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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ential Cases in Books

자전거 팔던 라이트 형제가 大과학자 제치고 동력비행 성공한 이유는?

서진영 | 128호 (2013년 5월 Issue 1)

 

 

세계 최초로 비행기를 만들어 비행에 성공한 사람은? 정답은 1903년 플라이어호를 타고 창공을 날아오른라이트 형제. 이것은 초등학생도 맞추는 문제다. 라이트 형제의 당시 직업은 무엇이었을까? 이번 질문은 조금 어려워졌다. 정답은 항공 전문가가 아니라 놀랍게도자전거포 주인이었다. 그렇다면 당시 비행기 제작을 꿈꾸던 항공 전문가는 없었을까? 아니다. 당시 항공 관련 최고권위자는 천체물리학자인 새뮤얼 랭글리(Samuel P. Langley) 박사였다.

 

<(), 미세한 변화를 감지하는 동물적 감각(이병주, 2012)>에 소개된 이야기를 읽으며 1903 107일 화창한 가을 날씨의 미국 워싱턴DC로 가보자. 워싱턴DC를 가로지르는 포토맥 강가에는 이른 아침부터 <워싱턴포스트> <뉴욕타임스> 등 여러 매체의 기자와 수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정부와 군 관계자, 대학 교수, 학생 등도 역사적인 장면을 보기 위해 나왔다. 뜨거운 관심은 당연했다. 이날은 미국 정부에서 운영하는 박물관, 미술관, 연구소, 도서관 등 문화기관의 집합체인 스미스소니언협회 회장을 지내고 있는 새뮤얼 랭글리 박사가 역사적인 비행실험을 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에디슨이나 벨처럼 당시 많은 사랑을 받는 과학자이자 발명가였다. 여러 대학에서 수학과 천체물리학을 가르쳤고 쉽게 쓴 천문학 서적은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읽혔다. 노벨상이 제정되기 전인 1887년 당시 가장 권위 있는 상이었던 영국왕립협회의 럼퍼드상(Rumford Medal)을 받기도 했다. 무인비행기 개발에 성공한 뒤 미국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쿠바 문제로 스페인과의 전쟁을 눈앞에 둔 미 국방성이 의회의 승인을 받아 당시로는 엄청난 거금인 5만 달러를 지원했다. 랭글리 박사는 이 돈에다 스미스소니언협회에서 모은 2만 달러를 더해서 본격적으로 비행기 개발에 나섰다. 그리고 1903 107일 포토맥 강가에서 첫 비행을 시도한 것이다.

 

드디어 하우스보트 지붕 위로 조종사가 올라갔고 사람들이 숨을 죽였다. 비행체가 발사대를 미끄러져 출발했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위로 날아가야 할 비행체가 점점 낮아지면서 포토맥강으로 추락했다. 강물로 고꾸라진 비행체와 허우적거리며 익사 직전까지 간 조종사를 구하는 장면은 너무나 처참했다. 며칠 후 랭글리 박사는 기자회견을 열고 비행체는 아무 문제가 없으며 발사장치 때문에 실패한 것이므로 다시 실험을 하겠다고 발표했다. 두 달 뒤인 128일 같은 장소에서 다시 비행을 시도했다. 역시 실패였다. 언론은 더 이상 랭글리 박사의 편이 아니었다. <워싱턴포스트>말똥가리가 난파됐다는 표현을 썼고 <뉴욕타임스>는 사설에서사람이 하늘을 날기 위해서는 앞으로 1000년은 족히 걸릴 것이라고 비아냥거렸다. 랭글리 박사의 17년에 걸친 노력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됐다.

 

이번에는 노스캐롤라이나주 키티호크 해안가에서죽음의 언덕이라 불리는 모래언덕 킬데블로 걸음을 옮겨보자. 랭글리 박사의 비행이 실패한 뒤 단지 9일이 지난 1903 1217일이다. 형인 윌버 라이트와 동생 오빌 라이트가 만든 플라이어호에 형이 자리를 잡았다. 12시 정각 12초 동안 36m를 날아 첫 비행에 성공했다. 그리고 몇 번의 시도 끝에 59초 동안 260m를 날아가는 동력비행에 성공했다. 인류가 최초로 동력 비행기를 이용한 유인비행에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 라이트 형제에게는 손님이 별로 없었다. 단지 동네 사람 다섯 명이 20세기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를 참관했을 뿐이다. 형제는 전보를 쳐서 가족에게 이 소식을 알렸다. 가장 먼저 고향의 신문에 기사를 내기 위해서였는데 <데이턴저널> 편집장은 이 소식을 전하는 맏형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59초라고 했나요? 59분이면 뉴스거리가 될 텐데. 그리고 라이트 형제가 누구죠? 3번가에서 조그만 자전거가게를 한다고 했습니까? 알겠습니다. 그런데 키티호크가 어디 있다고 했죠? 일단 저희가 기억은 하고 있겠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라이트 형제를 기억했다. 랭글리 박사가 실패하고 1000년은 더 걸릴 것이라던 유인비행기 개발이 오하이오주 데이턴에 사는 무명의 형제가 성공한 것이다. 라이트 형제가 1900년부터 키티호크해변을 찾아 비행실험을 한 지 고작 4년여 만이었다.

 

여기서 의문이 하나 생긴다. 당대 최고의 학식과 풍부한 재정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17년간 노력을 기울인 랭글리 박사가 실패하고 4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자전거포를 운영하며 홀로 비행기를 개발한 라이트 형제가 성공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첫째, 머리로 만드는 논리와 몸으로 체득(體得)하는 실제 데이터의 차이에서 비롯됐다. 랭글리 박사는 먼저 이론을 만들고 계획을 세운 뒤 행동했고 라이트 형제는 실험하면서 이론을 만들었다. 매사추세츠주 보스턴 교외에서 자란 랭글리 박사는 농장이나 강가에서 새들을 지켜보는 것을 좋아했다. 몇 시간씩 한자리에 앉아 새를 관찰하면서 하늘을 나는 꿈을 꿨다. ‘하늘을 나는 모습이 어쩌면 저렇게 아름다울까. 바람이 이렇게 심하게 부는데도 새들은 전혀 흔들리지 않고 날다니 정말 대단해! 사람도 저렇게 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책을 좋아하는 랭글리 박사는 도서관에서 새에 관한 책을 모두 읽었다. 조류학을 어느 정도 공부한 뒤 그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비행으로 옮겨졌다. 새를 연구하는 것만이 아니라 새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그가 나중에 천체물리학자가 된 것도 새에서 출발해서 비행과 하늘, 천체로 관심이 확장됐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천체물리학을 가르치면서도 생각은 늘 비행기 개발에 쏠려 있었다. 랭글리 박사는 1887년 교수직을 던지고 스미스소니언협회로 옮겼다. 정부 산하 단체였던 스미스소니언협회에서 비행기 개발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개발에 참여한 결과 9년 만에 무인비행기 개발에 성공했다.

 

그러나 랭글리 박사는 어느 순간부터 새가 나는 법을 몸으로 느끼지 않고 머리로만 이해하려고 했다. 공부를 너무 많이 한 탓일까? 비행을 명료한 공학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새의 비행을 공식으로 만들어서 재현하려고 했다. 포토맥강의 비행실험은 이때부터 이미 실패가 예정돼 있었는지도 모른다. 초기 비행기 발명가들이 비행을 연구할 때 참고할 수 있었던 것은 새와 비행선 정도였다. 새가 나는 것을 봐도 땅에서 뜨기 위해서는 많은 힘을 들여 날개를 퍼덕이고 비행선도 공기를 데우기 위해 많은 열을 발생시켜야 한다. 랭글리는 당시 이용 가능한 모든 정보를 통합하고 비행을 논리적으로 분석해서 가장 적합한 이론을 만들었다.

 

 

 

 

 

반면 라이트 형제는 이론적이거나 체계적이지 않았다. 두 사람이 서로 토론하면서 오류를 그때그때 개선했다. 랭글리 박사는 머리로 계산하고 조수들을 시켜서 작업했지만 라이트 형제는 직접 몸으로 체험하면서 실험했다. 동력비행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엔진보다 날개의 크기와 각도, 보조날개 위치 등이 훨씬 중요하다. 이런 것은 실험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라이트 형제는 비록 늦게 시작했지만 끊임없는 실험을 통해 비행이 무엇인지 체득했다.

 

하늘의 공기흐름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아직 알려지지 않은 시대에서 머릿속으로만 공기역학을 익힌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라이트 형제는 몸으로 공기역학을 익혔다. 이런 방식은 형인 윌버의 성격과도 관련이 있었다. 윌버는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또 라이트 형제는 비행기가 하늘을 나는 원리가 자전거가 균형을 잡고 굴러가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페달을 밟지 않으면 넘어지는 자전거처럼 비행기도 조종하지 않으면 하늘에서 안전하게 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실험을 거듭한 끝에 날개 끝을 조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발견하고 방향키를 만들었다. 1000번이 넘게 실험을 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런 시각은 과학과 이론에 바탕을 둔 논리적 계획과 기술과 실험에 바탕한 행동 중 어느 것을 더 중시하느냐의 차이였다.

 

둘째, 비행에 대한 접근방식에서 차이가 있었다. 랭글리 박사는 비행기 개발에서 엔진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비행은 땅에서 떠서 하늘을 나는 것을 의미했다. 일단 땅에서 떠야 하늘에서 움직일 수 있다. 랭글리는 일단 땅에서 뜨는 것에 집중했다. 무인비행을 성공시킨 후 7년간 뜰 수 있는 엔진 제작에만 몰두했다. 비행기를 띄우기만 하면 안전하게 날 것으로 생각한 랭글리 박사와는 달리 라이트 형제는 하늘에서 비행기를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기능을 구현하기 위해 실험을 계속했다. 그래서 비행기 자체의 설계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날 수 있다면 뜨는 것은 자동적으로 해결된다고 본 것이다.

 

이어령 교수는 <젊음의 탄생(생각의 나무, 2008)>에서 라이트 형제가 최초로 하늘을 난 비행기 이름이플라이어(Flyer)였다는 것을 눈여겨보라고 주문한다. 플라이어(Flyer)날다(fly)’라는 동사에 -er을 붙인 것으로 이 이름은 이전글라이더(glider)’와 차별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글라이더는 나는 것이 아니라 뜨는 것이다. 그냥 떠다니는 글라이더가 아니라 자신의 추진력으로 가려는 방향으로 나는 것이 플라이어다. 동생인 오빌 라이트는겨우 12초 동안의 비행이었다. 그것도 불안정한 파상운동에 마음을 졸였고 공중을 기는 것처럼 난 비행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틀림없는 동력비행이었지 활공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구름이나 풍선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공기 위에 떠다니다가 사라지고 물에 뜬 거품과 부평초는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표류하다가 사라진다. ‘뜨는 것보다는 자신의 힘과 의지로 움직이는나는 것에 중심을 둔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다.

 

셋째, 실패에 대한 태도 차이에서 비롯됐다. 가벼운 무인비행기 실험에 성공한 랭글리 박사는 비행에서 엔진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또 기체의 설계와 디자인은 무인비행기 실험 성공으로 이미 완성됐다고 여겼다. 사람을 태울 수 있도록 디자인을 확대하면 나는 것은 문제가 없다고 봤다. 관건은 무거운 비행체가 하늘에서 움직일 수 있도록 해주는 동력장치라고 생각했다. 이론적으로 정리되자 랭글리 박사는 엔진 개발에만 몰두했다. 당시 가솔린 엔진 분야의 최고 엔지니어와도 계약했다. 랭글리 박사의 신념은 점점 더 확고해졌다. 국방성의 기대와 달리 유인비행기 개발은 5년 이상 지연됐지만 비행기 무게와 엔진의 동력을 정확하게 계산해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절대 비행실험을 하지 않았다. 결국 랭글리 박사팀은 60㎏도 안 되는 무게로 52마력을 낼 수 있는 엔진을 개발했다. 엔진 개발로 모든 준비가 완료됐다고 생각한 랭글리 박사는 포토맥강 비행실험을 앞두고도 연습 비행을 하지 않았다. 계산된 수치대로 결과가 나온 이상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고 믿었다.

 

심지어 첫 번째 실험에 실패하고 두 번째 실험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랭글리 박사는 엔진만 점검했다.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가고 있음에도 자신이 무엇을 틀렸는지 모른 채 엔진에는 이상이 없다는 확신으로 성급하게 두 번째 실험을 강행했다. 어쩌면 실패를 두려워하기에 실험해보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랭글리 박사는 두 차례 실험에서 실패한 뒤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다. 일흔이 가까운 나이에도 젊은이 못지않은 열정과 체력을 자랑하던 랭글리 박사는 급격하게 수척해졌다. 결국 비행실험이 실패한 지 2년 뒤 그는 쓸쓸하게 죽었다. 화려한 인생을 살았지만 마지막은 외로웠다. 사람들은 그가 비행실험 실패에 대한 비관 때문에 죽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단 두 차례만 실패했을 뿐인데 말이다.

 

반면 라이트 형제는 실패를 통해 배웠다. 1900년부터 키티호크해변에서 비행실험을 했는데 첫해에 실험한 비행기는 줄이 달린 커다란 글라이더 형태였다. 1901년 줄을 뗀 글라이더 모양을 실험했고 다음 해에는 글라이더의 중심을 잡을 수 있는 꼬리 날개를 달아서 날렸다. 한 번 키티호크에 갈 때마다 수백 번 이상 글라이더를 탔다. 그리고 고치고 또 고쳤다. 윌버 라이트는 지인에게 쓴 편지에서 자신의 성공은 재능이 아니라 행운이었다고 이야기했다.

 

“플라이어호의 성공에는 수천 가지 다른 요인이 결합돼 영향을 줬습니다. 이런 영향이 정신적인 능력이나 창조력보다 열 배나 강하게 작용한 것 같습니다. 만약 처음으로 돌아간다면 아마도 우리가 했던 일을 다시 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놀라운 것은 성공까지 걸린 시간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짧았다는 겁니다. 이것은 다시 있을 수 없는 여러 상황의 특이한 조합이었습니다. (…) 세상은 똑똑한 사람들로 가득하지만 무수히 많은 사소한 것들이 결과에 영향을 끼칩니다. 나는 아주 객관적인 자세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성공은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확률의 문제였습니다.”

 

윌버는 행운이라고 겸손하게 말했지만 실패가 모여 성공 가능성을 점점 높여줬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1903년 키티호크해변에 갈 때 라이트 형제는 누적된 실패에서 얻는 학습으로 성공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체득하라. 일의 본질을 파악하라. 그리고 실패에서 계속 배워 나가라. 어쩌면 창조 경제는 이렇게 현장에서 나오는 것이 진짜가 아닐까?

 

 

 

서진영 자의누리경영연구원 대표 sirh@centerworld.com

필자는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에서 경영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전략과 인사 전문 컨설팅 회사인 자의누리경영연구원(Centerworld Corp.) 대표이면서 최고경영자(CEO)를 위한 경영 서평 사이트(www.CWPC.org)를 운영하고 있다.

 

 

  • 서진영 서진영 | - (현) 자의누리경영연구원(Centerworld Corp.) 대표
    - 최고경영자(CEO)를 위한 경영 서평 사이트(www.CWPC.org)운영 - OBS 경인TV ‘서진영 박사의 CEO와 책’ 진행자
    sirh@centerworl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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