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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s with the Maestro 제과 명장 김영모 대표

소중한 제빵기술 왜 공개하냐고요? 경쟁자 만들어 자극받기 위해서죠

이유종 | 124호 (2013년 3월 Issue 1)

“소중한 제빵기술 왜 공개하냐고요?

경쟁자 만들어 자극받기 위해서죠

 

동네 빵집이 프랜차이즈 제과점에 밀려 맥을 못 추고 있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등이 동네 빵집 보호에 나서고 있지만 영세한 빵집의 어려움은 여전하다. 하지만 김영모과자점은 오히려 점포 확장을 계획하고 있다. 김영모과자점은 1982년 서초점을 시작으로 1997년 역삼점, 2000년 도곡타워팰리스점, 2009년 반포점을 세웠다. 도곡타워팰리스점에는 샌드위치 카페인페르 에 피스(Pere et Fils)’도 개설했다. 성남에는 쿠키, 초콜릿, 파운드케이크 등 보존 기간이 긴 제품을 만드는 공장까지 운영하고 있다. 바로 구워야 하는 빵은 각 지점의 작업장에서 직접 만든다. 도곡타워팰리스점 2층에는 매장과 비슷한 크기의 작업장이 있다. 프랜차이즈 제과점과 동네 빵집의 장점을 결합해서 경영하고 있다. 직원이 180명에 달하고 연간 매출은 150억 원을 웃돈다. 입맛이 까다로운 강남 사람들에게 30년 이상 품질을 인정받는 비결은 무엇일까. 더군다나 매장 면적을 더 늘리지 않아도 각 점포의 매출은 매년 오르고 있다. 빵의 비밀을 알기 위해 도곡타워팰리스점에서 김영모 대표를 만났다.

 

직업으로 빵을 만들기 시작한 계기는 무엇인지요.

지금도 빵을 만들고 계신가요.

어릴 때 학교 앞 제과점 진열장에서 빵을 바라보며 허기를 달랬어요. 제과점에 취직하면 빵을 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죠. 빵집에 들어가면 숙식도 제공되니까 더 좋았습니다. 하지만 취직을 한 뒤에는 빵을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원래 그렇잖아요. 몰래 먹다가 걸리면 두들겨 맞고 두 번 걸리면 쫓겨나던 시절이었습니다. 크림빵 하나를 훔쳐서 재래식 화장실에 숨어들어가 몰래 먹은 적도 있어요. 그래서 지금도 제일 좋아하는 빵은 곰보빵과 크림빵입니다. 빵은 지금도 만들고 있습니다. 명장이 빵을 안 만들면 뭘 하겠습니까. 제가 빵 만들기를 중단하는 순간 기술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직원들이 저처럼 만들 수 있을 때까지 교육하고 저도 빵을 계속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1982년 첫 가게를 서초동 아파트 촌에 냈고 다른 지점도

반포동, 도곡동 등 강남 지역에만 개설했습니다.

강남지역을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제품과 고객 수준이 잘 맞아야 빵도 잘 팔립니다. 저는 해외여행 자유화가 시행되지 않았을 때부터 자비로 해외 연수를 많이 다녔어요. 제빵기술에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앞선 품질이라도 고객이 인정하지 않으면 외면을 받습니다. 당시 서초동이 신흥 부촌이었는데 제 기술 수준과 지역의 소비수준이 딱 맞아 떨어졌죠. 다른 곳에서 사업을 했다면 이렇게까지는 성공을 못했겠죠. 도곡타워팰리스점과 반포점 인근 주민도 경제적인 수준이 꽤 높아요. 또 가까운 곳에 직영점을 개설하는 이유는 품질관리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입니다. 현재 점포 3곳은 자동차로 10분밖에 걸리지 않아요. 수준이 높은 고객은 제품 선택도 까다롭게 합니다. 제품을 수시로 검토해야 품질 관리가 제대로 이뤄집니다.

 

직장에서 리더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직원들과 생각이 다를 때 어떻게 풀어갑니까.

리더는 즐겁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합니다. 저희처럼 소사업체에선 의사결정이 대부분 CEO에 의해 이뤄지기 때문에 이런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새로운 제품을 만들려면 창의성이 중요하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해서 무조건 나무라면 안 됩니다. 배우는 과정에서 실패의 쓴맛을 봐야 더 좋은 제품을 만들 수 있습니다. 10년 전 둘째 아들이 케이크를 만들 때 장식을 매우 간단하게 만들었어요. 유럽 스타일이 그래요. 한국에선 장식이 푸짐한 케이크가 잘 팔립니다. 둘째 아들이 고집대로 간단하게 장식했고 결국 잘 팔리지 않았죠. 이후 제 조언대로 과일로 장식을 추가했더니 의외로 많이 팔렸습니다. 케이크 자체는 맛이 좋았어요. 아이디어에 경륜이 추가되면 더 좋은 제품이 나오는 것이죠. 직원들도 자유롭게 제안하면 그 제안에 확실한 피드백을 해줍니다. 매주 월요일 열리는 제품 관련 회의를 할 때도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듭니다. 저는 주로 듣기만 합니다.

 

30년 동안 경제위기가 많았습니다.

위기를 버텨낸 비결은 무엇입니까?

IMF 경제위기에도 매출은 늘었습니다. 매년 3∼4%라도 늘고 있죠. 가장 중요한 것은 꾸준함입니다. 1982년 무지개상가에서 처음 가게를 열 때는 김영모과자점의 브랜드 파워는 없었습니다. 품질에 주력했습니다. 매일 빵 맛이 같도록 꾸준하게 품질을 유지하자 입소문이 퍼졌습니다. 맛과 품질은 언젠가는 판명이 납니다. 홍보도 꾸준하게 해야 효과를 냅니다. 케이크 상자에 김영모과자점의 설립취지와 재료 등의 내용을 소개한 전단지를 10년 이상 끼워 넣었습니다. 단타로 해서는 소용 없습니다. 잘 안 팔리는 빵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유명 제과점에서 빵을 사려는 강남 고객들이 저희 제품을 선택했습니다. 지금은 전단지 효과가 없어요. 문자와 SNS, 인터넷카페를 통해 홍보하고 있어요. 불황기에도 빵 값을 올렸습니다. 제품의 품질이 뒷받침이 돼서 가능한 것이죠. 남의 눈치를 안 봤습니다. IMF 당시에는 빵 3개를 단돈 1000원에 판매하는 제과점이 많았습니다. 그런 매장들은 다 망했어요. 오래갈 수 없습니다. 제빵, 제과에 쓰이는 밀가루와 설탕은 수입품입니다. 당시만 해도 90% 이상을 수입했어요. 환율이 어마어마하게 올랐죠. 재료 값이 하루가 멀다 하고 치솟았습니다. 또 다른 이유로 프랜차이즈와 동네 빵집의 장점을 결합한 것도 주효했습니다. 동네 빵집의 장점은 재빠르게 공급량을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래야 남는 빵을 줄일 수 있어요. 갑자기 추워지면 빵이 안 팔리고, 주말에 비가 내리면 나들이를 취소하기 때문에 그만큼 고객이 많아지죠. 프랜차이즈업체는 미리 빵을 만들어오는 곳이 많기 때문에 공급량 조절에 실패할 확률이 크죠. 대신 쿠키처럼 유통기간이 긴 제품은 저희도 성남 공장에서 만듭니다. 또 저희는 모두 직영으로만 운영합니다. 빚을 내지 않고 자금을 축적해서 하나씩 열고 있어요. 점포를 늘려도 무한정 늘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점포가 많다고 좋은 과자점은 아닙니다. 빵과 과자를 어떻게 만들고 어떻게 판매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서비스도 매우 중요합니다. 서비스는 빵을 하나를 더 주고 가격을 깎아주는 게 아닙니다. 고객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죠. 초창기에 저희 슈크림빵을 먹고 한 가족이 배탈이 나서 고생했어요. 배탈의 원인은 현재까지 정확하게 모릅니다. 전날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저희 제품을 드셨으니까 저와 집사람은 연락을 받고 가족을 병원까지 모시고 가서 치료를 해드린 적이 있습니다. 이 가족은 30년 가까이 저희 가게의 단골입니다.

 

품질관리에 대한 일화가 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빵은 모두 버렸다고 하는데요.

완벽한 제품이라고 판단될 때만 판매를 했습니다. 소보로빵은 윗면이 거북이 등처럼 균일하게 갈라져야 제맛이 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맛이 떨어지죠. 발효가 조금이라도 덜 되거나 혹은 조금이라도 지나치면 아무리 많이 만들어도 처음에는 쓰레기통에 다 버렸어요. 하루는 완벽한 제품이 아니니까 판매하지 말라고 하고 일이 있어서 밖에 다녀왔는데 가게에 제품이 진열이 돼 있었어요. 아내가 아까우니까 팔려고 내놓은 것이죠. 그런 식으로 하려면 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가게 문을 한나절 동안 닫았어요. 아내에게 다시는 그렇게 안 하겠다는 약속을 받은 뒤 다시 문을 열었습니다. 그런 아집과 근성으로 점진적으로 사업을 키웠습니다. 1985년 빚을 내서 오븐과 최신 발효기, 아이스크림 기계 등 제빵 기계를 17000만 원어치 샀습니다. 당시 그 돈이면 집 몇 채를 살 수 있었습니다. 그 돈으로 땅을 샀다면 돈은 더 벌었을 수도 있었겠죠. 하지만 최신 기계로 제품의 품질을 유지해서 지금의 김영모과자점이 있는 것입니다. 저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천연발효라는 용어조차 생소할 때 천연발효 빵과

케이크 등 건강빵을 선보이기 시작했습니다.

1995년 해외 연수 중에 천연 발효빵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어요. 독일과 프랑스에서 효모를 사다가 빵을 만들었는데 이 효모들은 3∼4개월이 지나면 부패합니다. 처음에는 이유를 몰랐어요. 이유를 찾으려고 백방으로 알아봤는데 유산균을 연구하는 교수에게 물어 보니 토양과 기후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수십 번이나 실패를 거쳐서 우리 기후와 토양에 맞는 발효법을 찾아 결국 천연 발효빵을 만들었어요.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많았죠. 그런데 포기하면 결국은 못 만들어냅니다. 장인 정신으로 해낸 것 같아요. 장인정신으로 뭉친 사람은 사명감과 신념이 강합니다. 그걸 포기하면 장인이라고 할 수 없죠.

 

제빵사와 기업체 사장을 병행하는

일종의 플레잉 감독이십니다.

제과와 요리 분야에는 제빵사나 요리사가 음식을 직접 만들면서 가게를 운영하는 사례가 많습니다. 음식에 혼과 정성이 들어갈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또 자신이 직접 만든 것이니까 제품을 자신 있게 고객에게 내놓을 수 있습니다. 인건비, 광열비 등 원가를 줄이는 경제적인 이득도 있습니다. 또 다른 장점은 현장경영을 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직접 경영을 하다 보니 백화점이나 음식점에 갈 때 항상 종업원의 서비스를 보게 됩니다. 또 고객의 편에서 불편한 점을 따지게 됩니다. 현장을 모르는 경영인은 할 수 없는 게 많습니다. 해외 선진국에선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CEO 50%를 넘는다고 합니다. 현장 경영을 하면 제품의 문제점을 빠르게 알아챌 수 있습니다. 매일 빵의 맛이 바뀌면 고객의 신뢰를 받을 수 없고 결국 브랜드 파워가 쌓이지 않습니다. 경계해야 할 점도 있어요. 경영자이면서 생산의 책임을 맡고 있는 오너 제빵사는 자기 역할이 빠지면 경영이 전혀 안 된다는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이것을 피하려면 다른 직원이 얼마든지 나를 대신할 수 있도록 철학부터 차분하게 가르쳐야 합니다. 기술인 경영자가 실패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고객이 원하는 바를 파악해 그들이 인정해 주는 제품을 만들기보다 무작정내가 만든 제품이 최고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만을 경계해야 합니다.

 

제빵 관련 책을 꾸준히 내고 계십니다.

노하우를 공개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저희 회사는 직원의 40%가 장기근속자입니다. 회사는 장기근속자가 이끌어가는 겁니다. 저희처럼 장인정신이 필요한 회사는 더욱 그렇죠. 장기근속자의 장점은 커뮤니케이션이 쉽습니다. 하지만 매너리즘에 빠지기도 합니다. 노하우를 숨기면 매너리즘이 더 깊어지죠. 책을 내는 이유는 기술을 외부에 공개해서 스스로 자극을 받으려는 것입니다. 제가 낸 책을 보고 다른 제빵사들이 노력하면 제품은 다양해집니다. 저희는 다시 변화된 기술을 배웁니다. 일종의 부메랑 효과죠. 또 기술을 공개한 만큼 제로베이스에서 더 잘하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희들은 제품의 맛만 봐도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대충 압니다. 감춰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공개를 해도 빵이 똑같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재료의 배합 방법이 같아도 정성과 재료의 질에 따라서 제품은 달라집니다. 머리로 생각하는 것을 손으로 빚어 내는 기술을 손에 익히려면 오랜 시간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어려운 성장기를 보냈다고 들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멘토는 자신의 부모님입니다. 저는 어릴 때 부모님이 이혼해서 아버지 집과 작은아버지 집, 외가, 이모 집을 전전했습니다. 여기저기 얹혀서 살아야 했죠. 나 혼자서 견디면서 살아야 했고 명절에는 오갈 데가 없어서 불이 꺼진 공장 다락방에서 밤을 지새기도 했습니다. 사춘기에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어릴 때부터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웠습니다. 술을 마시면 사고를 치기 마련이었죠. 싸우다가 친구의 이 3개가 부러져서 소년원에 가기도 했습니다. 1973년 군에 입대한 뒤 부대에선 독종으로 불렸습니다. 때리는 고참을 맞받아치다 몰매를 맞은 적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외박을 나가서 술을 마시고는 경례 안 한다고 한 소리 하는 다른 부대 상급자를 패기도 했죠. 군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빵 만드는 기술을 배웠으나 성공해야 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어요. 미래나 꿈에 대한 설계도 없었고.

 

청년기에 방황했는데 마음을 잡은 계기는 뭔가요.

군대에서 다 떨어진 책 한 권을 읽었습니다. 인생의 터닝포인트였죠. <카네기 행복론>인데 전율하며 멈칫한 대목은걱정으로부터의 자유라는 제목의 장()이었습니다.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라. 최악의 경우를 그대로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하라. 최악의 경우를 개선하라.’ 단 세 문장이었죠. 기차에 뛰어들어 자살하기 직전 모든 걸 포기하니 마음에 평안이 오고 불현듯 살아갈 방도가 떠올랐다는 글쓴이의 설명도 덧붙여 있었습니다. 사람에게 현실을 개선할 방책이 왜 없을까. 잊고 있었던 꿈을 되찾았습니다. 생활 패턴도 달라졌죠. 당시에는 성공을 꿈꾸지 못했고 술만 마셨습니다. 기회만 있으면 탈영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던 터였죠. 어릴 땐 꿈이 있었는데, 그 꿈을 방황하면서 잃었고 <카네기 행복론>을 계기로 다시 찾은 것이죠. 술과 담배를 끊었고 군대에서 틈틈이 책으로 제과와 제빵 관련 공부도 했습니다.

 

제빵에 도전하는 후배들과 제과점 창업을 희망하는

사람들에게 해주실 말씀은 무엇인지요.

요즘 젊은 사람은 기술에 대한 애착과 열정이 많이 떨어지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또 일에 대한 가치를 제대로 모르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까 제품을 정성 들여서 만들지 않아요. 일을 많이 하려고도 하지 않아요. 정말 정성 들인 제품, 정말 완벽한 제품을 팔고 싶은데 때에 따라서는 자존심이 상할 때도 있습니다. 기능인으로 그런 생각이 들어요. 창업을 하겠다는 후배들이 제게 던지는 질문은 비슷합니다. 가게 위치를 고려할 때 장사가 잘 될지 봐달라는 것이지요. 저는 오히려 왜 창업을 하려는지 물어봅니다. 대부분 돈 때문에 한다고 대답합니다. 기능인은 돈을 벌려고 하는 순간부터 망합니다. 돈을 좇아 장사를 하다 보니 재료 단가를 낮추게 되고 결국 제품의 질이 떨어집니다. 제가 생각하는 성공은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아닙니다. 제게 성공은 일을 잘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돈의 가치에 물들어서 일의 가치를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저는 지금도 제품이 먼저입니다. 돈은 결과적으로 따라오는 것이지요. 빵집을 새로 열려면 먼저 준비가 철저해야 합니다. 재료와 조리 과정을 완벽하게 알고 있어야 하죠. 소비자에게 팔리기 전에 잘못된 제품을 골라낼 수 있는 수준은 갖춰야 합니다. 업종을 불문하고 재방문 고객을 만드는 것이 성공의 지름길입니다. 단 한번의 실수에도 고객은 발길을 돌리죠. 경영자는 전문 기능인만큼은 아니라도 빵을 보는 안목을 가지고 있어야 소비자가 신뢰합니다.

 

그렇다면 좋은 제빵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실력을 키워야 합니다. 실력이 없는 사람들이 트릭을 많이 씁니다. 관행과 패거리를 만들죠. 제빵에선 배합표가 있어야 빵을 만듭니다. 실력이 없는 사람들은 남의 배합표를 구걸해서 빵을 만들죠. 그러나 노력하는 사람들은 기존 배합표를 응용합니다. 결과물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다양한 지식을 습득해야 합니다. 빵만 파고들면 편협한 사람이 됩니다. 독서와 경험을 통해서 다양한 지식을 얻어야 합니다. 그래야 창의적인 제품을 개발할 수 있습니다. 보리에 어떤 성분이 있는지 알기 위해선 중국 명나라의 약학서인 <본초강목>도 읽어야 합니다. 빵을 만들 때 어떤 재료가 좋은지 알아야 합니다. 셋째, 인격을 갖춰야 합니다. 계급사회 시절에는장이라고 천시했죠.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었지만 사람으로 대접을 받지 못했고 그래서 인격 자체를 언급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죠. 좋은 인격을 갖춰야 좋은 제품도 만들 수 있습니다. 제품에도 인격이 투영됩니다. 기술과 지식, 인격을 다 갖춰야 하는 제과를 해봐야 참다운 인생을 알게 됩니다.

 

로고에 조그맣게 프랑스어로 아들을 뜻하는 ‘Fils’라는 말이 붙어 있어요. 두 아들이 모두 제빵 분야에서 일하고 있지요.

150년에 가까운 한국 제빵 역사의 세월만큼 장수한 과자점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일본 과자점을 돌아보면서 전통이 계승되는 모습에서 큰 감동을 받았어요. 이제 한국 제과업계에서도 전통을 이어가는 장수기업이 나와야 할 때입니다. 1982년 이래 지금까지 이어온 제 과자점만큼은 명맥을 유지하고 싶습니다. 큰 아들은 영국 대학에서 호텔경영학을 전공했어요. 김영모과자점에서 재료 구매와 창고 관리, 제품 출고 등 말단사원 업무부터 시작해 현재 마케팅 등을 담당하고 있어요. 제빵학원에서 제과기술을 배워서 빵을 만들 줄도 압니다. 둘째 아들은 1월 프랑스에서 열린 한 국제적인 제빵대회에서맛 부문’ 1위를 차지했어요. 2003년 프랑스 제과월드컵 개인전 우승, 스위스 국제기능올림픽 한국대표로 제과 부문 동메달 등을 수상하기도 했죠. 앞으로는 한국에 들어와서 함께 일할 것입니다. 언젠가 아들과 손자가 빵을 굽고 있는 가게에 제 빵을 먹었던 손님들이 찾아와 저와 나눴던 시간을 이야기하면서 감회에 젖는 상상을 합니다. 특별한 빵집으로 남고 싶습니다. 자녀는 부모의 영향을 받습니다. 부모가 자신의 일에 대해 긍지와 애정을 가지면 자녀도 그 일을 좋아하게 될 것입니다. 지겹다거나 힘들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 자녀도 그 직업에 대해 거리감을 느끼지 않겠습니까.

 

이유종 기자 pen@donga.com

 

김영모과자점 대표는 대한제과협회장, 직능경제인단체총엽합회 수석부회장 등을 지냈다. 1953년 출생인 김 대표는 대구고 1학년을 중퇴하고 빵공장에서 밀가루 반죽 보조를 시작으로 빵과 인연을 맺었다. 대구 금강당제과, 서울보리수제과, 나폴레옹제과 등을 거쳐 1982년 서울 서초동 무지개상가에 6평짜리 김영모과자점을 열었고 현재까지 운영하고 있다. 일본 도쿄제과학교, 프랑스 르노트르제과학교, 독일 하노버대 제과제빵과 등에서 연수과정을 마쳤다. 2004∼2005년 월드페이스트리컵 세계대회 심사위원을 지냈다.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미국에서 제과제빵 안내서인 드림캐릭터 출판사)>을 내 베스트셀러를 기록하기도 했다. 2007년 국내 첫 천연 발효빵 개발로 6번째로 제과부문 명장(明匠)이 됐고 2011년부터 대한민국명장회 회장도 맡고 있다. 특허 3건을 출연하고 신제품·신소재 34건을 개발하는 등 40년 넘게 제빵 분야 발전에 공헌한 점을 인정받아 지난해 은탑산업훈장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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