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준식 아모레퍼시픽 브랜드 & 디자인 랩 상무
제품이나 서비스를 구매하는 과정은 일종의 경험이다. 특히 어떤 도시를 방문했을 때 해당국 고유의 브랜드를 현지에서 직접 경험하도록 만드는 것은 소비자에게 잊지 못할 기억을 선사한다. 아모레퍼시픽이 방문 관광객이 가장 많은 서울 명동에 마몽드플래그십 스토어를 선보인 것은 그 같은 이유다. 플래그십 스토어를 기획한 오준식 상무는 “소비자가 제품이나 서비스를 경험하게 하라”며 “개별적인 디자인이 아닌 전체적인 그림을 그려가는 광의의 브랜딩을 고민해야 할 때”라고 강조한다. |
이 기사의 제작에는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인턴연구원 최수정(고려대 경영학과 2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명동 한복판에 꽃이 피었다.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로 황금색으로 빛나는 아치형 파사드가 선명하게 들어온다. 구스타브 클림트가 그린 ‘키스’에서 쏟아질 것처럼 반짝이던 금색, 바로 그 색이다. 문을 열고 매장에 들어가면 본격적인 꽃밭이 펼쳐진다. 벽마다 꽃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 가득하다. 곳곳마다 색색의 꽃들이 자태를 뽐낸다. 벽면에 걸린 대형 스크린에도 꽃이 떴다. 국립발레단 소속 김리회 발레리나가 꽃과 어우러져 찍은 사진은 사람이 꽃인지, 꽃이 사람인지 알아보기 힘들다. 꽃에서 눈을 돌리면 화장품이 보인다. 단정하게 가지런한 화장품들은 특유의 향을 뿜어내며 곳곳의 꽃들과 어우러져 마치 만개한 꽃밭에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서울 명동에 자리 잡은 마몽드플래그십 스토어 얘기다.
아모레퍼시픽은마몽드라는 브랜드를 출시한 후 22년 만에 단독 브랜드로 플래그십 스토어를 열었다. 화장품을 단지 바르고 써버리는 소모품이 아니라 소비자가 직접 경험하고 느끼는 아름다움의 매개체로 본 결과물이다. 화장품을 고르고 구입하기 전에 아름다움 자체를 먼저 체험하고 느끼도록 하기 위한 공간이다. 꽃을 주제로 한 것도 그런 이유다. 화장품을 통해 사람은 향을 낸다. 색을 입는다. 마침내 꽃이 된다.
명동의마몽드플래그십 스토어가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어떤 목적으로 기획한 것인가.
아모레퍼시픽에 합류한 후 디자인실을브랜드&디자인 랩으로 바꿨다. 달라진 점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기업의 디자인 조직에서 하는 일은 비슷비슷하다. 제품 디자이너는 제품 패키지를 만든다. 인테리어 디자이너는 매장을 디자인한다. 그래픽 디자이너는 판촉물이나 홈페이지 등을 만든다. 그렇게 각 부서에서 만든 부산물의 총합을 아울러 마케팅이나 커뮤니케이션 부서에서 이름을 달고 포장을 한다. 그리고 소비자에게 전달한다. 문제는 이 모든 과정이 충분한 논의나 협의 없이 진행된다는 점이다. 이는 마치 식당에서 전식 만들어주는 사람과 본식 차려주는 사람, 디저트를 제공하는 사람과 와인 따라주는 사람이 전체적인 콘셉트나 순서, 나가는 간격 등을 의논하지 않고 각자 자신만의 생각에 따라 전달하는 것과 다름없다. 식당은 분명 준비한 먹을 것이나 마실 것을 제공하고 고객은 다 먹고 난 후 배가 부르겠지만 이 과정에는 섬세함이나 아름다움, 독특한 기억이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제품이나 서비스를 경험하는 소비자는 이 모든 과정을 한꺼번에 겪는다. 패키지 따로, 매장 따로, 홈페이지 따로, 각각을 별개로 인식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예컨대이번에 아모레퍼시픽 백화점 매장을 업그레이드하면서 궁극적으로 우리가 제공하는 서비스가 무엇인지를 고민했다. 아름다움, 우리는 아름다움을 전달하는 회사라고 생각했다. 여기에 초점을 두고 그에 맞는 서비스를 디자인하는 데 주력했다. 고객이 매장에 들어와서 보고 듣고 겪는 모든 경험을 디자인한다고 생각하고 작업했다. 고객이 매장에 처음 들어왔을 때 어떻게 쳐다봐야 할까? 어떻게 안내해서 매장의 어디쯤 앉게 해야 할까? 제품을 어떤 방식으로 소개해야 하는가? 수많은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답을 시나리오로 엮었다. 매장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의 의견을 모으고 디자이너들이 아이디어를 보탰다. 그 결과를 토대로 현장 직원과 제품, 그들이 서 있는 매장이 일관성 있는 메시지를 줄 수 있도록 디자인하는데 초점을 뒀다. 그렇게 하고 보니 제품을 디자인하는 사람과 인테리어를 하는 사람, VMD(Virtual Merchandising)하는 사람의 역할이 딱히 나눠지지 않았다. 온 가족이 모여 명절 밥상을 차린다고 할 때, 얻고자 하는 것은 결국 즐거운 식사 아닌가.1980년대 정해둔 효율의 공식 안에서 21세기에 요구되는 감성적인 비즈니스 터치는 얻기 어렵다.
현대카드에서도 전용 서체를 만들었고, 아모레퍼시픽으로 옮겨와서도 고유의 글씨체를 만들었다. 기업에 글씨체는 왜 중요한가.
오늘날 기업 활동의 대부분은 고객과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전개된다.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는 더더욱 많은 커뮤니케이션이 대화 아닌 활자로 이뤄질 것이다. 당장 우리만 봐도 그렇다. 통화보다는 문자를 통해 친구와 이야기하는 빈도가 훨씬 높지 않은가. 대부분의 대화가 활자로 이뤄진다는 점을 감안할 때 서체의 중요성은 날로 커질 것이다.
사실 서체는 그 기업의 말투다. 원래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던 서체는 명조체였다. 붓글씨를 본떠 획의 끝이 구부러진 서체다. 그러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근대화된 서체가 등장했다. 안상수 씨가 만든 안상수체다. 이후 우리나라에서 사용되던 많은 활자가 명조체에서 안상수체로 바뀌었다. 비유하자면 사회에서 통용되던 말투가 ‘아버님 진지 드셨어요?’에서 ‘아빠 밥 먹었어요?’로 바뀐 셈이다. 이건 세계 어디에서나 통하는 법칙이다. 사람이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느낌이 그렇다. 같은 맥락에서 기업이 그 자신의 고유 서체를 만든다는 것은 어떤 말투로 고객과 커뮤니케이션할 것인지 결정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무엇을 제공하는 기업이지? 고객과 어떻게 소통하는 기업이지? 주요 메시지는 무엇이지? 평소 우리 회사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투는 어떻지? 등을 파악하고 고민해서 정의해야 하는 작업이다. 우리는 여성적이면서도 섬세한 회사입니다, 또는 우리는 차가우면서도 냉철한 회사입니다 등 고객에게 전달하고 싶은 기업의 정체성을 말투, 즉 서체를 통해 가장 먼저 나타낼 수 있다. 커뮤니케이션 목적이나 의도를 근본적으로 고민하지 않고 그저 예쁘니까 또는 남들이 하니까 전용 서체를 만들겠다는 식의 접근은 차라리 하지 않는 만 못하다.
옳은 디자인(Right Design)을 주장한다. 이것은 무엇이며 그 이유는 또 무엇인가.
20세기를 관통한 디자인의 화두는 굿 디자인(Good Design)이었다. 굿 디자인이란 불필요한 것을 걷어내고 효율을 높이는 디자인 혹은 기발하거나 독특한 디자인을 의미한다. 이탈리아 브랜드 알레시(Alessi)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알레시 같은 디자인을 표방하는 기업이 늘면서 불필요한 소비를 유도하는 정크 컴퍼니(Junk Company)가 많아졌다. 필요 없는데 귀엽다, 특이하다 하면서 하나 더 사게 만드는 디자인이다. 그런 디자인이 없어져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것이 모든 디자인을 대변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현상에 문제가 있다는 의미다.
굿 디자인 다음은 옳은 디자인이다. 자연에 반하는 현대인의 경제 및 사회적 활동은 어차피 피해갈 수도, 돌이킬 수도 없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 보다 합리적으로 전개될 수 있도록 기여하는 디자인이 옳은 디자인이다. 스웨덴 가구업체 이케아(IKEA)를 예로 들 수 있다. 이케아는 스웨덴 전체의 경제 발전을 이끌면서 전 세계 보편적인 삶의 질을 올려준 기업이다. 단적으로 멀리 유학 간 한국인들도 이케아 덕분에 적은 돈으로도 너무 궁상맞지 않게 침대 놓고 책상 놓고 지낼 수 있지 않았나.
이탈리아 디자이너 안토니오치테레오는 비트라(Vitra) 등과 일하면서 수많은 예술적 실험을 시도했다. 그 사람 덕분에 밀라노 인구의 70%가 디자인으로 먹고 산다. 실제로 디자인을 하든, 디자인 디렉터의 운전기사로 일하든, 디자인 회사의 청소부로 근무하든, 어떤 식으로든 밀라노라는 도시 인구의 70%는 디자인과 관련된 산업에 속해 돈을 번다. 나는 그런 디자인을 하고 싶다. 예를 들어 아모레퍼시픽에서 화장품 용기를 만들 때 아주 작은 한 가지를 수정해서 재활용 비율을 높일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옳은 디자인일 것이다. 이런 예도 있다. 아모레퍼시픽이 용산에 새로 사옥을 짓고 있다. 그런데 사옥 올라가는 데 필요한 부지 외에 주변 일대 땅을 함께 매입해서 커버할 수 있는 최대의 면적을 공공에 이롭게 꾸미고 있다. 공원을 조성하고 어린이집을 만들고 그 범위 안에 들어가는 동사무소도 새로 짓는 식이다. 외국에 나가 공원을 가보면 공원뿐 아니라 공원에 이르는 길도 아름답지 않은가. 아름다운 라이프스타일을 만들 수 있도록 돕는 기업이 주변 사옥에 이르는 길까지 책임지고 조성한다는 것은 굉장한 의미가 있다.
틈날 때마다 자문하는 질문 중 하나도 그것이다. 지금 이것이 옳은 일인가. 옳다면 창피하지 않아도 된다. 불안하지 않아도 된다. 미안하지 않아도 된다. 시간이 걸릴 뿐이다. 옳은 것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디자인의 힘은 더 커질 것이다. 예전에 자동차 회사들에서 ‘콘셉트 카(Concept Car)’를 내놓으면 그것은 그냥 상상 속의 차였을 뿐 실제로는 만들지 않을 차였다. 요즘 콘셉트카는 언젠가는 만들겠지만 단지 시간이 걸릴 뿐인 차다. 디자인은 사람들이 감성적으로 열광하고 싶은 미래를 제시한다. 일단 이상향을 그려놓고 소비자와 기업이 함께 답을 찾아간다. 초기 아이폰이 대표적인데 요즘은 그렇지 않은 분야를 찾기 어려울 정도다. 디자인을 고민하는 과정에 다양한 부서가 참여하면서 각자 역할에 맞게 필요한 질문들을 떠올리는 것이 바람직하다. 아, 이걸 생각해 봤어야 했는데 안 했구나, 이 문제는 다시 봐야겠구나 하면서 놓쳤던 점들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때 디자인이 옳지 않으면 다른 분야에 예리한 질문을 던질 수 없다.
특히 지금은 디자인과 브랜딩을 뗄 수 없는 시대다. 디자인은 기업 브랜딩에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다. 브랜드 컴퍼니는 단지 많이 파는 것만으로는 안 되는 그 무엇이 필요하다. 단지 개별 제품이나 서비스를 얼마나 잘 포장해서 많이 팔까가 아니라 기업 전체의 브랜드를 어떻게 완성해 갈 것인지를 깊이 있게 고민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