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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with the Maestro 사진작가 구본창

창의성은 남과 다르게 해석하는 것 선입관 빼고 낯설게 보라

이유종 | 127호 (2013년 4월 Issue 2)

 

 

편집자주

※ 이 기사의 제작에는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인턴연구원 임승희(서강대 국어국문학과 4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그는 엄친아였다. 명문고와 명문대를 졸업한 뒤 대우실업에 입사했지만 미술을 배우고 싶어서 6개월을 채우지 못하고 독일로 떠났다. 그는 원래 미대에 진학하려고 했으나 가족들이 반대해서 상과계열 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대기업에 들어간 뒤에도 미술을 동경했다. 유학을 떠난 직접적인 계기는 친구인 배창호 감독이 현대건설을 다니다가 그만두고 이장호 감독 아래서 영화감독의 꿈을 키우는 것을 보고 자극을 받아서다. 아버지에게 미국에 유학 보내달라고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우연히 한 중소기업에서 독일 함부르크 주재원을 뽑는 것을 보고 지원했다. 독일에서 미술을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해외여행조차 자유롭지 않았던 당시 독일은 신세계였다. 다채로운 포스터와 이미지가 거리마다 붙어 있었고 박물관에는 진귀한 유물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야말로 문화적인 충격이었다. 주재원으로 근무하면서 현지 교육기관에서 독일어를 배웠고 유학을 결심했다. 미술을 공부하다 사물을 바로 영상으로 옮길 수 있는 사진에 더 끌렸고 독일 대학에서 6년간 공부했다. “독일에서 회화와 디자인, 사진 등 여러 과목을 배웠는데 사진이 더 재미가 있었어요. 어느 순간 카메라가 제 눈처럼 움직여줬고 제가 보고 느낀 대로 따라준다는 확신이 들었죠. 대상의 본질을 좀 더 꿰뚫어보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배우면서 그런 작품을 찍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죠.”

 

구본창 작가는 1980년대 중반 국내 사진계에 등장해 추상화 같은 작품세계를 보여주며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당시 국내 사진계는 가난한 길거리 사람들과 탑골공원 노인 등 삶의 애환을 포착한 사실주의 계열의 사진이나 풍경 사진 대부분이었다. ‘기록의 미학에 충실했던 국내 사진계에 그의 색다른 표현법은 논란거리였다. 처음에는 사진도 아니라는 반발마저 나왔다. 구 작가의 현란한 기법과 다양한 변화에 대해서외국의 유행을 적절하게 포장하는 데 급급하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국내외 전문가를 막론하고 구 작가를 한국의 현대 사진을 정착시킨 작가 중 하나로 꼽는 데 이견을 다는 사람은 없다. 그는 사진으로 사회 현상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대신 작가의 눈으로 새롭게 볼 수 있는 것에 대해 말하려고 했다. 구 작가를 서울 삼청동의 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안정적인 대기업을 그만두고 사진작가를 선택했습니다.

당시에는 전업 사진작가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습니다. 인생을 담보로 한 도박 같은 도전을 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1980년대만 해도 전업으로 사진을 하겠다는 것에 대해 부모님들의 인식은 좋지 않았어요. ‘딴따라라고 해서 예술계에 가는 것 자체를 곱지 않게 보셨죠. 그런데 직장을 그만두고 유학을 가겠다고 했으니 가족의 분위기는 긍정적이지 않았죠. 사실 저 자신의 결단도 쉬운 선택은 아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제가 그런 결단을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내가 다행스럽게도 그런 선택을 했구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30대 초반에 학업을 마치고 들어오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어요. 미래를 알 수가 없으니까요. 독일에 갈 때부터 잘한 선택일까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죠. 저는 당시 한국의 직장생활이 견딜 수 없이 힘들었고 탈출하고 싶었던 욕구가 더 컸어요. 비슷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있다면 저는 도전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네요. 물론 그전에 어디까지 견딜 수 있는 상황인지, 현재 직업이 내 인생관에 맞지 않은데 억지로 하고 있는 것인지 등을 저울질해 봐야겠죠. 또 자신의 가능성도 체크해 봐야겠고요. 후배들도 보면 직장을 여러 군데 옮기지만 결국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래서 어려운 시점은 어느 정도 견뎌야 해요. 하지만 직장이 자신의 적성에 맞는데 일 자체가 힘든 것인지, 아니면 적성에 맞지 않아서 힘든 것인지는 파악을 해야겠죠.

 

작품이 좋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요.

작가가 성공 요인을 자신의 입으로 말한다는 게 우습죠. 작가는 작품의 성공을 위해서 작품활동을 하는 게 아니니까요. 열심히 작업을 하다 보니 평판이 나오고 작품에 대한 선호가 따라 오는 것이죠. 하지만 굳이 말한다면 아마 제 사진은 특성상 다른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고 우리가 잃어버린 어떤 향수를 자극하는 요소가 들어 있는 것 같아요. 개념적이고 해석하기 어려운 다른 현대적인 작품보다는 제 작품의 많은 이미지가 어느 정도 감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폭이 크기 때문에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또 다른 요인은 작품 사진 이외에도 다양한 사진으로 먼저 대중과 친해진 게 도움이 된 것 같아요. 1985년부터 한국에서 작품 활동을 했으니 벌써 28년이 흘렀죠. 저는 처음부터 상업사진을 거부하지 않았어요. 영화 포스터도 찍었고 소설가 신경숙과 최인호 씨가 책을 낼 때도 제 사진이 쓰였죠. 패션쇼 사진과 광고사진 등도 찍었어요. 배창호 감독의기쁜 우리 젊은 날(1987년 개봉)’의 포스터 사진을 찍었는데 제작자인 이태원 태흥영화사 사장이 황신혜 씨가 너무 예쁘게 나왔다고 좋아했어요. 그래서 태흥영화사의 포스터를 제가 많이 찍었죠. 임권택 감독의장군의 아들’ ‘서편제’ ‘아제아제 바라아제등의 포스터를 찍었어요. 그래서 제 이름이 서서히 알려진 것 같아요. 물론 미리 의도한 것은 아니고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죠.

 

또 다른 것으로는 국내에서 찍었지만버터 냄새가 나게 찍었어요. 촌스럽지 않게. 사대주의랄 수도 있지만 당시 우리가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동경을 많이 했잖아요. 1980년대까지는 한국 사진에서 솔직히 현대적인 감성은 부족했죠. 제가 독일에서 사진을 배우고 와서 일종의 세련미랄까, 솔직히 추상화를 만든 것이죠. 당시 한국 사진계에서는 리얼리즘이 유행했고 길거리나 풍경 등 틀에 박힌 사진이 많았죠. 저는 서양에서 통용되는 시각언어를 단순화시키고 추상화시켜서 첫 눈엔 알 수 없지만 흥미로울 수 있는 것을 제시했어요. 사진으로 조금씩 보여준 것이죠. 패션 디자이너들도 외국에서 봤던 것을 제가 비슷하게 찍으니까 좋아했어요. 외국적인 느낌이 났으니까요. 국내에서 단순한 벽이지만 외국의 벽 같은 느낌을 줬고 모델들도 격이 느껴지게 해줘서 조금 달랐던 것 같아요.

 

또 피사체의 스토리와 인격을 보여주려고도 노력을 했어요. 다른 작가들은 모델을 찍을 때 어떤 예쁜 옷을 입고 모델은 얼마나 예쁜지를 보여줬죠. 사진에서 모델의 스토리와 인격을 보여주려면 그 사람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 여자의 눈빛에서 보여지는 스토리를 잡으려고 했죠. 피사체가 여자일 수도 있고 정물일 수도 있으며 다른 모티브들이 될 수도 있지만 그걸 해석하는 능력이 사람마다 다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경험과 인생관과 느낌으로 이 사람을 봤을 때 이 모델은 어떤 스토리가 있겠는지, 이 사람의 얼굴에서는 어떤 분위기가 풍길 수 있는지를 고민했어요. 모델의 스토리를 제 나름대로 조금 다르게 해석했던 것 같아요. 사진을 찍을 때만큼은 그 모델을 진짜 사랑해야 합니다. 좋은 사진이란 피사체가 가지고 있는 영혼을 훔쳐야 하기 때문이죠.

 

 

 

 

경영자들은 사업이 일정 궤도에 들어가면

다른 성장동력을 발굴하거나 새 사업을 추진합니다.

작가들도 끊임없이 새로운 테마를 만들어야 할텐데

작품 아이디어를 어떻게 발굴하나요

다산 정약용 선생이 생전에 책을 많이 썼어요. 너무 다작을 해서 가치가 없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죠. 그런데 저는 궁금했어요. 어떻게 많은 책을 쓸 수 있었을 까. 그래서 찾아봤더니 정약용 선생은 한 가지 일을 해서 나온 여러 정보를 분류해서 저장을 했더라고요. 그래서 다른 분야를 쓸 때 저장된 내용 중에서 관련이 있는 부분을 찾아서 사용했고 많은 책을 쓸 수 있었죠. 일본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작품을 쓸 때 자신은 서랍에서 소재를 하나씩 꺼낸다고 말했어요. 저는 그런 말을 듣고 놀랐어요. 저와 방식이 똑같아요. 컴퓨터 안에 폴더가 많듯이 제 머릿속에는 폴더가 많아요. 경영인들이 좋은 사업을 시작하려면 사업 아이디어를 저장한 일종의 씨앗이 많아야 합니다. 삼성도 일찌감치 디지털 분야에 대한 씨를 뿌렸고 이후에 휴대전화나 가전제품 등으로 수확을 했어요. 저는 항상 서너 가지의 작품 테마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 밖에도 대여섯 가지가 넘는 씨앗이 자라나고 있어요. 또 촬영을 할 때 한 가지만 찍는 게 아니죠. 고건축물을 찍으러 전라도에 갔더라도 매화가 눈에 띄면 찍어둡니다. 임권택 감독 덕에 전라도에 자주 갔어요. 영화 포스터를 위해서 배우를 찍지만 촬영을 간 곳의 풍경이 좋으면 찍어두고 저장하면 이후 제 전시회에 쓸 수가 있는 것이죠. 한꺼번에 두 가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한 가지만 찍는 작가가 더 깊은 맛을 내겠지만 저는 다양한 것을 찍고 엮어내는 게 더 맞아요. 더 많은 주제를 다뤘죠. 하지만 큰 줄기는 계속해서 시간에 대한 흔적이나 사물에 대한 역사성에 대한 것을 찍고 있어요.

 

사진작가들은 전시회에 거는 것보다 훨씬 많은 사진을

찍기 때문에 고르는 작업이 만만찮을 것 같습니다.

작품을 선정하는 기준은 무엇인가요.

그것이 재주입니다. 글을 쓰시는 분도 긴 인터뷰를 한 뒤 정해진 분량에 맞춰서 짧고 일목요연하게 써야 하지 않나요. 강사들이 강연할 때도 그렇죠. 저는 이런 것을 디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디자인 하면 분홍색을 예쁘게 칠하고 팬시숍에 있는 물건을 잘 전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이 많습니다. 하지만 디자인의 개념은 질서를 잘 잡는 것입니다. 이야기하고 싶은 것을 여러 절차를 안 거치고 상대방에게 정곡을 찔러주냐가 디자인을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쓸데없이 긴 잔소리를 하는 것보다 한마디 굵게 해주는 것이 더 효과가 있잖아요. 기업체 사장과 강사, 작가 등 다 마찬가지죠. 그렇다고 무조건 짧은 게 아니라 적절함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죠. 사진을 잘 찍고, 잘 골라내고, 잘 인화하고, 잘 전시해야 합니다. 네 가지가 다 잘 맞아야 해요. 많이 잘 찍기만 해도 소용이 없어요. 어떤 공간에서 전시회를 여느냐에 따라서 방문객에게 전달하는 감동이 달라집니다. 시간과 공간의 적절함을 따져서 전시회를 해야 합니다. 사진만 잘 찍어서 끝나는 것이 아니죠. 이제는 사진작가에게 그런 모든 것을 파악하는 능력이 중요합니다. 찍은 사진 중에서 작품을 고르는 기준은 숱한 경험을 토대로 정말 자기가 본능적으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많이 찍고 고르는 등 스스로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사진을 잘 찍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저는 사진을 찍기 전에 미리 피사체에 대한 정보를 수집합니다. 적을 알아야 전쟁에서 이기는 것 아닙니까. 연극배우를 찍는 사진작가가 연극에 대해 전혀 모르면 그를 이해할 수 없고 피사체를 이해하지 못하면 제대로 된 작품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동안 어떤 배역을 했고, 어떤 톤의 목소리를 가졌는지 등을 최소한 알아야 합니다. 또 평소에 다양한 분야에 대해 호기심이 많아서 자료 스크랩을 많이 해두는 편입니다. 한 가지 분야만 관심을 가지고 파는 사람도 있지만 저는 건축과 문학, 뉴스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해 관심이 많아서 자료를 많이 챙깁니다. 신문이나 잡지 등 언론 매체를 통해서 얻은 정보 중 필요한 것은 쌓아뒀다가 작업을 할 때 관련이 있으면 꺼내서 사용합니다. 백자를 찍을 때 미리 백자에 대한 자료를 준비해뒀다면 지금 백자를 새로 접한 사람 보다 몇 배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겠죠.

 

예술가는 특히 사물을 달리 봐야 할 것 같아요.

아무래도 창의성이 많이 필요하겠죠.

창의성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한마디로 정의할 수는 없겠지만 창의성은 결국 남과 다르게 해석하려는 노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존에 선입관을 갖고 남들이 준 지식에 맞춰서이것은 이렇다라고 정의하잖아요. ‘이것은 이것이다라고 선입관을 갖는데 창의성은 이것을 낯설게 보는 것이죠. 다시 내 눈으로 관찰하고 새로운 해석을 할 때 창의성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사실 거의 주어진 정보에이것은 이것이다하고 넘어가는 경향이 강하죠. 새로운 것이 없이. 한 영국 유학생이 투박한 전기 코드를 접을 수 있게 만든 사례가 있어요. 노트북을 들고 다닐 때 꽂는 게 너무 컸다는 것이죠. 유학생이 이걸 접어서 얇게 만들었죠. 너무 기특하고 재미가 있더라고요. 여행용 트렁크 바퀴가 예전에는 한쪽으로만 이동할 수 있도록 돼 있었는데 요즘에는 쉽게 여러 방향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바꾼 제품이 나오더라고요. 저는 어떤 것이 불편하면 그게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했나 감탄합니다. 이런 작은 것에 즐거워하고 뭔가 새로운 것에 대한 욕구와 관심이 창의성의 원동력이 되지 않았나 싶어요.

 

국내외 사진전 기획도 많이 하셨습니다.

전시회를 준비할 때는 사진을 거는 위치부터

관객의 동선까지 모두 고려해야 할 것 같아요.

먼저 작가가 아니라 관객의 입장에서 볼거리를 제공해야 하겠죠. 레스토랑에 가서 음식이 맛있으면 입소문이 나듯이 관객이 작품으로 감동을 받아야 합니다. 2008년 대구 사진비엔날레에선 한중일 3국의 100년 전 모습을 사진으로 보여주는동북아시아 100년 전을 열어서 19세기 말 전후의 희귀 사진 350점을 전시했어요. 해외 큐레이터의 관점에서 보지 못했던 작품을 가지고 잔치를 벌인 것이죠. 그래야 그들의 관심을 끌 수 있으니까요. 또 그래야 해외 큐레이터들이 국내 작가들의 작품에도 관심을 가질 수 있고 국내의 숨은 작가의 작품이 해외에 많이 소개될 수 있겠죠. 그런 관점에서 준비를 했어요. 그룹 전시회를 할 때는 한 사람만 잘해서는 안 되고 주변 작품들과의어울림이 매우 중요합니다. 전시회를 볼 때 관객은 우선 그 공간에 반해야 합니다. 작품 앞에서 하나만 보는 게 아니라 그 공간을 전체적으로 경험하는 것이죠. 그래서 작품 하나하나보다는 전체적인 어울림에 신경을 씁니다. 또 저는 관객이 이 작가에게 이런 공감을 받을 수 있겠구나 하는 것을 예측해서 전시하고 또 끊임없이 많이 보여주기보다는 몇 개만으로도 그 작가를 보여줄 수 있는 것을 제시합니다.

 

사진도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필름 사진을 고집하는 작가도 많습니다.

큰 변화의 흐름은 따라가야 하는 것일까요.

아직까지도 필름을 고집하시는 분들도 많죠. 정말 세상이 변한 것인데 필름 사진의 질감이 디지털 사진과는 다르다고 주장하는 것이죠. 다른 것도 있기는 합니다. 흑백사진은 아직도 인화지의 맛이 다릅니다. 일반인이 보기에는 모르겠지만 작가의 눈에는 인화지 사진이 디지털 사진에 비해서 블랙 톤이 더 깊고 묘한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아우라가 있죠. 그 아우라에 빠진 사람은 아직까지도 암실에서 작업하는 인화지에 더 큰 매력을 느끼는 것이죠. 디지털이 블랙 톤의 깊은 맛을 낼 수 없으니까 마니아 층의 주장은 아마 더 계속 될 것입니다. LP판이 어딘가 깊은 맛이 난다고 더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듯이 사진도 스크래치와 먼지가 끼지만 거기서 오는 맛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신문과 잡지, 광고 등 상업사진을 하게 되면 전혀 차이가 없어요. 또 박물관들도 디지털 사진의 가치를 인정해주고 똑같은 작품으로 받아들이고 있어요. 이제 작가 자신이 판단을 해야겠죠. 저는 디지털로 따라가야 한다고 봅니다. 너무 고집하다 보면 시대에 뒤떨어지게 되죠.

 

1985∼86년 세계 보도사진가 100인 초대 촬영에

참가하셨습니다. 당시 유학을 막 마친 상태라서 작품활동도

거의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참가할 수 있었나요.

모든 일이 사실은 인연이라고 생각해요. 아주 사소한 일로 벌어진 일들이 오늘의 나를 만들어 준 것이죠. 귀국을 앞두고 평소 좋아하는 독일 사진작가 안드레 겔프케에게 다짜고짜 전화를 해서 작품평을 청했어요. 용기를 낸 것이죠. 켈프케는잘 찍었다는 평을 해줬고 제가 당시 체류하던 함부르크에 사는 다른 작가를 소개해줬어요. 함부르크의 작가는 당시 일본에 있는 한 사진 관련 회사와 거래하고 있었는데 제게 이 회사를 소개해줬어요. 당시에는 독일에서 한국으로 들어가는 직항이 없어서 도쿄를 경유해야 하니까 만나고 가라고 추천했었죠. 가봤더니 마침 그 회사가 100명의 사진작가를 초대하는 행사를 준비하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저를 초대해줬어요.

 

학창시절까지 포함하면 30년 이상 작품활동을 했습니다.

슬럼프에 빠진 시기는 없었나요.

1995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이후 3년 동안은 무슨 작업을 해야 할지 몰랐어요. 당시 작품에서 삶과 죽음,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었는데 죽음을 이미 가까이 한번 겪으니까 앞으로는 죽음이라는 주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잘 모르겠더군요. 당시에 전시회 등 이런 것도 뜸했고 앞으로 어떤 작업을 해야 할 것인가로 고민했죠. 항상 계기가 오는 것 같아요. 자극은 외부에서 찾아왔어요. 당시 호암아트홀에서 국내외 유명 작가들이 참가하는 큰 전시회가 열렸는데 제가 초청을 받았죠. 그 사람들과 함께 작업하면서 작품을 명상적인 분위기의 사진으로 바꿨어요. 슬럼프에서 나오려면 누군가가 제 작품을 좋아한다거나 다른 즐거움을 만드는 등 외부의 응원을 받아야 하는 것 같아요. 다행스럽게도 전시회라는 작은 즐거움이 슬럼프를 빠져나오는 계기가 됐죠. 어찌 보면 스스로 이미 슬럼프에서 빠져나올 준비가 돼 있었는지도 모르죠.

 

인물에서 나비, , 백자 등 다양한 주제를 다뤘습니다.

그래서 중심이 없는 작가라는 지적까지 있어요.

저는 자장면만 좋아하고 설렁탕만 먹는 사람들과는 좀 다른 사람이에요. 변화가 있고 재미있는 것에 관심이 많아서 표현하려는 대상에 가장 잘 어울리는 방법을 찾고 그런 기법으로 사진을 찍습니다. 하지만 제 작품 세계의 큰 줄기는 시간의 흔적에 대한 사물의 역사성에 대해 정숙, 정적 등의 깊은 맛을 끌어내려는 노력을 한 것이죠. 초창기 도시적 이미지부터 나비, , 백자, 비누에 이르기까지 시간이라는 개념이 들어 있습니다. 시간의 화석화라고 할까요. 세월이 흘러 고정된 느낌 속에서 그것이 숨을 쉬고 있게 만들고 싶은 것이 제 사진의 목표입니다.

 

앞으로 작품 활동의 방향을 말씀해주시죠.

2010 6·25전쟁 60주년 당시 전쟁 유물을 찍었어요. 제가 유물 같은 오래된 것과 박물관을 좋아해서 전쟁기념관에서 열린 그룹전에 참가했죠. 전쟁 유물을 찾다 보니까 한 군인이 어머니에게 쓴 편지인데 배달이 안 됐더군요. 그 군인의 옷에서 배달되지 않은 편지가 나온 것 같아요. 아들을 잃어버린 어머니가 살아 있을까 궁금했는데 찾아보니 살아계시더군요. 이미 100세가 넘으셨더군요. 그래서 철모와 편지, 어머니의 이야기가 담긴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그런 작품을 만들면서 전쟁에서 아들을 잃어버린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앞으로 제가 할 것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가 적이라고 생각하는 곳에도 어머니와 아들은 있잖아요.

 

 

 

이유종 기자 pe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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