고 미국 IBM에서 HDD사업을 인수했으나 급격한 제품가격 하락으로 적자가 이어졌다. 나카니시는 구조개혁을 단행해 매각 당시 이 사업은 흑자로 전환했다. 하지만 사회 인프라 사업에 주력한다는 경영방침에 부합하지 않았다. 게다가 가격변동이 큰 위험 사업은 앞으로 거리를 두기로 했다. 히타치는 액정 디스플레이 사업에도 손을 대고 있었다. 당시 샤프와 파나소닉은 액정사업에 적극적인 설비투자를 진행하고 있었다. 반면 히타치는 대형 액정 디스플레이 사업을 파나소닉에 매각하고 중소형 액정사업도 본사에서 분리하기로 했다. 철수 판단이 다른 회사보다 빨랐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히타치는 샤프나 파나소닉과는 달리 TV사업에서 큰 어려움을 피할 수 있었다. 히타치는 왜 이런 판단을 했을까?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단지 현장 감각을 중시해 3∼5년이라는 중장기적 관점에서 사업을 판단한 결과다. 경쟁업체의 TV 사업장을 방문한 나카니시는 생산규모, 공정흐름 등을 자사와 비교했을 때 TV 사업이 3년 후에는 타사와 경쟁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비즈니스는 경쟁상대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상대의 가치를 냉정하게 판단해야 한다.

 

2012 11월 화력발전 사업을 미쓰비시중공업과 통합하기로 결정했다. 이 통합은 글로벌 경쟁기업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미국 GE가 프랑스 알스톰사를 매수하는 등 글로벌 시장이 재편되기 시작했다. 통합 법인의 히타치 출자비율은 35%에 불과했다. 하지만 경영 주도권을 미쓰비시에 양보해도 좋다고 생각한 것은 냉정하고 적절한 판단이었다. 지금까지 히타치는 GE에게 가스터빈을 조달해 국내 화력발전 수요에 대응하는 고객밀착형 비즈니스를 했다. 그러나 셰일가스의 등장으로 향후 화력발전사업은 천연가스컴바인드사이클형이 주류가 될 전망이다. 따라서 히타치의 비즈니스모델로는 글로벌로 비스니스를 진행하기에 어려움이 많다. 가스터빈을 제조할 수 있는 회사는 미국의 GE, 독일의 지멘스와 프랑스의 알스톰, 미쓰비시중공업밖에 없다. 3∼5년 이후 화력발전사업의 전망을 감안하면 경영권을 미쓰비시에 양도해도 합병하는 게 현명하다. 더 이상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2014 2월에 미쓰비시히타치파워시스템즈가 출범했다.

 

 

위기 봉착 2년 후인 2011 3월 히타치의 최종이익은 2388억 엔에 달했다. 2년 만에 V자 회복을 이뤄냈다. 그러나 나카니시는 개혁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2012 4월 조직을 인프라 시스템, 전력 시스템, 정보·통신 시스템, 건설·기계 시스템, 고기능재료 시스템 등 5개 영역으로 단순하게 나눴다. 나카니시는 “IT와 사회 인프라의 융합, 스마트시티 사업의 글로벌 확장, 빅데이터 활용으로 축적·검색·분석·예측 수요 대응을 중점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 조직을 개편했다라고 말했다.

 

 

경영진 선발 시스템도 개혁

나카니시는 2014 4월 사장 자리를 히가시하라 토시아키(東原敏昭) 부사장에게 물려주고 회장으로 물러났다. 4년 만에 사장이 교체됐다. 가와무라가 일찍부터 회장직에서 물러날 것을 선언했기 때문에 사내에서는 자연적으로 나카니시가 회장으로 물러날 것을 예상했다. 하지만 나카니시는 이런 분위기가 직원들이 까칠하지만 꼭 말해야 하는 소리를 하지 못하게 만드는 게 아닌지 우려했다. 나카니시는모두 지시만 기다리고 반대하는 사람이 없어지는 것이 제일 두려웠다. 히타치같이 다양한 사업을 하는 회사가 그런 상태로 가면 건전한 경영을 할 수 없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히타치는 사장 선발 시스템도 획기적으로 바꿨다. 과거에는 주로 회장이 차기 사장을 지명했지만 이런 관행에서 벗어나 투명성을 강화했다. 차기 사장을 선택하기 위해 1년 전부터 후보자 3명의 이름을 밝히고 이사회 등에서 면접을 진행했다. 유럽과 미국에서는 기업 이사회의 최대 미션은 차기 리더를 뽑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 기업에서 사장 후보자를 1년 전부터 거론하는 것 자체가 흔치 않는 일이다. 히타치는 외부 인사인 이사회의 위원장에게 사장 인사를 전부 위임하는 게 아니라 회장과 사장이 후보군 리스트를 정하면 이사회가 그들을 평가하고 이후 사업 현황이나 비즈니스 환경 등을 감안해 결정한다. 더불어 이사회도 2012 6월 외국인 사외이사를 3명으로 늘리는 등 사외이사 정원을 8명으로 확정했다. 전체 이사회 멤버 14명 중 과반 이상이 사외이사다.

 

히타치는 2012 7월 고속철도차량 596량을 영국에서 수주했다. 2014 4월 추가로 227량을 수주하고 보수사업까지도 확보했다. 이는 가와무라와 나카니시가 해외 정부와 유력인사를 대상으로 세일즈를 펼친 결과다. V자 회복과 사업구조 개혁에 성공한 히타치는 이제 글로벌화를 가속시키는 게 큰 과제다. 이는 해외 경험이 풍부한 히가시하라를 사장으로 선정한 배경이기도 하다. 히가시하라는해외를 해외로 생각하지 말라라며 글로벌화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히타치는 2015년도 경영목표를 매출액 10조 엔(2012년도 9조 엔), 영업이익 7% 이상( 4.9%), 해외 매출액 비중 50% 이상( 41%)으로 잡고 있다. 목표 달성을 위해 가장 중요한 요인은 해외시장에서 성장이다. 히타치의 지속적인 발전은 글로벌 시장에서 성공하느냐에 달려 있다.

 

히타치 개혁의 성적표와 교훈

히타치는 2013년 매출은 위기였던 2008년보다 3.5%가 줄어든 9 6162억 엔이다. IT 등 부실하거나 수익성이 없는 사업을 잘라내고 주력사업인 사회 인프라 사업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기업이 스스로 매출액을 줄이는 것은 쉬운 결단이 아니다. 히타치는 과감하게 이런 결정을 내렸다. 다음은 이익부분이다. 영업 이익과 이익률 모두 4배 이상 좋아졌다. 히타치의 사업구조 개혁이 성공하고 있다는 증거다. 10%를 밑돌 것을 우려했던 주주자본비율도 2013 24.1%로 높아졌다. 주주들을 설득하고 구조조정을 지속적으로 추진한 덕분이다. 그 결과 주가는 200엔 대에서 최근에는 800엔 대로 4배 이상 올랐다. 결국 히타치는 개혁 5년 만에 효율이 약 4배 이상 좋아진 것이다.

 

한국이나 중국이 따라오기가 쉽지 않은

사회 인프라 관련 전기·전자 사업에선 일본 기업이

여전히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 히타치는 이 같은

산업 흐름을 간파하고 발 빠르게 새로운 방향타를

잡았다. 샤프·소니 등이 한국 기업과 경쟁하기 위해

무리한 투자를 감행한 것과 대조적이다.

 

히타치 개혁의 성공요인

첫째는 쇼야마 전 회장의 과감한 인사다. 자회사 경영자를 최고경영자로 발탁한 이례적인 인사는 과감한 결단이었다. 비상수단이지만, 경영진 6명 전원을 주변부에서 발탁한 인사는 일본 기업의 관행을 고려할 때 쉽지 않은 선택이다. 쇼야마는 한 번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사람이 다시 일선에 나섰을 때 비장함과 결단력을 발휘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러한 예상은 적중했다. 또 주변부에서 발탁된 인사들이 위기를 훌륭하게 극복했다는 점은 히타치의 인재층이 그만큼 두텁기 때문이기도 하다.

 

둘째는 개혁의 주도자 가와무라가 위기를 대하는 자세다. 라스트 맨 정신을 자신뿐만 아니라 조직에도 침투시켜 대마불사의 기업문화를 바꿨다. 가와무라는신중한 낙관주의자라고 불린다. 의사결정은 신중하게 내리지만 행동은 신속하고 과감하다. 경영자에게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다.

 

셋째는 가와무라가 산업의 흐름을 읽는 통찰력이다. 반도체나 액정처럼 기술이 표준화되고 대량생산으로 범용화가 급속하게 진행된 산업에서는 히타치의 경쟁력이 떨어진다고 판단했다. 그는 과감하게 구조조정을 선택했다. 그는경영환경이 급변하고 갑자기 라이벌이 나타나는 사업은 점진적인 개선을 거듭하면서 기술을 축적해나가는 방법이 장기인 일본 기업에게 잘 맞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상대적으로 환경변화가 서서히 진행되고 생산현장 개선과 기술축적으로 강점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야말로 일본 기업이 잘할 수 있는 분야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히타치의 사업구조를 이런 방향으로 몰고 나갔다. 히타치가 다른 일본 전자기업보다 빨리 재생할 수 있었던 것은 가와무라의 통찰력이 적중한 결과다.

 

 

넷째는 기존의 사장단 인사 시스템을 과감하게 바꾼 점이다. 개혁 과정에서는 그때마다 핵심 과제가 다르기 마련이다. 히타치는 이러한 과정에 유연하게 대처하기 위해 기존 인사관행을 과감하게 타파하고 적합한 인사를 선발했다. 가와무라는 적자사업 분리에, 나카니시는 주력사업 강화에, 히가시하라는 사업 글로벌화에 치중했다. 모두 시대의 요청에 맞는 인사를 단행한 결과다. 기존의 인사 시스템에 연연하지 않고 사장 선발 등 기업지배구조까지 과감하게 바꾸는 히타치의 변화는 개혁을 성공으로 이끈 밑거름이다.

 

히타치의 회생은 일본 전자산업의 미래 전략에 많은 시사점을 준다. 향후 일본의 전자산업은 이미 경쟁력을 상실한 TV·휴대폰 등 IT산업에서 경쟁력을 회복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한국이나 중국이 따라오기가 쉽지 않은 사회 인프라 관련 전기·전자 사업에선 일본 기업이 여전히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 히타치는 이 같은 산업 흐름을 간파하고 발 빠르게 새로운 방향타를 잡았다. 샤프·소니 등이 한국 기업과 경쟁하기 위해 무리한 투자를 감행한 것과 대조적이다. 현재 중국 기업들이 한국 기업의 주력 분야에 빠르게 도전하고 있다. 한국 기업들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가 큰 과제다. 위기를 겪고 있는 많은 한국 기업에게 히타치 개혁은 큰 시사점을 준다.

 

이우광 한일산업기술협력재단 연구위원 wklee@kjc.or.kr

필자는 중앙대 통계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대 경제학연구과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1989년 삼성경제연구소에 입사해 주로 일본 경제와 산업·기업 등을 연구했고 일본연구팀장, 해외연구실장 등을 지냈다. 저서로 <일본재발견> <일본시장 진출의 성공비결, 비즈니스 신뢰> <도요타 : 존경받는 국민기업이 되는 길> 등이 있다.

  • 이우광 | - 한일산업기술협력재단 연구위원
    - <일본재발견>, <일본시장 진출의 성공비결,비즈니스 신뢰>, <도요타 : 존경받는 국민기업이 되는 길> 저자
    wklee@kjc.or.kr
    이 필자의 다른 기사 보기
인기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